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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길 소녀소설>
봉숭아꽃물 들이던 시절 안방대의 꿈
<1>
안방대는 수업이 끝나자, 부리나케 책가방을 어깨에 걸머메고, 용례 문숙과 동아리 져서 서로서로 손잡고, 교실을 빠져나와 교정을 내려서더니, 곧장 운동장을 질러 사박사박 교문 쪽으로 향했다.
때마침 비홍산 하늘가 가로능선으로 지루하리만큼 길었던 하루해가 질듯 말듯 걸렸는데, 거기서 조명불빛마냥 날카로운 빛살이 눈부시게 쏘대는 데로 행여나 눈쌈하듯 눈을 마주 볼 순 없었으나, 안방대는 아랑곳없이 용례랑 문숙이랑 한껏 빗긴 햇빛을 머금은 얼굴을 마주하고, 어디론가 발을 내디딜 듯 말듯 망설이었으나, 막상 교문 밖으로 나와서는 마냥 머뭇머뭇 서성이면서 한가로이 입담을 마구 씹어뱉고 있었다.
“난, 암만해도, 진학 못할 것 같아!”
김용례가 눈꺼풀로 까만 동공을 덮었다가 거두었다가 문득 체념했듯 동공을 다시 감춰 보이더니, 무엇을 상기시켰는지, 자못 결심한 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 얼핏 가볍게나마 충격을 받았을까, 안방대가 적이 토라져서 마치 맞대갈 치듯 입술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야 나도 사정은 마찬가진데...”
“너넨, 우리보다 부유하잖아?”
안방대는 자신을 문숙의 처지와 싸잡아서 하는 말 같기도 했다.
“넌, 고교진학뿐이겠어?”
“일류대학도 거침없겠다, 얘?”
안방대의 말에 김용례가 놀라면서 받았다.
“어머, 얘 너, 착각하지 마라!”
“난, 본래, 공부에 취미도 없지만, 울 아버지 맨날 딸자식 높은 학교 보내봐야, 남의 집안 섬기는 출가외인걸, 아무 짝에도 쓰잘데없다고, 노래 부르시던데, 글쎄, 덤터기로 울 엄니, 지난달 또 내 밑으로, 셋째를 덜컥 낳으셨잖아? 깔깔깔... 울 아버지말씀이 설득력을 더하신 거야!”
“딸이 귀한 집에서 외동딸이라도 딸자식에게 목돈 앗기면서 가르쳐봐야, 큰돈만 아스러트릴 뿐, 남의 가문 섬기러 출가하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라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허탈감에 빠지실 건데, 만약 여러 딸에게 그런 일을 연거푸 당한다면... 가뜩이나 공부도 뛰어나지 못하면서 나마저 그리로 껴들어서나 어기대고. 진학의 꿈을 꾸기나하겠어? 깔깔깔...”
용례가 이러면서 목청을 돋우고, 소리를 드높이며 떠들어대는데...,
안방대가 그녀의 말에 열방망이가 치솟아 속이 울컥거리는가보았다.
“얘, 우린 울 엄니, 친정동네 옥산 살적만 해도 그렁저렁 잘 산 거야. 근데 용성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식구라야 몇 안 되는데, 양식마저 달려서나 삼시세끼 울 엄니, 뒤주바닥 박박 긁어대는 소리가 어찌나 처량하고 불안하고 안쓰러운지, 내 귀청을 자극해서 마냥 맘을 괴롭히는데, 그 적마다 내 속마저 뒤집어질 듯 바짝바짝 조여들잖아?“
안방대의 말에 용례가 입을 열면서 말을 이었다.
“쯔-쯧! 우린, 아버지께서 일정 때, 강제징용으로 일본 어딘가 탄광에 끌려갔다가 해방되자, 푼돈이나마 수중에 꼽쳐 와갖고, 척박한 논다랑이 겨우 사들여갖고, 거기에다 아버지께서 예전 할아버지 쩍부터 화전 일구던 허드레 땅 시전지물 보태서 시방 양식은 그렁저렁 잇는다지만, 십년 다되게 탄가루 호흡해서 아무리 쩡쩡한 청년시절이라도 시방 멀쩡하시겠느냐, 말이야?”
“그래서 돌아온 울 아버지는 시방 맨날 폐질로 콜록콜록 객혈까지 하시는데, 어찌어찌하다가 그 언제 큰일을 당할지도 모르잖아? 삼시세끼 입에 밥 들어갈 적마다 그렇지 않아도 한창나이에 창백한 낯빛으로 가구장이 없이 초췌한 아버지의 가녀린 목숨을 조이나싶잖겠어?”
용례의 말에 안방대는 지지 않고,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얘, 아버지 피 말리고, 목숨 조이긴 우리랑 뭐가 달라? 말도 마라!” “우린 용성동네 와서부터 손바닥만 한 다랑이논뙈기 짓는다고, 울 아버지 시커멓게 그을어서 막심한 두더지 꼴인데, 정작 양식조차 달지 못하고 있으니, 나도 진학은 벌써 글러서나 포기하고, 대구 울 명주오빠네 가서 공장사리라도 해감서 야간 다니기로 진작 작정해둔 거야!”
안방대가 열불을 토하듯이 말하자, 용례가 서둘러 입술을 두들기고 있었다.
“얘, 방대야! 넌, 그렇게라도 진학해서 대학 가라! 넌, 태생적으로 마스크가 우아하고 고아서 귀골이라, 고생 좀 되더라도 야간 나가 진학해서 공부 열심히 잘하면, 후제 틀림없이 잘 풀릴 거야!”
용례가 웃지도 않고, 말짱한 표정으로 정색하며 말하는데, 안방대는 그녀의 말이 허풍선이 같게만 들리는 것이다.
“어쮸. 넌, 관상가 영신(靈神)이 되더라도 네 밥벌이는 하겠다! 깔깔깔...”
“정말이야, 말이 있잖아? 우리 조선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인물 뜯어먹고 산다더라!”
“내가 시방 문득 생각나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담임선생님 손에 백묵가루 하얗게 날리면서 칠판에다 빽빽이 글씨 쓰며, 강의하시다가 문득 네 쪽으로 한번 눈을 보냈다면, 그 눈을 여간해서 딴 데로 얼른 못 돌리시더라!”
“사람을 보는 안목이야, 누구든 다 같아!” “내가 널 보기에도 우리 교실엔 날, 포함해서 값싼 닭들만 파득거려서 아무렇게나 너저분히 늘어놓은 시골장터 닭 전의 허술한 닭장풍경을 연상케 하는데, 넌, 그 중 학이야. 학! 백합꽃 같기도 하고, 휘영청 밝은 보름달밤아래 달꽃 같기도 하고, 아침이슬 머금은 함초롬한 꽃떨기 같기도 하고... 깔깔깔...”
용례가 자기 말에 취해서 깔깔거리자, 방대가 듣기에 곤혹스런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돌리면서 소리쳤다.
“어머머! 얘가 오늘 왜이래?... “김용례! 듣기 싫어!”
방대는 솔직히 용례가 자신을 부풀려 잠자리비행기 태우는 소리가 듣기에 거북하긴 했으나, 아주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불우한 형편을 돌아본다면, 용례의 말은 허깨비소리만 같아서 아무소리도 듣기가 싫은 것이다.
더욱 마음속에 작정해둔 방직공장을 운영한다는 대구 명주오빠네 집에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철부지 소녀의 막연한 무지개꿈일 뿐이었으나, 중학교 교문을 들어설 때부터 마음을 굳혔던 대구 오빠네는 잠재의식으로 굳건히 남아있었다.
게다가 김용례는 자기가 방금 아무렇게나 토악질하듯 쏟아놓은 말들을 못질이라도 하려는 듯 뜬금없이 입을 놀렸다.
“정말이야. 이 계집애야! 듣기 싫어도 할 수 없어!” “넌, 순홍의 새빨갛게 맵시 나는 잔작한 채송화 꽃떨기나 맨드라미마냥 앙증맞게 아리땁거나, 어여쁜 계집앤 아니야! 하지만, 그 곱고 우아함과 귀골로 빠진 자태는 본디 고아한 품격이 물씬 풍겨 보인다다니까! 깔깔깔..”
“얘, 정말, 참? 듣기 싫대도...”
안방대는 김용례의 못질하는 소리조차 정녕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서 듣기가 곤혹스러웠던지, 연신 혀를 차며 설레발치는데, 옆에서 듣고만 있던 문숙이 느닷없이 불쑥 용례한테 악담 비슷이 내지르고 있었다.
“김용례! 얘, 너, 안방대가 그렇게 좋거든 네 며느리 삼아라! 깔깔깔...”
이러는데, 문숙의 말은 분명히 어깃장 놓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일테면, 중학교동창생끼리 용례가 시집가서 아들을 낳아 성장한 뒤에 그 놈을 안방대와 혼인시켜 며느리를 삼으라니, 악담 치고는 저주스런 몹쓸 주둥아리이었고, 되레 부덕하기 짝이 없는 요사스런 계집애의 욕지거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안방대는 문숙의 말끝에 무심코 깔깔대더니, 맥없이 덩달아 웃어넘기고 마는 거였다.
