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忘女(6)
- 여강 최재효
“아아, 어쩐다냐?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금봉이에게 뭐라고 변명을
한단 말이냐? 그리고 나를 믿고 뒷바라지를 해준 아지에게는 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염병할 놈의 세상, 왜 나에게는 기회를 안 준단
말이야. 젠장.”
박달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운종가로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박달을 술 취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젊은 사람이 대낮부터
술에 취해 주정을 한다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박달은 여기 저기 기웃
거리다가 피마골에 있는 어떤 모줏집을 찾아 들어갔다.
"주모, 여기, 여기 모주 한잔 주시오.”
“하이고, 어서 오시구랴. 아주 잘 생긴 총각님이시네요. 호호
호호......”
“어서 한잔 주시오.”
“얘, 애월아, 여기 모주 한 사발하고, 파전 한 접시 내오거라.”
“아니, 주모 안주는 안 시켰소.”
“우리 집에 처음 오시는 멋있는 손님이라서 제가 인심을 쓰는 거니
염려하지 마시구랴.”
인심 좋아 보이는 여인은 박달을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눈웃음을 쳤다.
주점 안에는 선비차림의 남자 두 명과 패랭이를 쓴 중인차림의 남자
서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은 무엇이 불만인지 한참 현시국에
대하여 성토하고 있었다.
“이번과거는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하이.”
“내 생각에도 좀 그러이. 난 이번이 네번 째인데 또 낙방했으니 고향
에 내려가면 낙방거사란 별명이 붙을 걸세.”
“허허 허허허......, 사람이 살다보면 합격할 때도 있고, 낙방할 때도
있는 거지. 어떻게 보는 과거마다 합격을 하누? 나도 네번 째 일세.”
박달은 양반 차림의 두 사람 이야기를 듣고 두 귀를 쫑긋 세우며 엿듣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과 함께 과거를 본 사람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두 사람에게서 박달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알 수도 있을 것 같
았다. 박달이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겨 두 사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과거 시제(試題)는 자네도 알다시피 이태백이 지은 파주문월(把酒
問月)이란 시의 내용 중에서 따온 거 아닌가? 난, 알다가도 모르겠어.
왜 하필이면 이백의 시에서 시제를 따왔는지?“
약간 나이가 든 사람이 탁주잔을 비우며 불만에 찬 듯 상을 탁탁 쳤다.
“난, 시경(詩經)만 열심히 외었지. 당시(唐詩)에서 시제가 나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네. 그런데 그 시제 중 고시월(古時月)이 뜻하는 바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고시월이란, 바로 사람을 뜻하는 걸세.”
“사람?”
“그려. 사람?”
“뭔 사람?”
“허허, 이 사람은?”
“이 사람아, 얼른 말해보게. 고시월이 사람을 뜻한다니? 그럼, 당신은
답안지에 고시월이 사람이니 사람 타령만 늘어놓았겠군?”
“그럼, 이번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 시권(試券)은 모두 달은 사람
이다. 그러니 달 이야기가 아닌 사람 이야기를 썼겠구먼?”
“맞아, 바로 그거야. 우리네 평민들은 달을 그냥 아무생각 없이 달로 보지
만, 왕실을 이끌고 있는 상감이나 관리들의 생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전혀 다르지.”
“자네, 낙방했으니 그 이백의 파주문월이나 한번 읊어보시게.”
“잘 생각이 날지 모르겠는데 한번 읊어볼까 그럼. 나도 어제 이 시를 보고
암기했는데 한번 들어보시게 그럼.”
“그래, 그래 어서 한번 읊어보이. 내가 장단을 맞출 테니.”
“천천히 읊을 테니 들어 보시게.”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낙방생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이백의 시를 읊기 시작
했다.
