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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잡하다’의 올바른 사용법
착잡하다’는 한국어에서 미묘한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혼란스러운 상태를 넘어 복잡한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과 내적 갈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나 어려운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자주 사용되며, 개인의 내면적 고뇌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착잡하다’는 또한 사회적 이슈나 복잡한 문제에 대한 반응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어, 개인적 감정뿐만 아니라 집단적 정서를 나타내는 데에도 활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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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산 정주영이 1981년 한 일간지에 직접 기고한 글로 기업인으로서의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새봄을 기다리며 정주영
이 글은 아산 정주영이 1981년 한 일간지에 직접 기고한 글로 기업인으로서의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창밖으로 내리는 부드러운 함박눈은 오는 봄을 시새는 것인가. 예로부터 立春(입춘) 지나서 오는 눈은 꽃을 시샘하여 내린다 하여 꽃샘눈이라고 부른다.
초봄의 女神(여신)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마음속에 흐뭇하게 안겨준다. 仁王山(인왕산) 골짜기엔 解氷(해빙)의 물소리가 졸졸 흐르며, 삼라만상을 에워싼 대기에는 약동하는 새봄의 기운이 서렸음을 알려준다.
창밖으로 내리는 부드러운 함박눈은 오는 봄을 시새는 것인가. 예로부터 立春(입춘) 지나서 오는 눈은 꽃을 시샘하여 내린다 하여 꽃샘눈이라고 부른다.
초봄의 女神(여신)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마음속에 흐뭇하게 안겨준다. 仁王山(인왕산) 골짜기엔 解氷(해빙)의 물소리가 졸졸 흐르며, 삼라만상을 에워싼 대기에는 약동하는 새봄의 기운이 서렸음을 알려준다.
춥고 지루하던 겨울은 지나가고 깊고 깊은 겨울밤의 思索(사색)에서 깨어나 긴 기지개를 켜는 봄을 바라본다. 이른 봄 먼 곳에서 憧憬(동경)의 女人(여인)이 살며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새봄을 기다리며 仁王山(인왕산) 음지의 殘雪(잔설)에 아쉬움을 보낸다.
早春(조춘)의 아침은 상쾌하다.
차갑고 부드러운 바람이 뜰 안에 가득하고 裸木(나목)을 한 둘레 돌아와서 나의 옷깃을 파고든다. 며칠 사이 확실히 달라진 것이 많다. 2월의 이른 봄은 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대답하면서 찾아왔다.
봄을 기다린 사람은 많다. 그중에서도 산간농촌 殘雪(잔설) 사이 양지쪽 논두렁에 불을 피워놓고 구정 대보름달을 맞이하는 思春期(사춘기)의 아이들 마음속에 봄은 맨 먼저 온다.
도시의 운동 부족인 일과를 다소라도 메우려고 새벽 출근길에 반은 걷고 반은 뛰어가는 사이에도 천지간에 새봄이 찾아들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눈을 밟으며 뛰어가는 운동화 바닥으로 봄을 느낀다. 겨울눈과 봄눈은 발바닥에 밟히는 촉감부터 다르다. 봄눈의 감촉은 부드럽고 연하며 겨울눈은 이보다 딱딱하다. 달려가는 새벽길의 겨드랑이 속으로 스며드는 봄기운은 생명 속의 오염된 찌꺼기를 씻어내는 맑은 냉수와도 같다.
새벽녘 景福宮(경복궁)의 중후하고 긴 돌담장 옆을 달리며 아직은 찬 침묵 속이지만 봄의 태동을 곳곳에서 느낀다. 早春(조춘)의 감격을 가슴 그득히 들이마시며 아직 밝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서면 봄은 간곳없이 사라진다. 비단 봄뿐이 아니고 모든 節氣(절기)의 변화에 대하여 그 反射感覺(반사감각)은 무디어지고 먼 어린 시절의 감상을 되씹는 일밖에 없다.
계절이나 자연은 그때에만 민감할 수 있고 有情(유정)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린 날의 순박한 자연은 어느새 멀리 뇌리에서 사라져버리고, 고향을 등진 도시의 流浪民(유랑민)처럼 거북한 긴장 속에서만 살아왔던 일을 되돌아본다. 이러한 세월이 제2의 天性(천성)으로 화하여 다년간의 생활 감정도 이런 습관에 이어져서 바람직하지 못한 개별의 나를 형성해 놓았다.
