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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구두
이 홍사
선생님들!
요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시나?
버스를 타도 아이들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다. 눈만 말똥말똥 뜨고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환갑이 넘어서니 마음은 청춘이지만 법적으로는 노인반열에 들어 노약자 보호석에 앉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먼저 차지한 싹수가 노란 아이들은 비켜주지 않는다.
꼭 앉고 싶은 건 아니지만, 경상도 말로 참 싸가지가 없다. 이런 일은 아이들을 나무랄 게 아니다. 욕은 선생님이나 부모들 몫으로 완벽하게 고착된다. 아침이나 낮에는 버스를 잘 타지 않는 내가 시내버스를 자주 타는 곳은 집 앞 네거리 대구은행 앞 버스 정류장이고 애용하는 버스가 20번이다. 이 버스는 세양청마루 종점에서 출발하는데 시내를 한 바퀴 돌아 종점으로 다시 온다. 인근에 봉곡중학교가 있다. 평일 그곳에서 버스를 타면 하교하는 중학생들이 잔뜩 타고 있다. 술 약속이 있을 때만 버스를 타는 나는 거의 네 시 오십 분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데 그 시간은 아이들이 하교할 시간이라 버스가 복잡하다. 며칠간 눈여겨보았지만, 마찬가지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아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타도 마찬가지다.
마음 같아서는 앉은 녀석의 머리통을 갈겨주고 싶은데 참자니 그것도 곤혹스럽다.
그 꼴이 보기 싫어 택시를 타면 좋으련만, 택시를 타보니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 정치에 민감한 시국이라서 택시 기사가 말을 걸어오면 대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말을 하다 보면 꼭 정치 이야기가 나온다. 진정한 통합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국민은 정말로 이분화 되어 있다. 좌파가 아니면 우파다. 중도는 없다. 택시 기사와 뭔가 말을 하다가 종내에는 냉랭한 분위기가 감도는 차 안에서 목적지에 도착하기 일쑤다.
말을 하기 싫은데 자꾸 시키는 것도 귀찮다.
그렇다고 승용차를 가지고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술 마시러 가면서 왜 승용차를 가지고 가?
시내에 나가면 주차하는데 신경이 쓰이고, 들어올 땐 대리운전을 해야 하는데 내 기름때면서, 대리운전 비를 물어야 한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 시작했는데 코로나 시국에 아이들이 등교하지 않아서 이렇게 싸가지가 없는 줄 몰랐다.
오늘도 버스를 탔는데 종점에서 탄 아이들은 자리를 다 차지하고 빈자리가 없었다. 그게 서운하고 기분이 나빠도 두 정거장만 참으면 된다. 거의 현대아파트나 파크맨션에 사는 아이들이다. 두 정류장만 가면 버스는 금세 빈 차가 된다는 걸 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버스를 타니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어떤 녀석은 애써 눈길을 피하고 핸드폰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하는 꼴이 내가 되레 민망할 지경이었다. 진짜 선생들이 원망스럽다.
아버지의 구두.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아버지의 구두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구두를 떠올린 것은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쇼핑몰을 뒤지고 있는데 거기에 원가 이하로 판다는 구두가 핸드폰 화면에 나타났다. 갈색 구두였다.
갈색 구두!
한 켤레의 구두가 눈에 선하다.
아버지의 구두다.
아버지께서 가신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이 희미한데 그 마지막 구두는 선명히 떠오른다. 당시에 시골집에는 신발장이 없었다. 아버지께선 구두를 벗으시면 툇마루 다듬잇돌 위에 얹어두곤 하셨다. 다른 신발들은 마루 밑에 넣어두는데 구두는 특별대접이다. 마루 위에까지 올라갔으니.
아버지께서 가실 적에 나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아버지께서도 단명하셨지만 내가 상주 노릇을 온전히 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장례를 치르고 진에 오니 그 갈색 구두만 툇마루에 오뚝, 남아있었다.
그 구두는 내가 사 드린 물건이었다.
아버지 병색이 오기 전 추석이 되어서 집에 가니 다음날이 추석인데 아버지는 구두가 없었다. 구두가 있었는데 마루 밑에 넣어두었더니 옆집 개가 한쪽을 물고 가서 죄다 물어뜯고 씹어 놓아서 신을 수가 없다는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추석날 한복을 입고 고무신이라, 어쩐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구두가 절실했다.
