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대부분의 경우엔 '야간운동'을 한다.
어느땐 시민운동장에서, 어느땐 산속에서 한다.
아주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런데 야간의 산속은 무척 어둡고 캄캄하다.
인적도 없다.
그야말로 무시시한 적막강산이다.
그래도 나는 그곳이 좋았다.
내 절친들이 때때로 물었다.
"안 무섭냐?"
그때마다 나는 항상 똑같이 대답했다.
"30년도 넘게 유지해온 습관이라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참 너는 희한한 인간이야. 한마디로 별종이지"
친구들은 대개 이렇게 말하며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곤했다.
어젯밤에도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산속에서 운동을 했다.
십중팔구 야간운동은 '검도훈련'이었다.
해병대 전역 후 대학교에 복학한 뒤로 3년간 매력적인 '검도의 세계'에 깊이 빠져 지냈다.
그때 몸에 배서 그런지 시간만 나면 목검을 손에 쥐고 땀을 쏟았다.
검도에 처음 입문하면 누구나 '죽도'로 훈련한다.
몇 년이 지나 '죽도'가 손에 익을 정도가 되면 그 다음엔 묵직한 '목검'으로 단련하게 된다.
대련할 경우를 제외하곤 대개 그랬다.
나도 그렇게 한 20여 년 정도 열심히 훈련했다.
종국엔 그 목검조차도 성에 차지 않는다.
더 많은 운동량과 땀을 위해선 더 무거운 '훈련도구'가 필요했다.
찾아도 구할 수 없을 땐 할 수 없었다.
직접 만들어서 사용할 수밖에.
최종적으로는 각목을 깎아서 만든 나만의 '수제검'으로 훈련을 했다.
둔탁하고 볼품없을지라도 무게감이 좋았고 손에 착착 달라붙었다.
체육관에서 훈련하는 목검의 4배 정도 되는 무게였다.
처음엔 손목에 엄청난 무리가 갔지만 지금은 이것이 딱이다.
오래 하다보니 어느새 몸에 뱄다.
어쩌다가 한번씩 과거에 썼던 '죽도'나 '목검'을 잡아보면 너무 가벼워서 마치 '부지깽이' 같다는 느낌을 받곤한다.
격세지감이랄까, 어느땐 마른 웃음이 흐르곤 한다.
어젯밤 10시가 넘은 시간.
산 꼭대기 능선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 저쪽 멀리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듯했다.
캄캄했지만 직감적으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같은 장소에서 야간훈련을 했던 터라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감지할 수 있었다.
쩍하면 입맛이었다.
그동안엔 1년에 기껏해야 서너번씩 '야간 MTB'나 '야등'하는 사람들이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다른 경우는 없었다.
어제 그 시각, 흐릿했던 검은 물체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정말 의외였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여성'이었다.
얼굴을 식별할 순 없었지만 이십대 초반의 앳된 숙녀 같았다.
머리카락이 매우 길었고, 큰 어깨가방을 메고 있었다.
흐릿했지만 실루엣을 보고 난 그렇게 판단했다.
"안 무서워요?"
내가 큰 소리로 물었다.
"아아...많이...무서워요..."
"아니, 무서운 사람이 이 야심한 밤에 산길을 혼자 다녀요?"
내 목소리는 약간의 비장함과 퉁명함이 서려있었고, 까닭모를 안타까움과 염려가 진하게 녹아 있었다.
"피치 못할 일이 좀 있어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산밑까지 가려면 한참을 더 가야하는데 내가 데려다 줄까요?"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그런데 이 길만 쭉 따라가면 되나요?"
모기소리 만큼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래요. 이 길이 내려가는 길이니까 조심해서 가세요. 이 칠흑같은 밤에 랜턴도 없이, 아이고, 젊디 젊은 아가씨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찰라같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정작 내가 바로 '공포의 대상'일 수 있다는 것을.
어두운 산속에서 만난 낯선 남자.
어떤 큰 몽둥이 같은 걸 들고, 제법 쌀쌀한 늦가을 날씨에도 불구하고 짧은 반바지와 민소매 티를 입은 채 달밤에 체조(?)하고 있는 미친 사람.
오히려 그녀에겐 내가 무서움을 더 보태는, 또 하나의 귀신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앳된 여성의 무서움을 경감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두려움을 배가 시키는 대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겠다.
어째서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아마도 그녀의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 때문이었을 게다.
어둠속이라 그녀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두려움에 떨던, 작은 목소리는 똑독히 들었으니까.
나도 딸을 둔 애비였다.
나도 모르게 걱정이 앞섰다.
필경 그녀에겐 산속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귀신보다 어둠속에서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던 시커먼 사내가 더 무서웠을 것이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내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하던 운동을 그만두고 최대한 청력을 집중하여 그녀 쪽으로 귀를 모았다.
한동안 아뭇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던 트레이닝복을 입고, 벗어두었던 허리쌕을 다시 찼다.
그리곤 그녀가 느끼지 못하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뒤따라 갔다.
혹시라도 나로인해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난다면 그 앳된 여성은 필경 귀신이 따라오는 것으로 착갈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추로 접어드는 심야의 산속.
찬바람이 미풍처럼 불고 있었다.
내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 대략 60-70미터 정도는 떨어진 채 뒤따라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만에 하나라도, 비명소리가 나거나 내 청력을 자극하는 어떤 미약한 소리라도 들린다면
단 일초도 주저함 없이 비호처럼 날아가리라 마음 먹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누구일지라도 육중하고 둔탁한
내 '사제검'으로 일격에 작살 낼 심산이었다.
검의 세계는 언제나 '일도양단,' 그것뿐이었으니까.
터널같은 숲속을 지나 어느새 밝은 가로등이 찬란한 마을로 내려왔다.
그녀가 어느 골목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었다.
적어도 내가 지나왔던 산속 능선길엔 더 이상의 사람 흔적은 없었으니까.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허허, 참나, 그 앳된 여성에게 어떤 피치 못할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심야의 시간에,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그것도 혼자..."
그 생각 때문인지 밤새도록 내 머릿속이 뒤숭숭했다.
야등(야간산행), 야잔차(야간 MTB), 야트(야간 임도 트레킹)나 다른 운동을 위해 야간에 산을 찾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러나 이런 목적이 아니라면 밤 늦은 시간에 산속을, 그것도 혼자서 내왕하는 건 절대로 금물이다.
남녀 모두 주의해야겠지만, 특히 여성들에겐 더더욱 그렇다고 믿는다.
모두에게 '안전'보다 더 중요한 덕목은 없으며, '건강과 평안'이 우리네 삶의 첫번째 테마일 테니까 말이다.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건승과 평강을 위해 기도하는 밤이다.
온누리에 안전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손에 땀이 나네요.
산속에서의 바스락 소리..
정말 등에 소름이 쫙~~ 돋는 순간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두려움의 대상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간혹 가로등 듬성한 길을 달릴때도 뒤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는데
내가 앞선 사람에게 놀라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안았는데...
오늘 또 새로운 생각이 눈을 뜨이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