오늘의 현실은 4/4 分期制(분기제)의 소득확대 추구를 위한 치열한 적자생존의 투쟁으로 채워지는 4계절뿐이다. 기업인에게는 歡喜(환희)의 4계절이나 낭만적 4계절은 연분에 닿지 않고, 대자연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心情(심정)에 다가서지 않아 멀고 먼 데에 있는 것과 같은 실정이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젊은 계절에 궁핍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굶주림과 헐벗음을 딛고 일어서기 위하여, 그리고 구멍가게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기업인으로서 불안한 첫발을 내디뎠을 때, 또한 그 일을 기점으로 하여 내 생애의 발목이 잡힌 후 오늘날까지 모험과 투쟁 속을 헤쳐 나왔다. 나로서 최선을 다하는 그 渾身(혼신)의 집중과 정열과 全心全靈(전심전령)을 消盡(소진)하는 질주의 기나긴 행로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편이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지는 아니한다. 企業(기업)의 대열에 서 있는 여러 기업 동지들이 이와 같은 형편에 놓여있을 것이다. 남이 잘 때 깨고, 남이 쉴 때 뛰어가지 않으면 기업의 육성은 불가능하다. 처절하다고 할 만큼 각박한 競合事例(경합사례)들을 수없이 치러내면서 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봄이 와도 봄의 줄밖에 서서 昏迷(혼미)한 어둠에 몸을 적시고 있는 수가 많다.
경쟁에 이기는 것만이 삶의 전부로 생각해온 폐쇄적 열기에 갇혀 지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봄은 환상 속에만 있는 관용의 女人(여인)과 같다.
봄은 만인이 듣는 복음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봄은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온다. 춥고 음침한 긴 겨울을 힘겹게 견디어낸 사람들에게 봄은 더욱 따스하다.
살며시 스며드는 봄은 慈愛(자애)의 어머니같은 성품 그대로이다. 포근하고 훈훈하다.
언제나 긴장하고 서두르면서 마음의 안식이라곤 없는 기업인들은 하늘의 별을 딸 듯한 기세로 달려가지만 정치가나 공직자 또한 聖職者(성직자)들의 비판 앞에서는 자라목같이 움츠러들기를 잘한다. 그 허약한 기업 군상들.
유구한 儒敎(유교)의 사상이 그러했고,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선조들의 실정이 그러했거니와 제 아무리 천만금을 손에 잡은 사람이라도 봄바람에 녹는 殘雪(잔설)과 같은 인간적 허약의 일면을 숨길 수 없다. 기업의 사무실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화려한 循環(순환)도 속절없이 스쳐 지나가며 다시 새봄이 와도 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때가 많았다. ‘空地(공지)에 無花草(무화초)하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다’(빈 대지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다). 기업인들이 봄을 기다리는 건 하늘에 별을 붙이고 돌아오는 여인을 기다리는 바나 다름없이 空疎(공소)한 경우가 되곤 했다.
그런데 봄이 또 왔다. 仁王山(인왕산)의 잔설을 밟으며 계절의 은혜를 새삼 되뇐다. 봄볕이 하루하루 짙어져 간다.
天地(천지)가 새봄이다. 이제부터 기업의 壇下(단하)에서 봄을 만끽하고 싶다. 經濟壇上(경제단상)에서 호기 있게 일하는 연출자들의 화려한 무대를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心情(심정)의 여유를 가지고 이 봄을 즐기리라.
봄눈이 녹은 들길과 산길을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위대한 자연을 재음미하고 인정의 모닥불을 피우리라. 天地(천지)의 창조주 앞에 경건한 찬미를 바치리라.
인생은 여러 가지이다. 온화한 삶과 질풍처럼 달리는 삶이 있으나 그 窮極(궁극)의 염원은 한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平和(평화)와 自足(자족)을 느끼는 마음이다.
봄이 온다. 마음 깊이 기다려지는 봄이 아주 가까이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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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말
<정몽준 이사장>
건강하신 모습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바쁘신 가운데 많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 아버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아산, 그 새로운 울림 : 미래를 위한 성찰’이라는 제목의 총서를
출간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산 그 새로운 울림 : 미래를 위한 성찰’은 제목이 참 좋다는 느낌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분들께서 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최고의 학자분들께서 이 작업에 동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짧게 말씀드리는 것은 결국 아버님에 대한 저의 기억인데요.
제가 아버님 사진을 몇 장 준비해 봤습니다. 사진 보면서 간략히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931년 지금은 북한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에 송전보통학교 졸업식 사진인데요, 앞에 앉아 계신 네 분의 선생님이 상당히 근엄하신 표정입니다. 전부 양복에 조끼가지 입으셨고 나비넥타이를 매신 분도 있습니다.
학생 수는 전부 한 20명 되는 것 같은데 저희 아버님이 뒷줄 가운데에 앉아 계십니다.