그렇거나, 안방대는 용성 집에서 아침마다 집 마당가에 나아가서면, 으레 아침 해가 떠오르는 김용례가 산다는 들녘 끝 멀리로 아련히 보이는 버들골 뒷산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했다.
금천천 논다랑이를 스멀거리면서 흐르는 실개천 도랑물 건너서 무성한 갈대밭늪지대에서 삐죽삐죽 솟구쳐 올라 너울진 그 멀리로 아련하게나마 초가지붕들이 조가비모양으로 옹기종기 정겹게 번진 용례네 동네는 들녘 끝으로 아스라이 그 정겨운 모습으로 볼 적마다 막연하나마 부자들만 사는 부촌 같게만 느껴지는데, 안방대에겐 어느덧 그 촌락이 동경의 세계로 머릿속에 콕 박힌 미지의 동네이었다.
용례는 거기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했고, 안방대는 용성에서 가까운 데에 있는 비홍초등학교를 나와 서로가 비홍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비로소 기구한 운명처럼 그녀와 중학교 동창생으로 만났으리라.
그런데 안방대는 김용례를 만난 뒤부터 아련히 보이는 버들골이란 동네가 광산 김씨네 집성촌임을 알게 되었고, 국회의원을 비롯한 판사 검사 변호사 같은 법관들이 줄줄 나온 동네라는데, 그 위엄스런 서슬에는 기가 절이는 느낌조차 들기도 했다.
순흥 안 씨도 흔연한 김 씨에 비하면, 희귀 성씨랄 수 있겠으나, 예전 어른들 말씀에 안창호선생이라든가, 안중근의사 같은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들이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조상님들이란 화두가 늘 입에 오르곤 했기에, 뿌듯함을 간직할 수 있었으나, 그보다는 김용례네 동네가 더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부에 느껴져 부러워지는 때가 많았다.
더욱 아침 마당가에서 맞이하는 오늘의 태양이 용례네 동네 뒷동산에서 솟아오르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해서 웬일인지 황홀한 꿈처럼 머릿속에 아로새겨져있었다.
국회의원이라면, 그녀의 아버지와 엄니또래 어른들이 투표해서 당선시킨 지역출신 인물로 국민을 대표하는 민주주의국정을 논하는 훌륭한 정치가들 아니던가. 그 국회의원이 용례의 집안 오빠뻘이 된다고 했고, 더욱 한 동네 사람인데다 판검사나 변호사들이 죄다 용례네 피붙이들이고, 종씨들이라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얘가 울컥했는지, 진학을 못하겠다면서 강제징용에 끌려갔던 아버지의 슬픈 이야기까지 씨우적거렸으나, 그녀야말로 고교진학을 기화로 일류대학교의 대학생이 될 날이 머지않을 듯도 싶었다.
안방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용례가 뜬금없이 제의해왔다.
“방대야. 싸게 우리 집 가자!”
“어느새 해가 져서 어두워졌잖아?”
안방대는 그제야 사위를 둘러보는데, 어둠이 그을음처럼 온 누리에 채워들어 시계가 적이 침침해보였다. 게다가 동네마다 희미한 연하로 자욱하게 차단되어 용례랑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동안 해가 지는 줄도 몰랐으나, 이제껏 함께 있던 문숙은 언제 소리도 없이 지 큰엄마네 집으로 갔는지, 시계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내일부터 여름방학이라 용례가 제의한 게 틀림없었다.
며칠 전 교정에서 화단을 가꾸면서 봉숭아꽃물 들이러 가자고 했는데, 방대는 호기심이 일렁거려서 함께 가기로 약속했었다. 손톱에 꽃물 들이고 언감생심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그러나 방학이라 해방감이 솔깃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용례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의 태양은 비홍산 능선에 걸린 채로 질듯 말듯하였으나, 어느새 흔적도 없이 기여 능선을 넘어가 사라져있었고, 검정그림자만 짙게 낀 산등성이는 음험한 성채와도 같이 견고하게 둘러쳐져있었다.
<2>
안방대는 김용례의 아버지께서 폐질로 콜록콜록 기침하시면서 앓고 계시다는데, 뜨악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으나, 천연덕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고, 동경하는 버들골 가는 한길을 따라서 발을 내디뎠다.
한길에는 크고 작은 돌멩이 자갈들이 거칠게 나뒹굴고, 게다가 노면은 들쭉날쭉한데, 그리로 어둠이 내려앉으면 걷기가 사납겠지만, 친구를 따라 강남 가는 기분은 가벼운 운동화발이 한껏 거뜬하게만 느껴졌다.
“넌, 이제껏 이 길을 걸어서 통학했잖아?”
“그럼, 나뿐인가, 뭐?”
“다른 애들도 다 걸어서 다니고, 홍산 장날일 때에는 어른들도 장짐을 남부여대로 이고지고, 모두들 걸어서 다니는데, 이런 비포장 길에선 차라리 걸어서 다니는 게 쾌적하고 산뜻해! 어쩌다가 자동차가 빠른 속력으로 달릴라치면,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서 숨이 막히더라!”
졸졸졸...
“야, 삽다리에 왔다!”
“그래, 우리 집에서 삽다리까지는 학교까지 꼭 반 거리야!”
용례가 삽다리 다리목에 다다르자, 환호하면서 소리치는데, 안방대는 모름지기 나무다리 교판위에 도톰하게 채워진 흙을 밟고 건너자, 용례가 말을 건네면서 삽다리는 집에서 학교길이 반거리라고 했다.
그네는 다리를 떠받히고 선 통나무교각 위 교판을 딛고 다리를 건너면서 다리 밑으로 흐르는 도랑물소리를 꿈결처럼 들으며, 다리를 건너 저쪽 다리목에 이르자, 언제부터인가, 으레 고즈넉이 칙칙한 모습을 운명인양 뒤어쓰고 서있는 두 채의 집채를 의식하면서 지나쳤다.
마침 살랑바람이 시원한 밤공기를 타고 배회하자, 걷기가 꽤나 산뜻하고 청량하여 쾌적했다. 그러나 으레 빈집 두 채 앞을 지날 적마다 그 집에서 사람이 나타나 보인 적이 없었기에 저절로 발끝이 무엇에 쫓기듯 다리 밑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웬일인지, 그 요사스런 집채에서 나는 소리처럼 괴이쩍게 이명처럼 들리자, 용례가 앞장서 타박타박 뜀박질을 치는데, 안방대가 소리치면서 따라서 뛰지는 않았지만, 사뿐사뿐 얌전히 걸어서 천연덕스레 따라가고 있었다.
“김용례! 왜 뛰어가는 거야?”
“함께 가자! 방대야!” 난 다리 밑에서 나는 물소리가 저 빈집에서 나는 소리처럼 들려서 소름끼쳐!“
”왜, 다리 밑에 물소리가 갑자기 빈집에서 나는 것 같니? 빛이 반사하듯 소리도 반향이 있잖아?”
“옳아! 삽다리 밑에 물소리가 빈집건물에 부딪어서 반향으로 들리는 소리구나!”
안방대는 그제야 김용례의 말에 소리의 반향을 알아차렸다.
그네는 어둠침침한 밤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면서 한참을 걷자, 길가에는 또, 정미소가 괴물처럼 우뚝 서있는데, 여름철이라 건물만 허수아비처럼 서있을 뿐, 안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없었고, 그리로 드나드는 사람도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기에, 고적하게 서있는 정미소 건물마저 괴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방대야! 빨리 가자!”
용례가 느릿하게 걸어서 따르는 방대에게 걸음을 재촉했다.
“난, 빨리 못 걸어!”
“깔깔깔... 넌, 태생이 귀골이라 걸음도 차분하게 양반처럼 걷는구나!”
용례는 언젠가 아버지 친척들과 양반이야기가 나와서 들었는데, 광산 김씨가 양반이라면서 하는 말이 ‘순흥 안 씨도 양반이라고,’ 하던 말을 기억에서 더듬어서 하는 말이었다.
“어쮸쭈! 홍산은 울 집에서 가까운 장터지만, 장날이 돌아와도 걷기 싫어서 오일장에 별로 안 가는데, 이렇게 먼 길 걷긴 첨이야! 터벅거려지잖아? 깔깔깔...”
그네는 괴물처럼 보이던 정미소를 뒤로하고 스쳐 지나가서야, 참실 복숭아과수원 언덕배기를 넘어서자, 평행으로 곧게 트인 하얀 한길을 따라서 밟아서 가는데, 길 좌우로 웃자란 볏논에 농수가 흡족히 채워져서 벼들이 한창 꼿꼿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채워진 무논의 벼들 속으로 이따금씩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리고는 했다.
“용례야! 볏논에 물고기가 사는 거야?”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물고기들 노니는 소리 같니?”
“글쎄 말이야! 물고기가 아니고, 개구리들이 막 먹이를 잡아먹느라고 뛰거나 아니면, 뜸부기가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둥지를 트는 소리일 거야.” “나도 몇 번인가, 울 아버지 따라서 논에 들어가 피사리하다가 뜸부기가 벼줄기를 마구 꺾어놓고, 군데군데 둥지를 틀어놓은 데가 있더라.” “벼이삭이 가재눈깔처럼 톡톡 여물어 튼실하고 무지근히 매달렸는데 글쎄, 그렇게 다 익은 벼를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분질러 꺾어서 둥지를 튼 데가 여러 군데 보이는데, 꼭 심술쟁이가 심술부린 것만 같아서 데게 속상하더라! 당장 뜸부기를 잡아다 죽이고 싶은 분노가 치밀더라!“
“아! 뜸부기가 볏논에서 둥지 트는 소리구나!”
