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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 문제 4 / 피부 대머리에 발생한 나병
레 13:38-46
38 남자나 여자의 피부에 색점 곧 흰 색점이 있으면
39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피부의 색점이 부유스름하면 이는 피부에 발생한 어루러기라 그는 정하니라
40 누구든지 그 머리털이 빠지면 그는 대머리니 정하고
41 앞머리가 빠져도 그는 이마 대머리니 정하니라
42 그러나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있으면 이는 나병이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발생함이라
43 제사장은 그를 진찰할지니 그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돋은 색점이 희고 불그스름하여 피부에 발생한 나병과 같으면
44 이는 나병 환자라 부정하니 제사장이 그를 확실히 부정하다고 할 것은 그 환부가 그 머리에 있음이니라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레 13:38-46 / [어루러기가 생겼을 때] 남자든지 여자든지 살갗이 헐어 희게 되었다면 39) 제사장은 그 환부를 자세히 살펴보아라. 헌데가 희끄무레하게 되었으면 그것은 어루러기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은 깨끗한 사람이다. 40) [대머리일 경우] 누가 머리털이 빠져 대머리가 되었어도 그는 깨끗한 사람이다. 41) 앞머리 털이 빠졌어도 그것은 단지 앞머리가 벗겨진 것뿐이므로 그를 부정한 사람이라고해서는 안 된다. 42) 정수리나 앞이마 부근의 머리털이 빠진 자리에 희고 불그스레한 점이 생겼을 경우에는 문둥병이 그곳에 번진 것이다. 43) 제사장이 그 사람의 정수리나 앞머리 부분을 잘 살펴보아 그 부분에 문둥병 증세와 같은 희고 불그스레한 점이 생겼으면 44) 그 사람은 문둥병자이므로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 사람의 머리에 문둥병이 발생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45) [문둥병자는 이 규정을 지켜라] 문둥병자는 갈기갈기 찢은 옷을 걸치고 머리는 헝클어뜨린 채 윗수염을 가리고는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한다. 46) 이 사람은 몸에 병이 퍼져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부정한 상태이므로 다른 사람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진영 밖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부정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가 없다.
대머리에 발병하는 악성피부병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머리임에도 악성피부병까지 앓아야 합니다. 마음의 고민이 컸을 겁니다.
대머리(38-44) 우리는 외모지상주의(Lookism) 세상에서 삽니다. 신체적 외모 그리고 외형적 이미지를 기준으로 가치판단, 차별 및 편견을 갖습니다. 대머리는 분명 신체적인 콤플렉스입니다. 열왕기하 2장 23절을 보면, 엘리사 선지자를 향하여 대머리라고 놀렸던 아이들 사십이 명이 죽은 안타까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모보다는 마음과 인격을 더 중요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생겨 나병이 된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머리에 나병이 발생할 경우 제사장은 다른 부위에 나병 증세가 있을 때와는 다른 결정을 해야 합니다. 즉 2주 간에 걸쳐 신중하게 지켜보던 때와는 달리 즉시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추측컨대 머리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으로 보입니다. 머리는 신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신체 모든 부위를 움직이게 하고 컨트롤하는 중앙관제센터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45-46) 45절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악성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쳐야 합니다. 가시적이고 청각적인 표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라는 말은 애통하라는 말입니다. 애통하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악성피부병으로 판정을 받으면 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합니다. 그 완치 시기를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슬픔과 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초창기에는 격리시키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외부와 접촉을 가능한 차단해야 했습니다. 전염병을 가장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이 격리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게 됩니다. 둘째, 악성피부병으로 판정을 받으면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쳐야 합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적용: 대머리로 생활하는 것도 고민되었을 텐데 악성피부병까지 앓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처럼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려워하는 이웃들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가 쓴 '파랑새'라는 동화의 내용입니다. 가난한 나무꾼의 어린 남매 치르치르와 미치르에게 어느 날 요정 할머니가 찾아와 병든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남매는 할머니의 딸을 살릴 파랑새를 찾기 위해 꿈의 세계로 떠납니다. 그러나 파랑새는 찾을 수 없었고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행복의 궁전'에서 물질적인 행복의 허무함을 보았고 참다운 행복은 건강, 정의, 특히 어머니의 사랑이며 '파랑새'는 마음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끝으로 '미래의 나라'에서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만나고 꿈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문득 자기들의 머리맡에 있는 새장을 보았고 그곳에 그토록 찾았던 파랑새가 있었습니다.
< 설 교 >
성경에서 말하는 전염병 관리
레 13:45-46 / 김원효 목사
성경에는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가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특히 전염병 중 문둥병(나병, 한센병)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전염병의 하나인 문둥병을 성경에서 어떻게 관리하는 것을 살펴봄으로 오늘날 전 세계에 퍼진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을 우리가 어떻게 관리해야 되는지 그 요령을 배우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이 80이 된 모세를 광야에서 부르고 말씀합니다. “모세야, 내가 너로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러나 모세가 대답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에게 표징을 주십니다. “모세야, 네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 모세가 자기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모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네 손을 품에 넣으라.” 그가 손을 품에 넣었더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흰지라.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그러자 손에서 문둥병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그들이 처음 표징을 보고도 너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둘째 표징을 믿으리라.”
즉 문둥병이라는 전염병이 순식간에 생기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된 오늘날도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이 순식간에 전 세계에 발생하니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난리가 납니다. 불안감과 공포감이 생깁니다.
그러니 당시의 사람들은 전염병이 생기는 것을 너무나도 무서워했고 하나님의 특별한 영역 아래에서 생기는 병으로 알았습니다. 오늘날도 COVID-19 전염병이 생기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경고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문둥병이라는 전염병이 든 사례를 보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유다의 웃시야 왕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그는 군대를 잘 무장시켜 주위 나라가 조공을 바칠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관개시설을 잘 만들어 목축과 농업도 장려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부요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 나갈 때 항상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교만입니다.