요즘 초등학교 선생님이 양복에 조끼 입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근엄하신 분들도 많아지면 우리나라도 다시
좋은 시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아버님 형제는 6형제에 고모님이 한 분 계셔서 7남매인데, 두 분이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아버님은 인민복을 입으셨고, 고모님은 그냥 하얀 옷을 입으셨는데, 이 사진은 아버님과 고모님이 그 당시에 어려운 환경에 살면서도 아주 꿋꿋한 기상을 보여주시고 있는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님의 젊었을 때에 사진 중 이 사진을 제일 좋아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오셔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실 때 직원분들 하고 금강산에 가서 찍은 사진인데요. 저는 이 사진을 보면 ‘꼭 서부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아버님은 막노동을 하셔서 근육이 잘 발달하셨고 직원분들 역시 몸이 좋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고향이 금강산과 가까워서 금강산 안내원을 하신 적이 있다고 말씀을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다음 사진은 어머님하고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인데 저 당시도 살림이 굉장히 어려웠을 때입니다. 아버님 양복을 보면 단추가 2개, 더블버튼이라고 하는데 모양을 내셨고 수건도 꽂으셨습니다.
아버님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어머님 이야기를 한 번도 안한 것 같습니다.
어머님은 같은 강원도에서 아버님을 만나서 16살 때 중매결혼을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서울에서 노동을 하신다니까, 서울이면 강원도보다 좋겠지 하고 오셨는데, 문자 그대로 신설동 언덕위의 단칸방에서 생활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아침에 막노동 현장에 나가시기 전에 물통에다 물을 2개 담아서 어머님 방 앞에 가져다 놓으면, 어머님은 집안에 살림도구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밥도 하고 빨래도 하셨는데 그게 너무 창피해서 우셨다는 말씀을 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이 사진도 많이 보셨을 텐데 저희 가족들이 6.25전쟁이 나서 전부 부산에 피난을 가서 살다가 1953년 6.25전쟁이 끝나면서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가운데 할머니가 보이고, 아버님은 저 뒤편에 계시며 여섯째 삼촌 사진, 그 다음에 몽구형 사진, 그 다음에 어머님이 저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아버님 형제가 6형제로, 다섯째 삼촌께서 서울법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이게 대학원 졸업사진입니다.
삼촌께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서 일하면서 국회 출입기자로 일을 하셨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2년 후에는 독일에 가서 전공을 바꿔서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거기서 첼로를 공부하고 있는 숙모님을 만나 결혼을 하셨습니다.
숙모님께서는 공부를 마쳤으니 먼저 서울에 가라는 삼촌의 말씀대로 서울로 오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장충동 집에 있는데 그 당시에는 전화가 없기 때문에 몇 달에 한 번씩 전보가 옵니다. 하루는 삼촌께서 병원에 가서 작은 수술을 했는데 별일 없다고 전보가 왔습니다.
그날은 집안이 장을 담그는 날이어서 숙모님들이 다 모이셨는데 저녁때 집에 갔더니 숙모님들하고 어머님하고 다 울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전보가 한 장 더 왔는데 그 전보에 삼촌께서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왔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의료사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저희 아버님은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셨는데 삼촌께서는 좋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독일에 가서 박사 공부까지 하셨기에 아버님은 다섯째 삼촌에 대한 기대, 자부심이 아주 크셨습니다.
그런 삼촌이 돌아가셨으니 아버님의 충격은 매우 크셨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 사진은 어렸을 적 장충동에 살았을 때 뚝섬에 가서 찍은 사진인데요. 아버님께서는 막노동을 하셔서 근육형의 몸매였고, 키가 제일 작은 사람이 저입니다.
가족 모두가 검은색 수영복을 입고 있는데 사실 저는 원래 사진에는 수영복을 입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원본으로 공개하기가 그래서 제가 사진에다가 수영복을 하나 입혀 놓았습니다.
잘 보시면 모두가 똑같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어머님께서 수영복 재료를 사 오셔서 직접 잘라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장충동 집에 참 좋은 꽃이 있어서 저희 가족들은 꽃이 필 때마다 꽃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이 그 모습입니다.
어렸을 때 저하고 몽헌이형 사진입니다.
다음은 아버님과 어머님이 속리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아버님이 정초에 붓글씨를 쓰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이 오늘 보여드릴 마지막 사진인데요. 제가 워싱턴 존스홉킨스대학에 가서 2년 동안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하루는 아버님께서 워싱턴에 오셨습니다.
제가“무엇을 하고 싶으시냐?”고 여쭤보니 당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으면 참 좋겠다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미국 대통령을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가 당시 레이건 대통령 비서실장인 베이커 비서실장, 안보보좌관이 리차드 알렌 두 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오셨는데 존경하는 대통령을 좀 뵈었으면 한다고요.