“우리 동네 용성에서도 볏논에 뜸부기가 살아! 근데 울 아버지는 내가 치맛자락 걷어 올리고, 무논에 들어가서 피사리하면, 막 못하게 말리신다!“
“그야 어느 부모님이든 아주 바쁜 농번기인 모내기철이 아니고선 어린 딸들 논배미 드나드는 걸 좋아하시겠어? 고은 허벅지살 억센 벼줄기가 어지럽게 할퀴면, 흉측스런 상처 나잖아?”
“게다가 후제 새신랑 맞으면, 신랑이 좋다고 하겠어?” 깔깔깔...
“얜 별소릴 다하네! 아-휴?”
안방대는 김용례의 말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철썩 철썩... 쏴...
“김용례!” “여기서 나는 물소리가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만 같은데?”
“아니야!” “우리가 지금 까치다리 위를 지나서 다리를 건너는 중이야!” “오른쪽 무논들에 벙벙하게 담긴 물이 물고를 빠져나와 이 까치다리 밑으로 몰려들어서 지금 한창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소리야!”
“어머나!” “너희 동네는 논배미마다 많은 물이 채워졌네!” 그러니, 벼가 웃자라서 벼 포기가 무성하게 자라잖아?”
“방대야, 이제 우리 동네 다 왔다!”
“여긴 뭐하는 데야?“
<3>
김용례가 울 동네 다 왔다고 소리치자, 안방대가 다리목의 큰집 춭입구에 새하얗게 둥실한 아크릴전구가 매달려 불을 밝히고 있자, 물었다. 출입구에는 크고 둥근 전구가 어둠을 쫓을 뿐 아니라, 그리로 건장한 남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질끈질끈 동여매고, 한창 바삐 드나드는 걸 보고, 무얼 하는 집인지 궁금했던지, 묻고 있었다.
“이 집이 술 빚는 집이야, 양조장!”
“아! 여기가 동성양조장이구나!” “우리 동네사람들도 여기서 빚어서 배달해오는 술을 즐겨 마시던데!“
“그래, 맞아, 술 빚는 양조장이야!”
“얘, 우리 집은 이리로 가는데, 싸게 가자!”
김용례는 앞장서 양조장에서 비치는 밝은 불빛을 따라서 맞은 쪽 골목길로 들어섰다.
양조장출입구에 매달린 축구공만한 우윳빛 아크릴전구에서 비치는 불빛은 마치 터널과도 같은 골목길로 기다란 그림자를 밟고 들어서자, 하늘을 가린 해묵은 나뭇가지로 우거진 나뭇잎들에 휩싸이는데, 나뭇가지로 울창한 잎들을 피워서 불빛에 비춰 그윽한 야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안방대는 비홍초등학교에도 이렇듯 벚나무가 울창했던 걸 되살리다가 학교라는 선입감이 들었는지 묻고 있었다.
“김용례!” “여긴, 네가 졸업한 초등학교 아니야?”
“맞아! 근데 난, 초등학교에서 너처럼 친한 친구가 없어서 별로 아름다운 추억 같은 기억이 나지 않아 별로 맘에 없어!”
“어머! 너도 나랑 같네!” “나도 초등학교는 육년 동안이나 하루같이 다녔지만, 별로야!” “고작 문숙이 있을 뿐이야!”
안방대도 김용례처럼 초등학교에 정감이 별로라고 대답했다.
“너희 집은 어디야?”
“이제 다 왔어! 여기 지나서 조금만 논두렁길로 거슬러 올라가면 돼!”
“너희 아버지께서 편찮으신데, 맛있는 것도 못 사갖고, 빈손으로 들어가기가 계면쩍은데 어떡하니?”
“괜찮아!” “아버지는 사랑채 방에서 혼자 계시니까, 모른척하고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가서 울 엄니 만난 뒤, 나랑 머릿방에 스며들어가 조용히 자면 돼!” ...“넌, 내가 가자고 해서 무심코 따라왔잖아?”
“괜히 맘 쓰지 마라! ...정이나 맘 안 놓이면, 나 따라와라!”
앞장서 가던 용례가 이러고선 문득 돌아서자, 안방대도 따라가던 발을 돌리고는 온 길을 다시 되짚어 걸어 나가는데, 용례가 동행하여 양조장 불빛을 따라서 큰길로 몇 발 옮겨갔을 때, 양조장 전등불빛을 받고, 밤에 빵떡을 굽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둘이는 부리나케 그리로 달려가 좁다란 공간에서 할머니와 마주앉았다.
“할머니! 방금 군 따끈한 것 하나 주세요! 얘도 하나 주시고요.”
둘이는 도톰하게 말랑말랑한 따끈한 빈대떡 모양의 빵떡을 하나씩 들더니, 호호 불면서 입으로 가져갔다.
“우리가 먼저 먹어봐야, 맛이 어떤지 알잖아! 호호호...”
“야! 달콤 달착지근하니 맛있다!”
그네는 빵떡 하나씩을 입에 베물고 우물거리더니, 값도 비싸지 않았기에 용례가 알아서 열 개를 사서 값을 치렀는데, 할머니가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싸서주는 대로 들고 일어섰다.
안방대는 그제야, 아무리 밤에라도 처음 가는 용례네 집에 그런대로 낯을 들고 들어갈 수 있겠다는 용기가 솟았다. 다욱 손에든 신문지뭉치가 따끈따끈해서 식기 전에 빨리 갖다드리고 싶은 것이다.
그네는 다시금 골목길을 따라서 나란히 벚나무 아래를 지나 어둠속으로 트인 논밭두렁길로 늘 동경하던 김용례네 버들골 들어가는 고불고불한 동구초입 길을 밟아서 들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드넓은 집 앞 바깥마당으로 들어서자, 생철지붕의 두레박 우물터가 있고, 그 안으로 몇 발 들어서자, 커다랗게 위용을 자랑하듯 대문이 굳게 닫혔는데, 용례가 성큼 댓돌위로 올라서더니 힘겹게 몸을 실어 대문을 밀치자, 삐거덕하는 큰소리가 밤의 고적을 깨면서 대문이 빠끔히 열리는데, 대문 열리는 소리가 어찌나 위엄스레 삼엄하게 들리는지 밤의 정적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안방대는 오금이 사뭇 절여오는 듯했다. 육중한 대문이 달린 대문간채만 보더라도, 안방대가 늘 잠재의식처럼 느꼈듯 부유한 집이 틀림없었고, 기가 절이는 위엄마저 온몸에 서리는 것이다.
“용례야, 왜 저물었니? 학교에서 늦게 끝났구나!”
그때 대문간에 전등불이 밝혀지면서 용례의 엄니로 보이는 쪽머리 뒤로 은비녀를 단정하게 꽂은 곱상한 낯빛의 인자하게만 보이는 여인이 방긋이 미소를 띠우면서 나타나서는 용례에게 따뜻한 말씨로 왜 저물었느냐, 학교에서 수업이 늦게 끝났구나, 하시면서 어머니들의 표상처럼 자상하게 묻는데, 용례가 대답하고 있었다.
“엄니, 낼부터 방학이라 친구랑 봉숭아꽃물 들이려고 함께 왔어요. 엄니!”
“방-학? 너희들은 좋겠다!”
“내일부터 방학 끝날 때까지 이른 아침 서둘러 아침밥 안 먹어도 되겠다! ... 친구는 어디 사는 친구야?”
“엄니, 저 건너 마주보이는 동네 용성 사는 친구 안방대예요!”
“안녕하세요! 용례 어머님! 용례랑 한반 동창에다 동갑나기예요.“
“오라, 안방대! 이름도 예쁘네! 우리 용례랑 동창에다 동갑나기친구구나!... 나도 안방대가 산다는 용성동네 알아! 언젠가 한번 갈대숲 지나서 가본 적이 있었다.”
“이름도 예쁘고, 밤에 보더라도, 얼굴이 매우 곱고 뽀얀데. 오호호.”
용례 어머니는 안방대에게 이름도 예쁘고, 밤인 데에도 얼굴빛이 매우 곱고 뽀얗다면서 밤이라서인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서 오호호, 수줍게 웃고 있었다.
“엄니, 얘는 본디 귀골이라 얼굴이 해사하고, 귀부인 같아요!”
“귀부인 같다니?”
“근데 뭘 이렇게 많이 사들고 왔어? 그런데, 안방대더러 귀부인 같다니?”
용례 엄니는 용례가 안방대에게 귀부인 같다는 소리에 발끈하더니, 책문하고 있었다. 용례나 안방대는 아직 어린 소녀들인데, 귀부인 같다는 비유는 마땅치 않다는 뜻일 거였다.
“친구가 아버지 편찮으시다고, 걱정하면서 빵떡 사갖고 왔어요!”
빵떡을 사기는 용례가 샀지만,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공부하는 어린 학생들인데, 너희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마음써가며, 이런 걸 다 샀니? 고맙다!”