그는 제사장을 싹 무시하고 자기가 직접 성전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려다가 하나님이 쳐서 전염병인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쫓겨나 죽을 때까지 혼자 별궁에서 격리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죽고 나서도 전염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왕실의 묘지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전염병으로 죽으면 바로 화장을 하거나 특별한 묘지에 따로 묻히게 됩니다.
이번에는 엘리사의 종 게하시 이야기입니다. 아람나라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자신의 문둥병을 치료받기 위해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요단강에 7번 몸을 담그므로 깨끗이 치료를 받습니다. 그는 너무 고마워서 많은 은금패물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선물로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를 시중들던 게하시라는 종이 욕심이 생겼습니다. 곧장 나아만 장군을 뒤를 따라가서 말합니다. “우리 엘리사 선생님이 그러는데요. 갑자기 제자들이 방문해서 필요하니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시래요.” “아- 이게 뭐야? 쪽팔리게!”
그는 받은 것을 집에다가 숨기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것을 알아채고 말합니다. “게하시야, 지금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냐? 나아만의 문둥병이 너에게 들어가 영원히 살리라.” 즉 욕심 때문에 문둥병이라는 전염병이 들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죽었습니다. 모세가 새로 장가를 갔습니다. 이번에는 까무잡잡한 이방 여인인 구스 여자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이 이를 비방합니다. 안 그래도 모세가 나이 들어 장가를 갔으니 좀 민망한데 대놓고 누나가 비방하니 말도 못합니다. 특히 미리암 누나는 모세가 태어나서 나일 강에 버려졌을 때 바로의 공주에게 모세를 연결시켜 주고 모세를 살린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모세 대신 하나님이 미리암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왜 충성된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 그 후 곧 바로 문둥병이 미리암에게 발생합니다. 남을 비방하면 특히 자기보다 한참 의로운 사람을 비방하면 영적 문둥병에 걸릴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면 이런 전염병에 걸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레13:45-46) 즉 먼저 옷을 찢고 머리를 푼다는 겁니다. 이는 극한 슬픔의 표시입니다. 왜 슬플까요?
사랑하는 가족들과 격리를 해야 되고, 자기가 이제까지 얻은 지위와 명예하고도 격리가 됩니다. 오늘날 COVID-19 확진자가 되면 어떤가요? 영국 총리라도 격리가 됩니다. 캐나다 총리도 격리가 됩니다. 하루아침에 참으로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전염병이 그렇게 창궐한데 젊은 애들이 철딱서니 없게 모여서 술파티를 하고 신나게 놉니다. 에고- 이런 태도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윗입술을 가리며 외쳐야합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한번 자기 손으로 윗입술을 가려 보십시오. 이게 무슨 의도입니까? 침 튀기지 말고 상대방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염병이 발생하니 마스크를 쓰느냐 마느냐 논란이 많은데 성경적으로 보면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는 것처럼 마스크로 입을 가려야 합니다.
특히 말할 때는 더욱 침이 튀길 수 있으니까 가리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답답하다고 마스크를 쓰지 않습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남이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입술을 마스크로 가려야 합니다. 그래야 전염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 COVID-19 바이러스는 무증상 감염도 많이 되므로 사람들이 있을 때는 무조건 마스크를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하다.”고 합니다. 즉 전염 병균이 있는 사람은 계속 격리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퍼진 COVID-19 바이러스는 완치가 잘 안됩니다. 환자는 계속 늘어나고 병실은 부족하니 대충 나았다 싶으면 퇴원을 시킵니다. 그런데 완치자라고 내보낸 사람이 다시 재확진이 되어서 나타납니다.
한국만 해도 이런 케이스가 지금까지 100명이 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재확진자이기 때문에 새로 확진자 숫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재확진된 분들이 다 낳은 줄 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계속 전염병을 퍼트리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 참 난감합니다. 참 컨트롤하기 힘든 전염병입니다.
이런 사람은 본문에 보면 “혼자 살되 진 밖에서 살지니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COVID-19 병에 걸리면 개인 음압병실에다 특별 관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염병동은 다른 일반 환자 병동과 같이 운영해서는 안 됩니다. 따로 떨어져서 관리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전염병이 병원 내에서 퍼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의료체계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한국에 보면 선별 진료소란 것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으면 정결예식이란 것이 있습니다. 일단 문둥병자는 제사장에게 가서 진찰을 받습니다. 제사장은 친히 성 밖으로 나가 환자를 진찰합니다. 좀 미심쩍으면 격리를 시켰다가 일주일 간격으로 다시 한 번 진찰을 합니다. 즉 아주 신중하게 진찰을 해야 합니다.
최근 뉴스를 보면 어떤 나라가 COVID-19 중국산 진찰 키트를 대량으로 수입해서 사용하다가 불량품이 너무 많아서 반송을 한다고 하는데 이런 식이 되면 안 됩니다. 전염병 진단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기에 아주 정확한 진찰 키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값이 싸다고,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하는 논리는 이때 안 통합니다. 그리고 모호한 경우에는 몇 번이고 진찰해서 음성인지 양성인지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환자가 진짜 다 나으면 그를 위해 어린 양을 잡습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기름과 피를 그의 오른쪽 귓부리, 오른쪽 엄지손가락,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머리에 바릅니다. 여기서 엄지는 대표를 의미하는 것이요. 귓부리는 듣는 것, 손가락은 만지는 것, 발가락은 다니는 것, 머리는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다시는 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삶의 행동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염병에서 낳았다고 막 돌아다니고 행동하면 안 됩니다. 영적 육적 위생에 더욱 철저해야 합니다. 특히 이번 전염병은 낳았다고 다 낳은 것이 아닌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번 바이러스는 변이가 잘 되서 다시 재발이 잘됩니다. 고로 계속 주의를 기울이며 관리해야 합니다.
신약의 예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10명 이상 여러 명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면서 그들에게도 문둥병자(전염병자)를 고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8 말씀입니다. “너희는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결론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육적으로 전염병이 퍼지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하고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염병에 걸린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 보고 그들을 고치라고 했는데.... 우리가 기도로 못 고치면 의사 분들이나 의학자 분들이 빨리 치료제를 개발을 하든지 해서... 하여간 같이 노력을 해서 전염병을 퇴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전염병을 빨리 제거해 주도록 같이 기도합시다.
