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곡 단테 신곡, 천국편의 마지막 곡, 하느님을 뵘
동정녀 마리아, 당신의 아들의 딸이시여!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으로 선택된,
모든 피조물들 중 가장 겸손하고 가장 높으신 분이여!
‘당신의 아들의 딸이시여!’는 성모 마리아가 하나의 피조물로서 자신의 창조주를 낳은 불가사의함을 함유하는데, 하느님은 사실상 재현할 수 없는 초월적 대상이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재현을 통해 단테의 시적 묘사의 신비함을 키우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당신의 은총을 갈구하니,
마지막 축복(하느님)을 향해 눈을
더 높이 올리도록 그에게 힘을 내려주소서.
베르나르가 성모 마리아에게 단테의 시력을 강화하여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두 눈이 기도하는 자에게 지긋이 향하니 그 기도가 얼마나 진실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베르나르가 내게 미소를 보내며 저 위를 보라고 했는데 단테는 이미 하느님의 본성을 관상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눈은 이제 더 맑아져갔고,
스스로 진실한 저 드높은 빛줄기로
점점 더 파고들고 있었다.
단테는 하느님의 빛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직관은 언어와 기억을 초월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봄[見]은 말함이 보여 주는 것보다
더 컸다. 말함은 그런 시각 앞에서는 실패한다.
기억은 그러한 한없음 앞에서 굴복한다.
순례자는 다만 볼 뿐입니다. 보는[見] 행위는 이미 인간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덧 씌워진 하느님을 직관하는 것이라면 단테는 그러한 순례자의 시각은 말로 재현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재현할 수 없음을 전면화하여 초월적 대상을 부각시킵니다. 인간으로서 한계를 인정하며 단테의 고뇌가 고도의 시적 정취를 이루는 곳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무한한 선은 빛으로 형상화 되어 표현되는데, 이러한 빛을 보는 봄[見]은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초월적 시각이 되어야 봄[見]의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14곡의 40~42행 참고)
인간의 눈은 밝은 빛에 약하지만 단테가 엠피레오에서 천국을 볼 수 있는 것은 9개의 하늘을 거쳐 오면서 베아트리체가 단테의 눈이 강해지도록 도와주었고 항성천에서 단테가 성 요한의 영혼에 육체가 있는지 보려다 눈이 멀었을 때 단테의 시각을 덮고 있던 티끌을 다 걷어 주었던 (26곡 76~78행) 덕분입니다.
베르나르는 엠피레오에서 단테가 눈을 뜨고 하느님의 빛을 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마치 꿈을 꾸면서 뭔가를 보는 사람이 꿈에서 깨어나면 그 열정은 자국으로 남고, 나머지는 마음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그렇게 눈 위에 찍힌 표시들은
햇살에 희미해지고 잎사귀에 새긴
시빌라의 점괘는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재현할 수 없고 기록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눈에 찍힌 표시가 햇살에 녹아 없어지듯, 시빌라의 점괘(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듯, 단테의 천국 경험은 깊은 흔적을 남겼으나 필멸에 속하는 어떤 것입니다.
미래의 사람들에게 남길 수 있도록
당신의 영광의 단 한 순간 불티라도
포착할 정도의 힘을 나의 혀에 주소서.
단테가 미래의 사람들에게 남길 수 있도록 본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때 살아 있는 햇살의 날카로운 찬란함을 견디어 냈건만 그 햇살이 나에게 더 많은 힘을 주어 나의 시선에 무한한 가치를 연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히 영원한 빛을 응시하도록 허락하신
풍요의 은총이시여! 저의 눈은 그 빛 속에서
저 가능성의 끝까지 도달했습니다.
재현 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려는 그의 재현의 노력은 ‘영원한 빛을 응시하도록 허락하신 은총’에 의해 가능해졌습니다.
나는 그 깊숙한 곳에서 보았다.
우주의 조각조각 흩어진 것이
한 권의 책 속에 사랑으로 묶인 것을
지금 단테는 재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있거나 혹은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보다’라는 동사와 그 행위는 이제 궁극에 다다른 순례자의 전부이며 그것을 글로 재현하는 단테가 의지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를 통해 단테는 지성의 의지와 힘으로 나아가고자 하는데 그 목적은 하느님의 신비를 보고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지성의 눈을 더욱 크게 뜨면서 지성을 초월하는 존재를 보려는 모순이 작가 단테의 모습입니다.
형이이상학적 진리를 직관하고 흩어진 것들이 한 권의 책에 엮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인이 차츰 삼위일체의 신학적 진리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보던 살아 있는 빛 속에
유일한 얼굴 이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 빛은 존재했던 대로 언제나 존재하신다.
하느님의 모습은 불변하지만 여기서는 순례자가 변하는 대로 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신성한 존재를 인간이 완전하게 포착할 수 없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시각을 통해 내 안을 바라보고
더 강해지면서, 그 유일한 모습이
내가 변하는 대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순례자의 지성은 하느님 안으로 차츰차츰 스며들고 점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순례자는 이제 인간도 하느님도 아닌 그 무엇이 되어갑니다. 하느님을 인지하는 방식과 결과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숭고한 빛의 깊고 밝은
본질 속에서 세 개의 색을 지닌 세 개의
원들이 하나의 차원으로 내개 나타났다.
신성의 본질 속에서 세 개의 색을 지닌 세 개의 원들이 하나의 차원으로 내개 나타났다'는 표현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묘사한 것입니다. 단테는 독립체 속에서 삼색일용적의 세 개의 환(성부, 성자, 성령)을 봅니다.
첫 번째 원(성부 하느님)은 반사하시고, 다음 원(성자)은 반사됩니다. 세 번째 원은 다른 두 원들에게서 똑같이 숨을 받은 불꽃(성령, a flam)과도 같았습니다.
그 원을 나의 눈이 잠시 집중하여 바라보았을 때, 자체의 내부에서 우리의 모습으로 그려진 듯했으니, 나의 눈은 그 모습에 온전히 고정되었습니다.
J. Flaxman, Visione della Trinità-플랙스만, 삼위일체의 비전
Dante and Bernard, Mary and the Trinity-단테와 베르나르, 마리아와 삼위일체
그렇게 발원하여 당신 안에 비추어진 빛으로 나타난 그 원을 나의 눈이 잠시 집중하여 바라보았을 때 우리의 모습으로 그려진(신과 인간이 하나 된 모습의 그리스도)듯 했으니, 나의 눈은 그 모습에 온전히 고정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형상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의 모습이 그 원에 어떻게 들어맞았는지,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어떻게 합일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나의 표현은 한계에 이릅니다.
내 날개는 거기에 오르기에는 너무 약했지만,
내 정신은 그 광휘로 깨어나
원했던 것을 마침내 이루었다.
‘내 정신은 광휘로 깨어나’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인간이 깨칠 수 없으므로 하느님의 비추심이 필요한데, 그러나 갑자기 내 머릿속에 번개 같은 섬광이 스치더니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이 빛을 발하며 다가왔습니다.
여기서 나의 환상은 힘을 잃었다. 하지만
내 소망과 의지는 이미, 일정하게
돌아가는 바퀴처럼,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하느님)이 이끌고 있었다.
나의 상상력도 힘이 모자랐습니다. 여기서 나의 환상은 힘을 잃었습니다. 궁극의 구원에서 해체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벌써 내 소망과 내 마음을, 한결같이 도는 수레바퀴처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태양과 뭇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