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시 「유리창」을 읽는 두 개의 시각
― 어린이 시에서 ‘정직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 윤동재
1956년 전국 글짓기 내기에서 특선에 뽑힌 작품 가운데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4학년 배은숙 어린이가 쓴 「유리창」이 있다. 이 짧은 시를 두고 박목월과 이오덕은 정반대의 판정을 내렸다. 박목월은 극찬했고, 이오덕은 혹평했다.
같은 작품을 어떻게 이렇게 달리 읽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읽기를 나란히 놓고 보면, 한 편의 시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더 근본적인 물음과 만나게 된다. 어린이 시에서 ‘정직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유리창
-배은숙 초등학교 4학년
빡빡, 덜컹덜컹, 보드득 보드득,
열심히 유리창을 닦고 있어요.
언니는 빡빡
오빠는 덜컹덜컹.
떠들며 웃으며
닦아 놓은 유리창.
유리창이 없어졌나,
깜짝 놀랐죠.
닦을 때는 힘들어도
보기 좋아요.
1. 박목월의 읽기: 맑은 날의 기쁨
박목월은 이 시를 언니와 오빠와 ‘나’, 셋이서 유리창을 닦으며 느낀 것을 옮겨놓은 동시로 읽었다.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이 아니면 이렇게 즐거운 마음이 스민 작품을 지을 수 없다고 했다. “유리창이 없어졌나,/깜짝 놀랐죠”라는 구절은 유리창에 비친 하늘이 맑고 푸르다는 것을 나타냈다고 했다.
박목월이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한 까닭은 셋이다. 첫째, 이 시에 담긴 정신이 아름답다. 유리창을 닦으며 느끼게 되는 깨끗하고 맑은 것에 대한 감탄, 그 깊은 느낌에서 우러나는 놀라움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둘째, 표현이 오묘하고 정확하다. 언니는 언니답게 힘을 들여 닦고, 오빠는 사내아이답게 덜렁거리며 소리 나게 닦고, 화자인 ‘나’는 나름대로 힘껏, 정성껏 닦는다. 세 의성어가 닦는 모습을 시늉하면서 형제자매의 성격까지 드러낸다고 읽은 것이다. 셋째, 어린 소녀가 지은 작품답게 자연스럽다. “닦을 때는 힘들어도/보기 좋아요.”라는 구절은 어린 소녀다운 꾸밈 없고 솔직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유리창을 닦는 일이 곧 마음을 닦는 일이기도 해서 더욱 귀하다는 해석까지 덧붙였다.(박목월, 『동시의 세계』, 서정시학, 2009, 55~58쪽)
좋은 점, 뛰어난 점을 찾아내는 데 힘을 쏟은 읽기다.
2. 이오덕의 읽기: 꾸며낸 놀라움
이오덕은 같은 대목에서 정반대의 것을 보았다. 아무리 티 없이 닦아 놓았다 해도 유리창이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다면 모르지만, 없어졌나 하고 깜짝 놀랐다는 것은 거짓스럽다고 했다. 그렇게 놀랄 수는 없으며, 놀라지도 않은 것을 놀란 것처럼 해 보이는 몸짓이라는 것이다.(이오덕, 『아동시론』, 굴렁쇠, 2006, 31쪽)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앞의 두 연에 퍽 재미있는 의성어를 썼다는 점에도, 이 작품이 강소천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드는 점에도 더 이상 관심이 없다고 했다. 어린이가 썼든 어른이 썼든 시적인 것을 어설프게 가장한 작품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강소천의 작품이라면 어린이의 생활을 너무나 모르는 것이고, 실제 어느 어린이의 작품이라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그런 지도를 받아 어른이나 책에 나오는 작품을 흉내 내어 제 느낌을 정직하게 쓰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같은 책, 32쪽)
어느 쪽이든 잘못이라는 이 논리 아래에서, 이 작품은 처음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길이 없었던 셈이다.
3. ‘깜짝 놀랐다’는 거짓인가
이오덕이 문제 삼은 것은 유리창이 사라졌다는 상상 자체가 아니다. 그는 ‘없어진 것 같다’는 표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그가 거짓이라고 본 것은 깜짝 놀랐다는 반응, 그리고 그것을 독자 앞에 내보이는 말투다. 이 시를 변호하려면 바로 이 대목을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먼저 사실과 느낌을 구별해 보자. 유리창은 실제로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말끔히 닦인 유리 앞에서 순간적으로 그것이 사라진 듯 느낄 수는 있다. 그 순간에는 ‘없어진 것 같다’고 차분히 견주어 말하기보다 ‘없어졌나’ 하고 스스로 되묻는 편이 오히려 실감에 가깝다. 비유는 놀람이 지나간 뒤에 정리하는 말이고, 자문은 놀람이 일어나는 순간의 말이기 때문이다. 시가 단정하지 않고 묻는다는 사실이, 이 구절이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순간의 지각을 붙잡은 것임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깜짝’은 과장인가. 유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듯 보일 때 몸이 먼저 움찔하는 경험은 어린이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투명한 유리문에 부딪혀 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 놀람의 크기를 어른이 바깥에서 재어 그렇게 놀랄 수는 없다고 판정할 근거는 작품 안에 없다.