어디에 가면 구둣가게가 문을 열었을까?
아무래도 선산읍에 가면 구둣가게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일이 추석인데 이 시간에 문을 열고 있을까? 그래도 가보자. 당시에 나는 중고로 산 고물 승용차를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발 크기가 나랑 비슷하다. 어쩌다 집에 들러 일을 하려고 아버지의 장화를 신으면 딱 맞았다. 아버지의 신발사이즈를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가까운 선산으로 갔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구둣가게가 없었다. 한군데 있었는데 추석 전날이라 장사가 시들한지 이미 문을 닫았다. 다시 핸들을 돌려 구미로 갔다. 구미에는 구둣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금강제화에 가니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구두가 진열된 것 중에서 가장 고가의 구두를 신어보고 샀다. 고가라서 그런지 발이 엄청 편했다.
마음에 드는 구두를 샀지만, 집에 와서는 아버지께 된통 야단을 맞았다. 너무 비싼 구두를 샀다고 그렇게 헤퍼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핀잔을 넘어서서 야단을 치시면서 내일 신지 않을 것이니 추석이 지나고 물러거나 싼 것으로 바꾸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비싼 값을 합니다. 편하고 오래 신죠. 평생 신으셔도 돼요.
말이 씨가 된다고, 아버지는 그 구두를 평생 신으셨다. 그 평생이 불과 이삼 년이었다. 아버지를 보내고 집에 들어가니 툇마루 다듬잇돌 위에 아버지의 구두가 오뚝, 올라앉자 있었다.
그동안 참았는데 주인을 잃은 그 구두를 보니 왜 그리 슬프든지. 눈물에 아롱지는 구두를 한참이나 보았다. 그 구두는 불에 태우든가 버리지 못하고 내가 챙겼다. 그 구두를 애지중지하며 내가 신었다. 나는 구두를 신을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당시에는 굴착기 운전을 직접 했으니 현장에 나가면 작업화를 신어야 했다. 아버지의 구두 말고도 나에게는 싸구려 구두가 서너 켤레 있었지만 어디 귀한 자리 출타를 할 일이 있으면 아버지의 구두를 신었다. 비싼 값을 하느라고 뒤축도 잘 닳지 않는 그 구두를 신으면 아버지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 푸근했다. 거의 십 년 이상 그 구두를 신었다. 싸구려 구두는 신지 않으니 가죽이 경화되어 언제 버렸는지 모르겠다.
대신의 단독주택에 살 적이었다.
이 상가주택을 지은 지 이십 년이 되었으니 그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 동기들의 계모임이 있어서 아버지의 구두를 신고 나갔다. 당시에 나에게는 그 구두 한 켤레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구두를 신고 가서 오랜만에 회포를 푼다며 잔뜩 마시고 모임을 마치고 다른 친구의 집들이에 갔다. 단독주택을 새로 지은 친구라 음식이 푸짐했다. 그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그 집들이에 가서 또 마셨다. 술을 마시기로 작정을 하고 차도 가져가지 않았었다. 잔뜩 취해서도 구두만을 잘 챙겼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없다. 택시에서 내린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곯아떨어진 모양인데 다음날 나는 지독한 설사에 시달려야 했다. 장이 안 좋다는 것은 짐작으로 알았지만 너무 마신 것이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던 중에 현관을 보니 구두가 한쪽밖에 없었다.
거, 이상하다? 현관에 개가 들어올 리가 없는데 구두 한쪽이 어디 갔을까?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아내에게 문단속을 잘못해서 옆집 개가 들어와 물고 갔을 것이니 이웃집들을 뒤져서 구두를 찾아오라고 했다. 물론 아내도 그 구두가 어떤 구두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다시 사든지, 잊어버리라는 토를 달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일을 나갔기에 구두를 찾아볼 시간이 나는 없었다. 저녁에 퇴근하면 구두를 찾았는가, 구두의 안부부터 물었다. 구두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날이 갈수록 불꽃처럼 사그라지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아내는 날마다 구두를 찾으러 다닌 모양이었다.
일주일쯤 지나서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은 한쪽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미어진다. 한쪽을 버리자.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선집에서 굽을 가는 한이 있어도 평생 신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남은 한쪽을 보니 속이 쓰렸다. 아내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나는 되물었다.