팬데믹 시대의 그리스도인
레 13:45-46 / 이익환 목사
코로나 19로 인해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혐오’도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표현과 차별 사건이 확산되고 있다. 구약시대 나병 환자는 극혐의 대상이었다. 피부가 변해서 보기 흉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염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토라포션에는 나병을 진단하고 그 대상자를 정결케 하는 과정이 나온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 혐오대상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펴보면서 혐오가 확산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찾고자 한다.
레 13: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환부의 털이 희어지고 환부가 다른 피부보다 깊게 패이게 되면 나병 환자로 확진된다. 여기서 ‘나병’은 히브리어로 ‘짜라아트(צרעת)’다. 그런데 짜라아트는 오늘날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나병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에는 옷과 집안의 벽에 피는 곰팡이도 ‘짜라아트’라고 표현된다. 따라서 짜라아트는 곰팡이균으로 인한 악성 피부병이라고 보는 게 좋다. 짜라아트의 증상을 점검하고 그 사람이 부정한지 정한지를 선언하는 것은 의사의 일이 아니었다. 제사장의 일이었다.정한지 부정한지는 의료적 기준이 아니다. 종교적 기준이다. 그래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제사장의 몫이었다.
레 13:4,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피부가 희게 색점이 났지만 우묵하게 패이지 않고 털이 희지 않으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7일간 격리한다. 여기서 ‘가두어 둔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싸가르(סגר)’인데, 영어로는 ‘quarantine’이다. 요즘 많이 듣는 말이다. 레 13:5,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격리 1주일 후에 다시 점검해서 병이 퍼지지 않았다면 1주일을 더 격리시킨다. 총 2주를 격리하는 것이다. 코로나 의심자도 2주간을 격리시키는데, 2주 격리가 성경적인 격리 원칙이 아닌가 싶다. 레 13:6,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총 2주 격리 후에 환부가 엷어지게 되면 제사장은 음성판정을 내린다. 그리고 그 환자를 정하다고 선언한다.
자 그런데 양성판정이 나면 어떻게 될까? 레 13:45-46,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악성 피부병 환자는 스스로 옷을 찟고 입을 가리며 자신이 부정한 자임을 알려야 했다. 그리고 병이 낫기까지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 공동체와는 완전 격리되는 것이다. ‘부정하다’는 말은 ‘불결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부정하다’라는 말 ‘타메(טמא)’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더럽혀지고 부패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이 악성피부병의 주된 원인을 ‘라숀 하라(לשון הרע)’때문이라고 본다. ‘라숀 하라’는 ‘evil tongue, bad speech, 악한 말’이라는 뜻이다. 요즘으로 하면 ‘혐오 발언’이라할 수 있다. 유대 랍비들은 ‘라숀 하라’가 우상숭배, 간음, 살인을 합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 그것은 나쁜 말이 말하는 대상뿐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 자신과 그것을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리암도 모세에 대해 나쁘게 말하다가 나병에 걸린다. 짜라아트,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흔드는 것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결국 미리암은 짜라아트에 걸려 진영 밖으로 격리조치된다. 그녀는 영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 공동체와의 교제에 부적합한 자가 되었기에 격리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짜라아트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고백해야 했다. 그리고 공동체와는 철저히 격리되야만 했다. 혼자 있는 그 시간은 참회의 시간이 되었고, 다시 죄에서 돌이켜 정결함을 얻는 시간이 되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혐오의 언어들이 넘쳐난다. 특히 인터넷 댓글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면 잔인하고 파괴적인 혐오 표현들로 가득하다. 라숀 하라, 즉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을 격리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는 구석 구석 검은 곰팡이가 피고 있다. 순수해야 할 초등학생들의 교실마저 혐오가 일상언어가 되었다. 어쩌면 전 세계가 혐오의 말에 감염되었기에 지금 모두가 격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혐오는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삶이 힘들거나 위기가 오면 사람들은 좌절과 불안을 느낀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현실속에서 사람들은 분노를 쏟아 낼 대상을 찾는다. 그런데 그 분노는 강자를 겨누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조지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싸움 잘하는 애들한테는 혐오 표현을 하지 않는다. 만만하게 보이는 애들, 나보다 약한 애들을 골라 함부로 말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지난 화요일이 홀로코스트 기념일이었다. 홀로코스트 역시 나치의 혐오 발언에서 시작되어 600만 집단 학살로 이어진 인류의 비극이었다. 당시 독일은 경제 위기로 온 나라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히틀러는 국민들의 분노와 두려움을 쏟아 낼 희생양을 찾았고, 그래서 찾은 대상이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혐오는 혐오 대상이 되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는 행위다. 혐오는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폭력인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혐오 표현을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그 사람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라숀 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약 3:6, 8-10,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성경은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재미있어서 한 말, 내가 조롱하며 단 댓글 때문에 누군가는 자살을 결심할만큼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위기서 14장에는 악성피부병 환자들을 다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 소개된다. 제사장이 진영 밖에 있는 환자를 진찰하고 그 환부가 나았으면 우슬초로 흐르는 물에 새의 피를 찍어 일곱번 뿌린다. 그리고 ‘정하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7일을 더 장막 밖에 머물게 한다. 이어서 8일 째 되는 날 속건제를 드리게 한다. 속건제는 해를 끼친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제사이다. ‘라숀 하라’로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해를 입힌 것에 대해 보상하는 제사인 것이다. 격리되었던 환자는 속건제를 드리며 완전히 죄사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로 복귀하게 된다. 따라서 악성 피부병에 대한 규례는 그들을 격리하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배제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다시 공동체로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잠시 격리와 참회의 시간을 허용했던 것이다.