靑天有月來幾時(청천유월내기시) 我今停杯一問之(아금정배일문지)
人攀明月不可得(인반명월불가득) 月行卻與人相隨(월행각여인상수)
皎如飛鏡臨丹闕(교여비경임단궐) 綠煙滅盡淸輝發(녹연멸진청휘발)
但見宵從海上來(단견소종해상래) 寧知曉向雲間沒(영지효향운간몰)
白兎搗藥秋復春(백토도약추부춘) 嫦娥孤棲與誰鄰(항아고서여수린)
今人不見古時月(금인불견고시월) 今月曾經照古人(금월증경조고인)
古人今人若流水(고인금인약류수) 共看明月皆如此(공간명월개여차)
唯願當歌對酒時(유원당가대주시) 月光長照金樽裡(월광장조금준리)
푸른 하늘의 달이여, 언제부터 있었느냐?
나 지금 술잔을 멈추고 한 번 물어 보노라.
사람은 저 밝은 달을 잡을 수 없는데
달이 도리어 사람을 따라 오는구나.
떠 다니는 거울같이 밝은 저 달은 선궁(仙宮)에 걸린 듯이
푸른 안개 다 사라지니 맑은 빛을 내는구나.
다만, 밤이면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을 볼 뿐이니
어찌 새벽에 구름 사이로 지는 것을 알리오?
토끼는 일 년 내내 불사약을 찧고 있는데
항아는 외로이 살면서 누구와 이웃하고 있는가?
지금 사람들은 옛 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저 달은 옛 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 모두 흐르는 물과 같아
다 같이 달을 보고 모두 이와 같았으리라.
오직 바라노라, 노래하고 술 마실 동안은
달빛이 오랫동안 술통을 비추어 주기를…….
“꺼억-, 술맛 조오타.”
이백의 시를 읊은 남자가 목이 마른지 탁주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
렸다. 이백의 파주월문 중 열한 번째 행에서 이번 과거의 시제가 선택된 것
이었는데 낙방한 대부분의 유생들은 시의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과거주관
부서인 예조(禮曹)에서 원하는 답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박달은 방금 들은 이백의 시를 생각해 보았다. 예전에 서당에서 공부할 때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시문을 대부분 암기하거나 자주 읊곤 했었지만
박달 역시 이백의 파주문월이 과거의 시제(試題)로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다. 이전에도 유명한 한시(漢詩)나 사서삼경(四書三經)중 한 부분
을 시제로 낸 적이 있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시국(時局)의 난제(難題)의 해법
을 묻거나 또는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묻는 시제가 자주 등장했었다.
“이 사람아, 자네는 고시월이 사람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이.”
“다르다?”
“십이 행에 보면 금월증경조고인(今月曾經照古人)이라고 했으이.”
“그랬지.”
“여기서 조고인(照古人)이란 고시월(古時月)과 대조되지 즉, 지금 이승에
없는 사람들을 뜻하는데, 즉 달은 우리 이승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옛날 사람
들을 알고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그러니, 백년도 못사는 인간들은 달의 영원성과 시공을 뛰어넘는 영물
(靈物)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이지.”
“아, 이 사람아. 핵심을 집어봐. 이번 과거에서 요구하는 정답이 무엇인지
말이야. 답답하이.”
“이 사람아, 정답을 알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탁주잔이나 찌그리고 있겠나?”
“하긴, 그렇겠군.”
“그럼 그 놈의 고시월이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아, 그거야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한 놈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빌어먹을......”
“이봐요. 형씨들, 나도 이번 과거에 낙방한 사람이오. 나도 그 고시월에
대하여 불만이 많소.”
박달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참견하자 두 사람이 박달을 흘낏 쳐다보
더니 손짓을 했다.
“아, 그래요? 그럼 우리 합석해서 이번 과거에 대하여 토론이나 해봅시다.”
“그럼, 실례하오. 난 경상도에서 올라온 박달이라 하오.”
“우린 경기도 사람이오. 반갑소. 난 박가요”
“난, 김가라 하오.”
“전 밀양이 본관입니다.”
박달이 박가라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반남이오. 동본(同本)은 아니나 반갑소이다.”
