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율법의 누룩을 주의하라. 律法のパン種に注意しなさい。
https://youtu.be/lUzDUVxC82Q
본문 갈 5:7~12
갈 5:7 ○여러분은 지금까지 잘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가로막아서,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였습니까? 8 그런 꾐은 여러분을 부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9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10 나는 여러분이 다른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거리낌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12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7. あなたがたは、よく走っていました。それなのに、いったいだれが邪魔をして真理に従わないようにさせたのですか。8. このような誘いは、あなたがたを召し出しておられる方から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9. わずかなパン種が練り粉全体を膨らませるのです。10. あなたがたが決して別な考えを持つことはないと、わたしは主をよりどころとしてあなたがたを信頼しています。あなたがたを惑わす者は、だれであろうと、裁きを受けます。11. 兄弟たち、このわたしが、今なお割礼を宣べ伝えているとするならば、今なお迫害を受けているのは、なぜですか。そのようなことを宣べ伝えれば、十字架のつまずきもなくなっていたことでしょう。12. あなたがたをかき乱す者たちは、いっそのこと自ら去勢してしまえばよい。
지난 주일에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이 땅의 현실을 살아가는 진정한 능력이 되는 말씀을 함께 들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고 유혹하고 압박하는 세속의 시대정신의 압제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힘은 주님의 사랑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이미 우리 안에 임재하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채우고 계신 것을 확신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온전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겸손히 순종함으로 승리의 주인공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을 강조하고, 자기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도록 유혹하는 지식과 교훈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신실함과 성실함에 대해서 칭찬합니다. 7절에 지금까지 잘 달려왔다는 격려와 칭찬의 말을 들을 수 있는데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격려하시고 칭찬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믿기에 한 주간의 첫날을 이렇게 구별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다른 어떤 지식보다 주님의 복음으로 삶의 기준을 세우는 이 태도와 자세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를 찾아내시고, 주목하여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고 계십니다. 성경은 약속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 8:17)
또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주님을 찾는 자를 주님께서도 찾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 53:2)
그럼에도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오히려 죄를 짓고 선을 행하기를 거절하는 것이 이 땅의 본질입니다.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시 53:3-4)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실은 손쉽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의지와 자원하는 심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가장 칭찬할 만한 일로 여기신다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 스스로의 존재가치와 존재의미를 증명하도록 우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혹은 어떤 실력을 갖추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느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저와 여러분의 가치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신 십자가의 보혈로 정해진 것입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그런 값을 들여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을 지키거나, 혹은 시대정신의 가르침에 맞춰 자신의 실력을 연마함으로써 자신의 값어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미 놀라운 재능과 사명의 기회들을 맡겨 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마 25:15)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여행을 떠나는 집주인의 비유는 곧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에 맞게 삶의 기회와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삶의 여건과 조건, 그리고 그 사명의 종류를 서로 비교하며 경중과 크기를 가지고 차별하거나, 혹은 교만스럽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8절에서 그러한 꾐, 즉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지식과 설득력이 있는 말을 의미하는데요. 9절에서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한다는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던 적이 있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 16:6)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사회를 주도하던 주류사회의 지식인들이며, 또한 권세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본문의 흐름에 맞춰서 말하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갈라디아 성도들을 설득하던 율법주의자들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형편에서 말하자면, 시대정신과 유행, 그리고 세속의 지식들과 같다고 하겠는데요. 바울은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계하셨던 누룩의 비유를 빌어 갈라디아 성도들을 일깨워 말하고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누룩은 그들, 즉 주류에 속하는 지식과 시대정신의 교훈 및 사고방식 등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고에 제자들이 빵을 챙기지 못했다는 말을 서로 주고 받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 16:11)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깨닫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 16:12)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설득력이 있는 말이나, 지식이나, 교훈은 그것이 매우 적은 것이라도 전체 반죽에 퍼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성경은 지혜가 없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미련한 이들의 교훈을 이렇게 비유하십니다.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잠 26:9)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의 현실에 넘쳐나는 시대정신의 교훈과 지식, 그리고 유행과 즐거움에 관한 조언들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우리 가운데 쉽게 퍼져 나갑니다. 게다가 그런 지식은 마치 술 취한 삶의 손에 들려 있는 가시나무와 같는 것이지요. 그러니 세속의 지식과 시대정신,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대해서는 늘 주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무턱대고 최신 유행이나, 혹은 최근의 트렌드라고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요.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이라고 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작은 것까지도 극도로 민감하게 경계심을 갖고 부정적이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눅 16:9)
불의의 재물이란 이 세상을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경제적 지식과 가치관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과도 같은 이 땅의 세계관과 지식을 통해 친구를 사귀고, 일상에서의 일과들을 감당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을 평가하는 세속적인 주류의 지식과 교훈, 혹은 가치관에 휘말리지 않고도 존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복음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울이 그토록 외치며 갈라디아 교인들과 우리들에게 호소하는 메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현실에서 벗어나 산속에 은둔하며 살아가는 독특한 생활방식으로 세상과 단절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미 나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하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는 영적인 가치를 채워 주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리를 질 지켜 오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상황과 여건에 공감하고 계시고, 주의 깊게 주목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여기서 동정하다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잘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종교적 율법에 기대거나, 세속적인 지식과 교훈, 시대정신을 따라 자신의 가치와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몸부림 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반복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가치와 존재감을 영원토록 증명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어떤 지식과 소유와 실력과 명예, 혹은 자랑거리에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순종할 것을 권하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도 바울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 오직 예수님만 찬양하고 예배하며 순종하는 진정으로 축복으로 가득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하며 간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노력이나 열심, 혹은 지적인 이해력으로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께서 하신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고, 나에게 어떤 은혜인 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순종할 것에 몸과 마음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종교적인 신념의 증명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증명하신 것을 인정하고 믿을 것을 가르쳐 주고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애쓰고 노력하며 몸부림칠 것에 고민하지 말고, 오직 나의 영생과 축복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의 창시자가 되신 예수님을 늘 바라보며 풍요로운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