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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11/11/2005111170335.html
비우면 채워지는 흰 그늘… 그 아름다움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김지하 지음|실천문학사|597쪽|3만원
"남도의 끝 해남에는 어란(於蘭)이란 작은 포구가 있다. 바다도 너무 깊어 언제나 검은 빛이었고, 조난이 잦아서 포구 끝에 등대 하나가 서 있으니 눈부신 빛이다. 흰 빛과 검은 바다."
김지하 시인은 그의 문학을 감싸는 후광(後光) 속에 깃든 풍경을 더듬어 흰 빛과 검은 바다를 만난다. 흑과 백은 서로 뒤엉킨다. '소리없는 아우성'과 같은 모순 어법이 가능해지는 시의 차원에서, 흰 빛과 검은 바다는 '흰 그늘'이란 김지하 특유의 모순 어법을 낳는다. '흰 그늘'은 담시(譚詩)와 대설(大說), '애린' 연작시 등등 김지하가 거쳐온 시적 행로에 드리워져 있을 뿐 아니라 현재 그리고 앞으로 김지하 문학이 나갈 길 앞에도 짙게 깔려있다. '흰 그늘'은 김지하가 추구하는 민족 미학의 원리를 담은 한 편의 시와 같은 용어이기 때문에 시인의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 책은 김지하의 강연록을 중심으로 민족 미학의 원리를 찾아간다.
'흰 그늘'을 이해하기 위해서 김지하는 판소리와 탈춤을 먼저 감상하라고 주문한다. 한국적 전통 예술의 독창성을 대표하는 판소리와 탈춤에서는 똑같이 '그늘'이란 경지가 있다. "저 사람 소리에는 그늘이 있다"고 할 때 그 소리꾼은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인생의 쓴맛 단맛이 녹아있는 소리와 춤사위에서 한국적 미학의 핵심인 '그늘'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전통예술에서는 삶의 윤리적 측면과 미학적 측면 또는 예술적 측면을 삶의 구체적인 인생 역정에 직결시켜서 봤던 겁니다"라고 김지하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흰 그늘'은 무엇일까. "빛을 품은 어둠, 뭔가 안에서 큰 외침을 가지고 있는 듯 하면서도 자기가 애써 억누르고 있는 침묵,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 서로 얽혀 이런 것이 굉장히 높은 경지에 있다고 할 때 흰 그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라는 것이다. 김지하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흰 그늘'의 미학을 선구적으로 구현한 시인으로 정지용을 꼽았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라는 정지용의 시 '유리창'에서 '외로운 황홀'이란 이미지가 '흰 그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침묵으로 쓰는 거예요. 말을 많이 쓰지 않고도 자기 주제를 표현하는 사람이 우수한 시인이죠. 공처(空處)의 시인, 즉 틈을 벌려주는 겁니다. 외로운 황홀, 그것은 신에 대한 호소입니다. 가톨릭적이죠."
'가톨릭과 소위 유럽의 모더니즘과 우리 민족적인 서정이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세 가지를 같이 묶어놨던' 정지용에 대해 김지하는 이성과 감성, 영성(靈性)을 통합한 예술가였다고 평가한다.
김지하는 그래서 '흰 그늘'의 핵심은 서로 엇갈리는 것들을 통합하는 상생과 조화의 미학이라고 역설한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30404/118673833/1
김지하 “한류도 ‘흰 그늘’…질병·죽음의 시대가 요구하는 치유의 예술”
‘김지하의 마지막 대담’ 출간
‘오적(五賊)’(1970년), ‘황토’(1971년), ‘타는 목마름으로’(1975년)…
1970년대 김지하 시인(1941~2022)의 문학은 저항과 투쟁의 표상이었다. 반독재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김 시인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 민청학련 사건 같은 시국 사건으로 수차례 투옥되면서 옥중에서 유불선(儒佛仙), 동학사상·생태학 공부에 몰두했다. 1980년대 석방 후엔 생명사상가, 미학이론가로서 족적을 남겼다.
다음달 8일 고인의 1주기를 앞두고 최근 김 시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김지하 마지막 대담’(도서출판작가)이 출간됐다. 20여 년간 김 시인을 연구해온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문학평론가)가 2003~2017년 고인과 8차례 대담한 내용을 쉽게 풀어 정리한 것이다. 김 시인의 시와 사상을 해설한 평론 2편도 함께 수록됐다.
홍 교수는 3일 전화통화에서 “2016년쯤 김지하 선생과 함께 그의 사상을 젊은 세대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그간 대담한 내용을 정리하기로 했다”면서 “팬데믹 기간 만남이 차단된 데다 지난해 선생이 운명하시면서 2017년 대담이 마지막이 됐다”고 했다.