용례 엄니는 신문지뭉치를 조금 풀어서 빵떡 한쪽을 떼어내서 입에 넣고 맛을 보더니, 맛있다면서 이내 그걸 들고 사랑채로 사라졌다.
그러나 용례 엄니는 곧 용례와 안방대가 마주 앉아있는 안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용례어머님, 용례아버님께서 일본 탄광에 끌려가신지 몇 년 만에 돌아오셨어요?”
“으-음...그러니까, 우리 용례 일곱 살적에 떠났으니, 여덟 해만이야!”
“어머나! 그럼, 그 동안 혼자 사셨어요?”
“그럼. 누구나 내외 단둘이 살다가 안에서나 밖에서나 하나가 나가 살게 되면, 혼자 살게 마련 아니겠어?” “그야, 강제징용이라 간주도 몇 푼 안 되지만, 행여나 처자식 장차 목구멍 풀칠하려고, 한도 끝도 없는 시커먼 탄구더기 막장 굴 구멍을 두더지마냥 뚫는 일을 한 것 어니겠어?”
“아버님은 그렇더라도, 어머님도 혼자 사시기가 버거우셨을 게 빤하잖아요?”
“허나, 나아가서 고생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집에 있는 처자식이야 아무리 고초가 심하다 하더라도, 신선이지 뭐?”
“그렇긴 하네요!”
안망대가 용례엄니의 말에 더는 할 말을 잊은 채 고개를 끄덕이자, 용례 엄니가 말했다.
“안방대 학생, 어서 용례랑 시원한 머릿방에 가서 자고, 내일은 울밑에 봉숭아꽃잎 따다가 손톱에 예쁘게 꽃물 들여 봐! 나도 구경 좀 하게! 오호호...”
“그럼, 어머님, 안녕히 주무세요!”
안방대는 이내 용례를 따라서 안방을 나와서 툇마루 끝 머릿방으로 들어가서 방안을 둘러보자니, 열어 젖뜨려진 문에 사뿐히 드리운 갈대발이 후덥지근할 더위에도 방안으로 산뜻하고 청량한 공기가 맴돌면서 방안의 공기를 시원하고, 개운하게 바꿔놓는 것이다.
“용례야! 아버님께서 팔 년 동안이나 낯선 타국 땅에서 고생하셨는데, 아버지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넌, 진학해서 공부 열심히 잘해야겠다!”
“그야, 정론은 그래, 그러나 생각과 맘먹은 현실이 쉬이 들어맞지는 않잖아!”
“너의 어머님은 아버님과 오랫동안 남편과 떨어져 사셨어도 흔적 없이 고우시고, 고운 마음씨가 겉으로 은은하게 나타나 보이는데, 대개 혼자 사시던 여자 분들에서 풍기는 거칠고 뻣센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네!”
“본디 울 엄니는 얌전하시다!”
“그러나 때에 따라선 데게 엄격하시기도 하신데, 벌써 딸만 셋을 낳으셨잖아? 아들 하나만 더 낳으시면, 바랄 게 없다고 입버릇처럼 빌어대신하시지만, 사람의 일은 용케도 목마르게 기다리는 일이 맘과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 거야! 마치 어디엔가, 심술쟁이 마귀가 숨어서 사람에게 근심걱정을 사서 갈구하게 만드는 것만 같더라.”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면서 천지신명님께 빌잖아?” 아직 모르지만, 맘과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드문 것 같은데, 사람들은 소원을 풀어 주십사하고, 신명님께 지극정성으로 빌잖아! 애처로운 일이야! 언제 하늘이 감천해서 엄니 소원이 정녕 이뤄질는지도 알 수 없으니 말이야?”
<4>
‘콜록콜록... 콜록콜록...’
안방대와 김용례는 시원한 머릿방에서 잠자리날개처럼 얄따란 여름 이브자리를 깔고 덮은 채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밤이 깊어 가는데, 정녕 사랑채에서 용례 아버지의 쇤 기침소리가 간헐적으로 연잇고 있었다. 안방대는 비몽사몽 깊은 잠을 못들인 채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났으나, 그녀는 용성 집에서처럼 해가 일찍 밝아오지 않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 벌써 아침 여덟 시가 지났는데, 여긴 이제야 해가 뜨나보네?”
안방대는 넌지시 벽에 걸린 벽시계에 시선을 꽂고 놀라고 있었다.
“우리 집에선 요즘 일곱 시에 일어나면, 너희 동네 버들골 뒷동산에서 눈부신 아침 해가 떠오른다. 근데 여기선 여덟 시가 훌쩍 지났는데도, 이제야 해가 뜨잖아? 깔깔깔...”
안방대는 밤새껏 잠을 이루지 못해 몽롱한 정신에도 천연스레 신기한 듯 떠들어대는데, 대문 여닫히는 소리가 연신 들리더니, 열어젖뜨려진 문밖으로 용례가 대문밖에서 두레박질로 물을 떠서 채웠을 물동이를 이고 안으로 들어서더니, 안마당을 질러 부엌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김용례!”
“오늘 봉숭아꽃물 들이거든 네 댕기머리 따 내리면 좋겠는데, 단발머리라 딸 수가 없겠네? 깔깔깔...”
“갑자기 무슨 댕기머린?”
“김용례, 물동이 머리에 이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단발머리는 안 어울리잖아?”
“으-응, 난, 또 무슨 소리인가 했네?”
안방대는 용례가 물동이를 부엌으로 이여 나르기를 마치고, 한동안 칼도마소리를 낸 뒤에는 용례 엄니가 아침 밥상을 차려들고, 사랑채로 간 뒤에야, 용례가 밥상을 들고 머릿방으로 들어왔을 때에 밥상 앞에 다가앉았다.
그때 용례엄니가 문밖에서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 용례친구 안방대!”
“반찬은 족하지 않아도, 밥 배부르게 많이 들어!”
“용례 어머님, 밥이 어찌나 기름지고 맛있는지, 구수한 된장국과 된장찌개가 어찌나 입에 당기는지, 수북이 퍼주신 고봉쌀밥 한 그릇을 벌써 비웠어요! 쩝쩝, 맛있어요. 어머님!”
“용례어머님, 아버님 병구완하시기 어려우시겠어요?”
“어렵기야하지, 그래도 수만리타국 징용 가서 소식도 없이 애간장 녹이는 것보다야 집에 함께 있으니, 외레 맘은 편하고 뿌듯해!”
용례엄니는 폐질로 고생하더라도, 집에서 함께 살아가니 마음은 편하고 뿌듯하다고 하시면서 남편의 우환에도 표정에 수심은 추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방대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말하자, 용례엄니는 놀라듯 다급히 용례를 부르고 있었다.
“용례야! 용례야! 싸게 가서 네 친구 밥 한 그릇 더 갖다 줘라!”
“아니에요, 용례어머님!”
“괜찮아! 용례야! 어서 싸게!” 후제 시집가서 아들딸 많이 낳으려면, 입맛 달 때, 많이많이 배부르게 먹어야해!” ...“용례야! 싸게!”
용례 엄니는 안방대의 사양에도 개의치 않고, 용례에게 다그치자, 용례가 부리나케 부엌으로 내닫더니, 수북이 푼 밥사발 두 개를 쟁반에 받쳐 들고 돌아와 안방대가 먹던 밥상위에 올려놓는 거였다.
안망대는 정말 밥이 맛있나보았다.
지난밤 한길을 따라 용례와 버들골을 오면서 길가의 무논들에서 농수가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넘쳐흘러 무성한 벼들이 물을 만 것 먹고 자라서 씨알을 톡톡 여물려서인지 밥맛이 입안에서 달콤한 맛마저 자아내었기에 또 한 그릇의 밥을 한 순간에 비웠다.
용례엄니는 안방대가 또 한 그릇의 하얀 쌀밥을 비웠다는 말에 생긋생긋 웃음을 흘리면서 대견한 듯 만족한 표정으로, 안마당을 스적스적 거닐고 있었다.
“안방대!” 싸게 나와서 도랑물에 손 씻고, 방에 들어가 얌전하게 앉아있어라!”
용례가 시키는 말에 안방대가 후닥닥 머릿방을 나와 대문을 나서더니, 우물가에서 두레박질을 하려고 하자, 용례가 대문을 열고 나와 소리쳤다.
“안방대! 그 아래 도랑으로 내려가서 흐르는 맑은 물에 씻어!”
“오라! 이 아래에도 도랑이 있었네!”
안방대가 두레박질로 우물물을 푸려다 말고, 아래쪽을 보는데, 물소리도 별로 나지 않으면서 옥수 같이 맑은 물밑으로 조약돌마냥 데그럭 데그럭한 차돌 박힌 좁다란 물길로 유리처럼 투명한 물이 벙벙 흐르는 게 보이는 거였다.
그러자 안방대는 얼른 몸을 돌려 그리로 달려가서 쪼그리고 앉아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손과 팔뚝을 박박 문질러 씻은 뒤에는 얼굴과 목덜미를 암팡스레 닦고 있었다.
지난밤 쾌적한 밤공기가 머릿방 갈대발 사이로 배회하여 곤히 잠들 수가 있었는데, 용례 아버지의 기침소리는 날이 샐 무렵까지 그침이 없었던 것이다.
“안방대, 아침에 세수는 했잖아? 손만 더 씻고, 얼른 들와!”
