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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어딘가에 존재하는 당신 편
2009.7.1.수요일
2009년 6월 29일 오전, 프랑스 북부도시 릴의 플랑드르 역 광장에서 자전거를 탄 남자가 멈춰섰다. 전화상으로만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 로랑이었다. 드물게 햇살이 무척 눈부신 날이었으므로 멀리서부터 나의 노란색 스카프를 단번에 알아봤다고 했다. 자전거에서 내린 그와 Nord pas de Calais 방송국까지 걸어가며 티셔츠 한 장 때문에 TGV를 타고 자신을 만나러 올 줄은 몰랐다는 그에게 겨우 1시간인 걸요, 라고 씩씩하게 답했다.
우리는 뭉쳐야 해요. 개개인은 약하니까요
딴: 반갑습니다. 로랑, 노무현 대통령의 티셔츠를 우선 먼저 보고 싶습니다. 그 티셔츠가 가짜나 합성이 아니냐는 의견도 올라왔습니다.
로랑: 그래요. 티셔츠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중략) 우선 입기 전에 보여드리죠. 어떤가요? 진짜인 게 보이죠?
딴: 사람사는 세상, 이 단어의 뜻을 알고 있습니까?
로랑: 네 알고 있습니다. 한글이라 막연하지만 뜻은 압니다. 대중들을 위한, 그들이 살만한 곳이라고요. 티셔츠를 만든 앙드레 리로부터 설명을 들었습니다.
딴: 맞습니다. 그가 평생을 걸쳐 이루고자 했던 목표였지요. 퇴임후 운영된 블로그 타이틀이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노무현에 대해 말해주겠습니까?
로랑: 보내주신 기사들을 주말 동안 읽어보았습니다. 이제는 좀 노무현이란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막연하던 것이 또렷해진 기분이에요. 사실 프랑스에서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알기는 어렵습니다.
로랑과 인터뷰를 위해 연락을 취하던 중, 뉴욕타임즈 르몽드, 피가로와 리베라씨옹 주로 연합뉴스의 기사를 소스로 한 노무현의 간단한 프로필이 담긴 서거 당시의 기사들을 보냈다. 2008년 5월의 촛불집회 당시의 외신 보도와 이명박의 정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분단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서
딴: 유럽과 한국은 좀 멀리에 있지요. 프랑스에서 한국이 생소한 나라인 건 당연합니다. 보통 자크 쉬락 이전의 프랑스 대통령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나저나 정말 비극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로랑: 그래요. 체 게바라처럼요. 그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신화적인 아이콘이 되었어요. 참 역설적이지만 비극적인 죽음이 종종 신화적 아이콘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
딴: 죽었긴 죽었으나, 그때부터 또 다른 의미로 사람들에게 남게 되는 것을 말씀하는 거군요. 로랑, 당신이 티셔츠를 입게 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하고 싶습니다. 앙드레 리가 티셔츠를 만들었고 제안했으므로, 그래서 단순히 입고 나왔나요?
로랑: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는 우리 방송국의 무대를 디자인했지요. 우리는 2개월을 갓 넘긴 신생 방송국입니다. 저도 프랑스 3 릴에서 이직 후에 이곳으로 왔습니다. 5월 어느날 앙드레가 무척 우울해 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무슨 일인지를 물었지요.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저였으므로 간단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를 잘 몰랐지만 한 사람이 목숨을 버렸다는 안타까운 사실이 제 가슴을 쳤습니다. 그래서 티셔츠를 입기로 결심했어요.
딴: 결국 티셔츠를 입은 건 당신의 뜻이었다는 거군요.
로랑: 나는 옷을 고르는데 내 자유의지를 갖습니다. 내 프로그램인걸요. 우선 프로그램에서 나의 역할은 앵커가 아닌 엠씨입니다. 분위기를 돋우고 진행을 하는 입장이에요. 뉴스 멘트를 하는 것처럼 정장을 갖출 필요가 없지요.
딴: 뉴스도 옷차림을 보면 프랑스 방송이 더 자유스럽더군요.
로랑: 네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옷을 입고 나올 수 있습니다. 방송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요. 예를 들어서 북한의 김정일이었다고 합시다. 나는 어쨌든 티셔츠를 입지 않았을 겁니다. 내키지 않은 건 거부할 수 있고 마음에 드는 것은 취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견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유가 없는 삶,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간단히 자신의 의견조차 표출 할 수 없다면 그게 바로 비극이지요. 프랑스에선 이런 견해를 드러내는데 제약이 없습니다. 철저히 개인적인 선택인걸요.
딴: 멀리 떨어진 한 나라의 대통령에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서 당신 역시 보편적인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로랑: 사람이 죽었습니다. 유럽이라고 해서 이런 정치적인 암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슷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었죠. 하지만 권력을 사이에 둔 싸움이었지 이것이 한 목숨이 사라질 때까지 전개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장갑을 던져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결투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어쨌든 한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이 있나요?
