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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아내의 가출"
아내가 가출을 했다. 결혼 30년 만에 처음으로 양띠인 아내는 양처럼 늘 순해서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집에서 모습을 감춘 아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갔나 했지만 예감이 이상했다.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고 출근했다. 정오를 넘기고도 부재를 확인한 후, 어머니에게 아내가 친정에 일이 있어 며칠 후에 올 지 모르니 동생 집에 가 계시라고 했다. 저녁 식사도 걱정이지만 조그만 일에도 안달하는 어머니가 아닌가.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둔기로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점점 치매가 심해지는 시어머니와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내 성격에 그동안 참았던 게 터진 것 같았다. 언성을 높이더라도 남자가 바깥에서 힘들어서 그러려니 이해를 해야지, 가출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전날 오후 늦게 함께 헬스장을 찾았다. 시간이 늦어지자 아내는 어머니에게 먼저 식사하고 계시라고 전화를 했다. 저녁 7시가 넘어 집에 오니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다. "아니 늦는다고 전화한 것 맞아?" 나는 다짜고짜 쏘아댔다. "몰라요" 아내는 저녁상을 차려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어머니느 혼자 저녁을 사 드시고 왔다며 섭섭한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다가 짜증난 기분으로 그렇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 뿐이었다. 다음 날 퇴근 후 집에 들어와 한동안 머뭇거렸다. 자존심도 그렇고 걱정을 끼칠까봐 아내의 친정집, 형제들 집에 확인 전화를 할 수 없었다. 혼자 적당히 저녁을 해결하고 기다렸지만 전화 한 통 없었다.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일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일이 내게도 일어난 것이다. 술기운에 겨우 밤을 보냈다. 울화를 억누르며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확인해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만 알아도 되는데... 전투에서 마지노선까지 넘어선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존심 강한 아내는 친정으로 가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이후부터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밥도 먹을 수 없었다. 걱정과 섭섭함을 저녁술로만 달랬다. 남자도 갱년기 증상이 있다. 왠지 짜증이 나고 사는 재미가 없다. 그간 해온 일들이 의미가 없어지고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일도 없는 것 같다. 자꾸 왜소해지는 느낌이다. 힘들어도 어디 가서 불평할 수가 있나. 위로 받을 데가 있나. 그렇다고 남자는 바깥일을 집에까지 들고 들어와 주절거리지 못한다. 나는 직업상, 성격상 바깥에서 있었던 일은 집에서 말하지 않는다. 특히 좋지 않은 일이나 환자에 관한 것은 불문율이다. 그건 여하튼 내 몫이고 내가 소화해야 할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내가 집에 올 때 왜 언짢은지 아내는 잘 모른다. 나 또한 집안 일은 아내 몫이니 그래주기를 바랐다. 사흘 후, 분노가 걱정으로 변해갔다. 급기야 아우들을 소집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하나같이 내 편은 없었다. 그저 형수 편만 든다. 모두 다 내가 잘못했다고, 그래서 형수가 집을 나갔다고, 성격상 별 일이야 있겠느냐고, 위로를 받기는 커녕 질타만 받고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내보다 나에게 문제가 많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 이번에는 아이들을 만났다. 전국을 뒤져서라도 엄마를 찾아오라고 엄명을 내렸지만 아이들도 걱정만 하지 나를 위로하는 기색은 별로 없었다. 다음날 딸한테 들으니, 아내는 혼자 배낭를 메고 부산으로 갔다고 했다. 내가 "왜 그 먼 부산으로 엄마가 갔니?"하고 물었더니 "엄마가 서울에서 제일 먼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어"라고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엄마도 휴식이 필요하대" 딸과 아내는 아마도 전화로 안부를 주고 받은 것 같았다. 안도가 되었다. 그러나 배신감과 치미는 화를 누르기가 힘들었다. 곁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집에 아내가 없으니 집은 사막과도 같았다. 하루 세끼를 사먹고 다니려고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혼자 집 근처 추어탕 집에서 소주 반주에 홀로하는 저녁식사는 영락 없는 일일 연속극 장면이었다. 불길한 상상이 나를 밤마다 짓눌렀다. 아무 대안 없이 그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정말 중이 제머리 못 깎는 꼴이 되었다. 수신제가도 못하는 주제에 내가 세상이 말하는 명의라니 빛좋은 개살구였다. 이렇게 무력감과 허탈감 속에서 일주일이 지났다. 직장에 가 있는 동안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딸이 전화해 "엄마가 돌아왔어, 엄마한테 아무 말도 묻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고, 무조건 잘 해햐 돼"라고 코치한다. 시집갔다고 제법 훈계를 한다. 내편은 하나도 없었다. 이럴 수가, 아들, 딸 모두 나에게 냉랭하다. 나도 쌓인 게 많은데... 아내와 어머니, 두 여자 사이에 끼어 자주 숨이 막히는데... 이놈들, 너희들도 살아 봐라... 그러나 종일 지난 몇 주간의 내 모습과 언행을 되돌아보니 나도 내가 싫었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오시라고 했다. 아내는 친정집에서 하루 이상 자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다. 눈치 빠른 어머니는 모든 것을 아시고도 모른 척하신다. 심각한 것을 아셨는지 평소보다 훨씬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밥 묵었나?" 하고 물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아뇨!"한다. 나는 어머니와 아내를 데리고 가까운 일식집으로 갔다. 어머니에게 술 한 잔을 권하고, 아내에게도 술 한 잔을 권하고 내 잔엔 내가 따르고, 귀가 축하 건배를 어머니에게 제의했다. 어머니께서 '못난 놈'하며 손을 저었다. 잔을 부딪친 후, "내가 살면서 이렇게 힘든 적은 처음이었소, 다시는 집나가지 말고 나갈 일 있으면 나보고 나가라고 해요"라고 했다. 아내가 돌아오자 안도가 되는지 어머니가 울먹이며 "그래 그래, 네가 안주인인데..."하며 맞장구를 치신다. "다시는 그러지 마래"하면서. 세 사람 모두 다소 얼큰한 채 돌아왔다. 그날 이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도 아내에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전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건 내 자존심이며, 아내의 시위를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아내는 계속되는 시어머니와 나의 압박감에 밤새 밤새 잠을 못이루고 어디론가 떠나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아침에 행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당연히 허락하지 안을 것이고, 한편으론 복수하고도 싶었으리라. 특히 소중하게 여기던 아이들까지 출가해 마음이 허전한 상태로 우울했다고, 나는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다.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단다. 그러다가 나의 말과 행동이 비수가 되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너무 일찍 돌찍 돌아왔다고 하더란다. 조금 더 있다가 와야 아빠가 확실히 변할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고 집에서 살림만 하던 아내가 처음으로 크게 느껴진 사건이었다. 아내의 가출로 그간 우리 집안의 진정한 리더는 아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힘과 권력은 내게 있어도 함께 살아가는 형제, 식구들은 아내를 더 지지하고 있었다. 이제 내게는 '타협과 연합'만이 살 길인가 보다. 아내의 가출, 어떤 변명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구를 소홀히 했던 죄, 간이 부은 남자에게 아내는 그렇게 경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어머니와 아내가 다른 점이다. 하여간 가정의 선장인 나는 아무리 파도가 높더라도, 어떤 태풍이 몰아치더라도 결코 손에서 방향 키를 놓을 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