“대체 저 옥수같이 맑은 물이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무심코 흘러가는 거야?”
“뒷동산 깊은 골짜기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삼년가뭄에도 끊임이 없단다. 얘!”
“정말 내가 용성 우리 집 마당가에서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동경하던 버들골 뒷동산은 역시나 신령스런 영산이었구나! ...버들골은 역시살기 좋은 두메산골이었구나!”
“너도 이리로 시집와서 살아라!”
용례가 세숫수건을 던져주자, 안방대는 얼른 받아서 얼굴과 목의 물기를 닦아내고, 돌아서 용례가 기다리는 머릿방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안방대는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손가락마디마다 활짝 펴서 보이며 용례 앞에 연분홍빛 손톱을 드러내보였다.
<5>
용례는 봉숭아꽃잎을 따다가 종잇장처럼 겹쳐서 한주먹 쥔 채로 또 한 손에는 왕소금 한 줌을 쥐고, 가위로 적당히 잘라낸 소창에 봉숭아 꽃잎을 첩첩이 소금물을 먹여 안방대의 손톱에다 상처를 감싸듯 칭칭 동여매주었다.
“기왕이면, 열 손톱 다 물들인다?”
용례가 자의적으로 안방대의 손을 잡고 다부지게 말하자, 안방대가 용례의 손에 쥐인 손을 빼트리려고 하면서 묻고 있었다.
“용례야! 왼손 약지손톱이랑 새끼손톱만 들이면 안 되겠니?”
용례가 무작정 오른쪽 다섯 손톱마저 다 싸서 천으로 돌리면서 왼손 열 손톱을 다 물들이겠다고 하자, 안방대가 민망스러운지 놀라면서 왼손 약지손톱과 새끼손톱만 들이면 안 되겠느냐고 빼는 거였다.
“오호호... 안방대다운 센티구나!”
“나도 다 할 건데, 네가 빼면, 난, 어떡하라고? 깔깔깔...”
“아무리 소금물로 절인다고 하더라도, 화무십일홍이란다.” 타고난 꽃물도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데, 네 손톱에 꽃물이 며칠이나 가겠어?” 걱정 마라! 깔깔깔...”
그날 안방대는 봉숭아꽃물을 들인 뒤, 부질없이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잤겠다, 느림뱅이로 뜸들이여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난밤 오던 길로 되돌아가기는 다리가 아파 못 가겠다며, 갈대밭 늪지대로 금천천 도랑을 건너 지름길로 집에 돌아가겠노라고, 부진걸음으로 뒷걸음질 치듯 어물어물 용례네 집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용례는 그녀를 무심코 보내기가 섭섭했는지, 양조장이 있는 까치다리까지 느린 발길로 안방대를 뒤따라서 배웅을 나갔다.
양조장 출입구에는 지난밤처럼 크고 둥근 새하얀 아크릴전구가 천연스레 매달려있긴 했지만, 불이 꺼져서 전광은 없었으나, 까치다리 아래 요란한 물소리는 그제나 이제나 흐르는 물이 변함없이 요란한 물소리를 내면서 다리 밑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흘러나가고 있었다.
“안방대! 며칠 전 장맛비가 많이 내렸잖아? 길도 뚜렷치 않은 갈대밭 늪지대로 군데군데 물이 고였을 텐데, 계집애야! 겁도 없이 어떻게 가려고 나선 거야?”
“괜찮을 거야! 질러가면, 얼마 안 가서 금천천 도랑물에 통다리 돌멩이 딛고 건너면, 우리 동네사람들 거기 나와서 빨래도 하고, 김장 무 배추를 씻기도 하는 데라, 지름길로 거기까지만 다다르면, 집에 찾아가긴 문제없어!”
<6>
용례는 안방대가 갈 길을 어림잡으면서 자신 있게 말하였으나, 떠나보내기가 불안하기만 한 거였다.
”암튼, 조심해 잘 가라!“
김용례의 작별하는 말에 안방대는 벌겋게 물든 손가락을 내밀었다.
“얘야, 예쁘다! 네 손톱! 깔깔깔...” “너네 엄니가 뭐라고 하시거든 버들골 용례가 해줬다고, 솔직히 말씀드려라!”
“알았어!” “김용례!” “방학 끝나고 만나자!”
“그래, 그때 만나!”
이러고서 안방대는 논두렁길로 접어들더니, 이내 갈대가 어수선히 찝찝하게 뒤엉긴 어지러운 속으로 파고들어가 이내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조심해서 잘 가라!”
“그래, 괜찮아! 낯익은 길이야!”
허무의 강물이 흐르는 물가에서 안방대의 꿈은 편인처럼 흩어져 떠가고...
김용례는 안방대가 사라지자, 다시 한 번 조심해서 잘 가라고 거듭 당부했으나, 그녀는 갈대밭 늪지대에 조심조심 발을 내딛고 들어서면서 낯익은 길 같았던지, 길로 자란 갈대를 휘어잡으며, 타잔처럼 요리조리 발을 더듬어 내딛고 앞을 가늠하면서 갈대밭 깊숙이 길을 헤쳐 가는데, 연신 둘레거리며 길을 가늠하면서 가고 있었으나, 어느 지점에서인가는 어지러이 갈림길이 마구 갈래져서 어느 쪽으로 가야할는지 헷갈리는데, 그렇거나 그녀는 확신도 없이 불확실한 갈대사이를 제치고 가면서도, 길을 잘못 들었다는 의구심이 들어서 긴장감이 감도는데, 이제는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김용례를 여기서 다시금 부른다고 하더라도, 가마득히 멀어져서 부르는 소리에 반응이 없을 것만 같아서 뚝딱뚝딱 심장이 마구 뛰놀고 있었다.
금천천은 이쯤 갈대밭을 지나면, 뙈기 논다랑이들과 함께 나타나 보이는데, 워낙 오랜만에 가는 길이라, 이쪽저쪽 갈대사이로 트인 길을 기웃거려보지만, 논배미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길을 잃고, 갈대밭 속에서 헤맨다는 자의식이 일어나는데, 예전에 떠돌던 이야기에 어떤 남자가 술을 많이 먹고, 밤에 갈대밭 길을 걷다가 밤새도록 그 자리에서만 뱅뱅 돌면서 헤맸다는데, 이튿날 날이 샌 뒤에 보자니 밤새 갈대밭에서만 맴돌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에, 문득 멈칫 서서 기웃한 해를 쳐다보자니, 용례네 집에서 점심을 먹고 막 바로 뒷걸음질이나마 나섰기에 해는 기웃해있었으나, 해질녘은 아직 멀어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갈대사이를 연신 두리번거리면서 고인 물을 맨발로 조심조심 밟아가며, 꺾이어 밟히는 쓰러진 갈대 위를 조심조심 밟아가면서 갈대숲사이로 눈을 멀리로 보내어 용성동네 야산말랭이나마 찾아보고, 방향을 잡아 걸어서 갈대밭을 빠져나갈 수가 있었는데, 그제야 낯익은 무논들과 도랑에 가로놓인 디딤돌 통다리 하나가 갈대숲사이로 나타나 보이는 거였다.
안방대는 그제야 멈칫 서서 후-유하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언젠가는 아침에 도랑에까지 나가서 세수를 한 적도 있었으니, 이제는 집에 다 왔다는 느낌마저 들자, 그녀는 자신이 마치 길 잃은 새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어미 새의 둥지에 돌아온 환희로 들떠있었다.
<7>
그런데 더욱 도랑으로 경계를 지은 논두렁 저쪽에서 뜻밖에도 문숙이 오는 게 보이지 않은가. 문숙도 어느덧 안방대를 보았는지 소리쳐 묻고 있었다.
“방대야! 너, 시방 어디서 오는 길이야?”
그녀는 벌써 갈대밭 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안방대를 눈으로 가늠하면서 소리쳐 반기고 있었다.
“얘야, 나, 버들골 김용례네 집에 갔다가 온다!”
안방대는 자랑스레 말했다.
“지난밤 용례랑 걔네 집에 걸어서 갔다가 하룻밤 자고, 오늘 서둘러오는 길이야!“
”오메, 너 다리 아프겠다!”
”응, 나, 다리 아파! 다리가 시근시근해 말도 못해!”
“게다가 방금 갈대밭 속에서 길을 잃고, 한참동안 헤맸잖아!”
안방대는 도랑 디딤돌 맞은쪽으로 다가오는 문숙과 마주쳤다.
“계집애야, 넌, 어제 교문 밖에서 온다간다는 소리도 없이 몰래 어디 갔었니?”
“큰엄마네!”
“그찮으면, 너랑 김용례네 함께 갈 건데”,
“오늘 아침, 용례가 내 열 손톱에 봉숭아꽃물 다 들여 주더라! 난, 왼손 약지손톱이랑 새끼손톱만 해달랬는데, 글쎄, 심술궂게 열 손톱을 죄다 했잖아? .... 오늘은 내 생애에 두 번 다시없을 아름다운 추억이 틀림없을 거야!”
“어디, 한번 보자!”
안방대는 문숙이 눈을 크게 뜨고 대들자, 거침없이 열 손가락을 펴서 붉게 물든 손톱을 그녀의 눈앞에 내보였는데, 문숙이 황홀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보고 있었다. 손톱 뿐 아니라, 손가락 끝마디마다 벌겋게 봉숭아꽃물이 물들여져 있었다.
