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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함대 스페인을 제치고 작은 나라 영국이 대국이 된 비결-대국굴기4편-아이작뉴턴경,제임스와트,특허제도로서
<대국굴기(大国崛起)> 동영상은 중국에서 제작한 것을 한국 EBS 방송에서 방영한 것으로 총12편 중에 제일 감명 깊은 것이 4편입니다.
창세로부터 감추어진 비밀을 영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류 발전에 혁신적 공헌을 한 내용인데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역시 인류최고의 발명이 아닐 수 없으니 훈민정음 연구가 기대됩니다.
블로그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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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굴기 4화-공업화의 서막(영국(하))
영국의 지속적인 해외 확장과 식민지 무역은 상품에 대한 수요를 가져왔고,
과학 의식과 시장 의식 등 영국인의 일반적인 의식 수준을 향상시켰다. 각 분야의 협력하에 영국은 세계 제일의 공업국가가 되고, 깊이 있는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만들었다. 또한 전 세계를 뛰어넘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하고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세계 발전을
주도한다.
영국에서 어떻게 공업화의 서막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이 작은 섬나라에서 산업화의 초고속 전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736년 산업 혁명의 대부이자 만능 증기기관의 발명자인 제임스 와트(1736-1819)가
출생했다.
와트의 조부와 부친은 상인들 중에서도 성공한 사람들로, 잘 나가는 담배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전의 영국은 이런 와트 가족과 같은 가정이 많았다. 그들은 신교육 사상의 영향 속에서 부의
창조와 이윤추구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현실 세계의 성취가 곧 하느님과의 소통이며 자신들이 하늘로부터 선택된
민족임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돈 버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와트의 부친 시대에는 그리녹(지역명)과 미국의
버지니아 간 무역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영국 전체의 무역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1686년 통계에 따르면 당시 반에 가까운 영국 선박들은 모두 미주나
인도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모든 국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제 생각엔 '명예혁명'이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오게
된 것 같습니다. 명예혁명으로 인해
얻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안정 요소를 꼽는다면 일반 국민들이 정부를 신뢰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점이었죠. 따라서 국민들은 정부 지원을
위해 기꺼이 세금을 낼 용의가 있었고 특히 18세기 초반 프랑스, 스페인과 한창 전쟁 중일 때는 군자금 조달을 위한 세금까지 감수하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1763년.
7년간의 '영국-프랑스'전쟁을
통해 영국은 앞서가던 프랑스와 스페인을 잠시 앞지를 수 있었다. 영국의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서부터 영국은 그 주변
국가의 중요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은 더 이상 유럽의 여러 국가 중 하나가 아니었고 러시아나 프랑스 같은 나라는 영국의 적수가 되지
못 했다. 영국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스스로를 세계적인 대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영국-프랑스의 7년 전쟁으로 인해 영국의 지위는 격상했습니다. 이때 최초로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럽의 외교 구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죠. 스페인도 프랑스도 더 이상 영국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섣불리 영국과 전쟁을
했다간 자국 영토를 빼앗길 수도 있었으니까요.
식민지의 확장과 해외 시장의 확장으로 각종 상품들의 수요가 늘어나 수공업 공장으로
지탱하던 생산 능력은 더 이상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점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은 거의 모든 것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한 영국 방직 업자는 런던의 대리상 쪽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당신이 평지포를 얼마나 생산할 수 있든 간에 내가
모조리 사겠소. 빨리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산업화 과정에서 전도 유망한
사업입니다."
시장에서 블랙홀처럼 솟아오른 수요는 우선 방직업에서 나타났다. 그
이유는 이 분야의 생산품이 일반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 빠른 생산을 위해 공인들의 총명한 지혜가 동원되기 시작했고
신 발명품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영국은 점차 산업혁명의 도화선에 접근한다.
"재래식
방직 생산시설은 아주 작아서 보통 집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부인과 아이, 심지어 남편까지 온 가족이 함께 천을 짰습니다. 그러나 방적기 같은
발명품이 등장하면서 생산규모가 크게 확대되어 더 많은 이들이 한 작업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공장 시스템이 나타나면서 후에 공장
모델의 기초가 됐죠."
