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길에서/ 곽주현
요즈음 아침 일찍 눈을 뜬다. 자리에서 뭉그적거리다가 동이 터오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늘 그랬듯이 창문부터 열어본다. 아침 공기가 어느 때보다 상쾌하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늘 다니던 산책길에 안개가 자욱하다. 산과 들이 구별이 안 될 만큼 모두 그 속에 묻혀 버렸다.
주변이 산으로 빙 둘러싸인 구릉지라 그런지 안개가 자주 끼곤 한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 짙어서 높은 산봉우리만 두어 개 보이고 그 주변이 온통 구름바다다. 들 한가운데에 서 있는 송전탑도 뾰쪽한 윗부분만 보여 붕 떠 있는 것 같다. 한 달여 동안 아침마다 걸었던 긴 산책길도 모두 사라졌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니, 비행기를 타고 갈 때 봤던 그런 풍경과 비슷하다. 이럴 때 셔터 누르면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은데 카메라가 내 집에 있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몇 장 찍어 본다. 높은 산에 올라야 얻을 수 있는 풍광이다. 평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라 자못 신비롭기까지 하다.
딸네 집이 시내 외곽에 있어 조금만 걸어 나와도 시골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출퇴근이 편하다며 이런 곳으로 이사했다. 너무 외지다며 반대를 했는데 지내보니 그 한적한 환경이 오히려 맘에 든다. 손자 돌보미로 오는 날은 주변에 있는 들로 아침마다 산책하러 나간다. 조그만 걸어 나가면 논과 밭이 있고 그 사이로 시냇물이 흐른다.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늘 다니던 길이라 따라가 보지만 시야가 가려 얼마만큼 왔는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도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는 들린다. 내 발걸음에 일찍 잠을 깼는지 개구리 한 마리가 물로 퐁당 뛰어든다. 뒤이어 놀란 물고기가 물결을 가르는 소리도 귀에 닿는다. 보이지는 않지만, 큰 새가 날갯짓하며 내려앉는 느낌이 온다. 아마 자주 눈에 띄던 황새가 논둑에 왔나 보다. 시각이 둔하니 청각이 예민해진다. 아침인데 아침 같지 않은 하얀 어둠 속을 지나고 있다. 흔치 않은 경험이다. 안개와 이슬로 신발이 눅눅해졌다.
안개가 걷히고 서서히 사물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논에는 보리가 자라고 밭에는 마늘과 양파의 알갱이가 제법 굵어졌다. 싱싱한 상추에 이슬이 맺혀 작은 옥구슬을 만든다. 늘 대하던 것이지만 희뿌연 어둠을 지나와서 그런지 더 빛나 보인다. 저만치에 있는 왼쪽 야트막한 산기슭에 하얀 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다. 주변이 소나무 숲인데 그 사이에서 화려하게 자기를 드러낸다. 별로 쓸모없는 나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 아카시아야.’라고 외치는 것 같다. 오른쪽 산등성이에는 보라색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키 큰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산과 들에서 잘 자라는 오동나무다. 결이 예쁘고 가벼워서 한때는 장롱을 만드는 목재로 귀한 대접을 받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갓길에는 수많은 풀꽃이 피고 있다. 쥐손이풀, 엉겅퀴, 괭이밥, 애기똥풀, 지칭개 등의 꽃이 보인다. 5월은 어느 때보다 들꽃의 향연이 가득 펼쳐지는 달이다. 괭이밥을 보니 지난주에 만난 친구 생각이 난다. 야생화를 취미로 기르는 그가 노랗게 핀 괭이밥을 넓은 화분에 심어 놓은 것을 보았다. 하찮은 들꽃인데 그렇게 옮겨 놓으니 훨씬 돋보였다. 한 무더기의 토끼풀이 있기에 이리저리 젖히다가 네 잎 클로버를 발견했다. 그것도 일곱 개나 찾았으니 횡재를 한 거다. 올봄 들어 처음이다. 이런 날을 무엇인가 좋은 일어 있을 것 같다. 모내기가 아직 멀었는데 벌써 물을 잡아 놓은 논도 있다. 그런데 이 무렵에 들녘에서 흔히 보는 못자리는 하나도 없다. 이제는 모를 비닐 하우스에서 집단으로 기르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 제법 넓은 텃밭이 있기에 들여다봤다. 상추, 쑥갓, 열무 등이 자라고 있다. 그런데 심어 놓은 작물 간의 간격이 너무 빽빽하고 무슨 화단처럼 모양을 내서 가꾸고 있다. 내 경험으로 보아 농사가 초보인 것 같다. 저만큼에서 잡초를 뽑고 있던 허리 구부정한 노인네가 인기척을 듣고 걸어 나온다. 서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해 2년째 농부란다. ‘그러면 그렇지.’ 했다. 길가에 핀 아카시아꽃을 따서 입에 넣었다. 어렸을 때 이맘때쯤에 간식처럼 먹었던 그 맛은 아니지만 달콤했다. 한 시간 넘게 산책을 했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해가 산야를 비춘다. 풀과 나무가 더 푸르러질 것이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왜 이렇게 늦었냐며 아내가 눈을 흘긴다. 눈을 비비며 다가오는 손주들에게 네 잎 클로버를 내밀었다. 어제 엄마가 찾아 줬다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천국을 갔다 온 것 같았던 아침 산책은 여기까지였다.
첫댓글 저도 이제 막 아침 산책하려던 참인데, 선생님 글 읽고나니 풀잎 하나, 꽃 한송이도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도 마음속으로 같이 걸었네요. 좋은 풍경 선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니까요. 저도 선생님 옆에 걸었습니다.
잔잔한 중에 웃을 포인트가 불쑥 있어요.
네잎클로바처럼요.
고맙습니다.
안개 낀 신비한 아침 산책길 묘사와 거기서 만난 동식물과 초보 농부 이야기가 한 권의 그림책 같습니다. 결론도 재미있고요. '무진 기행'과 결은 다르지만 안개 이야기에 잠시 떠오르네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선생님, 겨울아침이면 거실 창이 뿌옇찮아요? 선생님이 걷는 아침길이 겨울날 아침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쓸면 서서히 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모습이인 듯 행복합니다. 대하소설을 여는 어는 마을의 모습처럼 가슴으로 쏘옥 들어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안개 자욱한 길을 따라 산책을 하고 온 느낌입니다.
엄마가 찾아 줬다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재미있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고운 그림을 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좀 아는체 하자면 '아카시아'가 아니라 '아카시'가 정명입니다.
세세하게 잘 묘사해서 안개 낀 산책길을 함께 걷는 듯합니다. 실감납니다.
동심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시니 이런 맛깔나는 글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아침 산책을 즐기시는 선생님이 참 부럽습니다.
저에게는 그림에 떡이나 마찬가지거든요.
현역에서 은퇴하면 선생님처럼 즐겨보렵니다.
토요일 아침, 학교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아침 산책을 나갔지요. '오감으로 맞이하는 아침'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옆 마을로 해서 뒷산 입구까지 걸어갔답니다. 찔레순을 꺾어 조금씩 떼어 맛보게 했더니 이걸 무슨 맛으로 먹냐고 찡그리더라고요. 내일은 아카시아꽃맛을 보여줄까 봐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