예수님도 나병 환자를 만나셨다. “나를 깨끗케 해달라”는 그의 요청에 예수님은 그의 몸에 손을 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선포하신다. 그러자 그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지시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의 모든 부정함을 고치시는 분이시다. 불평하고 비난하고 원망을 쏟아내며 더럽혀지고 부정해진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과 공동체 앞으로 돌려보내시는 분이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위해 피 흘리셨다. 그 사실을 믿고 주님의 보혈을 우리 마음에 뿌릴 때 우리는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정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이렇게 권면했다. 롬 13:9-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남에게 악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 이웃, 우리 옆에 있는 친구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길 원하신다. 혐오 표현을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들의 상처가 보인다. 그들도 괴롭기에 자기 보다 약해보이는 대상을 찾아 자기의 괴로움을 쏟아내는 것이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쉽게 혐오의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다. 반면 자기와의 화해를 이룬 사람은 남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 자신과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정하다’는 느낌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정하다”는 선언을 받아야 한다. 요일 1:9절은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연약해서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백할 때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다시 정하다고 선언해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용서를 경험해야 우리는 원수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나에게 실수하고 잘못한 사람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나 자신도 더욱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해야 다른 사람들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주일학교 친구들이 학교에서 혐오 표현을 하지 않거나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 내 이웃인 친구들을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이 예수님 때문에 질 수 있는 십자가가 되길 바란다. 세상은 누구를 조롱하고 힘쎈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약해보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을 결국 존경하고 따르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게 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과연 나의 미래가 안전할지, 내가 앞으로 먹고 살 수는 있을지 두려움이 커져가고 있다. 두려움과 불안이 커질 때, 혐오가 그 어느때보다도 우리의 일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지금 세상은 예민하게 희생양을 찾고 있다. 교회는 지금 모이는 것만으로도 ‘개독’소리를 듣는다. 교회는 어느새 ‘혐오 집단’이 되었고, 신앙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신앙을 가지고 세상 앞에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혐오와 경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환대에 굶주려 있다. 진짜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다. 외모와 조건에 상관없이 나를 용납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을 찾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평가와 험한 말들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여러 평가와 판단의 말들로 지쳐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속마음은 나병보다 더 심하게 문드러져 있는 사람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거친 말과 혐오 표현으로 인해 부정하게 된 것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부정하게 된 자를 고치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죄의 문제에서 정함을 얻은 우리들이 혐오로 오염된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이 때야말로 우리가 혐오의 반응을 뛰어넘어 하나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때라고 믿는다.
그 사랑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까? Mr. Rogers’ Neighborhood라는 미국 TV 프로에 나오는 노래로 적용점을 찾고자 한다.
There are many ways to say, ‘I love you’
There are many ways to say, ‘I care about you’
Many ways, many ways
Many ways to say, ‘I love you’
There is the telling way to say, ‘I love you’
There is the telling something someone really like to hear
Feeding well, feeding well, feeding well to say, ‘I love you’
Cleaning up a room can say, ‘I love you’
Hanging up a coat before you’re asked to do it
Drawing special pictures for the holidays
And making plays
You’ll find many ways to say, ‘I love you’
You’ll find many ways to understand what love is
Many ways, many ways
Many ways to say, ‘I love you’
방을 청소하는 것도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따뜻한 말, 격려와 배려의 말을 하는 것도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정하게 되는 법
레 13:45-46 / 이익환 목사
지난 일주일 사이 이스라엘에서는 세 번의 테러가 있었다. 총 열 한 명이 사망했는데, 우려가 되는 점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총격 테러였다는 점이다. 이제 유대인만이 아니라 우리도 안전할 수 없겠다는 염려가 된다. 테러는 혐오의 극단적인 표현이다. 구약시대 나병 환자는 공동체에서 극혐의 대상이었다. 피부가 변해서 보기 흉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염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나병을 진단하고 그 대상자를 정결케 하는 과정이 나온다. 우리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 혐오대상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혐오가 확산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레 13:2-3,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여기서 ‘나병’은 히브리어로 ‘짜라아트(צרעת)’다. 그런데 짜라아트는 오늘날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나병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에는 옷과 집안의 벽에 피는 곰팡이도 ‘짜라아트’라고 표현된다. 따라서 짜라아트는 곰팡이균으로 인한 악성 피부병이라고 보는 게 좋다. 당시짜라아트의 증상을 점검하고 그 사람이 부정한지 정한지를 선언하는 것은 의사의 일이 아니었다. 제사장의 일이었다. 정한지 부정한지는 의료적 판단기준이 아니라 종교적 판단기준이기 때문이었다.
레 13:4,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피부가 희게 색점이 났지만 우묵하게 패이지 않고 털이 희지 않으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7일간 격리한다. 여기서 ‘가두어 둔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싸가르(סגר)’인데, 영어로는 ‘quarantine’이다. 일주일 격리는 구약시대 때부터 있었던 제도임을 알 수 있다. 레 13:6,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격리 후에 환부가 엷어졌으면 제사장은 음성판정을 내린다. 그리고 그 환자를 정하다고 선언한다.