소주 남은 거 있어?
아내는 냉장고를 뒤져 냉큼 소주를 찾아왔다. 아내를 탓하고 몰아세울 일은 아니다. 소주를 두어 잔 마시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주를 마시면 생각했다. 저 한쪽을 보면서 얼마나 더 가슴을 졸여야 하나? 자신이 없었다.
알아서 처리해!
나머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안주를 집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차마 내 손으로 버릴 수가 없었다. 가슴은 시리지만 더 시리지 않기 위해서 내린 결단이었다.
아마도 다음날 바로 아내는 구두를 버렸을 것이고 나는 퇴근하면서 금강제화에 들러 스타일과 색깔이 비슷한 구두 한 켤레를 사서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구두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좁은 마당에 가지가 무성한 대추나무 가지치기를 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어서 낮은 블록 담장 위에 올라서서 가지치기하다 보니, 어? 저게 뭐야? 기와집 지붕 위에 구두가 한쪽 온전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렇게 찾던 아버지의 구두였다. 그것을 장대로 내렸다.
아내에게 한쪽을 버렸느냐고 물었다.
내 말이 떨어지자 바로, 다음날 쓰레기봉투에 넣었노라고 했다. 가슴이 쓰렸다. 구두 한쪽이 없어졌을 때보다 더 심한 낭패감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구두가 어떻게 지붕 위에 올라갔을까?
술에 취한 그날을 떠올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지붕 위에서 발견된 그 한쪽을 버리는 데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 구두 한쪽이 집에 얼마나 있다가 버려졌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후로 나는 몇 켤레의 구두를 샀지만, 구두를 사면 그 스타일과 비슷한 구두를 샀다. 발이 편하고 더 나아가서는 마음이 푸근하다. 아버지는 구두를 물려주었는데, 나는 그 구두의 스타일만 받았다.
지금 신고 있는 구두도 그 스타일과 색상이 비슷한 것이다. 지금 신은 구두도 뒷굽이 반쯤 닳았다. 구두는 뒷굽이 반쯤 닳으면 앞부분도 가죽이 탄력을 잃는다. 요즘은 구두 수선집도 보기 힘들 뿐 아니라 굽을 갈아서 신는 사람도 드물다. 비싸고 좋은 구두를 사면 굽이 잘 닳지 않아서, 내 경우로 따지면 오륙 년은 거뜬히 신는다.
신고 있는 구두가 뒷굽이 어지간히 닳았다.
곧 바꾸어야 할 시기다.
형곡동을 가려면 시내버스를 대구은행 앞에서 환승을 한다. 바로 환승을 하면 시간이 좀 남는다. 술 약속인데 좀 늦으면 어떠랴만 나는 시간을 지키는 편이다. 대구은행 앞에서 도로를 건너가면 바로 금강제화가 있다. 잠시 들러서 구두를 구경이나 하고 갈까? 다리를 꼬고 앉은 시내버스에서 구두를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시내버스는 도량성당을 지나고 있었다.
이미 싸가지 없는 아이들은 다 내렸다. 요즘 아이들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안 보는 게 정서상 이롭다. 그때까지 나는 핸드폰을 건성으로 보며 생각에 잠겼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기억을 더듬게 한 구두가 떠 있었다.
갈색 구두. 스타일과 색상이 참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든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버지의 구두를 닮았기 때문이리라.
금강제화에 들러서 이런 구두가 있다면 당장 사더라도 결코 충동구매가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당장 마음이 급해졌다. 마음이 급한 게 나의 단점이면서도 최대의 장점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 나다.
마음이 급하다.
마음이 급해도 버스는 손님이 없는 정류장마다 다 선다. 아마도 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그러는 모양이다.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무음으로 핸드폰에 진동이 느껴졌다.
이게 뭐야?
미얀마의 망망쪼가 카톡을 보낸 것이다. 미얀마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로 보낸 것이다. 잘 있느냐고 안부 카톡이다. 망망쪼는 미얀마의 거래처 사장이다. 망망쪼를 통해서 지은 집이 열 채가 넘는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얀마에서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서 외국인 전면 입국 금지가 내려졌다. 관광비자는 무비자였는데, 이젠 비자가 다시 생겼다. 그러나 비자를 받기가 몹시 까다롭다. 미얀마의 초청장을 받아야 하고 들어가더라도 열흘간 호텔에서 격리해야 한단다.