남는 것은 문장 끝의 ‘~죠’라는 어투다.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이 어미가 놀람을 연기하는 몸짓처럼 들릴 수 있다는 지적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어미는 아이가 겪은 일을 누군가에게 들려줄 때 쓰는 가장 흔한 말투이기도 하다. 들려주는 말투로 썼다고 해서 들려준 내용까지 꾸민 것이 되지는 않는다.
4. 문체를 빌리는 일과 느낌을 꾸미는 일
이오덕이 강소천을 떠올린 데에는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재미난 의성어를 앞세운 첫머리, 가지런한 율격, ‘~요’와 ‘~죠’로 맺는 어미는 당시 성인 동시에서 흔히 보던 모양새다. 그러나 문체의 닮음은 정황일 수는 있어도 저작에 대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적어도 그 글에서 이오덕은 의심을 뒷받침할 자료를 내놓지 않았다. 표현이 자신이 생각하는 ‘어린이다운 표현’과 다르다는 이유로 저작자까지 의심하면, 작품 평가는 어느새 저작 사실의 판정으로 넘어가 버린다.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어린이가 당대에 익숙했던 동시의 문체를 빌려 썼다고 해보자. 그래도 그 안에 담긴 느낌까지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니다. 1950년대의 어린이가 교과서와 잡지에서 읽은 동시의 말투로 제 경험을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어린이에게 그것은 흉내라기보다 ‘시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배운 형식이다. 형식을 빌리는 일과 느낌을 꾸미는 일은 다르다. 이오덕은 이 둘을 한데 묶었고, 그래서 문체에 대한 의심이 곧바로 정직성에 대한 판정이 되었다.
이오덕의 기준이 귀하다는 점은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어른의 표현을 흉내 내거나 실제로 느끼지 않은 것을 그럴듯하게 꾸며 쓰는 일을 경계한 것은 어린이 글쓰기 교육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오랫동안 어린이 시 지도와 글쓰기 교육을 현장에서 실천해 온 그의 판단에 무게가 실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이력과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석의 타당성은 별개의 문제다. 기준이 옳다는 것과 그 기준을 이 작품에 바르게 적용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5. 두 읽기가 함께 놓친 것
그렇다고 박목월의 읽기가 전적으로 옳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읽기에도 작품에 없는 것이 꽤 들어 있다. 그는 ‘빡빡, 덜컹덜컹, 보드득보드득’ 세 의성어를 언니 오빠 나의 유리창 닦기 의성어라고 하면서 ‘덜컹덜컹’을 오빠가 유리창 닦는 의성어로, 사내아이다운 덜렁거림으로 읽었지만, 형제자매가 유리창을 닦는 동안 창틀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로 읽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셋째 ‘보드득보드득’이란 의성어를 화자 ‘나’의 몫으로 본 것도 작품에 적혀 있지 않은 추론이다.
유리창 닦기를 마음 닦기로 읽은 것이나, 끝 연을 ‘어린 소녀다운’ 솔직함으로 칭찬한 것도 마찬가지다. 어린이의 시에 어른이 기대하는 교훈과 소녀다움을 덧입힌 것이다.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은 반대 방향에서 같은 일을 했다. 박목월은 어른이 바라는 아름다운 동심을 작품에 덧입혔고, 이오덕은 어른이 그려 둔 정직한 어린이의 모습에 작품이 맞지 않는다며 물리쳤다. 한쪽은 너그러웠고 한쪽은 엄격했지만, 둘 다 작품보다 먼저 와 있는 ‘어린이다움’의 상을 들고 작품을 읽었다. 그 사이에서 정작 이 어린이가 유리창 앞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충분히 읽히지 않았다.
6. 정직함의 자리
어린이 시에서 ‘정직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만이 정직함은 아니다. 어린이 시의 정직함은 사실의 정확성이 아니라 느낌의 진실성에 있다. 실제 경험에서 출발해 그 순간의 느낌을 부풀리고 견주고 되묻는 것도, 그 느낌이 아이의 것이라면 정직한 시적 표현이다. 유리창이 없어졌나 하고 놀란 아이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너무 맑아진 유리라는 작은 발견을 제 말로 붙잡은 것이다.
물론 어린이의 느낌이 진짜인지를 작품만으로 온전히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짓임을 증명할 수도 없다. 어린이의 생활과 느낌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에는 박목월도 이오덕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갈린 것은 그 생활과 느낌이 시의 말로 바뀔 수 있는가였다.
어린이의 시를 읽을 때는 어른이 미리 정해 둔 ‘어린이다움’을 들이대기보다, 그 어린이가 보고 느낀 세계가 작품 안에서 어떻게 말이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작품만으로 거짓임을 입증할 수 없다면, 의심이 아니라 신뢰에서 읽기를 시작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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