자 그런데 양성 판정이 나면 어떻게 될까? 레 13:45-46,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확진 판정이 난 사람은 스스로 옷을 찢고 입을 가리며 자신이 부정한 자임을 알려야 했다. 그리고 병이 낫기까지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 공동체와는 완전 격리되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말은 ‘불결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부정하다’라는 말 ‘타메(טמא)’는 종교적인 의미로 더럽혀지고 부패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이 악성피부병의 주된 원인을 ‘라숀 하라(לשון הרע)’ 때문이라고 본다. ‘라숀 하라’는 ‘evil tongue, bad speech, 사악한 혀, 나쁜 말’이라는 뜻이다. 요즘으로 하면 ‘혐오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유대 랍비들은 ‘라숀 하라’가 우상숭배, 간음, 살인이라는 죄, 셋을 합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 그것은 동시에 세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나쁜 말이 그 말을 받는 대상 뿐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 자신과 그것을 옆에서 듣는 사람까지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리암도 모세에 대해 나쁘게 말하다가 나병에 걸린다. 짜라아트,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흔드는 것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결국 미리암은 짜라아트에 걸려 진영 밖으로 격리 조치된다. 그녀는 영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 공동체와의 교제에 부적합한 자가 되었기에 격리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짜라아트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리고 공동체와는 철저히 격리 되어야만 했다. 혼자 있는 그 시간은 참회의 시간이 되었고, 다시 죄에서 돌이켜 정결함을 얻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혐오의 언어들이 넘쳐난다. 특히 인터넷 댓글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면 잔인하고 파괴적인 혐오 표현들로 가득하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미국과 영국 내 온라인 혐오 발언이 20%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혐오는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삶이 힘들거나 위기가 오면 사람들은 좌절과 불안을 느낀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분노를 쏟아 낼 대상을 찾는다. 그런데 그 분노는 강자를 겨누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조지는 것이다. 혐오는 혐오 대상이 되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는 행위다. 혐오는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폭력인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혐오 표현을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그 사람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라숀 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약 3:6, 8-9,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성경은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쉽게 내뱉은 말이 누군가는 자살을 결심할 만큼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위기 14장에는 악성피부병 환자들을 다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 소개된다. 제사장이 진영 밖에 있는 환자를 진찰하고 그 환부가 나았으면 우슬초로 흐르는 물에 새의 피를 찍어 일곱 번 뿌린다. 그리고 ‘정하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7일을 더 장막 밖에 머물게 한다. 이어서 8일 째 되는 날 속건제를 드리게 한다. 속건제는 해를 끼친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제사이다. ‘라숀 하라’로 인해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해를 입힌 것에 대해 보상하는 제사인 것이다. 격리되었던 환자는 속건제를 드리며 완전히 죄사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로 복귀하게 된다. 따라서 악성 피부병에 대한 규례는 그들을 격리하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배제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다시 공동체로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잠시 격리와 참회의 시간을 허용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한 나병 환자를 만나셨다. 그는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말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된다. 구약시대에 짜라아트로 확진된 사람과 접촉하는 사람은 그 역시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은 철저한 격리와 거리두기로 부정한 자와의 접촉을 차단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신약시대에 와서 거룩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나누었다. 구약시대처럼 부정한 것에서 자신을 분리하고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한 것을 향해 나아가 그 부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으로 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상종하지 않았던 나병 환자에게 다가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정한 자와 접촉했음에도 그의 거룩이 훼손되지 않고 오히려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부정함을 아시고 고쳐주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악한 말로 더럽혀진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과 공동체 앞으로 돌려보내시는 분이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피 흘리셨다. 그 사실을 믿고 주님의 보혈을 우리 마음에 뿌릴 때 우리는 다시 정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가만 보면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부정결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 ‘나는 부정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나 권위자로부터 ‘라숀 하라’, 자신에 대한 안 좋은 평가의 말을 받아왔던 사람들은 낮은 자존감으로 신음하며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긴다. 살아오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여러가지 평가와 비판의 말을 들으며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게 된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나는 부정하다’라는 느낌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정하다”는 선언을 받아야 한다.
나쁜 말, ‘라숀 하라’의 근원은 무엇일까? 최초의 ‘라숀 하라’는 에덴동산에서, 뱀에 의해 저질러졌다. 뱀은 간교한 말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했다. 또한 아담과 하와를 교묘하게 속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했다. 뱀의 교활한 말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부정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도 멀어진다. 서로 안의 친밀함도 파괴된다. 바울은 말한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합법적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성경은 사탄을 ‘참소하는 자’(계 12:10)라고 말한다. 사탄의 참소로 인해 우리 인간 안에 부조화가 시작되었다. 서로를 미워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사탄의 참소와 그 영향 아래 나쁜 말을 하게 되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는 깊은 영적 상처를 받게 된다. 이것은 구약시대 짜라아트와 같은 영적 질병인 것이다. 즉 나쁜 말로 인해 부정하게 된 상태인 것이다. 사탄은 교묘한 말을 사용하여 세상에 사망을 선물했다. 우리 인류는 이 나쁜 말로 인해 영적인 사망을 경험하고 있다. 그 말과 참소에 의해 오염되면서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구약 시대 나병환자처럼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고 있는 듯 하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영혼이 그처럼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회와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이상 사망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우리를 부정하게 했던 모든 나쁜 말과 사망의 영향력을 끊어내야 한다.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계 12:10-11,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사탄의 참소, 라숀 하라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어린 양의 피의 능력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던 나병 환자처럼 예수님께 나아가 요청해야 한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부정하게 여기는 부분에 손을 대어 고치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 분을 통해 정함을 얻어야 한다. 그분에게 나의 부정함을 고백하며 “너는 정하게 되었다”는 그분의 선언을 들어야 한다.
혐오와 경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진짜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다. 외모와 조건에 상관없이 나를 용납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평가와 험한 말들로 인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속마음은 나병보다 더 심하게 문드러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라숀 하라, 거친 말과 혐오 표현으로 인해 부정하게 된 것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부정하게 된 자를 고치셨던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정함을 얻은 우리들은 이제 혐오로 오염된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 따뜻한 말, 격려의 말로 그들 안에 상처로 자리 잡은 짜라아트를 씻어줘야 한다. 바라기는 사망의 권세로 오염된 이 세상에 예수 생명의 권세를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정결케 하는 주의 은혜
레위기 13:38-46 / 홍승의 목사
레위기 11장부터 본문까지 계속되는데 어떤 내용이 나오고 있냐면 정결법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특별히 본문까지 읽은 13장 말씀은 사람의 피부에 나타나는 질병,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질병에 대해서 나타내고 있는데 13장 초반에 어떤 단어가 쓰이냐면, 나병이라는 단어가 쓰여서 사람들이 다 이것은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문둥병, 나병. 이 병을 이야기하나 보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13장에 나오는 이 피부에 나오는 질병은 우리가 아는 그 문둥병만을 얘기하는 질병이 아니다. 여기서 문둥병, 나병으로 번역한 단어는 원어로 ‘짜라아트’인데 47절에 가면 ‘악성 곰팡이’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13장에 나오는 피부의 질병은 꼭 굳이 나병, 한센병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안에 있었던 이스라엘 모든 피부질병들, 예를 들면 18절 말씀에 ‘종기’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하고 그외도 ‘화상,’ ‘옴,’ ‘오르라기’ 오늘 본문 비 정상적인 대머리까지. 일반적으로 피부에 나타나는 질병들을 총칭할때 쓰는 단어로 ‘나병’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일단 이스라엘 백성안에 피부병이 생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일단 제사장에게 가야 한다고 13장에 나온다. 제사장에게 가면 제사장은 세가지 선택중에 하나를 할 수 있다. 그 사람의 환부를 살표보고
1) 별거아닌 음성.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판명: 정결예식을 수행한 다음에 이스라엘 진, 원래 자기가 살의 터전으로 돌아가면된다.
