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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양전백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 선생은 명신학교, 신성중학교, 보성여학교 등의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으며, 105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자주독립을 주창했습니다.
●● 한학자에서 기독교인으로
선생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양반 가문의 후예로 증조부 슬하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한 선생은 15세에 과거 준비를 하기도 했으며, 1892년 김관근과 함께 서울 정동교회에서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접하고 평북 구성으로 돌아와 한문과 함께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 러일전쟁의 경험, 민족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다
1894년 12월 청일전쟁으로 평안도 일대가 온통 싸움터가 되어 학당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선생은 1896년 12월 평양에서 휘트모어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통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북지역에서 휘트모어와 함께 선천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를 세우고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선천 유지와 교인들의 찬조를 받아 초등교육기관으로 명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평북 일대의 교회들은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막사 또는 병원으로 징발되어 시설이 파괴되거나 불에 타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러일전쟁의 처참한 경험은 평북 일대의 교회들을 사실상 관장하던 선생에게 약소민족의 설움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선생은 1906년 선천읍교회 교인들과 함께 신성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1907년 보성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지도자를 양성하였고, 1908년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 민족구원의 신앙으로 무장한 한국 장로교회의 초대목사
1907년 6월 선생은 길선주 등과 함께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평안북도와 남만주 일대를 순행하는 목사로 2년간 시무했습니다.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선생을 비롯한 기독교 각 교파 교역자 17인을 초청해 일본시찰을 시키고 회유하려 했습니다. 선생을 비롯한 시찰단 일행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일제는 이듬해 10월 ‘데라우치 총독모살 미수사건’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선생을 비롯한 신성중학교 학생과 교사들을 체포했습니다.
모진 고문과 장기간의 법정투쟁 끝에 1913년 3월 무죄로 풀려나 1년 6개월 만에 다시 교단에 선 선생은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 제5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전국의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장로회의 원로 반열에 오른 선생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함으로써 또 한번의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 3·1 독립선언의 민족대표로 참여하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선생을 비롯한 29인의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출동한 순사들에 전원 연행되었습니다. 선생은 취조 과정에서 일제의 무단통치가 적합하지 않으며, 한국인은 일본인과 도저히 동화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마포의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선생은 선천 북교회의 담임목사로 다시 시무를 시작하였고, 1927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아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원에 머물며 교회사 자료를 수집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선천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다가 1933년 1월 17일 64세를 일기로 선천 천북동 자택에서 별세했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3월의 독립운동가 양전백 선생>
2013.3월의 독립운동가 양전백 목사
- 3ㆍ1운동의 불꽃을 점화시킨 민족대표 33인 -
장규식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강직과 자애의 신앙인, 격헌(格軒) 양전백(梁甸伯) 목사
(1870. 3. 10. ~ 1933. 1. 17.)
“선생은 웅변의 인(人)도 아니오, 문장의 인도 아니며, 팔면(八面) 활달한 사교의 인도 아니오, 기책(奇策) 종횡(縱橫)한 지략의 사(士)도 아니다.
다만 강직한 의의 인이며, 자애 깊은 정열의 인이다.
비리와 불의 앞에서 추호도 굴치 않는 마음, 빈천과 약자를 보고는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마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105인 사건의 주요 인물이자,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양전백 목사가 1933년 서거했을 때 『신학지남(神學指南)』에 실린 추도사의 한 대목이다. 불의에 굴하지 않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 동정을 아끼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람! 그것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을 하나로 엮어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양전백 목사의 일생을 오롯이 담은 헌사였다.
한학자에서 기독교인으로
양전백(梁甸伯)은 1870년 3월 10일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리에서 태어났다. 전백(甸伯)은 그의 자(字)이고, 본명은 섭(燮), 호(號)는 격헌(格軒)이다. 이를 통해 살필 수 있듯이 그는 비록 성리학 문화의 사각지대인 평안도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의 21세손임을 자부하는 양반 가문의 후예였다. 어려서 그는 증조부 슬하에서 한문을 배웠다.
9세 때 가세가 기울어 고향의 집과 논밭을 팔고 인근 고관면 관동리로 이사를 한 이후, 그는 입신양명과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과거 준비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15세에 이르러서는 시부(詩賦)에 능통하다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가세가 더욱 몰락하여 그의 집안은 의주군과 인접한 구성군 천마면 조림동으로 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조림동에서 그는 생계를 위해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 노릇을 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시간 나는대로 겨울에는 책을 읽고 여름에는 시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생계에 매여 학문에 진전이 없는 것을 안타까와 하던 양전백은 1888년 열아홉의 나이에 홀연히 서당 훈장을 그만 두고 빈 손으로 집을 떠났다. 그리고 동서남북을 유랑하다가 의주군 송장면의 한 작은 마을에 이르러 유학자로 근방에 이름을 날리던 이정로(李梃魯)를 찾아갔다. 이정로의 문하에서 새로운 경지의 한학에 접하며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은 그는 이듬해 집으로 돌아와 박영신(朴永信)이란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 이후 그는 유교 경전의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으로 다시 서당 훈장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가정을 이루고 서당 훈장을 다시 시작한지 3년이 지난 1892년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주에서 로스(John Ross) 목사의 한글 성경번역에 참여한 의주상인 백홍준(白鴻俊)의 사위인 김관근(金灌根)이 그를 찾아왔다. 김관근은 1889년 봄 압록강 배 위에서 아버지 김이련(金利鍊) 등과 함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이 무렵 예수교 조사(助事: 전도사)가 되어 평안북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김관근은 양전백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양전백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김관근은 그에 굴하지 않고 그 해 9월에 다시 찾아와 노잣돈을 댈 테니 함께 서울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였다.