그러자, 문숙이 갑자기 겁에 질린 듯 몸을 치떨면서 말했다.
“어머! 너, 얘, 송장 파먹은 여우 발톱 같다야! 깔깔깔...”
“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소름끼치게...”
“... 얘, 울 큰엄마가 근데, 동성양조장 이층으로 크게 새로 짓는다고 하더라!”
“난, 몰라!”
문숙이 생경한 말을 꺼냈으나 안방대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방금 양조장 옆 까치다리에서 김용례랑 헤어져 갈대 벌로 질러서 온 건데, 용례도 그런 말 않던데?”
“어제 울 큰엄마네 온 손님이 옥산 임목수란 사람인데, 용례야, 한동네라도, 집질 목수본인이 꺼낸 말인데, 그런 소문이 그새 동네에 벌써 퍼졌겠니?” 소문이 퍼졌더라도, 어른들 입에서 입으로만 건너다니는 얘길 걔가 어떻게 알겠니?”
“암튼 난, 모르는 얘기야!”
안방대는 통다리를 밟고 건너서 문숙과 손을 잡고,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지난번 장맛비에 갈대 벌에 물이 많이 불어서 넘실거리던데, 비가 한 번 더 왔다간 통다리가 떠내려갈지 몰라?” “그러면, 또 애들 학교에 못 가 난리치는 것 아니야?”
“설마 그 만큼 비가 많이 더 오진 않겠지! 그야, 하늘 맘인데, 누가 알겠어?”
안방대는 문숙과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둘이 다 진학이 불확실한 전도를 놓고, 문숙은 졸업하고, 지 큰엄마네 집에서 일하기로 한 것과, 안방대는 대구의 명주오빠네로 가서 야간고등학교 다닌 뒤에 정규학교진학의 꿈을 이루겠다는 미로와도 같은 앞날을 다잡았기에 그 불확실성을 오롯이 끌안고, 자위적인 몸부림을 뒤틀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틀림없는 사실은 세월이 가서 여름방학이 끝나고, 중학교졸업장을 받아 쥐었는데, 김용례는 지 아버지의 등골만 뺀다면서 학창시절 내내 슬럼프에 빠지더니, 아예 시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8>
문숙이도 그녀의 큰엄마네 집에서 일하는 동안, 안방대는 숙명인양 일찌감치 대전행 버스를 타고, 대전기차역에 다다라, 기여 경부선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싣고, 낯선 대구에서 내려 명주오빠의 방직공장이 있는 침산동 오빠네 집을 찾아가 머물면서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오빠의 집에 머물러 날마다 해질녘에 저녁을 일찍이 먹고, 교과서와 공책을 챙겨든 채 학교에 나가곤 했다.
야간고등학교란 예전 중학교 교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머릿속 한켠에 상상으로 거무칙칙하게 그려놓은 자화상으로 머릿속을 차지하여 틀어박혔던 상투어였으나, 첫날부터 교실을 메운 허술한 차림의 학생들은 웬일인지 자신을 비롯해서 허접스런 룸펜들로만 보이는 건 그녀의 밑바닥에 깔렸던 자괴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도대체 교실에 채워든 학생들과 어엿한 대학생이 될 날은 날이 갈수록 묘원하게만 느껴지는데, 2학년 1학기를 마칠 때까지도, 그런 떳떳하지 못한 슬럼프에 빠진 느낌은 얼른 뇌리에서 말끔히 스러지지 않았고, 땟국처럼 거뭇하게 찌든 상념이 늘 시계에 도사리고 있었다.
<9>
오빠네 집에는 성격이 매우 수더분하고 온순한 올케와 그녀가 낳아놓은 어린 조카 셋이 있었는데, 안방대는 지극히 자연스레 어린 조카들을 돌보는 일을 어느덧 일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안방대는 타의적으로나마 꿈이 실현되어가고 있다고 볼 순 있었기에 가녀린 자부심은 가질 수가 있었다. 한데, 묘한 심리는 날이 갈수록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 뇌리로 새로이 파고들면서부터 머릿속을 어지럽게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자각지심이 들면서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데에도, 괜스레 맘이 편치 않아서 가리사니를 잡을 수가 없어지는 지경으로 달려가는 까닭은 자신조차 알 수가 없는 것이다.
<10>
야간이든 정규학교든 하찮은 직업이라도 갖고 있다면, 용돈이라도 벌어서 떳떳이 쓸 수가 있다지만, 아무 수입도 없으면서 오빠네 집에서 무의도식 끼니조차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자, 미안감은 더할 나위 없었고, 하루살기조차 마음이 마냥 안불망위인데, 이대로는 하루 한 시간도 더 버티기가 마치 지옥만 같아서 이전에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이질감 때문에 한순간도 붙어있기가 참으로 괴로운 시점에 다다르자, 까닭모를 굴욕감이 치솟는 반감을 스스로 감내하기가 실로 힘겨워지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지 않고선 배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두 해를 바득바득 보내었으나, 나래를 펴고, 비상을 꿈꾸던 안방대는 잠시도 더는 머물 수가 없었기에 야간고등학교 2학년 때 스스로 손톱만큼의 미련과 머릿속에 끊임없이 걸리적거리는 스트레스를 죽자 사자 떨쳐버리고, 학업을 포기한 채 용성의 정든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귀로에 접어들었다.
<11>
그때까지도 문숙은 지 큰엄마네 집에서 일하다가 끝내 집에서 가출했다고 했다. 그녀의 큰엄마는 아직 아기를 낳아 키운 경험이 없어서인지, 본성이 쌀쌀맞아 조카딸인 문숙에게조차 추호도 인정과 사랑을 베풀 줄 몰랐고, 매사 매몰찼던지, 면에서 인구조사를 겸하여 도민증을 내야한다는데, 그녀는 살맛 안 나는 세상에서 아주 사라지고 싶었던지, 시집가는 것도 포기하고, 차라리 비구니가 되어서 수덕사나 도선암 같은 정처의 산사로 들어가 몸을 숨기겠다는 소리를 내었는데, 인간의 정감을 모르는 그녀가 야멸찬 세상에 거부감이 소스라쳤던 건데, 그녀의 이러한 염세주의적 자포자기를 전해들은 그녀의 엄니가 딸을 비구니로 만드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겠다면서 서슬 퍼렇게 몸부림을 친다는 소리에 놀란 문숙이 엄니의 정마저 저버릴 수는 없었는지 그제야 비로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자, 격했던 그녀의 엄니가 성화를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는데, 집으로 돌아온 안방대는 그 무렵에야 문숙을 만났다.
시집도 안 간 어린 딸이 비구니가 된다고 설치는데, 처녀귀신 만드는 꼴을 어느 어미가 남의 일처럼 마냥 바라보고만 있었을까싶었다.
문숙이 말했다.
“니가 공부하러 집을 나갔다니까, ‘울 문숙이도 너 본봐서 가출하려한다고’, 억지소리를 한다며, 그녀의 엄니가 오해하는 바람에, 그 뒤 안방대는 문숙과 만나지도 못하고, 한동안 우울하게 지냈는데, 예전엔 삼천동과 용성동네가 타동네로 갈라져있었으나, 뒤에는 한동네가 되었는데, 문숙은 안방대보다 한 해 먼저 삼천동으로 시집을 갔다.
“방대야! 너, 김용례 시집간 것 알아?”
문숙은 어디서 누구한테 들었는지, 또 생경하게도 김용례가 시집갔다는 말을 전했다.
“어머! 김용례가 시집갔다고?”
“그래, 아주 찢어지게 가난한 집으로 갔대. 신랑 하나만보고 갔다는데, 탈탈 빈손에 가난뱅이신랑이라니? 누가 밥을 거저 먹여주니? 신랑 착실하면, 뭣해? 논밭뙈기 한 뼘에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어야, 목구멍 풀칠하잖아?”
문숙은 되레 김용례를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 없어!” 봉숭아꽃물 들이러 갔을 때 버들골 걔네 집 가봤는데, 용례네 친정은 데게 부잣집 같던데. 시집은 가난하더라도, 친정은 부자니까, 용례 부모님들께서 설마 시집간 딸 굶기기야하겠니? 근데 동성양조장을 옥산 임목수가 짓기로 했다는 말 들었다며?”
“으-응, 임목수가 울 큰엄니랑 주고받는 말 똑똑히 들었어!”
“내가 네 말 듣고, 가만 짐작해 보니까, 그 임목수가 울 엄마 친정 족속이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이 들더라!”
“동성양조장은 울 면에서 최고 부자야! 그 집 아들들도 미끈미끈 잘 생겼는데, 큰아들인가, 언제 새재 주막집에 거래처라고 왔을 때 보고, 울 큰엄마네 집에도 그런 관계로 왔을 때 난, 봤다!”
“넌, 동성양조장을 잘 아는구나!”
문숙이 삼천동으로 시집가고, 그전 해에 버들골 김용례가 가난뱅이 집으로 시집간 일들이 머릿속에 틀어박혔으나, 낯선 땅 대구의 침산동 명주오빠 집에서 체험한 단상들이 머리를 휘잡고 들어와서 뒤흔들어대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진학의 꿈을 안고, 두 해 남짓한 행로는 김용례나 문숙 그리고 안방대는 가파르던 진학의 길은 그만 접어두고, 그 외길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했다.