2) 양성으로 판명되는 경우: 이스라엘 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바로 진 밖으로 추방을 당한다.
3) 양성인것 같기도 하고 음성인것 같기도 한 애매한 경우:
7일동안 한 장소에 격리되어 살표본다. 8일째 되는 날 한번 더 살표보고 그래도 7일정도 더 격리를 시켜서 그 환부를 잘 본 다음에 거기서 만약에 음성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정결예식을 한 다음에 다시 삶의 터전으로 가면 되는데 거기서 양성으로 나오면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이다. 7일 14일간의 격리를 통해 양성으로 판명되면 이것은 악성적인 피부질환이다라고 생각되면 그는. 이스라엘 진영밖으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것이다.
왜 악성 피부병을 가진 사람은 진 밖으로 쫓겨나가야 하는가? 여러 책에서는 공중위생, 공중 보건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더 큰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거룩한 공동체 정중앙에는 성소가 있다. 성소는 아주 거룩한 곳이다. 그 거룩한 곳을 중심으로 진영이 짜여 있는 것이다. 이 진영이 하는 역할이 무엇이냐면 그 거룩함을 보존함과 동시에 그 거룩함을 은총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진영밖으로 쫓김을 받는 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냐면 왜 쫓겨나야 하면 그저 공중의 위생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거룩한 곳을 보존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곳을 정결하게 유지 해야하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은 그 곳가운데서 쫓겨나야만 한다. 왜? 거룩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래야만 하는 족속들이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쫓겨난 사람들은 엄청난 슬픔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어떤 생동을 하는가?
45절 말씀을 보면 ‘윗입술을 가리다’라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수염을 가리다는 것이다. 세가지의 행동을 해야한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해치고 수염을 가리는 행동. 이 행동을 해야하는데 그냥 의미없는 행동이 아니라 이것이 구약성경을 보면 종종 나타나는 모습이다. 예를들면 어디서 나오냐면 야곱의 아들이 있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가? 요셉이었다.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시기를 받아서 요셉이형제들에 의해서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간다. 그런데 형제들이 자기들이 노예로 팔았다고 이야기 할 수없으니까 그의 색동옷을 벗기고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아버지 야곱에게 갖다 준 다음에 ‘요셉이 맹수한테 잡아 먹혔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가 그 색동옷을 받아 든 야곱이 ‘옷을 찢으며 슬퍼했다’라는 장면이 나온다.
‘옷을 찢는다’는것이 구약성경에 종종 등장하지만 옷을 찢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주 슬퍼하고 애통하되 어떤 것앞에서 애통하는 모습이냐? ‘죽음’ 이라는 것. 심판으로 인한 죽음. 죽음앞에서 애통해 하는 마음. 죽음앞에서 너무나 슬퍼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때 옷을 찢는다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해치고 윗입술을 가린다.’는 뜻은 에스겔에 24장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다. ‘너희 눈의 아름다움을 빼앗아 갈것이다.’ 즉 에스겔의 아내가 죽는다는 것이다. “에스겔! 너의 아내가 죽게 될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머리를 풀어 해치지 마라! 머리띠를 매라!수염을 가리지 마라!”
머리를 풀어해치고 수염을 가린다, 윗입술을 가린다는 것은 그냥 죽음 앞에서 엄청나게 애통해 하는 모습이다. 죽음앞에서 정말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표현할때 나타내는 단어이다. 오늘 본문에서 나병환자가 진밖으로 쫓겨남을 당한다. 나병환자가 거룩한 곳으로 부터 가장 먼 곳으로 추방을 당한다. 가장 하나님의 거룩함으로부터 가장 먼곳까지 쫓김을 당할때 그가 하는 행동은 ‘아 그냥 슬프다! 이제 뭐 먹고 살지!’ 이 정도의 슬픔이 아니고 지금 이 사람이 쫓겨나면서 하는 행동은 ‘곧 죽음을 맞딱드린 사람’ 하는 행동인 것이다.. 그가 진 밖으로 쫓겨난 순간, 그는 똑 같이 우리처럼 숨을 쉰다. 이전하고 똑 같이 이 땅을 밟고 살아가지만 그는 살았으나 살아있는 자가 아니다.
그가 진밖으로 쫓겨나는 순간. 그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나 똑 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미가서에서 어떤 말씀이 등장하냐면 미가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선견자)들에게 선포를 한다. 선견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못 받는 것이다. 원래 선견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선포하는 일이 선견자의 역할인데 하나님의 계시를 더 이상 못받는다. 그러니까 미가가 “너희는 머리를 풀어해치고 수염을 가리고 애통해라!” 왜? 살아있으나 살아갈 이유가 없다. 선견자가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를받기 위함인데 하나님의 계시를 못받는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똑 같은 너희들 슬퍼해라!” 이런 얘기를 할때 미가서에 그런 표현이 나온다.
오늘 본문에서 ‘나병환자가 진 밖으로 쫓겨난다.’ 는 것이 그냥 “ 아 슬프다 가족하고 헤어지겠구나” 정도가 아니라 이 사람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 우리처럼 똑 같이 보이지만, 좀 어려움은 보이겠지만 이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 부정하다” “ 부정하다” 다른 사람이 소리쳐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크게 외쳐야 한다. 이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크게 4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1) 육체적: 나병이 육체 안에 들어왔다. 육체 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태,
2) 공동체적: 거룩한 공동체에서 쫓겨나 버린 상태. 아무도 도와 줄 수 없다. 왜? 성경에서, 부정한 자를 정한자가 만지만 이 정한 자는 어떻게 되는가? 똑 같이 부정해지는 것이다. 민수기 12:7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시체와 나병환자이다. 아무도 이 나병환자를 접촉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가족도 도와 줄 수 없다. 왜? 이 사람을 대는 즉시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 사람을 도와 줄수 없다. 육체에는 죽음이 찾아왔고 가장 행복했던 공동체에서는 축출을 당했다.
