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뒤돌아본다
푸섶길의 가없음을 배우고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새소리의 기쁨을 비로소 안 한 해를
비탈길을 터벅거리며 뒤돌아본다
저물녘
내게 몰아쳐온 이 바람 무엇인가
송두리째 나를 흔들어놓는
이 폭풍 이 바람은 무엇인가
눈도 귀도 멀게 하는
해도 달도 멎게 만드는
이것은 무엇인가
자리에 누워 뒤돌아본다
만나는 일의 설레임을 알고
마주 보는 일의 뜨거움을 알고
헤어지는 일의 아픔을 처음 안 한 해를
꿈속에서 다시 뒤돌아본다
삶의 뜻으로
또 새로 본 이 한 해를
- 신경림, <세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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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올 한 해는 어떠셨는지요? 수많은 인연들이 우리의 삶에 드나들며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을 꼬옥 잡으셨는지요? 연말이 되면 다시 되새겨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교회공동체가 고백하며 추구해온 교회 표어입니다. 2023년 교회표어는 ‘지친 이들의 마른 목 축이는 생명의 옹달샘 되어’(요한 7:37-38)였습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 되시는 예수님의 은총에 기대어 생의 목마름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작은 자들의 마른 목 축이며, 그들의 형편을 살피며 우린 이 자리까지 걸어왔습니다. 그 발걸음 속에서 시대의 작은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던 주님을 우린 여럿 만났습니다. 우리의 작은 손내밈을 통해 세상은 조금 더 환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작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숨은 깊어가고 희망과 사랑은 자꾸만 쪼그라듭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세상. 사실 이러한 현실이 우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랬지요. 권력과 힘이 압도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살아갈 이유를 품게 하시고, 자신을 위한 삶을 넘어 타자를 위한 의미있고 보람된 삶을 살게 하셨지요.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 나라의 꿈을 저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꿈 앞에 포기할 줄 몰랐단 예수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을 누구하나 훼손됨 없이 누리고 경축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는 삶! 그러한 삶이 구약에서 말한 ‘희년의 세상’이고, 신약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를 향한 믿음이 세상을 살리는 거룩한 실천으로 나타나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좀더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품고 서로를 대하는 ‘착한 세상’이 그것입니다. 세상이 무척이나 거칠어졌습니다. 무관심은 물론이요 폭력과 혐오와 냉대가 일상화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낙오하거나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고 세상은 속삭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사랑이 이긴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어떠한 힘 앞에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재료가 바로 사랑이지요. 그래서 2024년 교회표어를 ‘착한 세상을 향한 꿈,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우리’(누가 17:20-21)로 정했습니다. 다가올 새해엔 하나님 나라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며, 또 실천하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2023.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