대량 생산 기계를 사용하면서 수공업 공정의 효율이
극대화됐고, 결국 현대 공장의 탄생을 가져오게 됐다. 그러나 이런 공장들도 공통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강의 하류 주변에 공장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18세기 초까지 기계를 돌릴 수 있는 동력원이 풍차와
수차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자연에 의해 얻는 동력원은 심각하게 생산을 제약한다. 때문에 가장 먼저 공업화의 요구에 적합한 동력 기계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앞으로의 경쟁에서 선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산업시대의
입구에 가장 먼저 도착한 영국인들은 어떤 준비를 했던 것일까.
모든 영국 심지어 모든 유럽에서 '무한동력'을 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애타게 기다렸다. 이때 만능 증기기관을 만들어낸 제임스 와트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1773년 3월. 와트는
합작 파트너가 파산하자 고정 수입을 잃게 됐을 뿐만 아니라 자산을 처분해 빚을 갚아야 했다. 서른일곱 살의 와트는 한이
맺혀 이렇게 말했다.
"난 처자식이 딸린 데다 거울을 보면 날이 갈수록 늙어만 가는데
안정적인 수입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구나."
"1773년 가을, 와트의
가정에 슬픈 일이 생깁니다. 와트와 9년을 함께 살아온 부인이 별세한 것이죠. 더구나 그에겐 6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의 합작공장마저 파산을
합니다. 이 당시 그는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한 친구가 그에게 러시아로 가서 일하라고 권하자 그는 말했습니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은데 난 지금 너무 가난해서 고민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와트에게
크나큰 좌절을 안겨주려던 영국은 자국에 끝없는 이익을 가져올 이 발명가를 놓치지 않았다. 영국은 이미 총명한 지혜를 실용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각종 기계들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이들 기계들은 거대하고 세밀한 망처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와 기술들을 영국으로 들여오게 했다. 그중에서
특허 보호는 가장 중요한 시책이었다.
"특허
제도는 16세기에 처음 시작됐지만 16,17세기에는 신청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특허가
보편화되고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부터입니다. 특허의 목적은 발명품과 발명자를 보호하고 신발 명품임을 인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발명자에게는 약 15년 정도의 보호기간을 부여해서 이 기간 동안 그의 발명품을 보호, 그 누구도 함부로 복제할 수
없었죠."
말년에 와트는 증기기관의 제조 공정의 수입이 아닌 폭넓게 보급된 고효율 증기기관의
발명 특허로 떼돈을 벌었다.
기술 창조에
대한 전략으로 탄생한 기계들은 영국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초로 특허법을 제정했던 이 나라는 이미 지식경제로 돌입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학기술 창조 전략을 국가 발전 기본 전략으로 삼고 있다. 영국은 현재 전 세계 신제품 생산국 중 4위를 차지하고 있다. 250년 전
영국이 지적 재산권에 대한 보호와 장려 정책을 펴자 사람들은 신기술 및 신발명에 대한 열광적인 숭배를
시작했다.
당시 영국의 한 간행물은 이렇게 서술했다. "공업기술에서 그 공은 전쟁과
외교보다도 크다. 교회나 대학 추상과 철학, 문학이 쌓은 것보다 크며 사회적인 변화 측면에서는 우리의 법이 쌓은 공보다도 크다." 공업기술에
대한 전 민족적인 숭배 속에서도 가장 열렬한 지지를 보인 것은 영국의 신흥 계층들이었다. 기술과 발명은 그들과 가장 밀접한 이익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계층을 당시 공장주라 불렀으며 오늘날에는 기업가라고 부른다. 1773년 그들 중에 일원이 러시아로
떠나려던 와트를 만류했는데 그가 바로 메튜 볼튼이었다.
"볼튼의 공장은 버밍엄에
있었습니다. 버밍엄은 당시 영국 부품 생산의 중심지로 공장에는 천여 명의 공원이 있었으며 주로 금속 기계들을 생산했습니다. 망원경 같은 생산품도
있었죠. 그러나 볼튼은 영국 공업이 발전하면서 수많은 공장이 동력 부족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증기기관과 가공기계들을
생산하기로 결정했던 거죠."