저자는 1995년 김 시인을 처음 만나 20년 넘게 교분을 나눴다. 그는 대담에서 김 시인이 정립해온 생명사상과 미학이론에 집중했다. 홍 교수는 “80년대 이후 선생께서는 생명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생명의 세계가 구현될 수 있는지에 가장 관심을 두셨다”면서 “생명을 중시한 민족 고유사상인 동학사상(1860년 창시)은 김지하 생명사상의 바탕이 됐다”고 설명했다. “동학에서는 ‘님을 높여서 부모 모시듯 친구 삼는다’는 말이 있다. 높이긴 높이는데 친구고 친군데 높인다 이 말이야. 그래서 님이라고 하는거야. 미의식의 핵심 안에서 모심이라는 윤리적이면서 철학적 태도가 있다.”(김 시인)
김 시인의 미학 이론의 핵심인 ‘흰 그늘’은 책 전체를 관통한다. ‘흰 그늘’은 굴곡진 삶에서 한(恨)을 인내하며 생겨나는 깊은 ‘그늘’과 그 속에서 ‘흰’ 빛, 즉 신명이 피어난다는 이진법적 원리다.
최근 ‘김지하 마지막 대담’을 출간한 홍용희 교수.
대담에는 한류, 촛불시위, 남북관계 등 다양한 문화·정치적 현상에 대한 김 시인의 분석도 담겼다. 김 시인은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 응원이나 한류 열풍 등의 문화적 현상도 민족적 미학의 원형인 ‘흰 그늘’로 해석한다.
김 시인은 대담에서 한류 미학의 핵심에 대해 “이 컴컴한 질병과 죽음의 시대가 요구하는 치유의 예술, 치유의 약손”이라며 “‘흰 그늘’을 이에 대응하는 미학적, 문학적 담론의 원형으로 내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대혼돈 속에서 신음하는 인격과 비인격, 생명과 무생명 일체를 다같이 거룩한 우주공동체로 들어올리는 세계문화대혁명, 이를 위한 아시아 네오 르네상스의 미학이 요구된다는 것이지요.”(김 시인)
홍 교수는 김 시인의 사상은 기후위기 등 인류가 현재 직면한 위기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고 강조한다. “16세기부터 서양을 중심으로 근대문명이 질주하면서 기후위기, 생명 가치 상실, 팬데믹 창궐 등이 심각해졌잖아요. 김 시인은 80년대 중반부터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안을 찾아나갔던 분입니다. 우리가 그를 더 깊이 공부하고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죠.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김 시인의 사상이 출구를 제시하지 않을까요.”(홍 교수)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6489.html
‘흰 그늘의 미학…’ 김지하 시인
"한류를 뒷받침할 미학적 뼈대 필요하다"
"한류가 미학과 함께 가면 좋겠고, 이 책이 그것을 자극하는 힘이 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5-6년전부터 명지대와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했던 미학강의를 정리한 책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실천문학사)를 내놓았다. 같은 출판사에서 1999년 출간한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 지난해 2월 출간한 '탈춤의 민족미학'을 잇는 저자의 미학강의 연작이다.
책 출간을 계기로 2일 인사동에서 만난 김 시인은 "'흰 그늘'에서 그늘이 인생의 쓴맛과 단맛, 희로애락, 한을 표현한다면 흰빛은 신성함, 신명같은 것과 관련된다"면서 "흰 그늘의 미학은 개인적으로 겪었던 정신적 분열상태를 극복하고 정신적 통합에 이르는 과정을 미학의 개념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삼국유사'의 고구려 유화 편에서 방에 갇힌 유화가 들이친 햇빛을 피했다가 흰 그늘을 껴안은 뒤 주몽을 낳았다는 대목이 나온다"면서 "이 책은 흰 그늘이 민족신화나 민족의 미학적 원형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따져본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독일 교회의 날 기념행사, 문명기행 등을 위해 2주 가량 프랑크푸르트,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아테네, 로마 등을 방문하고 돌아온 그는 "유럽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마다 한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우리가 '문화입국'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지 목사로부터 한국이 삼성, LG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문화도 꽤 강력하다는 것을 느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김 시인은 "이제 한류도 미학적 뼈대를 세울 때가 됐다"면서 "예술종합학교 심광현 교수가 제시한 바 있는 흥과 한의 개념을 동반한 것이 '흰 그늘'이며, 이러한 개념이 한류의 미학적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칼 구스타프 융의 '그림자론'은 의식에서 침전된 욕구불만이 무의식에 축적됐다가 신경질이나 히스테리처럼 갑자기 튀어나온다"면서 "모차르트는 그것을 예술창조의 원리로 활용한 것"이라고 흰 그늘의 미학을 설명해 나갔다.
나아가 "우리 문학 가운데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에는 흰 그늘의 이미지가 여러 차례 나온다"면서 "정지용은 감성적으로는 민족주의자, 이성적으로는 모더니스트, 영성적으로는 가톨릭이라는 세 가지 모순된 성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흰 그늘'의 민족신화적 원형은 북방유목계의 색채감각인 검은 그늘과 남방해양계의 눈부신 태양, 환웅과 웅녀의 결합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최근 한국영화를 통해 흰 그늘의 미학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를 보다가 이유없이 울었다"면서 "밑바닥에서 누추하게 살아온 사람이 만들어내는 매끈한 액션은 너덜너덜한 한을 뚫고 올라온 흥이어서 평론가들조차 그런 감동을 예상치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난데 없는 감동이야말로 흰 그늘의 미학이며, 그것은 외국인들에게도 분명히 감동을 줄 것"이라고도 했다.