3) 정서적: 자기 입술로 자기가 “부정하다 부정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이 심령이 이 정서가 이 감정이 온전한 상태이겠는가? 감정이 다 망가져 버린 상태.
4) 영적: 제일 슬픈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부터 가장 멀리 추방을 당했버린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 사람은 4가지의 죽음을 맞게 된것이다.
1) 육체적인,2)정서적인 3) 영적인 4) 공동체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되어 진것이다. 아무도 도와 줄수가 없다. 너무나 처참하고, 너무나 비참한 인생이 나병환자가 되어 버린것이다. 그런데 나병환자가 부정한 사람인데 훗날 성경에서는 이 나병환자를 누구라고 이야기 하는가? 바로 저 같은 사람들, 여러분 같은 사람들, 이사야 64장을 보면 이사야가 이 부정한 자의 범위를 어디 까지 확장 시키냐면 ‘모든 사람은 다 부정하다.’ 나병환자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부정하다.
이사야 64:6 /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사야가 어디까지 이 부정함을 확장시키냐면 진안에 있는 정하냐 그렇치 않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부정하다. 무슨 말인가? 여러분이 나병환자라는 것이다. 제가 바로 나병환자라는 것이다. 네가지 죽음을 당한 육체적인 정서적인 공동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우리는가장 비참한 사람들이다.라고 성경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 누군가는 와서 말로 위로를 해줄수는 있을 것이다. “불쌍하다 딱하다” 누가 와서 몰래 천사처럼와서 음식을 놔두고 갈수있다.. 내가 진 밖에 살고 있을때 누군가가 와서 음식을 떨어 뜨리고 갈 수는 있다. 그거 주워 먹을 수는 있다. 누군가는 와서 간접적으로 도와 줄 수는 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누가 우리를 도와 줄수 있겠는가? 왜? 우리를 닿는 자마다 부정하게 되기때문에 . 아무도 우리를 도와 줄수 없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줄수 없다. 그런데 성경에서 부정한것이 정하게 되는 유일한 한 사건이 있다. 전에 말씀 드렸다시피 부정한 것이 정한 것에 닿게 되면 정한것 마저 부정하게 되는데 부정한 것이 닿았을 때 정하게 되어지는 유일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닿으면 그것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예를들면,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신다. 떨기나무가 모세앞에 똘똘 굴러와서 불이 붙었는데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불은 무엇인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다.
“너가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의 신을 벗어라!”
아무 의미없는 광야의 땅이 하나님이 닿는 순간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33장을 가면 모세가 진 안에있는 거룩한 성소의 성막을 접고 진 밖으로 나가서 성막을 쫙 펼친다. 어떻게 되는가? 진밖에 있는 그 부정한 곳이, 진밖에 있는 그 정결하지 않은 땅이 성막을 펄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임했을때 그 땅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33: 7 /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여러분! 부정한 자를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사장이 아니다. 제사장이 기도해줘서 그 사람이 정해질수 없다. 제사장이 신비하게 능력을 전이시켜서 ( impartation) 정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은 그런 능력이 애초부터 없다. 그 사람자체도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직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방법. 그 방법은 하나님이 접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그 순간. 그때에만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그런데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접촉하신것이다. 빌립보서 말씀을 보면 뭐라고 나오는가?
빌립보서 2:6-8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이 원래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그는 근본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 같이 되셔섰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가운데)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를 정결케 하는 유일한 벙법은 예수님이 이 땅가운데 그 영존하신 하나님께서 이 더러운 이 부정한 삶가운데 찾아 들어 오셔서 우리를 만져주시는 사건. 이것이 우리가 정결케 되어지는 유일한 사건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자, 이것이 바로 감사인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레요한을 만나시고 회당에 있는 귀신을 내 쫓으시고 제일 먼저 하신일이 뭔가? 나병환자를 찾아가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제일 먼저 하시는 일, 이 땅에 있는 모든 부정한 자를 대표하는 나병환자를 예수님께서 찾아 가시는 것이다. 나병환자가 예수님 보자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예수님! 제가 정하게 되길 원합니다.”
마가복음 1:40 /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여기서 단어가 이상하지 않은가? ‘예수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얘기한것이 아니라 여기서 ‘정하게’되길 원합니다. 이뜻은 뭐냐면. 카탈리조라는 뜻인다. 이것은 어떻게 번역이 되냐면 Purify clean 단어이다. 나병에 걸린 사람이 와서 “나를 healing 고쳐주세요”가 아니라 “나를 정하게 purify clean하게 해달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가 정하게(깨끗하게) 되고 싶어하는 것은 뭐냐면 육체의 치유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병환자가 달려와서 나를 정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이야기할때는 네가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1) 육체의 질병을 낫게 해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2) 그의 무너진 정서 자기가 자기 입으로 부정하다 외치는 것 만큼 북한에서 인민재판하는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어디 있는가?
3) 공동체적으로 회복되고 싶다.
4) 가장중요한것. 하나님의 거룩함에 나아갈 수 있도록 거룩함을 회복하고 싶다.
네 가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댄적이 없다. 그가 진밖으로 쫓겨난 다음에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댄적이 없다. 왜? 그를 대는 자는 부정해 지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손을 뻐치셔서 그를 만지셨다. 왜? 하나님이 만지시면 정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지면 부정해 지겠거니와 하나님이 만지시면 정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탁 만졌다. 하나님이 그를 만지는 순간. 그가 정하게 되었다. 육체가 치유되었다. 육체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가 정하게 되어진것은 그 순간 그의 감정이 회복되어 지는 것이다. 그의 육체가 회복되는것이고 그의 신분이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것 그것이 구원의 사건인 것이다.