과거에 낙방한 처지라 세 사람은 금방 마음이 통했다. 박달이 두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자 두 사람은 흔쾌히 손을 마주 잡았다. 박가라는 사람이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일 뿐 김가라는 사람은 박달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박달 도령 반갑소. 보아하니 나이도 어리고 키고 크고 헌헌장부로세. 여인
들이 아주 좋아할 상이야. 하하하하......”
“내가 봐도 그러이. 가만히 박달도령 관상을 보니(女難)에서 늘 고민이
많을 듯 하이. 하하하하......”
‘아니, 이 자들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못하는 말이 없네. 내가 괜히 참견을
하였다. 가만히 이야기나 듣고 있을 것을......’
“하하 하하하......, 그리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박달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속을 달랬다.
“자, 이렇게 운종가에서 낙방한 사람들 끼리 만나 한잔하는 것도 인연이오.
한잔들 합시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박가가 잔을 들어 건배를 하자고 했다.
“그래, 박달도령은 이번 과거에 답안을 어떻게 작성하였소?”
김가가 박달에게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달에 대한 옛 고전을 인용하여 달에 대한 나의 소감을 논술 형식으로
지어서 제출하였습니다.”
“어떤 고사인데요” 박달은 두 사람에게 자신이 작성한 답안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열변을 토하는 박달의 모습에 두 사람은 마치 여우에 홀린 듯
한 모습이었다.
“오오, 과연, 과연 멋진 시권(試券)이오.”
“맞소. 과연 명 논문이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낙방 처리된 것이오?”
“그걸 알면 내가 형씨들하고 여기서 술을 푸겠소?”
“아아, 안타깝구려. 안 그렇소 박형?”
“암, 암. 그렇고말고. 내 같은 박가 성을 가졌다고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정말로 명문이오.”
“아닙니다. 나를 포함하여 두 형씨들 그리고 이번에 낙방한 모든 분들이
아마도 예조에서 원하는 시권을 쓰지 못하여 낙방하였겠지만,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시제가 현 시국의 해법을 묻는 것 같았습니다.”
박달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이적선(李謫仙)의 파주문월이란 시구를 따서 시제를
내었을까?”
“그야 시관(試官)들 마음이겠지. 아님, 문약한 상감이 평소 좋아하던 시구
일 수도 있겠고.”
“내 생각도 박달 도령 말처럼 당파싸움에 지친 조정 관료나 상감이 이백의
시중에서 한 시구를 따서 유생들에게 처방을 물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김가 성을 가진 남자가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마치 자신의 생각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언제 또 과거가 있는지 아시는지요?”
박달이 과거에 떨어진 상태로 낙향할 수 없었다. 한양에서 무슨 수를 써서
라도 눌러 앉아 혹시 있을지 모를 과거에 대비하고 싶었다.
“모르지요. 소문에는 내년에는 상감께서 금상에 앉으신지 십 년째 되는 해
이고 오랜 태평성대에 대비께서 최근 오랜 환우에서 점차 쾌차하고 있다고
하니 상감께서 내년 봄에 갑자기 별시(別試)를 시행할지 모르는 일이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틀림없이 내년 봄에 별시가 있을 것이오.”
박가 성을 가진 남자가 제법 아는 체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그 별시를 대비하여 준비를 해야겠다. 이대로 고향을 찾을
수 없어. 잘만하면 별시를 보고 내려가도 되겠지. 금봉이도 나의 이런
입장을 이해해 줄 거야. 그냥 가는 것보다야 좀 늦더라도 입격(入格)해서
찾아가는 떳떳하고 말이야.’
박달이 침통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거 박도령도 내년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별시를 한 번 더 보시려면 지금
부터라도 계획을 잘 짜서 공부에 임해야 될 거요. 이번처럼 또 잘못 했다
가는 낙방거사 소릴 듣게 될 거요. 고향 사람들도 두세 번은 봐주지만 세 번
이상 입격하지 못하면 욕을 할거요.”
“고맙습니다. 형씨 말씀대로 한양에서 더 머물면서 별시를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하였소, 고향에 내려가 보았자. 별 수 없을 거요.”
