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17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예성강 푸른 물에
고려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던 강이 예성강이다. 『대명일통지』에 “예성강은 개성부의 남쪽에 있어 바다와 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성강은 황해북도 수안군 성교리에서 시작하는 강으로, 황해북도의 수안군ㆍ곡산군ㆍ신계군ㆍ평산군ㆍ금천군과 황해남도의 평천군을 흘러 배천군과 개성시 개풍군 일대를 지나서 서해의 강화만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187.4킬로미터에 유역면적 4202.3제곱킬로미터이며, 유역 평균 폭은 23.2킬로미터다.
이 강은 신계ㆍ곡산의 현무암 지대를 깎으며 흐르다가 지석천ㆍ신계천ㆍ구연천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지천을 받아들이면서 지난다. 이 강의 하구에 벽란도가 있다. 지금은 개풍군 삼성리의 자그마한 강변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수도인 송도의 관문이었고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던 곳이다. 출입하던 외국 무역선은 송나라 상선이 가장 많았고, 일본 상인과 동남아 여러 나라,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찾아왔으며, 벽란도 근처에 외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한 벽란정(碧瀾亭)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사실을 노래한 「예성강곡」이 남아 있는데, 『고려사』「악지」를 읽어보자.
예성강 노래 2편이 있다. 옛날에 당나라 상인 하두강이 바둑을 잘 두었다. 그가 한번은 예성강에 이르러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서 그 남편과 바둑 내기를 하여 여인을 취하려고 하였다. 그는 그녀의 남편과 바둑을 두되 일부러 지고는 물건을 약속한 양보다 갑절이나 실어다 주었다. 이에 재미를 붙인 그녀의 남편은 더 많은 물건을 갖고 싶어 자신의 처를 두고 바둑을 두었다. 하두강은 단판에 이겨 여자를 배에 싣고 가버렸다. 그 남편은 너무도 원통하여 이런 노래를 지었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그 부인이 배에 실려 갈 때 몸단속을 심히 굳게 하여서 하두강은 그녀를 간음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빙빙 돌면서 나아가지 않으므로 점을 치니 ‘절개 있는 부인에게 감동된 바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그 부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배는 반드시 깨질 것’이라고 하였다. 뱃사람들은 그만 겁을 먹고 하두강에게 권고하여 부인을 돌려보냈다. 부인 역시 노래를 지었으니 그 후편이 바로 이것이다.
노래의 가사는 전하지 않는데, 추정하기로 남편의 노래는 회한을 담았을 것이고, 아마도 남편과 아내의 합작품이었을 것이다. 한편 권근은 「기(記)」에서 벽란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송도 서북쪽 여러 골짜기 물이 모여 긴 강이 되어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그 나루터를 벽란이라 한다. 국도에 가까우므로 건너다니는 사람이 많고, 산이 가까우므로 강류가 빠르며, 바다에 가까우므로 조수가 세게 밀려서 건너는 이들이 매우 괴롭게 여긴다. 나라에서 관원을 두어 맡게 하였는데, 강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옛날에는 초루(草樓)가 있었으니, 나루터 일을 맡아보는 관원이 거처하는 곳이다. 강은 바다와 하늘에 잇닿았고 산은 들판에 가로놓여 구불구불 아득히 멀어 끝이 없으며, 형세의 절승한 것이 제일이라고 할 만하다.
경기도 개풍군 벽란도는 고려시대에 예성강 하구의 무역항이자 요충지였다. 고려는 일찍부터 중국과 통교하여 교역하였다. 934년(태조 17) 7월에는 고려 상선이 후당(後唐)의 등주(登州)에 가서 교역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고려의 배가 청주(靑州)에서 무역을 하였으며, 958년(광종 9)에는 후주(後周)에서 비단 수천 필로 구리를 무역해왔다는 기록도 있다.
예성강 철교황해남도 배천군과 개성시 개풍군 사이를 흘러 강화만으로 들어가는 예성강. 강어귀에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무역항이었던 벽란도가 있다.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서해안에 위치한 벽란도는 원래 예성항이었으나, 그곳에 있던 벽란정의 이름을 따서 벽란도라고 불렸다. 고려 전기의 대외무역은 송(宋)을 비롯하여 요ㆍ금ㆍ일본 등 주변 나라와 행하였으며 멀리 아라비아의 대식국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의 대상이 광범위하였다. 각국의 해상 선단이 개경의 문호인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중심으로 몰려옴으로써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창하였다. 특히 송과의 무역은 매우 중요했는데, 이때 항로는 남북항로가 주된 간선이었다. 북선항로는 산동과 등주 방면에서 동북 직선로에 의해 대동강 어귀를 거쳐 옹진항 또는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고, 남선항로는 명주(明州)에서 동북으로 흑산도에 이르고 다시 동북행하여 서해안 도서를 거쳐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는데, 문종 때까지는 주로 북선항로가, 이후에는 주로 남선항로가 발달하였다.
상행위뿐 아니라 우벽란정에서는 조서(詔書)를 안치하고, 좌벽란정에서는 사신이 도착하거나 떠나기 전에 대접하는 일을 하였다. 벽란도에서 개경까지 동서로 도로를 놓는 등 외교 면에서도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벽란도는 고려 초부터 말까지 사용된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국제무역항이다. 고려 전기의 대외무역은 송나라를 비롯해 요나라, 금나라, 일본 등 주변 나라들과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벽란도는 비교적 수심이 깊어 배가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좋은 하항을 갖추고 있었다. 각국의 해상 선단이 개경의 문호인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중심으로 몰려와서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