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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사실 당시 상황에서 정몽주를 쳐야 한다는 점에선 이성계나 이방원의 의견은 차이가 없었지만, 제거 방법에 있어선 의견이 달랐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제거하더라도 조정을 통하여 명분을 얻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방원은 정몽주를 일단 죽여야만 조정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상황을 헤아려보자면 조정엔 이성계가 마땅히 움직일 만한 인물이 없었고, 공양왕 또한 정몽주를 편들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방원의 판단이 더 주효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꼭 정몽주를 죽이기까지 했어야만 했을까? 수하들로 하여금 사로잡게 하고, 정몽주를 살려둔 채 조정을 장악할 순 없었던 것일까? 어차피 고려의 무장 세력은 모두 이성계 휘하에 있었다. 따라서 군대를 움직인다면 조정을 장악하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정몽주를 무참히 살해한 이방원의 행동은 그의 권력투쟁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적이라고 판단되면 그 대상이 누구든 가차 없이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 그것만이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2장 [아비의 역적이 되어 용상을 차지한 이방원]에서
그들이 나간 다음에 세조는 이렇게 말했다.
“전일에 금성대군의 집 정자를 상왕께 바치려고 할 때에 성삼문이 나에게 이르기를 ‘상왕께서 이곳에 왕래하게 되신다면 참소하고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기에 내가 경박하다고 여기었더니 지금 과연 이와 같구나.”
실록에 기록된 세조의 이 말은 성삼문에 대해 이미 의심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성삼문이 상왕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모든 일이 세조의 의중에 따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육신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김질과 정창손의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고변에 근거하여 성삼문을 고문한 결과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왔으며, 그들을 다시 고문한 결과 상왕 단종이 역모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거꾸로 해석해보면 상왕이 역모의 중심에 있어야 하고, 그 역모 세력 중에 핵심은 성삼문과 단종의 외숙부 권자신이어야 하며, 역모와 관련된 인물들은 세조의 눈 밖에 난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단종을 상왕에서 쫓아내고, 동시에 단종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각본에 의해 모든 일들이 순차적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세조와 그 측근들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조작된 흔적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6장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에서
이인좌의 난은 단순히 이인좌 한 사람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역 사건이 아니었다. 영조의 즉위와 노론 세력에 반대하는 소론의 강경 세력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서울, 평안도의 세력들을 규합하여 동시다발적으로 군대를 일으킴으로써 영조와 노론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계획 아래 이뤄진 것이었다. 만약 영조가 1727년에 정미환국을 통해 소론을 중용하지 않았다면 소론 세력 전체가 이 반란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소론이 조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이 사건이 일어난 덕분에 한층 작은 규모의 반란이 일어났고, 영조는 왕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소론에 의해 소론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같은 당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들의 입지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영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탕평책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왕권을 크게 안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2장 [경종의 복수를 위해 반역한 이인좌와 소론 강경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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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시대를 부정하고 다른 시대를 꿈꾸었던 조선 반역자들의 연대기!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가 파헤친 반역의 진실!
이방원에게 칼을 겨눈 이성계의 복위 전쟁
조선사상 최초로 반역의 깃발을 들고 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다. 태종 이방원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석과 이방번을 죽이고 용상을 빼앗다시피 차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간에 정종이 끼어 있었지만 이방원이 잠시 세워둔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1402년 11월 5일, 안변 부사 조사의가 군사를 일으켜 이성계를 복위시키고 이방석과 그의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의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했다. 안변은 함흥과 함께 함경도의 요충지로 이성계의 근거지였으며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씨의 족속이었다. 겉으로는 난을 주도한 인물이 조사의인 듯 보였지만 조사의를 움직이는 것은 이성계였다. 조사의가 군대를 일으킬 당시 이성계는 함흥에 머물렀다. 함흥에 머물기 전에는 안변에 머물렀는데, 조사의를 안변 부사로 삼게 한 것은 자신의 복위 전쟁을 위한 포석이었다. 이성계와 이방원은 비록 부자지간이었지만 이성계는 아들 이방석과 이방번을 죽이고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간 이방원을 용서할 수 없었다. 조사의의 반군이 함경도를 장악하고 동북면에서 위세를 떨치자 이성계는 함흥에서 서북면의 맹주로 향했다. 동북면의 민심을 얻었다고 판단하고 반군이 서북면까지 장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11월 27일 조사의의 반군은 평안남도 안주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런데 반군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반군은 청천강 인근에 주둔해 있었는데, 그 병력 속에 포로병인 김천우란 자가 있었다. 반군 병사들이 그에게 진압군의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는데, 김천우가 약 4만 명은 될 것인데, 그대들이 어떻게 당할 수 있느냐고 하자, 반군 내부에 이탈자가 속출했다. 조화란 자가 군영에서 달아나기 위해 군막에 불을 지르자, 반군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사의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안변으로 돌아갔지만 그때 휘하 군사는 기껏 기병 50여 기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도안무사 김영렬이 군대를 이끌고서 조사의를 포위한 후 사로잡았다. 조사의를 앞세워 다시 한번 용상에 오르리라 다짐했던 이성계는 패배 소식을 듣고 맹주에서 평양으로 옮겨갔고, 조사의가 도성으로 압송된 다음 날 도성으로 돌아왔다. 조사의의 난 이후로 이성계는 더 이상 이방원과 맞서지 않았다. 결국 태종의 왕위 계승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역적으로 몰려 반역한 이괄, 경종의 복수를 꿈꾼 이인좌