후에 볼튼과 와트가 손잡고 최초의 증기기관을 제조했을 때
영국 국왕이 그들의 공장을 참관한다. 국왕은 볼튼에게 무엇 때문에 바쁜지 물었고, 볼튼은 "지금 군주들의 꿈속에 그리던 제품을 제조하느라
바쁩니다."라고 답하자 국왕이 "그게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다. 이에 볼튼은 "힘입니다. 폐하 "라고 답한다. 이런 선견지명이 있던 볼튼은
생활고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와트에게 편지를 보낸다. "난 발전기를 창조해내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췄으며 우린 전 세계에 각종 규격의 발전기를
보급할 것입니다. 또 당신이 필요한 투자자가 되어 당신의 부담을 줄이고 당신의 제품을 전 세계에 소개할
것입니다."
"매튜 볼튼과 제임스 와트는 성격이 전혀 달랐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일했다는 건 역사적으로도 대단한 화제거리죠. 와트는 매우 조심스럽고 느리고 걱정이 많고 자주 의기소침했습니다. 완전히 의욕을 잃고 일손을
놓아버리는 때도 있었죠. 반대로 볼튼은 매우 열정적이고 명랑하고 사교적이고 낙관적이었습니다. 와트가 잘 안 될 거 같다고 걱정하면 볼튼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성공할 거라고 격려하는 식이었죠.
결국 만능 증기기관이 완성된다. 사실
와트 이전에 증기기관은 발명이 됐었지만 그 증기기관은 무겁고 투박한데다 석탄용이어서 석탄이 있어야만 사용이 가능할
뿐이었다.
"근대 과학이 탄생한지 수 천 년 동안 인류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생산,
기술, 과학의 순서를 따라가며 발전했습니다. 이것은 경험에 근거해 생산을 하고 지속적인 생산과정을 통해 기술을 연마하며 다시 기술 개발 과정
속에서 과학이 생산됐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경험을 근거로 한 과정이었기에 많은 시행착오가
생겼습니다."
와트가 증기기관을
연구하기 전 1세기 동안은 바로 유럽 역사상 과학이 가장 번성한 시기였다. 17세기 중엽부터 근대과학이 태동한다. 그중에도
뉴턴(1642-1727)이
독보적이다.
1687년 뉴턴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출판한다. 이 심오한 책 속에서 뉴턴은 수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만유인력의 법칙과 운동의 3대 법칙을 증명하는데
이 4대 법칙은 인류 지혜 사상 가장 위대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이 법칙들을 응용해 뉴턴은 별, 지구, 자연계에 모든 힘을 그의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뉴턴 이론의 요점은 하늘의 모든 천체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따라서 수치로 계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태양계에서 아무 행성이나 골라 법칙에 따라 계산하면 행성의 위치와 운동 방식 등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 극장 같은 세계 위에 놓여 있으며, 모든
사건의 기원과 연유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철저히 숨겨져 있고, 우리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지혜가 없다. 우리는 끝도 없이 상처를 주는
불행한 사건들의 발생을 방지할 능력도 없기에 영원한 의구심에 집착하고 있다." 이는 영국의 저명한 철학가인 데이비드 흄의
말이다.
이 말은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순응적인 시각을 솔직하게 묘사한
것이다. 300년 전 인류의 사상은 미신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은 왜 아래로 흐를까. 태양은 왜 뜨고 지는 것일까. 오늘날 보면은 지극히
간단한 문제들에 대해서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아이작 뉴턴이 나타나면서부터 인류는
달라졌다.
"자연계는 규칙에 따라 존재하며, 규칙은 인식할 수 있다." 뉴턴의 발견은
인류에 전혀 없던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하늘의 발 밑을 기어 다니던 인류가 드디어 과감하게 머리를 들어 이성적인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를 하나만 고른다면 당연히 뉴턴이겠죠.
뉴턴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사는 우주에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며 우리도 그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18,
19세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과학 연구 및 발전의 물꼬가 트였죠."
"뉴턴으로
대표되는 근대과학의 탄생 이후 인류 사회는 급속히 발전하게 됐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자산계급이 통치하던 `100년 동안 창조된 생산력은
이전 역사가 창조한 전체 생산력보다 많습니다.
"뉴턴은
대인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일화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는 당시 또 다른 과학자 로버트 후크와 논쟁이 잦았는데 쟁점은 어떤 이론을 누가
먼저 생각해 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화에 따르면 뉴턴은 후크를 너무 싫어해서 그의 초상화를 모두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때문에 현재 뉴턴
초상은 4, 5 장쯤 남아있지만 후크의 초상은 한 장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곧 영국 국민들의 '재능에 대한 존경', 모든 사회가 과학자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이는 한 국가의 과학자들에 대한 태도이자 한 국가의 과학에 대한 태도였다.