‘아아, 그러나 내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금봉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입격하지 못했지만 한번 다녀올까? 아니야, 안 돼. 금봉이 아버지나 어머
니는 내가 이 꼴로 찾아간다면 실망하고 말거야. 그렇게 되면 금봉이의
처지도 우습게 될 것이고. 그래, 내년 봄에 있을지 모르는 별시를 한 번
더 보고나서 찾아보아도 되겠지.’
박달은 입술을 깨물며 내년 봄을 기약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자, 이제 물 건너간 건데 더 이야기해서 무얼 하겠소. 우리 진탕하니
마시면서 다른 이야기나 하십시다.”
“좋습니다.”
박달이 맞장구를 치며 술잔을 들었다. 술이 서너 주전자 비워지자 세 사람
은 낙방한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조정의 시국을 제대로 풀어나가지 못한다며
시국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하면서 침을 튀기기도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술상을 두드리기도 하였다.
“자자,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 앞으로 대책을 논해봅시다.“
“논해보는 것도 좋은데 술이 취하니 계집 생각이 나는구려.”
박가 성을 가진 경기도 남자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두 사람의 안면을 살
폈다.
“이런 곳에도 계집이 있을라고?“
“부르면 오겠지요.”
“그냥 술이나 한잔 마시고 가십시다.”
박달이 자신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아지를 생각했다.
“아니야, 아무리 싸구려 모주집이라도 계집은 있게 마련이오.”
“주모, 이리와 보시오.”
박가 성을 가진 남자가 주모를 부르자 주모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달려
왔다.
“부르셨수?”
“여기 계집 좀 불러주쇼. 이거 남정네들끼리 술을 마시니 술 맛이 나질
않아.”
“호호 호호호......, 우리 집은 색주가가 아니라서 술시중 들 아이는
없어요.”
“아니, 아까 보니 안주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처자를 보았는데 그 아이는
누구요?”
“그 애는 우리 집에서 내 일을 도와주는 처녀인데 작부(酌婦)는 아니우.”
“작부든 아니든 이곳에 있으면 다 작부 아니오?”
“그럼, 그럼. 작부가 뭐 다로 있다. 술 부을 작(酌), 계집부(婦), 말 그대
로 술 따르는 여자가 작부 아니오?”
“하하 하하하. 박형 말이 맞습니다.”
“그럼 내 그 애를 나오라고 할 테니 좀 생각 좀 해주슈.”
“허허, 걱정하지 마오. 행하채는 아니지만 내 알아서 섭섭지 않게 해줄
테니.”
주모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한 여인이 나왔다. 나이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지만 성숙한 느낌이 드는 여인인데 육덕이 튼실하고 살결이
곱고 얼굴이 반반해 사내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해 보였다. 초록색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고 댕기머리를 한 여인의 풋풋함이 술에 얼큰하게
취한 세 남자들의 음심을 건드렸다.
“소녀, 애월이라고 합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애월이? 거참 이름도 예쁘네.”
“기방에서 유통되는 이름 같네 그려. 하하 하하하......”
“아이 놀리시면 싫어요.”
“하하 하하하하......., 그 처자, 사내들 간장을 다 녹이겠네.”
애월은 남자들 사이에 앉더니 술을 한잔 씩 가득 따르고 어서 마시라며 눈
을 흘겼다.
“아, 좋아. 좋아. 오늘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애월이랑 한번 놀아보자고.”
“호호호호......., 좋사옵니다.”
애월이 비록 댕기머리를 하였으나 세상풍파를 모두 격은 여인처럼 남자들을
요리하는 데 능숙해 보였다.
“애월아, 오라비들이 오늘 과거에 낙방하여 마음도 울적한데 노래나 한수
뽑아 보거라.”
“그래, 어서 한번 해봐라. 자고로 술자리에는 계집이 있어야하는데 오늘
네가 제격이구나. 거기에 노래 한수 곁들이면 금상첨화지.