다행히 이분들이 흔쾌히 수락을 해주셨고, 당시의 만남에서 제가 짧은 영어실력으로 열심히 통역을 했습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는데, 아버님께서는 본인이 북한에서 온 사람이며, 여러 가지 남북관계 이야기를 같이 하니까 레이건 대통령께서 아주 즐거워하셨던 모습입니다. 저 사진에서도 그때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은 설명은 이렇게 마치며, 간략히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미국의 <타임>지는 아버님은 ‘많은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즉 영어로“Chung Ju Yung proved a lot of people wrong”’이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타임>의 지적처럼 아버님은 많은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하면 더욱 열심히 하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들 하는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착공당시에 많은 반대 속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적은 비용으로 공사를 할 수가 없고 무엇보다 당시 우리형편에는 고속도로가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아버님은 그보다 3년 앞선 1965년에 태국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경험을 쌓으셨습니다.
월드뱅크에서 발주한 공사였는데 적자를 많이 봤다고 하더군요.
고속도로도 없는 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가서 고속도로 건설을 해봤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한 정확한 비용과 기간을 계산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967년에는 소양강댐 공사를 했는데 대일청구권 자금이 투입된 공사였기에 당시 설계를 일본인이 했으며 시멘트 댐으로 설계를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일본이 설계해 놓은 콘크리트댐 대신 소양강에 많이 있는 모래와 자갈을 이용하는 사력댐을 건설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일본 사람들이 당신은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사람이 이렇게 커다란 댐의 안전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느냐고 모욕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시멘트가 굉장히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 만약 소양강댐을 시멘트로 지었으면 우리나라에 시멘트가 더욱 부족한 현상이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을 하셨고, 아버님은 결국 사력댐, 즉 모래자갈댐으로 소양강댐 공사에 성공하셨습니다.
미국의 포드사와 결별하고 독립된 자동차 회사를 만든다고 하셨을 때, 기술적 그리고 자본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현대중공업을 만드실 때는 혼자서 새벽에 자동차를 운전하시다가 겨울바다에 빠졌다가 살아 나오시기도 하셨습니다.
공장을 지으면서 공장의 제품을 만든다는 것, 조선소를 지으면서 초대형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한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아주 유능한 기술자들을 전부 모아놓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 아버님께서 바다에 빠졌다가 돌아오셔서 한 일주일 후에 가족들에게 해주신 말씀이, 자동차를 운전하다 방파제 아래 바다에 빠졌는데 ‘만약에 내가 여기서 살아서 나가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무모하게 사업을 진행하다가 잘 안 되니까 자살을 했다고 말 할 것 같아서 꼭 살아서 나가야지 다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다른 이야기는 다 들어도 그 이야기는 들으면 절대로 안 되었기에 꼭 살아서 나가야지라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래서 차문을 열고 방파제의 한 부분을 겨우 잡고 있었는데 한참 있다가 경비원이 한 명 와서 “그 아래 누구 있냐?”고 물어서, “누구긴 누구야, 사람이지 빨리 건져라”라고 말씀하셨고, 결국 바다에서 나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1971년 알래스카에 가서 협곡에 다리를 건설했던 일, 1972년 파푸아뉴기니아라고 지금도 가기가 힘든 나라지만, 이곳에 지하수력발전소를 건설했던 일,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일, 이런 일들이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살아계셨을 때 많은 일을 하셨지만 지금 아버님을 생각하면 그래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늘은 그 아쉬운 부분을 채워주는 좋은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평소 스스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셨기 때문에 아마도 당신에 대한 학술총서가 나온다고 하면 대단히 쑥스러워하셨을 것입니다.
저 역시 아버님에 관한 학술총서를 내는 것이 과연 아버님 뜻에 맞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는 아버님은 당신께 특별한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평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 받으신 정규 교육은 서당공부 3년, 초등학교 교육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가출하신 다음에는 건설현장 노동자, 인천부두 노동자로 시작해서 평생 일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유한 노동자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한 노력을 쏟아 부으며 이 평등하게 주어진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등한 자본금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는 의미였습니다.
비록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셨지만 아버님께서는 삶의 철학과 신념을 살아계시는 동안 열심히 생각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당에서 배우신 사서삼경을 즐겨 말씀하시면서 공자와 맹자의 사상 속에는 서구의 합리적 개인주의의 사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맹자가 그래서, 맹자를 더욱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울산의 현대중공업 공장에는 아버님이 지으신 글씨가 써있습니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고,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글을 음미해보면 아버님은 서구식의 개인주의와 우리 동양식의 공동체 의식을 조화시키려고 애쓰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고민했던 두 번째 이유는, 그동안 아버님에 대한 수많은 책이 나왔습니다만 아버님이 직접 쓰신 두 권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이 땅에 태어나서>보다 아버님의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는 책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진홍 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께서 아버님의 일생에 대한 학술적 고찰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셔서 저도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삶과 철학, 업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격동기 우리나라의 경제, 사회,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지속적인 연구를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교수님들의 노력이 담긴 글들을 받아보니 아버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버님의 성품을 가장 잘 표현하는 글귀는 ‘담담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께서는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한 마음은 당신을 굳세고, 바르고 총명하게 만들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