전쟁을 일으킨 반역자들 중 이괄은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역적으로 몰려 어쩔 수 없이 반역을 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이괄은 평안 병사 겸 부원수로 영변에 있었다. 《인조실록》에서는 이괄이 인조반정에 대한 논공행상 때문에 난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결과론적 시각에 불과하다. 당시 후금과 조선 사이는 준전시 상황이었다. 때문에 인조는 평안 병사로 누굴 선택할지 몹시 고민했다. 인조는 이서와 이괄, 둘 중 한 사람을 택하고자 했는데, 도원수 장만이 이괄을 천거하여 부원수로 삼았다. 당시 평안 병사는 조선의 최전선을 책임진 인물이었고, 인조가 이괄을 평안 병사로 삼은 것은 그만큼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조의 마음을 알았기에 이괄 역시 영변에 도착하여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1624년 1월 17일 문회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기자헌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언급된 인물들은 북인임에도 인목대비의 폐출을 반대하거나 인조반정을 도운 인물이었다. 서인들이 북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역모 고변을 했던 것이다. 서인들은 이괄을 부원수에서 해임하고 중앙으로 소환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괄을 소환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한명련을 소환하여 국문할 것을 지시했다. 섣불리 이괄을 건드렸다간 정말 역심을 품고 도성으로 밀고 내려올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괄은 결국 자신을 겨냥한 조치임을 알았다. 반정 때부터 대립했던 김류 등이 일을 꾸몄을 것으로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역적으로 몰려 죽느니 차라리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 임금을 바꾸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괄은 즉시 군대를 보내 압송되던 한명련을 구출하고 아들 이전을 잡으러 온 관리들을 죽였다. 이때가 1월 21일로 이괄의 난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kaAa-wOVNE
선왕의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킨 자도 있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특히 경종의 충신이었던 소론 강경파들은 그것을 사실로 믿었는데,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장악한 이인좌의 군대는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밤낮으로 곡을 했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은 역사적으로 작은 규모의 변란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사실은 전국적인 거병이었다. 그 이유는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믿었던 전국 각지의 소론 강경파들이 충정도,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서울, 평안도의 세력을 규합하여 동시다발적으로 군대를 일으키려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인좌의 난 당시 전라도에서는 태인 현감 박필현이 군사를 일으켰고 경상도에서는 정희량이 군사를 일으켜 거창을 장악했다. 당시 영조는 정미환국을 통해 소론 온건파를 중용한 상황이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소론 세력 전체가 반란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소론이 조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사건이 일어난 덕분에 한층 작은 규모의 반란이 일어났고, 영조는 왕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국문도 없이 처형당한 허균 사건의 진실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호민론], [유재론] 등을 통해 혁명과 평등을 외쳤던 진보적 사상가 허균. 그러나 한편으로 허균은 권신 이이첨에게 아첨하고 인목대비를 폐모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음흉한 정치가였다. 1617년 1월 궁궐 내약방 동쪽 뜰에서 흉서가 발견된다. 그 흉서의 내용 중에는 광해군이 ‘서자로 외람되이 왕위에 올랐으며, 아비를 죽이고 형을 죽였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같은 내용의 격문이 화살에 매달린 채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던 경운궁에도 날아들었다. 격문의 내용 중에는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과 영의정 기자헌, 판의금부사 박승종을 반역의 동조자로 끌어들인다는 말이 있었다. 흉서 사건을 꾸민 세력은 이이첨과 대북파였고, 이 계략을 제시한 장본인은 허균이었을 것이다.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폐출하고 동시에 남아 있던 서인들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런데 기자헌의 아들이자 북인인 기준격에 의해 허균이 흉서를 작성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자, 대북 세력은 그 화가 대북당 전체에 미칠 것을 염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이이첨과 허균이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처음에 이이첨은 광해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폐모론을 이끌었지만 막상 실제로 벌어질 상황이 되자 후에 비판받을 것을 염려하여 한 걸음 물러섰다. 그래서 명나라에 보고한 후 인목대비를 폐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목왕후 폐출을 늦추거나 현실화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허균은 달랐다. 허균은 명나라에 알릴 것 없이 바로 폐출하여 서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폐모론은 이이첨과 허균의 주장으로 나뉘게 되었고, 광해군은 두 주장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는 흡사 허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겨져 이이첨의 입지를 매우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결국 이이첨은 허균을 역적으로 몰아 죽임으로써 대북당에 미칠 화근을 잘라내기로 했다. 옥에 갇힌 허균에게는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갈 참이므로 근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면서 온갖 수단으로 사주하고 회유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허균의 죄상이 명명백백히 드러났으므로 국문을 할 것도 바로 처형해야 한다고 광해군을 겁박했다. 결국 광해군도 대북당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허균을 옥에서 끌어내게 했다. 그제야 허균은 “할 말이 있다!”며 소리쳤으나 서쪽 저잣거리에서 사지를 찢기고 죽었다. 결국 허균은 스스로 만든 술책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죽었고, 이이첨과 대북당은 허균을 희생양으로 삼아 흉서 사건의 배후라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2개의 반역 사건으로 읽는 조선의 진짜 모습
반역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에서부터 비롯된다. 반역은 그 시대를 부정하고, 다른 시대를 꿈꾸는 일이며, 다른 권력을 생산하는 일인 까닭에 그렇다. 따라서 조선의 역사를 반역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은 숨겨진 조선의 속살을 들춰내는 일이기도 하다. 역사는 늘 이긴 자 입장에서 서술된다. 때문에 반역자는 항상 악인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서술의 행간을 자세히 살피고, 그 행간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진실을 찾아내면 반역의 그늘 속에 숨겨진 그 시대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반역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두었던 12개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사의 진실을 찾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징옥, 이시애, 정여립, 이괄, 이인좌 등 조선사 500년 동안 금기시되었던 이름들이 역사의 수면 위로 올라온다. 모쪼록 《조선반역실록》이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조선사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