하하하하......”
“좋아요. 오라버니들. 소녀가 한수 뽑을 테니 장단을 맞춰주세요.”
“걱정마라. 우리가 알아서 맞출 테니.”
애월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시작하였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애월이 애절한 목소리로 끊어질 듯 하다가 이어지며 황진이의 시조 읊자
사내들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박가 성을 가지 경기도 사내
는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췄다.
“이야, 너 이 모줏집에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 기생청에 등록하여 공부
좀 해서 기루로 진출하면 황진이 뺨치겠는 걸?”
“오오, 맞다 맞아. 너 정말 잘한다. 한 곡조 더 뽑아보아라. 이 울적한
심사를 네 노래로 달래야겠구나.”
“애월이, 정말 멋집니다. 한 곡 더 청해도 되겠소?”
박달이 애월이 눈과 마주치자 애월이 눈을 찡끗하더니 다시 목총을 가다듬
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허리를 둘러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고운 님 오신 날 밤이어 든 굽이굽이 펴리라
“꺼억-, 조오타. 정말로 죽여주는 구나.”
“정말로 황진이가 환생한 듯 하구나. 너, 이 모줏집에서 썩긴 아깝다.”
“호호호호......, 그럼 오라버니들 따라가면 기생이라도 만들어 주실
래요?”
“조오치. 애월아, 너 나 따라서 가자. 내 기생청에 등록 시켜 줄테니.”
박달과 두 남자들은 애월이와 어울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을 퍼마셨다.
박달이도 애월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울분을 삭이려고 하였다.
“아아. 서방님께서 어찌된 것일까? 벌써 유시(酉時)가 넘었는데. 혹시,
혹시 과거에 낙방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벌써 오셨을 텐데?”
주모, 아지는 축하잔치 준비를 모두 끝내고 박달이 빨리 오기만 기다렸다.
아지의 친한 친구들도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지야, 어찌된 거니? 네 서방님은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야?”
“글쎄, 오실 때가 훨씬 넘었는데......”
“얘, 혹시 낙방한 거 아니니?”
“아냐, 우리 박달 서방님은 절대 낙방하실 분이 아니야.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고? 분명히 합격하셨어. 아마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늦게 오고 계시는 걸 거야.”
“그렇다면 다행인데, 어째 기분이 영 찝찝하다. 얘, 아지야, 우리끼리
먼저 한잔하자. 마시고 있으면 곧 오시겠지.”
“그럼, 너희들 끼리 먼저 마시고 있어. 난, 좀 더 있다 마실게.”
“계집애도, 열녀났다. 열녀 났어. 어련히 알아서 올까봐 그러니?”
아지의 두 여자 친구들은 입을 삐쭉거리며 아지에게 불평을 토했다. 아지의
친구들은 화류계에서 뼈가 자란 여인들이었다. 박달이 합격 소식을 가지고
주막으로 오면 멋지게 놀아주려고 하였지만 박달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자 무료해 하다가 먼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아, 박달 서방님이 어찌 된 걸까?’
아지는 주막을 나와서 개천을 따라 걸었다. 개천에는 얼음을 지치는 아이
들로 북적였다.
‘만약, 만약 서방님이 불합격하였다면 어찌하나?’
아지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개천 길을 걸었다. 바람이 불었지만 아지는
추운 줄 몰랐다.
아지는 박달이 과거에 합격하였다면 박달이에게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박달을 출세시켜 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를 아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당연히 열심히 공부한 박달이 장원은
아니더라도 과거에 꼭 합격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냐, 아냐. 분명히 합격하였을 거야. 그런데 주막으로 돌아 올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아직 안 오시는 이유가 뭘까? 혹시? 혹시 금봉이에게 달려간
건 아닐까?’
아지는 개천 길을 걷다가 부리나케 주막으로 달려왔다. 박달이 쓰는 방을
들어가 보았다. 괴나리봇짐과 옷가지 그리고 지필묵과 서책이 그대로 있었
고, 미투리도 세 켤레나 고스란히 있었다.
