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안주
술을 즐기는 자들은 각자 취향 따라 좋아하는 안주가 있다.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지기와 마주 앉으면 상대를 존중해 안주로 뭘 들 것인지 물어봄이 예의다. 흔히 말하는 ‘가성비’도 생각해야 한다. 빈 술병이 여러 개 세워져도 안주가 술값보다 더 할 때가 허다하다. 이제 세월 따라 주량도 점차 줄고 술자리 횟수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기름진 안주는 피해야 함은 당연하다.
나는 소주에는 생선회보다 주꾸미나 호래기가 잘 어울렸다. 주꾸미는 아무래도 봄이 제철인 듯했다. 살짝 데친 주꾸미 알이 서렸고 먹통도 먹음직하다. 요즘은 수입 냉동 주꾸미도 있나 보다. 호래기는 꼴뚜기의 경상방언이다. 주꾸미와 마찬가지로 서남해안 포구에서 흔히 본다. 겨울철이면 마산 어시장 호래기가 싱싱하다. 날로도 먹고 살짝 데쳐 먹는데 소주 안주로 일품이다.
그럼 막걸리 안주로는 뭐가 잘 어울릴까? 난 두부와 묵을 꼽으련다.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빚은 두부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하다. 일 년에 몇 차례 고향 집을 찾으면 칠순 형수님 덕에 그 맛을 보게 된다. 묵은 메밀과 도토리로 빚는데 녹두로 빚는 청포묵은 드물어도 메밀묵과 도토리묵은 가끔 먹을 수 있다. 어느 해 가을 나는 산에서 도토리를 가득 주워 시골로 보낸 바도 있다.
막걸리 안주에는 전통 방식으로 빚은 두부와 묵이 제격이지 틀에서 찍어낸 것은 맛이 뒤지고 수저가 가길 머뭇거린다. 두부와 묵 다음 막걸리 안주는 부침개다. 통칭 파전으로 불린다만 순수 파전은 적다. 통통한 쪽파를 가려 홍합이나 새우를 넣어 전으로 부친 해물파전이다. 파전을 대신할 수 있는 게 부추전이다. 부추에 홍고추나 청양고추를 잘라 넣어 맵싸하게 부쳐낸다.
파전과 부추전 만큼 곡차 안주에 어울리는 것으로 명태전이 있다. 생태야 귀하신 몸이라 구경조차 쉽지 않다. 대부분 노르웨이나 러시아산 냉동 명태들이다. 동태를 해동시켜 등짝을 뒤집어 통째로 부친 전이다. 대가리는 대가리대로 전을 부쳐내는 가게도 봤다. 오일장서도 명태전을 파는 간이주점이 있었다. 생선뼈를 발라내면서 안주로 집어 곡차 잔을 드는 낙도 즐길 만하다.
앞서 언급한 맑은 술 안주인 주꾸미나 호래기는 창원에선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건너편 무학상가로 가면 맛 볼 수 있다. 가게 문은 아침부터 한낮은 닫혀 있고 해거름이 되어야 열린다. 해가 설핏 기우는 즈음 저문 강 삽을 씻은 소시민이 주탁에 마주 앉아 맑은 술을 잔에 채우고 비운다. 엄습해오는 피로에 쓴 술잔을 달디 달게 바꾸는 마법과 같은 안주가 주꾸미고 호래기다.
전통 방식으로 빚은 두부나 묵을 파는 식당으론 북면 온천장 ‘산미’다. 주인 아낙 친정이 남지 강변이라 들었다. 지금이야 4대강 공사로 사라졌지만 모래밭 땅콩이 많이 나던 곳이다. 그 땅콩으로 두부를 빚어 특허 등록을 받았다. 콩국수를 전문으로 파는 식당이지만 나는 두부무침과 묵무침으로 곡차를 가끔 들었다. 무침은 별 게 아니고 상추나 유채 겉절이로 버무려낸 것이다.
명태전이나 부추전으로 막걸리를 들 수 있는 주막은 더러 있다. 3과 8일은 진해 경화 장날이다. 그 장터에 ‘박장대소’가 있다. 중년을 넘어선 주인 내외는 지역 사립 사범대를 나온 식자층이다. 젊은 날 한때 시골 중학교 기간제 교사도 지낸 적 있다. 국수도 말아 팔지만 명태전이나 부추전으로 막걸리를 들면 세상에서 부러운 것 없다. 옆자리 손님들은 모두 아재고 성님이다.
주증 머무는 거제에서 퇴근 후에도 여유 시간이 많다. 그럼에도 불쑥 찾아가도 반갑게 맞아줄 주점이 없다. 마음 터놓고 마주 앉을 만한 지기가 있을 리 없다. 학생들과 젊은 동료가 있던 교정을 빠져나와 와실로 들면 적막강산이다. 면벽한 수도승이나 마찬가지다. 서안을 겸한 밥상 위에 편의점서 마련한 생탁을 올려 잔을 채우고 비울 뿐이다. 고작 꽈리고추멸치볶음이 안주다. 19.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