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희년을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내는 그리스도인
희년 - 해방의 기쁨과 희망 선포
희년의 시작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 탈출 후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그 일곱째 달 초 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레위기 25,8~10)
이같은 레위기의 말씀에서 희년의 뜻을 살필 수 있다.
희년은 무엇보다 ‘해방’의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은총으로 이집트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해방의 기쁨 속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은혜를 입게 된 기쁨과 감사를 알리며 외치는 온 세상을 향한 선포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희년의 원천이면서 이집트 탈출 상황이 배경인 레위기의 알려진 최종 편집 시기가 바빌론 유배(BC 587)
이후라는 점이다.
바빌론에서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의 안일했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뉘우치면서
굳건한 신앙 안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다시 세우려 한다.
이집트에서 탈출하며 다짐했던 마음을 떠올리며 오직 하느님만을 제대로 섬기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여러 규정과 제도를 마련했던 레위기의 내용들을 떠올리고,
다시 한번 자신들 삶의 질서로 삼고자 한다.
이런 관점으로 레위기를 살펴보면, 오랜 억압과 고통 끝에 마침내 누리게 된 해방의 기쁨뿐 아니라
과거의 오류에서 벗어나 다시금 하느님 뜻에 맞는 올바르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각오와
희망이 함께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희년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해방과 기쁨의 해인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하신 그분의 거룩하신 본성을 우리 자신 안에서
온전히 회복해야 하는 시기이다.
교회 안에서의 희년 역사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전통인 희년이 정식으로 천주교회 안에 들어온 역사는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cius VIII, 1294∼1303 재위)가 첫 희년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된다.
그 이전까지 교회는 십자군 전쟁(1095~1291)으로 매우 힘든 한 세기를 보내고 있었다.
성지를 되찾고자 했던 전쟁 본연의 목적은 전쟁에 참여한 각자의 세속적인 동기로 왜곡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힘든 한 세기를 보낸 하느님 백성을 향해, 다가오는 100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지난 시간 우리 자신의 죄와 잘못을 참회하자고 말하며
희년을 선포하였다. 교황의 희년 선포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선포한 희년은 100년을 주기(週期)로 한 탓에
누군가는 이 기쁨에 참여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475년 교황 바오로 2세(Paulus II, 1464~1471 재위)는 일평생 누구라도 희년의 기쁨을
한 번은 맛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희년 주기를 25년으로 단축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희년은 25년마다 정기적으로 선포되었고, 이 외에 지난 2015년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 2013~ 재위)에 의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닮아 자비를 실천하기를 바라며
‘자비의 희년’이 선포된 것과 같이 ‘특별 희년’이 비정기적으로 선포되었다.
하느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하느님만이 마련해주실 수 있는
참된 기쁨을 선포하고, 그 기쁨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다.
예수님의 희년 선포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또, 이어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하신다.
이는 당신 자신이 바로 구원의 기쁜 소식 그 자체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왔던 메시아라는 힘찬 선언이다.
그리고 당신께서 희년의 기쁨을 살고, 살아냄으로써 그 기쁨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일깨워 보이겠다는
의지적 고백이기도 하다.
이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 그리스도인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희년을 사는 법
희년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면서, 우리 자신의 거룩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따라야 할 것들이 있다.
“(…)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6~37)
“(…)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예수님께서는 종을 풀어주고, 땅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레위기의 희년 법을 사랑과 나눔,
그리고 섬김의 실천으로 확장하고 완성하신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 돌봐주고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가르쳐주시며,
겸손한 삶의 태도를 바탕으로 섬기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일러주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랑으로 구원되었고, 그 사랑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 동시에
그 사랑에 빚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만의 기쁨,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의 기쁨이 아니라 모든 이의 기쁨과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살아내야 할 것이다.
하느님 뜻은 바로 우리 자신이 희년의 증거가 되고, 하느님의 은총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이들의 기쁨과
희망을 일깨워주는 마중물이 되는 데에 깃들어 있다.
전대사의 은총
희년에 교회는 전대사(全大赦)의 은총 기회를 마련한다.
전대사는 죄로 인해 남겨진 잠벌(暫罰)1)을 모두 용서받을 수 있는 특은(特恩)이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신자들은 전대사를 받기 위해 준비하고 그에 합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본 다음 성지를 순례해서, 고해성사를 받고,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 지속적인 기도를 드린다.
희년에 베풀어지는 전대사는 우리 일상의 크고 작은 잠벌들을 용서받을 좋은 기회이다.
또한 연옥에서 정화(淨化)의 시간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 소죄나 보속할 죄벌이 남아 있는 사람이 현세나 내세의 연옥에서 받게 되는 잠시적 벌.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벌, 즉‘영벌(永罰, damnatio)’과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교회와 역사, 2025년 1월호, 노현기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특수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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