‘금봉이 처자에게 달려간 건 아닌데. 설령 간다고 하여도 나에게 다녀오
겠다는 인사는 하고 가겠지. 서방님이 그냥 갈 예의 없는 분이 아니야.
그렇다면 오시다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가신 게 아닐까?’
아지는 이 생각 저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박달이 늦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
했다.
‘가만, 그렇다면 자축하기 위하여 혼자 오시다가 피마골 '극락'에 들려
인사만 하고 오신다는 게 그만 그 집 언니에게 붙잡혀 술을 마시고 계시는 건
아닐까?’
아지는 집에 가만히 있다가는 박달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 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자 직접 운종가로 나가 보기로 하였다.
“너희들 나 운종가 좀 다녀올 테니 마시고 있어.”
“아니 우리들만 남겨 놓고 무엇 하러 운종가를 가게?”
“응, 아무래도 박달 서방님이 운종가에 있는 ‘극락’에 계실 거 같아서
그래.”
“극락 색주가 그 언니에게 한번 잡히면 끝인데. 얘, 아지야, 너 아무래도
죽 쒀서 극락 언니 주는 거 아니니? 호호 호호호......”
“그럴 수도 있어. 그 언니 남자편력이 얼마나 심한데. 한 달이면 두 세
남자 갈아 치우잖아. 아지야, 빨리 가봐. 너 우물쭈물 하다가 서방 빼앗기게
생겼다.”
‘아니야. 서방님이 지조 없이 아무 여자에게 절개를 줄 분이 아니야.
아니고 말고.’
아지는 이웃집에 사는 마부를 불러 마차를 타고 운종가로 향했다.
‘아아, 박씨 말이 틀림없구나. 금봉이 꽃물이 멈춘 게 틀림없어. 정말
걱정되네.’
금봉이 아버지는 장독대 뒤에 있는 놋요강 두 개 중에 딸의 것 뚜껑을 열어
보았다. 개짐이 없고 맑은 물만 가득 차 있었다. 꽃물이 나오는 시기에 사용
하던 개짐을 요강에 담가두어야 하는데 딸의 개짐이 없었다.
‘분명, 집 사람하고 비슷한 날짜인데. 집 사람의 개짐이 요강에 가득한데
금봉이의 개짐이 없다는 것은 그 애가 꽃물이 멈추었다는 증거가 분명해.
그렇다면 틀림없이 딸애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인데......’
금봉이 아버지는 권련을 피우면서 곰곰이 딸 금봉이의 앞날을 생각해 보
았다.
‘과거가 끝났으니 지금 쯤 박 서방이 과거 합격증서를 받아서 고향으로 향
하고 있을 테지. 그러면 이곳 벌말까지 넉넉잡고 보름이면 충분할거야. 그래,
보름 후면 금봉이에게 소중한 선물이 도착하겠군. 그래, 넉넉잡고 보름이야.
보름.’
금봉이 아버지는 딸이 개짐이 요강에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과수
댁을 찾았다.
사진:박달재에 현존하는 금봉이와 박달도령의 조형물 입니다^^
박달재 성황당 올라가는 길목에 다정하게 서 있는 박달도령과 금봉 낭자 장승
- 계속 -
(▲ 이지역 출신인 이미테이션 가수 현칠의 깜짝 출연에 가수 현철도 놀란다)
♡ 송해 - 울고 넘는 박달제(원곡-박재홍)
1)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2)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둘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이름 : 송해
본명 : 송복희
출생 : 1927년 4월 27일
출신지 : 황해도 재령
학력 : 해주예술학교 성악
직업 : MC,개그맨
데뷔 : 1955년 '창공악극단' 가수
경력 : 원로연예인상록회 회장
영화 : 동해물과 백두산이 (2003), 울랄라 씨스터즈 (2002)
수상 : 2007년 방송 80주년 기념 한국방송협회장 표창
2004년 KBS 바른 언어상
대표작 : 전국 노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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