1765년. 뉴턴이 죽은 지 35년이 지난 후 최신의 증기 기관이 와트의 손에 의해서
탄생된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은 기존의 증기기관에 비해서 작을 뿐만 아니라 대량의 석탄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인류는 스스로 창조한 동력을 가지게 됐다. 더
이상 대자연에 제약받지 않게 됐다. 후에 사람들은 공업화의 핵심 문제를 해결한 와트의 증기기관을 산업혁명의 지표로 삼았고 와트는 산업혁명의
대부로 불리게 된다.
"증기 시대와 산업혁명이 시작되자 이미 선두에 있던 영국은
더욱 앞서 나아갔고 작은 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향후 수백 년간 다른 국가를 한층 더 앞서가게 됩니다.
"
변혁은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효율을 더더욱 향상시킬 수 있는 생산 조직의
형태에서도 일어났다. 이전에는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야만 했던 일이 전문화된 제조화 공정으로 나누어지게 되고 모든 노동자들은 특정
제조 공정만 계속 반복하면 되는 것이다. 18세기 말부터 영국의 각 분야에서는 공장 화가 가속화되고 수십 년의 짧은 시간 동안 과거의 생산
방식과 생활 방식, 사고방식들이 모두 변화됐다. 모든 영국은 마치 끊임없이 계속되는 힘에 의해 움직이는 고속 체인과도
같았다.
증기기관이 영국을 기동시킨 후 과연 어떤 힘이 이런 체인을 지속하게 만들어,
영국을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일까.
와트와 볼튼이 증기 발전기의 마지막
완성품을 만들 무렵, 쉰 살이 된 런던의 한 학자는 자신의 책을 출판 건에 수정을 하고 있었다. 이 책에는 특수한
발전기와 사상적인 발전기가 나타나 인류를 위한 부의 성장에 지속적인 동력 공급을 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 책은 공업화가 더 이상 기계 발명과 상품 제조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사회 발전에 있어서도 혁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책의 출판 시기는 1776년. 책의 제목은
<국부론>이다. 이 책의 저자 애덤
스미스(1723-1790)는
경제학자였다.
"애덤 스미스는 인류가 경제 활동을 하는 동기는 개인의 이익 추구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이 만족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도살업자나 양조업자, 제빵사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은 그들이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로부터 이윤을 얻기 위해서다'"
애덤
스미스는 보통 사람들은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얼마나 증대 시키는지 알지 못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하는데, 결국 이것이 사회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킨다라고 인식했다. 오늘날에 이미
많이 알려진 '자유경쟁'이라는 개념은 애덤 스미스 경제 학설의 초석이 됐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관점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그는 시장경제에서 개체 간의 자연스러운 교역으로 자연스럽게 효율적인 자원 분배 체제가 만들어질 것이고
또한 소득도 상대적으로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았죠. 물론 시장경제체제로 인해서요.
"
이 이론에 근거해 그는 매우 전략적인 대외 무역 정책을
제시한다.
"스미스는
보호주의 무역과 정복, 그리고 독점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으나 만일 자유무역을 택한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다른 이들을 부자로 만들면 그들이 우리 제품을 더 많이 구매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뉴턴이 산업혁명을 위해서
과학의 열쇠를 창조했다면, 와트는 이 열쇠를 가지고 산업 혁명의 문을 열었고,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을 휘둘러 산업혁명의 추진을 위한
새로운 경제 질서를 확립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토인비는 "산업 혁명의 본질은
'석탄, 철강, 방직공업 속의 변혁, 증기기관의 발전도 아닌, 이전까지 부의 생산 및 분배를 지배하고 있던 중세적 규칙 조례를 대신한 경쟁
"이라고 생각했다.
기술 혁신보다 더욱 커다란 영향은 경제 사회의 운행 규칙에
변화였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그해 와트와 볼튼으로 대표되는 신흥 계층에 의해 신성한 이론으로 추앙받았다. 그들은 애덤
스미스의 이론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방의 각국 의회에서 대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애덤 스미스의 이론은 국가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자유주의 경제체제가
형성됐다.
