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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9: 17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 고전 9: 18 값없이 전하고
고전 9: 17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
바울은 사도라는 특별한 직분을 받았다. ‘직분’이라는 원어(오이코노미아)는 ‘임무’라는 뜻이다. 바울은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복음 전도의 의무 아래 있고, 그 직분과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도 주께로부터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받았다. 목사와 장로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보살피는 임무를, 권사는 교인들을 격려, 권면하는 임무를, 집사는 교회의 재정 봉사의 임무를 맡았다. 교회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자신이 맡은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1]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자의로’라고 번역된 원어는 ‘자원해서, 자발적으로’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가 다 의무적으로 전임전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의 일반적 의무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말씀과 기도 가운데 경건하게 살고, 성경 말씀대로 죄 짓지 않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며, 또 힘있는 대로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신자 중 누가 육신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자원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전임전도자가 된다면, 그것은 상을 얻을 일이다.
주께서 요구하시는 신자의 의무 이상으로 자신을 주께 드릴 때 분명히 주께서 칭찬하시고 상을 주실 것이다. 모든 신자가 반드시 전도 대원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전도의 일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주께로부터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이다.
바울이 자발적인 선택으로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요 그에 대한 상이 있을 것이다.
'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도스'(*)는 '보상'(reward, KJV, NIV)을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로부터 강압적으로 복음 전도의 소명을 부여받았으므로 거기에 대해 어떠한 자랑거리나 보상이 있을 수 없다. 그는 단순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 행 26: 16 -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2]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안 페피스튜마이'(*)의 문자적인 뜻은 '나는 청지기직을 부여받았다'이다.
여기의 '청지기'(steward)는 '자유인'('freeman)과 상반되는 말로서, 청지기들은 노예 계급에 속했었다.
* 눅 12: 42-43 –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노예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고하여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엄한 처벌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본 절은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나는 노예로서 일을 수행할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堅持)하였음을 보여준다(Godet).
바울이 자신의 사명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 눅 17: 10 -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3] 복음을 전하는 사명 (고전 9: 16-17)
이 세상에는 나름대로 복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은 예수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인 줄 믿는다. 에베소서 1장 3절 이하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은 복을 가리켜서‘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했다. 그 복의 내용을 보면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는가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백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 할 수 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천국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영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게 된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언해주신다고 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하고 믿게 하는 역할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예수님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빠짐없이 모두 다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대로 이루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다. 사람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전도를 통하면 그 전도를 받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렇게 전도 받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이때 믿게 되는 사람들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 48절에「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했다. 우리가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작정한 사람,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며 영생을 누리기로 한 사람은 다 믿게 된다. 이렇게 성령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 속에 들어가 예수를 주로 믿게 만들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하여 성공을 했을 때 우리도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려 수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사람이 예수 믿게 됐으니 도우신 성령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해야 할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이루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 16: 15)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 지상명령으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우리의 사명으로 목숨 걸고 순종해야 하는 사명이다. 그래서 디도서 1장 1-3절에 사도 바울은「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 전도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평생 복음 전하는 일을 하다가 순교하였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을까?
(1)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전도를 위하여 기도하고 바쁜 중에 수고하고 양육하며 열심히 주의 일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은 아주 건강해질 줄 믿는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는 건강하고 성장한다.
교회에 분쟁이 있거나 좋지 못한 소문이 나는 교회들의 공통점은 전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집사나 장로들도 1년에 단 한 명도 전도하지 않는다. 주님의 지상명령에 신경 쓰지 않고 큰소리만 치다 보니 밤낮 교회가 시끄럽고 부흥이 되지 않고 병든 교회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 그 아이들이 장성해서 가정의 기둥이 되듯이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영적 자녀를 낳아야 한다. 전도하여 예수 믿게 하고 그 사람을 양육해서 그가 우리처럼 주를 위해 사는 일꾼이 되게 만들어서 구원의 열매가 맺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도 구원의 열매가 없다면 건강한 신자가 아니다. 병든 신자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그러자 뿌리까지 말라 죽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본보기다. 겉으로 보면 잎만 무성하여 예수 잘 믿는 것 같지만 구원의 열매는 하나도 없는 것은 저주 받을 일이다.
(2)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사도 바울은「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한다. 복음 전하는 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누구나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지, 그것을 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기 싫어도 부득불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있는 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성도들이 있는 한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깨어 기도하지 않고 전도 하지 않아서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고 교회에는 몇 사람 모여서 밤낮 분쟁하고 나쁜 소문만 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멸시하겠는가?
교회가 빛을 잃어버린다면 이 나라에는 하나님의 재앙이 임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다면 이 땅에서도 고통 속에서 지옥을 맛보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깨어 기도해야 하고, 반드시 전도(선교)해야 한다.
(3)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것은 지상에서도 천국을 맛보며 살게 하기 위함이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약속이다. 우리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고 행하도록 가르친다면, 주님이 너희와 끝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란다.
그뿐 아니라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보면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백배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밤낮 먹고 마시고 즐기며 쓸데없는 일에 빠져 산다고 하면 물질의 축복을 줄 필요가 없다.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타락하고 교만해진다면 오히려 더 불행해진다. 물질의 복을 구해도 응답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면서 생명까지 바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까워서 주시지 않겠는가?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게 된다.
(4)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것은 장차 천국에서 상을 주시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고,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는「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다.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을 주신다는 것을 성경이 아주 강조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받는 상은 일시적이지만 천국에서 받는 상은 영원한 영광이다.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순교한 사람이 천국에서 면류관을 쓰고 나타날 때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 영광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누가 주님의 제자입니까?「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 24)」이것이 제자 되는 길이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데 영혼 구원을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어떤 고난이라도 지고 충성하는 사람이 제자다. 고난을 안 받겠다는 것은 제자가 아니다.
전도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운동이 일어나길 바란다. 우리 성도님들이 이 운동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하여 각자 은사대로 봉사하면, 놀라운 구원의 열매가 나타날 줄 믿는다.
고전 9: 18 값없이 전하고 -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마땅한 의무이므로 거기에서 상을 기대할 것은 없다. 단지, 그의 상은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했고 그의 권리를 다 쓰지 않은 데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의무를 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상을 기대할 것이 없겠지만, 의무 이상을 행했을 때, 즉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행했을 때 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값없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다파논'(*)은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대가로 아무런 물질적인 부담을 지우지 아니한 것을 뜻한다.
2]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은 사도이었지만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삶을 살았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정당하지만, 바울은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자신을 절제하였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는 스스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그는 직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모든 복음 사역자들과 성도들에게 자기 절제의 본이 된다.
'다 쓰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카타크레사스다이'(*)는 '남용하다'나 '오용하다'의 뜻이 아니라 '남김없이 소모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부정은 부분 부정이 아니라 전체 부정으로 '일체 사용하지 않다'의 뜻이 된다(Lenski).
바울은 청지기, 즉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수 없는 노예로서 복음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노예도 주인으로부터 먹을 것과 입을 것은 공급받을 권리가 있었던 것 같이 바울도 그러한 권리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봉사하는 것과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것 자체를 자랑이며 보상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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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속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사랑과 행복으로 편안한 삶에 만사형통 하시고 즐겁게 아름다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