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몰아야지 수레를 몰면 어쩌나
청주가 자랑하는 직지심체요절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남악회향 선사는 중국 형주 옥천사에서 출가했다.
스님은 혜안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육조 혜능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남악회향 선사가 계시는 전법원에 도일 마조 스님이 매일 좌선만 하고 있었다.
"거기서 무엇하고 있는가?" "좌선합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 하려고?" "부처가 되려고 좌선하지요."
이튿날 회향 스님이 벽돌 하나를 집어 절 앞 바위에서 득득 갈았다.
이것을 본 마조 스님이 물었다.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 하렵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아니,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고요?"
"그래, 앉아만 있으면 부처가 될 줄 아는가?'
이 말에 마조 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죄선이라는 타성에 빠져 있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초조했다. "스님,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소 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수레를 몰아야 하는가,
소를 몰아야 하는가" 선은 앉거나 눕는 데 있지 않고, 부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야! 집착이 없고 취하고 버릴 게 없는 것이
진짜 선이지!" 이 말을 듣고 마조 스님은 크게 깨쳤다.
선종 사서史書인 〈오등회원五燈會元〉 17권에 사심 선사(11세기) 행적이
실려 있다. 그는 여러 곳을 행각하다가 황룡산 회당조심晦堂祖心 선사를
찾아가, 자기가 아는 지식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말이 많은 젊은이를 보고 스승은 다음과 같이 타이른다.
"아무리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 한들 어찌 배가 부를 수 있겠는가."
개는 돌멩이를 던지면 돌멩이를 향해 짖으며 쫓아간다.
하지만 사자는 다르다. 사자는 돌멩이를 던진 사람에게 달려든다.
무엇을 쫓을 것인가. 절집에는 이와 같은 비유가 많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만 쳐다보는가?" 하는 말도
그런 말이고 '소 등에 타고 소를 찾는다.'는 말이나 속가 속담처럼 '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라는 말이 다 마찬가지다.
본질을 바로 꿰둟지 못하면 평생 국그릇 언저리만 돌뿐 국 맛을 알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절에 오래 다닌 사람 가운데 십 년이 되어도 일 년 된 듯한
불자들이 많다. 그것은 흔히 하는 말처럼 불교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불교는 손가락 뒤집듯이 아주 쉬운 종교다.
부처님은 오늘 현실을 사는 이야기가 아닌 말씀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가. 구원이 없다면 종교는 맑은 날 우산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갖가지 모순과 갈등을 겪는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바같 부조리와 갈등뿐 아니라.
자기 안에서도 적잖은 모순을 지닌다.
자유롭지 못한 안팎 조건들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우리 간절한 소망이다.
구원은 '자유 길'이며 '목숨이 싹트는 현상'이다.
자유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탕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자유를 살리는 길이다.
불교에서는 구원은 구제, 제도 또는 해탈, 열반이다.
여기에는 '건져준다'는 뜻과 '벗어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건져줌은 내가 남에게 손길을 내미는 일이고, 벗어남은 내가 속박에서
벗어남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자유에 이르는 길은 '건짐과 벗어남'에 있다.
우리는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경지를 열반이라 부른다.
니르바나nivana 원뜻은 '부어서 끄다'인데 지혜로써 불꽃을
꺼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자기 갈등과 모순에서 벗어나는 일이 우선 과제다.
괴로운 원인이 집착에 있다고 생각, 그 집착에서 벗어나 눈, 지혜 눈을 뜬다.
깨침은 눈뜸이다. 부처님을 '눈이 있는 이여' 또는 '눈을 뜬 이여'하고 한 것도
바로 눈뜸을 통한 해탈에 의미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벗어남'이다.
지금 우리는 소를 몰지 않고 수레만 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숨결 변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