"스미스의 이론은 산업 자본주의 발전 이전에 발표된 것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는
작용을 해서 영국을 세계 제일의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전 세계 패권 국가들에게도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815년 영국은 세계를 놀라게 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승리는 영국인들이 애덤 스미스가 세운 공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이해에 영국의 웰링턴(1769-1852)
공작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하고 사람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교전에서 얻은 승리를 영국 군대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시장 경제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작은 가게 주인'알고 조롱했지만 그 힘을 알고
있었다. 어떤 엄격한 봉쇄 정책을 시행해도 이 작은 가게 주인의 상품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지 못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군대가
백병전을 펼칠 때 입은 군복 역시 영국에서 들어온 면방직 제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영국은
전쟁 중 참전국에 군복과 무기 등을 공급했습니다. 온 유럽이 영국에서 물건을 사들였죠. 그 결과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당시 세계 어느 국가와도
비교가 안 되는 세계 최강의 산업대국이
됐습니다."
세계 최고의 공업적 우세를 이용해서 영국은
자유무역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점차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무역제한 철폐의 방법을 이용해 국외시장을 확대했는데 그
방법은 바로 다른 국가 제품의 영국 수입 제한을 취소하는 대신, 다른 국가의 영국 제품 수입제한과 맞바꾸는
것이었다.
자유무역은 영국의 국책에 돼서, made in england는는 이때부터
더 큰 세계 시장에 거침없이 파고들어 간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경제의
자유화가 실현된 시기가 영국이 공업 분야에서 절대적인 선두 자리를 차지한 이후였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 된 후에 자유무역
시대로 접어들게 된 거죠."
자유무역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서 영국은 무력을 사용해
한 국가씩 차례로 대문을 열도록 만들고, 신속한 확장으로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 됐다. 이 제국 안에서 점차 영국을
핵심으로 하는 상업 무역권형성됐는데는데 1865년-영국의 경제학자인 제번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북미와 러시아의 평원은 우리옥수수 밭이며,며,
캐나다와 발트해는 우리의 숲이다. 호주는 우리의 양복장이며 페루에선 배근을 보내오고 아프리카와 호주의 황금은 런던으로 유입되고 있다.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은 우리를 위해 차를 싣고, 우리 커피와 사탕수수, 향료 농장은 동인도 제도에 퍼져있다. 우리의 면화는 오래전부터 미국 남부에서 재배
됐지만 지금은 지구에 모든 온난 지역까지 확장됐다.'
1850년 무렵. 영국의 도시 인구는 전 인구의 60%를 넘었으며, 철 생산량은 전
세계 모든 국가의 합계를 넘어섰다. 석탄은 전 세게 총 생산량의 2/3. 면직물은 세계 반 이상을
차지했다.
산업화의 진전은 영국인에게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처음으로 초를 단위로 정확해졌으며 기차와 기관사는 마차와 범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1814년 세계 최초로 증기 기관차가
영국에서 탄생했고, 1830년에는 증기기관차가 세계 최초로 철로 위에 투입돼 운영되기 시작했다. 1851년에 영국은 철도 노선 22개에 총 길이
13,000km에 달하는 철로를 보유하게 된다.
"프로이센의 국왕은 이를 부러워하며
말했다. 국민 생산과 국민의 부에 있어서 영국에 경제적 지위는 고금을 통틀어 그 어떤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치까지
발전했다."
"산업 혁명이 없었다면 지금의 현대 사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산업혁명은
영국을 세계 최강의 대국으로 만들었으며 그 강대한 공업생산 능력은 그 당시 영국 일개 국가로 모든 세계와 대항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산업혁명은 영국을 현대화의 길로 접어들게 했으며 최초의현대화 국가로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또 전 세계가 영국을 따라 현대화로 향해
전진해 가도록 압박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영국은 그 당시 세계의 조류를 이끌고 갔으며 현대 세계의 길을 터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해 런던 만국박람회가 개막된 후
전시장은 인파로 가득했으며 전시된 물품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예술품들과 국외에서 온 각종 동식물 외에 주로 영국의 공업제품들이
전시됐고 기선의 모형이나 증기기관차의 모형 각양각색의 선박들도 있었습니다. 이는 영국이 이미 명실상부한 세계의 공장이 되었으며 또한 영국의
산업혁명이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cf. 빅토리아 여왕
(1819-1901)
[출처] [다큐] 대국굴기 4편 - 영국|작성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