용례와 문숙은 그렇거니와,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행운의 열쇠를 쥐듯 설마 요행 같은 기대를 아직은 저버리지 못한 터였다. 문숙의 동성양조장을 옥산 임목수가 짓는다는 말은 가마득히 저 산 아래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로 귓바퀴에서 아련히 거리를 두고 맴돌았을 뿐이었다.
<12>
안망대의 엄니가 말했다.
“내겐 그 임목수란 사람이 친정으로 말하면, 오촌 재당숙이라 아저씨뻘인데, 양조장에서 목조이층집을 짓는다면, 이참에 한 몫 쥐겠네!”
“더욱 강원도 어디라나 홍송을 열 바리나 맞춰다 짓는다니, 돈이 얼마나 많으면, 금값을 호가한다는 홍송을 수년 전에 맞춰놓고, 그 원목을 재목감으로 들여다가 술도가 이층집을 번듯이 짓는다는데, 버들골 앞들 고래실논이 백마지기가 넘는다고, 재당숙이 호사롭게 말하더니만, 양석지기라도, 가을걷이에 이 백석은 넘지 않겠냐!”
“엄니!” “임천심(任天心), 저는 엄니 이름을 늘 한문으로 잊지 않고 되새겨요!”
안방대는 조석끼니때마다 임천심(任天心)이란 이름의 엄니가 마치 덩그렇게 빈 뒤주에다 쌀바가지를 박살내기라도 하려는 듯 뒤주의 밑바닥을 박박 긁어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남의 고래실논 백 마지기 타령이 듣기가 싫은 거였다. 학창시절 한자(漢字)시간이 돌아오면, 등줄기에 오한이 번져나 질색이었는데, 그때부터 취미를 느끼지 못하던 안방대는 그 어느 날인가, 교과과정으로 한문시간에 어설프게나마 배운 한문 실력으로 풀어본 엄니의 이름 뜻은 ‘하늘마음을 맡기다’ 아니면, 하늘같은 마음을 자신에게 맡기다 이었다. ‘하늘마음?’ ‘하늘마음?’ 도시 ‘하늘마음이란 무엇이며, 얼핏 생각으로도, ’하늘같이 드넓은 마음을 모름지기 자신에게 맡기다니, 도시 무슨 뜻이란 말일까.
“...임목수가 그러는데, 그 집 둘째아들이 너랑 찰떡궁합이라 썩 좋다고 하더라!”
“으-악!” “엄-니?”
안방대는 엄니가 슬그머니 꺼내놓은 말꼬리에 대뜸 거부감을 느꼈는지 목청을 돋우고 외마디소리를 치며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원망스레 엄니를 격하게 불렀다.
“방대야!” 넌, 설마하니, 문숙이 마냥 평생 시집도 안 가고, 비구니가 되어서 남자와 짝맞아 한 쌍의 부부가 되기는커녕, 아기가 배 속에서 자라도 시큰둥이 절간 정처에 들어가 평생을 처녀귀신이 된다면서 지 어매 속을 뒤집어서나 아무 죄도 없는 지 어매 애간장을 녹이고, 부아를 질러갖고, 억장이 무너지게 하지는 않겠지?”
안방대는 임천심 엄니의 간절한 말씀을 들은 얼마 뒤, 외척이라는 임목수가 두어 달 간격으로 그림자처럼 엄니와 아버지를 번갈아 만난 듯싶더니, 뜻밖에도 장차 남편이 될 낯선 남자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숨결마저 함께 나눠호흡하리만큼 마주앉아 엄니가 노래 부르듯 고래실논 백마지기에 황금알을 낳는 화수분 술도가의 부농 둘째아들답게 미남자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다가보니, 선입감에도 반하여 남자는 매우 건실하고 착실한 면모를 드러내 보였기에 만족스런 대로 그녀는 문숙이 삼천동으로 시집을 간지 일 년 만에 까치다리가 있고, 그 옆에 양조장과 축구 볼만한 아크릴 둥근 전구가 매달린 김용례의 친정동네 버들골과 이웃한 동네로 시집을 갔다.
<13>
어느덧 해가 바뀌고, 이듬해 첫 아기가 아홉 달쯤 만삭일 무렵 친정 용성을 다녀서 시집으로 돌아가던 길에서 실개천 통다리목을 밟고, 건너려던 참에 결혼 후 처음 만난 문숙은 낳은 지 열 달이라는 아들의 고사리 손을 잡은 채, 빨래를 하러 나왔는데, 그녀는 생경하게도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학창시절 아기자기한 정감이 아로새겨진 우정이 절어 붙은 감성 때문에 이제는 서로 출가해서 기우로 만남의 기쁨이 친정과 시집이란 주어진 이단의 횡보가 삶의 방정식이 울적하기만 했지만, 되레 우수를 자아내었기에 속으로 울먹이는데, 여자이기에 친정과 시집이라는 하나의 간극이 생성되어 두 사람사이를 아쉬움으로 끈끈히 묻어나게 하는 그러나 접착이 불가능한 접착제가 되어 옛정이 따끈따끈한 물기로 화끈거리는 눈망울을 촉촉이 적시게 하는 것이다.
<14>
새내기로 하얀 안개 속의 미로에서 단꿈처럼 사랑을 느낀 것은 잠시 착각일 수는 있었다. 아련하게나마 아롱져지는 빛들도 어느 날인가, 금천천 상류의 높푸른 초가을 하늘가에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오른 천둥산봉우리를 친정집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서 바라보던 때, 그 산봉우리를 에워싼 잔솔들이 웬일인지 거뭇거뭇 거칠게 부각되어 보이던 착시, 사랑이란 바보스런 어리석은 짓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미로의 미친 짓일지도 몰랐다.
근데 으레 그 거무데데한 산봉우리로 검정먹구름이 에워싸 가을비를 뿌리면서 달려들면, 만삭의 몸으로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빨래하러 온 문숙을 만나 괜스레 목메어 울먹거리던 날을 기억하면서 시집으로 달려가곤 했는데, 무심코 천진스레 순산한 첫딸 유미를 낳고부터 문숙이 고사리 같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만나던 그녀가 여왕처럼 머릿속으로 다가오는 까닭이 뭔지 몰랐다.
시집은 당초 부유한 큰살림이라, 없이 살아가는 집들처럼 가족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볼을 비비면서 애지중지 다정다감할 순 없었으리라, 때문에 시아버님, 시어머님, 큰아들 둘째아들, 또 그에 따른 맏며느리, 둘째 며느리 거기서 출산한 맏며느리의 자식들, 둘째며느리의 자식들, 그렇게 저렇게 무미건조하게나마 구분되어 제가끔 존재한다고 보아야했다. 그게 보편타당한 가족사이의 인격관이였고, 반드시 서로 존중되었기에 가난뱅이들처럼 시시콜콜 개개의 성격 같은 개성의 특질을 꼬박꼬박 꼬집어서 시시덕거리고, 정에 겨워 들뜨거나 매료되지 않았다.
근데 첫딸 수나를 낳고부터 보이지 않는 눈총과 질시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아니다 그걸 의식한다는 게 반대급부로 그녀가 그 누구에게 눈총을 주기는커녕, 일종의 죄악으로 인식되었던 거였다. 그것이 곧 원죄라고, 안방대는 스스로 일깨고 있었다.
언제인가, 김용례가 중학교 졸업 무렵 예사롭게 진학을 포기한다면서 말했듯 걔 엄니가 지난달 또 셋째 딸을 낳았다며, 남의 가문 일으킬 딸을 높은 학교 보내봐야 목돈만 으스러질 뿐이라는데, 그녀마저 진학하겠다고 껴들어 떼를 쓰겠느냐고 반문했듯, 내 사랑 첫딸 수나를 낳은 안방대는 김용례네 이웃동네 버들골을 떠나 교회가 있는 솔골동네로 남편과 함께 까치다리가 있는 술 빚는 동네를 숨소리도 내지 않고, 아주 조용히 떠나 둥지를 다시 틀었고, 목사님의 권고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의 영험함은 기여 둘째딸 수진을 하나 더한 뒤, 셋째에사` 아들 세규를 낳아놓았으니... 여하튼....
“기쁘다. 구주 오셨네!”
<15>
안방대는 김용례의 말마따나 군계일학이고, 휘영청 밝은 달밤의 달꽃과도 같았고, 우아하면서 곱기가 목련꽃에 비유된다면서 열 손톱을 죄다 봉숭아꽃물을 들여 주었지만, 하나도 고귀하지 못했다. 이렇듯 출가한 지, 수년 동안 남모르는 속앓이를 격고 난 뒤에는 잔잔하게 가슴속으로 희미한 감성으로 느껴지는 마음의 평화가 이어지던 무렵 적이 충격적인 풍파가 너울처럼 일렁거리면서 노도와 같이 무릎 앞에 달려들어 으르렁거렸다.