마가복음 1:41-42 /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만지심을 받으신 분들이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한 자들이 아닌가? 여러분들이 어느 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죄인되어 나병환자처럼 진밖에 쫓겨나서 죽음밖에 기다릴것이 없는 상태로 살고 있을때 하나님이여러분을 찾아 오셨고 여러분에게 손을 대셨다. 이제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인가? 육체가 정한 사람, 감정이 정한사람, 신분이 회복되었을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에 가장 가깝게 나아감으로 여러분의 신분이 변화되어졌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할때 단지 삶의 일부분을 올려드리는 기도를 하지 마시고
“하나님! 나를 만지시사 내 육체만이 회복되어 질 뿐만아니라 내 감정이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육체와 감정만이 회복될 뿐만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되어 질 수 있는 그 신분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신분만, 감정만, 육체만 강건해 지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이런 온전한 구원이 여러분의 삶가운데 머물러 있기를 축복합니다. 진밖에 쫓겨나서 구원받지 못한 자처럼 슬퍼하며 주저 앉아 있는 자같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만지심을 받은 자, 하나님의 접촉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입은 자처럼 그런 능력있는 삶으로 오늘 하루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디를 가든 그 거룩함을 삶으로 나타낼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의 성품으로 나타내실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의 감정으로, 여러분의 신분으로, 여러분의 거룩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시는 그 거룩하신 하루를 살아가시는 그런 하루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올려 드리면 어떨까 합니다. 하나님! 진밖에 쫓겨나서 그저 할 수 있는것은 옷을 찢고 수염을 가리고 그저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소리치며 살아있으나 죽은 자 같았던 저희입니다. 하나님!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죄인되었던 죄인, 죽어 마땅했던 사망에 있었던 죄인을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그 거룩한 손을 펼치시사 만져주셔서 우리가 거룩하여 졌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우리의 감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님!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감사제목입니다. 오늘 단 하루의 감사가 아니라 영원한 우리의 감사제목. 나를 거룩해 하신 하나님의 은혜, 삶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오늘 하루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마 나병에 관한 규례
레위기 13:38~46 / 김종호 목사
계속해서 문둥병 규례에 대한 말씀이다.
성경 말씀에 나오는 문둥병의 종류도 참 다양하다.
종기, 화상, 머리나 수염, 옴등의 문둥병에 이어 오늘은 대머리 문둥병에 대한 말씀이다.
부정한 문둥병만이 기록된 것이 아니고 오해 할 수 있는 정한 질병이나 외모도 있다.
오늘 말씀에는 3가지가 명시 되어 있다.
1. 피부에 발한 어루러기(39)
어루러기는 가벼운 습진이나 여드름 등을 말한다.
2. 머리털이 빠지는 대머리(40)
3. 앞머리가 빠지는 이마 대머리(41) 이다.
3가지 모두가 외모와 관련이 있다.
현재에 나도 해당이 되는 것이 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손등에서 팔 굼치까지 물사마귀인지(?)
아무튼 보기에 흉 할 정도로 작은 반점 같은 것이 오밀조밀 난 적이 있었다.
여름이라서 노출의 계절에 내가 보기에도 이쁘지 않았고
악수를 통해서 인사를 하거나 할 때에 창피함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어느날 참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하나님 나 참 수치스럽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자녀가 이것 때문에 이렇게 수치스러워서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원망하며 따지듯이 기도했었는데.........
너는 눈에 보이는 작은 반점 때문에 창피하게 생각하고
마음 안에 들어있는 분냄과 미움과 살인과 음란과 게으름과 거만함과
탐욕과 불의와 추악과 교만과 무정하고 무자비한 마음은 괞챤니???!!!
하시면서 자비를 베풀어 고쳐 주신 적이 있었다.
지금은 이마 대머리가 진행 중이다.
외모에 신경을 안쓸려고 해도 참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아멘.
성도는 외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추구하고
내면의 질서를 바로잡고 내면의 더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마땅하다.
단순히 머리카락이 빠지는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는 정하지만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있으면 문둥병이다.(42)
제사장이 그를 진찰해야 한다.(43)
특별히 본문 말씀에 문둥병자들의 규정이 있다.
1.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한다.(45)
구약에서 많이 보는 행동 들이다.
특히 슬퍼하거나 애통할 때에 많이 나타나는 행동 들이다.
문둥병자들은 자기 몸에 이런 병균이 있음을 원통하고 애통하는 표현으로 이렇게 하나보다.
2. 윗 입술을 가려야 한다.(45)
입술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중요한 곳인데
입술을 가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기뻐외치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하기 때문이다.
죄 가운데 있거나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런 경험들이 있다.
하나님을 목소리 높여 크게 찬양하고 싶은데 죄가 입술을 가리게 할 수 있다.
입술을 가리고 수치스럽게 크신 하나님을 작게 찬양하지 않도록 하자. 아멘.
3.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한다.(45)
하나님은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면 타인의 접근은 스스로 막아야 한다.
병균의 전염성 때문에 공동체를 위해서도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한다.
가만히 혼자 있는 것도 참 비참 할 텐데 스스로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칠려면 얼마나 비참할까 상상이 안간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도 안되고 죄인처럼 살아야하는 문둥병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영적 문둥병에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4.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아야 한다.(46)
하나님은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아내와 함께, 또 가정을 이루고 가족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책임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혼자 진 밖에서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나병은 죄악과 부정한 삶을 상징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정해 놓으셨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오늘 문둥병 환자의 4가지 규정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문둥병과 같은 죄악이 나를 틈타지 못하게 하옵소서.
공동체와 분리되고 사회와 격리 되는 일이 없도록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께 열매맺는 가지로 붙어 있게 하옵소서.
성령님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애통하는 일이 없도록
목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고 크게 기뻐하는 일에 방해 받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부정하다 외치며 혼자 진 밖에 쫒겨나는 일이 없도록
부정과 죄악을 멀리하며 스스로 겸비하여 거룩한 인생 되도록
성령님 도우시고 인도하옵소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