인사 말미에 망망쪼는 언제 들어오느냐고 묻고 있었다.
지금 들어갈 수가 없다.
미얀마 군부에서 외국인 기자들이 들어올까 봐 외국인 입국을 막고 있다. 꼭 들어갈 사람은 미얀마 기업의 초청장을 받고 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관광과 취재는 허락이 안 되고 사업 비자만 허락하고 있는데 그나마 미얀마 사람들이 집에만 있어서 들어가더라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그런 사연을 영어로 적어서 답장을 보내는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 어설프게 영어를 기억하며 답장을 보내고 보니 내릴 정류장이 바로 다음이었다.
미얀마를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미얀마에 지은 집은 서른 채가 넘는다. 투자만 잔뜩 하고 한 푼도 건져오지 못했다. 어설프게 완공한 집, 세를 놓아 그 돈으로 직원들이 월급을 나눠가고 있다. 미얀마에 투자한다고 한국에는 빚을 잔뜩 지고 있다. 매달 나가는 이자가 부담스러운 지경이다.
아버지 말씀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께서는 가시기 전에 항상 말씀하셨다. 외국에 돈 벌러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당시에 중동 붐이 일어서 중장비 기사들이 해외에 많이 나갔었다. 나도 중장비를 하니까 그런 목돈의 유혹에 빠져서 외국으로 나갈까 봐, 하신 말씀이겠지만 물 건너 있는 돈은 돈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말씀에 따른다고 나는 근로자로서 외국에는 나가지 않았다. 투자자로서 외국에 나간 것이지. 아버지 말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거역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께서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멀리 내다보시고 하신 말씀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버지 말씀을 거역해서 나는 고전하고 있다. 언제쯤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막막한 상태다. 아버지 말씀대로 물 건너 있는 돈은 돈이 아니다. 어쩌면 아버지 말씀을 거역해서 천벌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방도를 찾아야지,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것이다.
환승하는 정류장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꺼서 주머니에 넣고 내렸다.
내려서는 도로를 건너 바로 금강제화로 들어갔다. 매장은 많은 구두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고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두엇 신발을 훑어보고 있었다. 요즘은 이런 구둣방도 옛날만큼 장사가 안된단다. 클릭만 하면 할인가격으로 파는 인터넷 쇼핑몰이 있기 때문이란다. 점원의 인사를 받고 진열된 신발을 둘러보았다. 어떤 신발은 한쪽만 진열하고 있었다. 아마도 진열대가 복잡했던 모양이다. 둘러보는데 중앙 진열대에 있던 갈색 구두가 눈에 들어와서 시선을 고정.
아, 아버지!
속에서 비명과 흡사한 한마디가 올라왔다.
구두를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아버지를 떠올렸다. 얼굴 기억이 희미한 아버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진열대에서 눈을 사로잡은 구두는 그 옛날 아버지의 구두와 모양과 색깔이 똑같은 거였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했다. 그 옛날에 최신 유행이라고 비싼 값에 샀는데, 지금 유행하는 구두란다. 그 구두에 눈길을 주고 있으니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점원이 다가와서 유행이라는 소리를 하며 진열대에서 구두를 내려 신어보라고 했다. 그 구두도 한쪽만 진열되어 있었다. 한쪽만 보아도 그 옛날의 구두라는 알 수가 있었다. 다른 물건은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거? 한쪽만 파시는 건가요?”
점원을 돌아보며 농을 했다.
“호호호.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쪽만 사시면 다른 한쪽은 그냥 드려요.”
“구두 한쪽에 질린 사람이 접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한쪽만 사신 일이 있나요?”
“그런 게 있습니다.”
구두는 신어보니 딱 맞았다. 사느냐 마느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음에 든 이상 가격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점원은 20% 할인을 해주겠노라고 했다. 그것도 마음에 든다고 하자. 점원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매장에 달린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구두를 사면 아버지께 바쳐야 하는 거 아닌가? 아버지의 구두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점원은 금세 한쪽을 찾아서 들고나왔다. 그때까지 나는 한쪽만 신고 점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한쪽도 신어보니 발이 편했다. 그 옛날 아버지의 구두와 같았다. 발도 편했지만, 우선 마음이 푸근했다.