딴: 양심 없는 자본주의의 논리에서는 종종 사람의 인권과 생명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돈이고요. 정의와 신념을 이야기하면 이 자본주의 세상의 무서움을 모른 다는 듯 철없다는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참 두려운 논리입니다.
로랑: 우리는 오마쥬라는 단어를 감정적인 이해와 존경을 담은 마음 없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딴: 당신이 마음을 담아 티셔츠를 입었다니 왠지 뭉클한 기분이 됩니다. 당신의 연대의식이 또 다른 동기였나요? 프랑스는 연대 의식이 참 강한 나라지 않습니까? 끔찍한 수준의 파업에도 모두들 우선은 파업하는 주체들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입니다. 지금 빠리 10구의 구청앞에는 '우리는 불법체류자 출신 부모와 아이들의 편'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어있습니다.
로랑: 놀라운 일인가요? 우린 뭉쳐야 하지요. 개개인은 약하니까요. 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우린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부당함에 들고 일어서는 건 프랑스 사람들의 핏속에 흐르는 일종의 기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혁명을 한 것이 1789년이잖아요? 그때부터 시민사회를 이루기까지 우리도 역시 긴 근대화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딴: 단지 빠리만이 아닌 다른 지역까지 포함한다면 아직도 보수적인 지지층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땅이 기름지고 농업이 강한 프랑스에는 신분제도등 과거의 구습이 오랫동안 남아있었습니다. 땅을 가진 지주들과 소작농의 관계가 개선되기는 쉽지 않잖아요. 그리고 이 소작농들이 도시로 와서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지주들과 부르주아들이 쉽게 자본가로 정착한 것처럼요.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자의 삶의 질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주당 35시간이 법정 노동시간인 지금에 이르기까지(일을 많이 한다고 임금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35시간을 넘길 경우 초과시간에 따른 세금을 내야한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운동 역시 길고 지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로랑: 정확합니다. 이런 긴 과정을 거쳐오면서 사람들에게는 연대의식이 생겨난 거지요.
딴: 그렇다면 당신은 미디어 악법관련 각종 탄압을 받고 있는 한국의 언론인들에게도 연대의식을 느낍니까?
로랑: 물론 그렇습니다. 이런 연대 의식은 인종이나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분야의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란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들이 꼭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저널리스트들이 자신들이 전하고 싶은 바를 전할 수 없다면 그건 이미 저널로서 뉴스로서 존재하는 이유를 잃은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무얼 읽고 무얼 봐야 하죠? 언론이 정부와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된 광고로 전락하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역겨운 일입니다.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중립을 지켜야합니다. 과학기술에 도덕성이 결여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우리는 모두 핵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형제나라 북한을 포함해서 많은 나라들이 다만 이익과 국제사회에서의 경쟁성을 위해 핵을 쥐고 밀고당기기를 하지요. 다수가 나서서 정부의 정책이므로 옳지 않아도 국익을 위해 옳지 않은 일에 찬성해야 한다는 건 당치 않아요.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것을 계속 쥐고 있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대의를 말하지만 누군가는 온 몸을 던져 자신이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가지려 애씁니다. 더 많은 사람을 위해서요.
딴: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말씀하시는 거겠군요. 당신은 역사가 앞으로도 꾸준히 발전해 갈 것이라고 믿습니까?
로랑: 역사보다도, 사람들의 의식은 절대로 거꾸로 가지 않습니다. 역사는 후퇴하지 않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늘 발전해왔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늘 그곳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소수에 의해 이미 자주 진보의 과정이 훼손되곤 했습니다만 반대로, 이미 자유를 맛 본 사람들이 억압이 만연했던 시대로 돌아가려고 할까요? 만약 이런 시대를 역행하려는 시도가 있다 한들 그대로 내버려 둡니까? 미디어의 자유가 늘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늘 지켜져야 합니다.
딴: 현재 당신은 자유롭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방송을 하는데 이런저런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현재 사르코지가 언론을 탄압하고 싶어한다지만 실제적으로 언론을 장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가능과 불가능을 떠나서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며 못 견뎌하는 모습이요.
딴: 한국에서도 곳곳에서 연대의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직 프랑스 만큼 강한지는 모르겠지만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모금을 통해 추모광고를 했지요. 49재를 위한 추모광고도 진행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영화가 좋아서, 요리나 야구나 피겨스케이팅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 뜻을 모아 그들의 의지를 분연히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다시 한번 티셔츠를 입는다면 이제 그 분들과도 연대하는 셈이 되겠군요.