섬사람들의 오래된 한과 종교를 넘어서려는 선비적 자세 등이 조선시대 천주교의 이입과정 속에서 복잡하게 전개되는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 흥과 한의 정서가 불교적 연기설 속에서 펼쳐지는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등도 흰 그늘의 미학을 보여주는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류 현상을 뒷받침할 미학이나 예술이론에 대한 논의가 지금부터라도 활발하게 펼쳐져야 하고, 우리가 탐구할 미학은 한류의 성장발전과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흰 그늘의 미학은 인간의 정신적 천민화, 도회적 삶의 혼란상을 극복하는데 강한 소구력을 갖고 있다"면서 "그것은 그늘과 흰빛, 한과 흥, 익살과 숭고미, 슬픔에서 신명에 이르는 통합적 미학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여기서 뻗어나간 기초예술이나 학술분야의 한류는 하나의 문명행태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독일 방문시 민중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와 '생명의 신학'이라는 주제로 대담했던 그는 "축구에서 새세대의 가능성을 본다고 말하자 몰트만 박사는 '축구는 전쟁'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내가 중요한 것은 스코어가 아니라 응원문화라고 강조하면서 지난 서울 월드컵 때 독일에 패한 한국에 대해 응원단이 '괜찮아'라고 외친 것을 예로 들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고 덧붙였다.
몰트만 박사는 "축구신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농담했지만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유럽축구와 한국축구의 응원문화는 분명히 다르고, 이는 한류의 미학적 근간을 이룬다고 김 시인은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철학자나 미학자가 아닐지라도 이번에 출간한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가 한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촉매역할을 하길 기대했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20510.22022002801
[도청도설] 흰그늘과 시김새
지난 8일 향년 81세로 타계한 김지하 시인이 2004년 쓴 사단법인 생명과 평화의 길 창립선언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거듭 읽을수록 더욱 공감이 간다.
“예컨대 임방울의 ‘심청가’에서 심봉사가 개굴창에 빠지는 청승스런 대목을 도리어 익살스럽게, 뺑덕어미의 우스꽝스런 작희를 오히려 심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이 끝없는 인욕정진(忍辱精進)의 ‘삭힘’에서 비롯된 ‘시김새’가 있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그늘’이라 하는데 우리 소리의 미학에서는 바로 이 ‘그늘’이 결정적이다. ‘저 사람 소리엔 그늘이 없어!’ 하면 예술가로서는 끝장이다. 이렇게 윤리적 패러다임과 미학적 패러다임이 일치하는 데에서 우리 민족의 민중예술과 미학의 탁월함이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 나오는 그늘에,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흰’(白)을 붙여 ‘흰그늘’이라는 미학 개념으로 확장한다.
시김새도 중요하다. 철학자 이지훈은 김지하 시인의 시김새를 이렇게 풀었다. “시김새는 예술적 기교를 넘어 삶 전체가 예술로 우러나는 양상을 뜻한다. 하나의 예술 세계를 이루는 인간의 능력, 깊이, 성숙한 경험 세계를 포함한다. 여기서 시김새는 삭힘 발효 같은 단어와 심층적으로 결합한다. 삶의 고통을 삭이며 노력한 결과로 나타나는 깊은 경지, 음식으로 비유하면 잘 발효된 맛, 곰삭은 맛이다.” 시김새와 그늘과 흰그늘, 흥과 한은 상호작용하면서 한민족의 미학을 형성한다. 물론, 이런 미학 원리는 지금도 우리 속에서 작동한다.
봄만 되면 수많은 ‘귀명창’ 관객이 어떤 가수의 ‘봄날은 간다’가 더 좋은지 논쟁하다가 아예 스스로 이 노래를 불러 젖히는 모습을 쉽게 본다.
일본·중국·중앙아시아·중남미 등지 한민족 동포 사회를 담은 모든 다큐멘터리에서 흥겹고 격렬하든 처연하고 애처롭든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은 꼭 나온다. 한류 가수의 노래와 춤이 낯설디 낯선 나라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는 탁월한 보편성을 발휘하는 모습도 유튜브만 클릭하면 무수히 볼 수 있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이런 현상을 관통하는 한민족의 미학 원리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시인이자 사상가 김지하 선생이 오랜 세월 가꾼 ‘시김새와 흰그늘’의 예술론·미학이 있기에, 그때마다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점만으로도 그에게 고맙다. 고인도 문화력과 콘텐츠의 시대에 한국의 도약을 지켜보며 우리 예술의 ‘시김새’가 무르익기를 기대할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