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웃는다
이미영
소년은 책상 머리맡에서 웃고 있다. 모서리를 궁굴린 네모난 얼굴에 오동통한 뺨, 두둑한 눈두덩이를 하고 입 꼬리가 옴폭 패이도록 미소를 짓는다.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광대가 반질거리고 내리뜬 실눈에는 장난기가 반짝인다. 오늘은 또 무엇을 하고 놀까 궁리를 하는 중이 틀림없다. 거친 돌 위에 새겨진 조각상이지만 영락없이 보송한 소년이다. 이 사진을 보자마자 서너 살 무렵의 아들이 떠올라 담뿍 정이 갔다.
어린 아들은 스티커 사진을 찍으려고 포토박스에 들어가서 혼자 이것저것 마구 누르다가 얼떨결에 함박웃음 사진이 찍혔다. 제 사진이 신기한지 들고 오리기 놀이를 한다. 삐뚤빼뚤 다 잘려나가고 웃는 얼굴만 동그랗게 남아있다. 두두룩한 눈꺼풀을 내리깔고 오만가지 버튼을 누르는 재미에 푹 빠진 순간이 포착되었다. 해맑은 미소가 신나는 그 날을 떠올리게 한다.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저절로 웃음이 난다.
소년을 만나러갔다. 잘생긴 맞선용 사진을 보고 기대에 차서 나간 선 자리에 딴 얼굴을 한 사람이 앉아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실재로 마주한 그 아이는 웃지 않는다. 표정을 살필 수 없는 형편에 처해버렸다. 햇살 속에서 명랑하던 사진 속 조각상은 지붕만 얹은 보호각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다. 얼굴로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비바람에 의한 훼손을 막으려고 지붕아래 들였다는데 정답던 미소는 사라지고 육중한 돌덩이가 버티고 있다. 사진보다 못한 실물을 만날 때도 있다. 예술작품은 경우가 달라서 진품이 주는 감동은 늘 예상보다 깊었다. 햇빛과 어우러진 천진무구한 미소가 오간 데 없는 조각상을 보고 나서 부질없이 보호각 주위만 빙글빙글 돌았다.
소년의 이름은 경주배동 석조삼존불상의 본존불이다. 양 옆으로 그를 닮은 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친구처럼 서있다. 7세기 중엽 경주의 남산 기슭에서 어느 이름 모를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키가 9척이나 되고 체구는 우람하지만 신체비율이 사등신이라서 애기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중국 수대(隋代) 불상의 영향을 받은 양식이라고 한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에 의지해 선진문물을 수입하던 처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대 중국 외교를 펼친 이후에 나타난 석조 상으로 우리나라 초기 조각사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외교적 역량뿐 만아니라 국력도 커가던 신라의 상황처럼 활달한 기상이 느껴진다고 설명한다.
이 삼존불의 형님 격이라는 수나라 불상은 어린아이의 체구에 귀염성 있는 자태이지만 열반을 구하는 숙연함이 어리비친다. 배동 본존불에게 번뇌의 고리, 해탈의 염원은 딴 세상 이야기 같다. 신라의 조각가는 무슨 생각으로 미소가 탐스러운 어린아이를 부처로 모셨을까. 중국불상을 처음으로 배워 깎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낯선 나라의 아이보다는 자신의 아들처럼 조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린 자식이 빙그레 하기만 해도 만 가지 시름이 사라지듯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도 천진스레 웃는 부처님을 뵙고 형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제 막 부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신라석공의 마음도 아이 같아서 티 없는 어린이를 형상화했으리라. 수나라의 불상은 물이 흐르듯 신라소년을 닮은 부처가 되어갔다.
소년의 사진을 보자마자 가까이에 붙여 놓으니 실없이 웃게 되었다. 내 얼굴에도 미소가 새겨지기를 바랐다. 불심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소년부처님처럼 웃게 된다면 해탈의 끝자락에라도 닿을 것이라는 생각이 싹텄다.
지붕아래 모셔진 삼존불상 앞으로 촛불을 밝힌 제대가 놓여있다. 바로 옆 절집에 다녀가는 불자들과 경주 남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오며가며 합장을 한다. 예물을 올리고 불전을 놓고 기도를 드리다 간다. 어여쁜 동자인줄 알았는데 어엿한 부처님이 되어 중생들의 염원을 듣고 있다. 마당의 소년 시절에는 웃었지만 전각의 부처가 되고부터는 번뇌의 고리가 이어진다. 텅 빈 마음이었을 때에는 환하게 빛났지만 인생의 고단함을 듣다보니 시름이 깊어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민욱이가 풀이 죽어 인사를 한다. 마스크로 가렸지만 시무룩함은 금방 드러난다. 아빠보다 일찍 학교에 달려가고 땀에 전 태권도복을 입고 깡충거리던 녀석이 고개를 숙인 채 발로 바닥을 비빈다. “심심하지?”, “학교가고 싶어요.” 반짝이는 눈에 방글거리던 입 대신 검은 마스크에 축 처진 어깨가 애처롭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욕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란다. 자연의 무분별한 훼손과 야생 동물을 먹는 관습이 화를 불러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보고이다. 태권소년은 뛰어 놀고 싶다. 젖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과자를 물고 학교에서 집으로 오르내리고 싶다. 아랫집 아줌마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어른이라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이라도 걸어 볼 밖에.
배동 소년 같은 민욱이가 태권도복에 빨간 띠를 자랑스럽게 매고 아파트 마당을 활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7시 50분 쯤 친구를 기다리며 등굣길을 어슬렁거리는 파란 가방이 보고 싶다. 우리나라 초기 조각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불상보다 석공의 마음처럼 맑게 웃는 신라소년이 그립다. 소년은 웃어야 한다.
첫댓글 그리운 신라 소년
만나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늘 욱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