구둣값을 계산하면서 생각했다.
이 구두는 아버지께 바쳐야 한다. 아버지의 구두다. 아버지께 바치고 그다음 신어야 도리가 아닌가. 그렇다. 산소에 가서 아버지께 바친 다음 내가 신는 게 도리다. 당장 산소에 가야 하겠다. 그런데 술 약속은 어쩌지?
오늘 모임은 일곱 명이다. 나 하나 빠진다고 술자리가 흐트러지는 건 아니다. 종이가방에 넣은 구두를 들고 금강제화를 나와서 술자리에 분명히 나타날 장 교수에게 전화했다.
“나 지금 그쪽으로 가다가 현장에 콜을 받았어. 급하게 견적을 하나 넣어 달라네. 지금 사무실로 다시 들어가는 길이야. 분위기 좋다고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적당하게 얼버무렸다.
이럴 때 보면 나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잘도 하는 인간이다.
아버지 산소에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선산은 바로 강 건너에 있어서 차를 가져가면 채 이십 분이 걸리지 않는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려 버스를 탈 시간이 없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다녀오려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는 게 마땅하다. 승용차는 집에 있다. 마침 빈 차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봉곡동으로 갑시다, 기사님 가능하면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저는 이 지역 정서에 맞지 않게 좌파니까요.”
먼저 초를 쳤다.
그런 주문을 하자 머리가 허연 기사가 룸미러로 나를 쳐다보았다. 운전자는 좀 굳은 표정으로 봉곡동을 향해 달렸다.
잠깐!
집에 가서 차를 가져갈 게 아니라 술이라도 한 병을 사서 가서, 구두를 놓고 아버지와 대작하는 게 어떨까? 아버지와의 대작? 갑자기 구미가 당겼다. 그렇다면 차를 가져가면 안 된다.
“기사님! 봉곡동으로 갈 게 아니라, 해평면까지 갈 수가 있지요?”
“갑자기 목적지가 바뀌었나요?”
신호를 기다리던 택시 기사가 룸미러를 보고 되물었다.
“예! 해평면 산소에 갈 일이 생각나서 이 차를 이용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돌아올 때 빈 차로 오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산소를 잠깐 둘러보고 이 차를 타고 나올 거니까요. 기다리는 시간도 요금이 올라가지요?”
해평면은 강 건너에 있다.
낙동강 대교를 건너 산업도로를 타지 않고 들길로 빠지면 바로 선산이다. 목적지가 바뀐 택시가 도량동에서 우회전하는 것을 보고 뒷좌석에 앉은 나는 무릎에 올려둔 종이가방을 벌려 구두 한쪽을 꺼내 보았다. 아버지의 구두! 구두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닮았다. 옛날의 그 구두가 부활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게 어떻게 주인의 눈에 띄었을까? 생각하니 대단한 수확이다.
차가 문성 삼거리를 지나갈 때 기사에게 주문했다.
“어디 편의점이나 마트에 잠깐 들렀다 갑시다. 산소에 가는데 술이라도 한 병 사서 가야지요.”
기사는 고분고분한 목소리로 알았다고 했다.
기사가 차를 세운 곳은 문성 삼거리를 지나 농협 앞이었다. 농협 옆에 24시 편의점이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본 것보다 매장은 넓었다. 주류코너에 아무리 찾아도 정종은 없었다. 하긴 이런 편의점에서 정종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소주를 들고 있던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안주는 명태나 포가 있을 리 없었다. 안주가 될만한 게 뭐 없을까? 둘러보다가 소시지와 게맛살을 사고 종이컵도 준비했다.
요즘 편의점에 가면 기분이 나쁜 것이 봉툿값을 따로 받는다는 점이다. 그 편의점 여학생도 봉투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산에 들고 올라가려면 봉투가 필요하다. 알뜰하게 봉툿값까지 계산했다.
밖으로 나오니 기사가 타기 좋게 택시를 돌려놓고 있었다.
대교는 금방이었다.
택시 뒷좌석에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내려다보았다. 혼자서 차를 가지고 지나가면 낙동강, 강물을 이렇게 자세히 못 본다.
삼 년간 나는 이 강을 건너서 학교에 다녔다.