로랑; 49재가 뭔가요? 중요한 날이라면 그 날짜를 눈여겨 봐둬야 겠어요. 모금을 통해 광고를 한다니 놀랍습니다. 그에 비하면 제가 한 일, 티셔츠를 입는 건 좀 사소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뿐만이 아닌 한국을 넘어선 베트남 언론에서도 저에게 연락을 취해오고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에요.
딴: 티셔츠를 입는 행위가 사소하다 할 수 있지만, 사소한 일의 반향이 마냥 사소하란 법은 없으니까요. 나비효과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로랑: 맞아요. 이제 제가 모든 것을 좀 더 명확히 알게 된 이상 마냥 사소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참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언론의 자유, 사회적 연대, 보편성, 비극의 신화... 나는 이 티셔츠로 인해 당신과도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분 좋은 일입니다.
딴: 거리낄 것 없이 답하는 당신이 부럽다가도 마냥 부러워만 해선 안되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을 내어주어 고맙습니다.
나는 최선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앙드레: 나는 노무현 지지자였습니다. 2002년 대선에도 그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보며 참 기뻐했고 많은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만큼 실망도 많이 했어요. 특히 스크린 쿼터를 비롯한 부분에서요.
딴: 실망이 컸던 만큼 비판도 많이 했었나요?
앙드레: 기대가 컸으니까요. 그 드라마틱한 승리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종종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때는 마냥 이건 다 노무현 때문이다 라는 말이 인터넷 상에서는 놀이처럼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많은 아쉬움이 들었어요. 왜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기에만 바빴을까. 왜 우리가 그를 먼저 버렸나. 지나고 나면 무슨 일에든 후회가 남지만 이건 더 진하고 깊은 종류의 슬픔이었습니다. 당신은 서거 이후 무엇을 했습니까?
딴: 저는 빠리 분향소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기사를 썼습니다.
앙드레: 왜 기사를 쓰셨어요?
딴: 아시다시피 저는 한국으로부터 멀리에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생각했죠. 지구 반대편의 추모의 분위기를 전하고 싶었고 내가 쓸 수 있는 글로써, 뭔가를 할 수 있단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그 이후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앙드레: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추모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이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가 저에게는 또 다른 영감이 되었습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WEO 방송국의 무대 디자인을 맡고 이 방송국의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던 순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요. 아무리 수사과정이 시끄러웠어도 그가 자신의 고향에서 바위에 몸을 던질 거라 생각했던 사람은 없었던 것처럼요.
딴: 사람사는 세상을 굳이 한글로 넣으신 이유는요?
앙드레: 민주주의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바람을 평상시에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권이 위협받는 사회주의로 무장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좌파는 좌빨이라는 단어로, 색깔론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에요. 자본주의가 기능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다 증명된 일인데도요. 신자유주의의 무지막지함도 우리는 이제 다 보지 않았습니까. 사람사는 세상이란 단어는 그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이므로 함께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사소하더라도요.
딴: 함께 기억될겁니다. 그 바람이 로랑에게도, 그 뉴스를 보게 된 한국인들에게도 전해졌고 이런 반향을 일으켰다고 믿습니다. 로랑도 당신도 사소하다는 말을 했으나 이제는 결코 사소하다 할 수 없네요.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바람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프랑스보다 벨기에를 더 닮은 시내를 걷는 동안 이 도시를 오래 기억할 거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자켓과 스카프를 벗고 홀가분한 차림으로 대합실에 자리를 잡았다. 왠지 어깨가 든든했다. 동양인이 드물어 모두들 나를 흘긋거리고 있었는데도. 혼자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든든함이 당신들을 붙들어주는 힘이 되기를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 멀리에 떨어져 있지만 마냥 혼자는 아니지 않나. 보이지 않는 곳곳에 당신의 편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기억해 주시라. 세상 곳곳, 어딘가에 당신 편인 사람들이 있음을.
출처:딴지일보
첫댓글 프랑스라는 나라 알면 알수록 참 대단합니다.시민혁명의 후예들이라그런지 그마방 노무현대통려에 대해 한꺼번에 이해를 해버리군요...옳지않은것에 대한 반향...그들의 자유가 부럽습니다.지금 이시국에선 특히...
대단하게 생각 하는게 대단합니다. 공부좀 더 하셔야 될듯... 우리식의 <주권회복>,<권리장전>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에만 치우치는 어리석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마십쇼!~ 촛불때 프랑스 68 시민혁명과 마구 비교 하고 같다 붙이는거 보고 전 사실 놀랬습니다. 같은 서유럽에서도 실질적으로 사회,문화,학술,철학 적인 토대가 가장 늦게 이루어진게 프랑스 입니다. 실제보다 부풀려 진게 맞고요~ 감상적인 부러움 보다 현실적인 우리식의 대안 모색과 발전이 중요 하다는 취지로 글올립니다. (쥐뿔 낭만과 예술... 문화의 도시라구...) 공부 더 하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