대구시 침산동 명주오빠의 방직공장은 설립초기부터 속내를 전혀 알 리 없는데, 안방대는 명주오빠의 대구 침산동 방직공장을 버릇처럼 되뇌었을 뿐, 오빠가 안고 있던 어떤 치명적인 모순과 그 회오리에 휘말려 그 충격에 빠졌는지, 엄연히 친정집의 장자로써 부모님을 모셔야할 명주오빠가 지극히 예사롭게 세상을 뜨는 허무하고, 놀라운 충격적인 일까지 터짐으로써 암튼 평민으로 살아가는 큰딸 금순언니가 있었지만, 안방대는 천심을 어디엔가 맡겼다는 임천심 엄니를 떠맡아 모시게 되는 수난곡절과 맞닥뜨렸는데, 게다가 바로 밑에 동생 방주는 가톨릭에 귀의하여 성직자로써 수녀가 되어 출가했으므로, 용성 친정 옛집은 저절로 공허한 바람이 소슬하게 배회하면서 비어있었다.
<16>
안방대는 남편이 지역유지들의 기대가 촉망되는 인물로 부상되어 이따금 그네와 무리지어 어울리는 그들만의 모임에 곧잘 참석했다. 그러나 공허한 허무를 연이어 맛보았던 그녀는 그네들과 잘 어울려지지 않았다. 이따금 남편과 연관된 부부들과 한데 모이곤 하였으나, 그네가 남편을 존경하고 보듬듯 그 아내로서 역할이 어울림에 자연스레 너울처럼 휩쓸려지지 못하는 자각증세가 뇌리를 아프게 스쳤으나, 모임이 있을 적마다 지역발전을 위해 건배했고, 초빙강사로 곧잘 뽑히던 남편이 쌓아올린 공력에 부응하려고 힘쓰면서도 동석 간에 어울러서 추대를 받아 받아들이면서도 그런 따뜻한 예우를 매끈하게 버무려서 모나지 않게 유연하기에는 자연스럽지 못했다. 지역에서 재력의 바탕이든, 남편의 빛나는 업적과 역할이든 아내로서 순조롭게 내조하기에는 개성적으로, 그 물정에 이질감이 없지 않았는지 몰랐다. 어림짐작으로 남편은 지역에서 큰일을 할 수 있는 신망을 쌓아올린 인물로 한때 국정에 관련한 대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각광받는 인물로 추앙받는 분위기를 넉히 알아차릴 순 있었으나, 남편은 그 호기를 타던 무렵 의외의 큰 사고에 부닥치고 말았다.
<17>
그런데 남편은 거기에서 실로 요행스레(?) 목숨은 잃지 않았으나, 사경을 헤맸고, 안방대는 그걸 기화로 얄삽한 수단으로, 한 물결로 몰아갈 수 있는 꾀꼴 피리를 불어제칠 신명까지는 이미 스러져 있었다.
그런 어느 날인가, 전초는 남편이 지역유지들과 함께 공적 여행 중 다른 차량이 달려들어 정면으로 맞부딪어서 충돌되는 바람에 뜻밖에도 남편은 치명상을 입었고, 급히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로부터 20일 동안을 꼬박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중상이었는데, 미운 고양이 딸 둘을 낳은 뒤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듯 독실한 신앙심으로 날마다 극진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린 끝에는 과연 목숨을 건지고 의식도 깨어나 퇴원할 수는 있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불의의 사고였으나, 불행에는 또 다른 불행이 덮치나보았다. 뜻밖에 터진 남편의 사고와는 비할 바가 없지만, 그와 때를 같이하여 설상가상이랄까,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위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는 놀라운 일까지 뒤를 잇는 회오리에 숨이 막힐 듯한 정황까지 몰아갔다.
결혼 후 처음 문숙을 만났을 때
“너는 좋겠다! 신랑이 잘해주지? 잘해주지?”
그때 그녀는 자기 얘기는 손톱만큼도 꺼내지 아니하고, 안방대의 신혼생활만 거듭해서 묻고, 또 묻고는 했는데, 그런 문숙은 눈망울에 글썽한 물기를 채우면서 더는 묻지도 못하고, 쓸쓸한 표정을 자아내었다.
문숙의 큰동서가 아기를 못 낳아서 문숙이 낳아 떼놓은 아들을 키운다는데, 일테면 그녀가 시동생의 자식을 키우는 셈이었는데, 한번은 그녀가 안망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방대야! 후제 아이가 자라서 지 엄마 보고 싶다며 조르고 떼쓰면, 그때 나는 어떡하지?”
“얘, 가만있어봐! 내가...?”
안방대는 이러고서 그네 집으로 달려가 중학교졸업사진첩에서 문숙의 사진을 찾아보았으나, 웬일인지 문숙의 사진은 안개 속처럼 얼굴이 흐릿해서 얼굴모습이 뚜렷치 않았기에 알아볼 수조차 없자, 허탈감을 끌안은 채 그냥 돌아서고 말았던 거였다.
<18>
안방대는 이런 문숙의 글썽이던 눈매의 표정과 언니랑 미묘한 표정들이 남편의 병상 앞에 있을 때, 활동사진마냥 머릿속으로 어지럽게 박혀 스멀거리고는 했다.
김용례의 엄니는 그녀를 가난뱅이 집안으로 시집을 보낸 뒤에도, 그토록 갈구하던 아들을 끝내 낳지 못하고, 딸만 둘을 더 낳았다는데, 용례는 시집가서 아들을 삼형제나 낳아서 끝내는 얄궂게도 친정어머니의 소원을 시집가서 풀고야 말았다는 얘기였다. 출가할 무렵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집도 차츰 소농가가 되어 그렁저렁 먹고사는 걱정시름을 덜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안방대는 남편이 갑작스런 사고를 당해 그 영육의 충격으로 쇠약해지면서 노년을 맞아 남편과 부부가 또 다른 평화를 되찾은 뒤는 젊어서 세상을 뜬 명주오빠,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뜨신 임천심 엄니와 아버지를 기리면서 혈육의 조상님들 명복을 비는 회억의 뜻으로 다례를 정성껏 올리기 시작했다. 뿐 아니라 다례의 엄준한 절차라든가, 예법을 익히고, 선양하면서 전통다례를 풍속화 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그녀는 버릇처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친정과 시집사이의 간극에 놓인 외줄타기 같은 그 길에서 아롱지는 이루지 못한 소녀의 꿈과, 허무의 통한으로 가슴을 치는 그 길을 꿈에서도 걸으면서 자화상을 파노라마처럼 그리고 있었다.
가깝고도 멀었던 오직 그녀만의 <길>을 안방대는 곧잘 시로써 읊조릴 때가 많았다.
둘 데 없는 / 마음 안고 / 쪽문 열고 나아가 바라보면 / 아스라이 머언 동네 / 내 건너 논두렁 지나 시집 온길 / 아지랑이 피일 때면 / 서러운 시집살이 / 눈물 훔치어 바라보던 길 / 갈 때면 단걸음 / 올 땐 백리길 / 오! 비밀 가득한 / 나의 길이여...
이 시구를 2년 전 어느 날인가 문학동인지에 실린 걸 보고, 감동하여 6년 전 내 곁을 떠나 멀리 아주 멀리로 떠나서 돌아오지 못하는 내 아내 김용례를 되살리면서 김용례가 중학교를 다녔더라면, 틀림없이 안방대와 동창생으로 친구가 되었으리란 생각을 곱씹으면서 그네의 소녀시절을 나름대로 허구한 상상으로나마 더듬적거려본 것이다. 구천을 떠도는 불귀의 객이 된 아내는 영혼이나마 위안이 되리라 믿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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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산 정안길회장님의 부탁으로 대신 올려드렸는데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아! 대우 이소준 실장님 제 가슴이 뜁니다! 2012년에서 2022년까지 10년간 '因緣'과 동행하셨던 이소준 시인과 재회하니 감개무량합니다. 많은 세월을 뒤로하고도 백마강 세상에서 사라지지않고 다시 만나다니? 백마강이 아니라 白馬長江이라고 명명해야할는지 아무튼 이소준 실장님과 다시 만나다니 갑자기 내 숨결이 벅차네요. 아! 내 생애에 가장 감동으로 벅찬 순간인가봅니다. 이제는 지난 10년간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내 손으로 글을 올렸는데, 이제 자작소설 글마저 부탁해야하는 격세지감에 휩싸이네요... 또 10년? 기약은 없으나 외쳐봅니다! ㅎㅎㅎ
<안방대랑 김용례가 중학교 동창이 아닌가요?>
대우님의 카카오톡에서 문의하신 내용을 여기서 답합니다.
실제 동창생은 아니었지만, 김용례의 동네 버들골과 안방대의 동네 용성은 같은 面內로 마주보는 동네이고 졸업한 초등학교는 서로 다르지만, 김용례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에 들어갔더라면 안방대가 다닌 비홍중학교에 들어가 동창생이 되었으리란 거죠. 안방대의 시 <길>은 '白江文學'에 게재된 작품을 2년전 내가 읽어보면서 주인공 안방대와 나의 아내가 동갑이란 사실도 알면서 나의 아내 김용례가 떠올라,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죠. 70대의 안방대 시인은 지역유지인 내또래의 부인이며, 나도 그네 부부의 생활상을 대충 알 정도이고, 안방대 시인은 용성에서 까치다리가 있는 버들골 이웃동네로 시집오셨으니 안방대의 시 <길>을 감상하자, 이내 머리속에 떠돌더군요.
오늘 다시 보내주신 원고로 수정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