당시에는 다리가 놓이지 않았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통학을 했다. 다른 이에게 이런 소리를 하면 낭만을 들먹이지만, 낭만은 없고 고생한 기억만 있다. 면 소재지에 있는 고등학교가 시시해서 주제도 모르고 국립으로 신설된 특수학교를 쳐서 떨어지고 후기로 들어간 곳이, 낙동강 건너 신설 미달 고등학교였다. 당시에 재수란 언감생심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면 소재지의 학교에 다닐 적에 나는 나루터로 가야만 했다. 직선거리로는 면 소재지의 학교보다 가깝지만, 낙동강이라는 장애물이 버티고 있어 홍수가 지면 당연히 학교에 못 갔다.
물길을 익히자 사공 할아버지를 쉬고 하고 내가 삿대나 노를 저었다. 사공 할아버지가 볼일이 있는 날은 나를 위해서 나룻배 하나를 강 건너에 묶어 놓고 출타를 했다. 춘하추동 바뀌는 강. 여름에는 헤엄을 쳐서 건널 때도 있었고 겨울에는 얼음 위로 건널 때도 있었다. 바로 그 나루터 위에 다리가 놓였으니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나?
그 옛날을 더듬으며 택시 뒷좌석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겨울의 매서운 강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
퍼뜩 눈을 떴다. 차가 길을 모르고 산업도로를 타면 낭패다.
“기사님! 다리를 건너서 바로 농로로 우회전하세요. 조오기요.”
택시는 속도를 줄여서 서행하다가 농로로 들어섰다. 농로로 들어서면 강둑으로 올라가게 된다. 강둑을 조금 올라가다가. 산업도로 굴다리로 빠지면 외통수 길인데 산 아래 닿는다. 택시는 내가 일러주는 대로 달려 선산 아래 도착했다.
“됐습니다. 여기서 차를 돌려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내려올 거니까.”
술이 든 봉지와 구두가 든 가방을 들고 택시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산길을 따라 십 분 정도 올라가면 아버지의 산소다.
양손에 물건을 들고 올라가는데 작년에 떨어진 낙엽에 길이 미끄러웠다. 산에는 나뭇가지가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었다. 지난 추석 아래 벌초를 하면서 와 보고는 처음이다. 한참을 올라가니 아버지 산소 부근에 붉은 것이 나뭇가지 사이 사이로 보였다.
“저게 뭘까?”
궁금해하면서 산소가 보이는 곳까지 올라가니 꽃이었다.
영산홍이 저 혼자서 만개했다.
몇 년 전에 아버지 산소 축대, 석축 사이사이에 심은 영산홍이 만개했다.
다소곳이 숨어서 수줍은 듯 피는 꽃이 아니었다. 무슨 꽃이 알몸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나? 붉디붉은 이 환장할 유혹을 어찌 감당하란 말이냐?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잠시 서서 꽃을 보았다.
손으로 쥐어짜면 꽃물이 주르르 흐를 것 같은 꽃이었다. 역시 영산홍을 심기를 잘했다.
산소에 올라서니 봉분 두 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이좋게 강을 내려다보고 앉아계셨다.
숨을 고르고 상석에 구두부터 꺼내서 올려놓았다.
아버지 구두를 사 왔습니다. 당신의 구두입니다.
그런 말을 속으로 웅얼거리며 술병을 따고 소주를 두 잔 부어 놓았다. 절을 두 번 하고. 술을 아버지의 무덤과 어머니의 무덤에 부었다.
그리고 산소 앞 잔디에 앉았다. 잔디가 보드라웠고 폭신했다.
상석의 구두를 내려서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아버지의 구두를 신었다.
아버지! 이 구두는 제가 신겠습니다.
아버지의 무덤을 보며 그런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다음은 소주를 내려서 종이컵에 콸콸 따랐다.
숨을 참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소주가 쓰지 않았다. 안주를 집을 생각을 하지 않다 다시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는 한입에 또 털어 넣었다. 나머지는 소주가 반 잔이었다. 그것도 마저 부어 털어 넣었다. 속이 얼얼했다.
돌아보니 강 건너에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소주는 내가 마셨는데 노을아 네가 왜 벌겋게 취하니?
앉은 자리가 푸근했다.
산 아래서 택시가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나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새로 신은 구두와 노을을 번갈아 보며, 오랜만에 푸근함에 취해 오래도록 앉아 있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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