양전백이 동의하자, 김관근은 그를 서울 정동교회(새문안교회의 전신)에서 열리고 있던 장로교회의 도사경회(都査經會)로 데리고 갔다.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공부하는 도사경회는 서울과 평안도, 황해도 일대의 교인 16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달동안 진행되었다. 얼떨결에 도사경회에 참석한 양전백은 모임에 나가며 기독교와 서구문명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었다.
도사경회를 마치고 구성으로 돌아온 양전백은 김관근의 아버지 김이련이 주선해 사기면 신시(新市)에 세운 학당의 교사로 초빙되어 한문과 함께 한글과 성경을 겸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교인과 학생 수십명과 더불어 학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실속은 여전히 유생이었다. 이렇게 절반 교인으로 생활을 하던 그가 세례를 받고 온전히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청일전쟁의 발발이었다.
청일전쟁으로 평안도 일대가 온통 싸움터가 되어 학당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양전백은 1894년 12월 집을 떠나 다시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그는 평양에서 활동하다 전쟁을 피해 서울로 와 있던 마펫(Samuel A. Moffett, 馬布三悅) 선교사를 만나 흉금을 터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1895년 마펫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신적 방랑생활을 마치고 온전히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세례를 받고 구성 신시로 돌아온 양전백은 집을 처분해 4백냥을 마련하고, 리(Graham Lee, 李吉咸) 선교사가 보낸 보조금 2백여 냥을 더하여 초가 6칸을 사들인 다음 수리를 해서 예배당으로 만들고 김관근을 조사로 세워 신시교회(新市敎會)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평양으로 마펫을 찾아가 권서(勸書) 직책을 받고, 평안도 일대를 돌아 다니며 복음서와 전도문서를 팔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다.
민족구원의 신앙으로 무장한 한국 장로교회의 초대 목사
1896년 12월 양전백은 평양에 새로 부임한 휘트모어(Norma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가 평안북도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자, 권서직을 그만 두고 그의 조사가 되어 동역을 하였다. 이 때부터 양전백은 휘트모어와 함께 선천에 거점을 마련하고 평안북도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를 설립하였다. 선천에서 그는 각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던 두 무리의 교인들을 규합해 1897년 가을 선천읍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각지를 돌며 전도에 힘쓴 결과 1898년 12개 교회에 세례교인이 53명이던 것이 1899년 26개 교회에 세례교인 202명으로 커다란 증가를 기록하였다.
이같은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00년에는 평양에서 독립한 독자적인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기지(Mission Station)가 선천에 설립되었다. 그와 함께 양전백은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선천 유지와 교인들의 찬조를 받아 초등교육기관으로 명신학교(明信學校)를 설립하였다. 창립 당시 교회 전도실에서 12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명신학교는 1901년 부속 여자소학교를 설립하며 점차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1902년 2월 양전백은 선천읍교회의 장로로 안수를 받았는데, 이로써 선천읍교회는 조직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장로회 평북시찰회가 조직된 것도 이 때였다. 이듬해 그는 장로회공의회의 결의로 평양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생으로 추천을 받아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신학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초창기 장로회신학교는 각 장로회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교육을 담당했는데, 한 달동안 수업을 받고 석 달동안 목회하는 방식으로 1년에 석 달씩 모두 5년간에 걸쳐 코스를 마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양전백이 신학교 2년차에 들어가던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와중에서 주요 싸움터 가운데 하나였던 평안북도 일대의 교회들은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막사 또는 병원으로 징발되어 시설이 파괴되거나 불에 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러일전쟁의 처참한 경험은 평안북도 일대의 교회들을 사실상 관장하던 양전백에게 약소민족의 설움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불붙은 민족의식은 그를 기독교 신앙과 민족을 아우르는 민족구원의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하였는데, 그 첫 결실이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의 설립이었다.
신성중학교는 을사늑약의 체결로 전국에 교육구국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던 1906년 양전백을 비롯한 선천읍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하였다. 명의상의 초대 교장은 휘트모어 선교사였지만, 학교 재정과 교과 운영은 전적으로 한국인들이 담당하였다. 초기에 선천읍교회의 공간을 빌려 26명의 학생에 6인의 교사진으로 출발한 신성중학교는 1909년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미국 독지가의 기부금을 받아 교사와 기숙사를 신축하고 학교의 경영권을 넘겨 받음으로써 미션 스쿨로 개편되었다. 이 때 신성중학교의 2대 교장으로 부임한 맥큔(George S. McCune, 尹山溫) 선교사는 모교인 파크대학의 교육방침을 원용하여 공작부와 농장을 설치하고 3H(Head, Heart, Hand) 곧 지(智)·덕(德)·공(工)의 집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백낙준·이대위·계병호·박형룡·김선량·김양선·장준하·계훈제 등 한국의 기독교계와 민족을 이끈 수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양전백과 선천읍교회 교인들은 1907년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를 설립하여 여성지도자를 길러내는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미주 교포들이 보내온 성금으로 1908년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1907년 6월 양전백은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이기풍, 한석진과 함께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들 7인은 석달 뒤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가 조직되자,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 장로교회의 초대 목사들이 되었다. 당시 38세로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학식에 있어서는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은 양전백은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평안북도와 남만주 일대를 순행하는 목사로 2년간을 시무하였다. 그리고 1909년 선천읍교회(1911년 선천북교회로 개칭)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선천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일궈내며 평생토록 섬겼다.
105인사건의 와중에서
선천읍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 양전백은 교회와 학교를 오가며 민족구원의 신앙을 실천에 옮겼다. 1910년에 명신학교의 교장을 맡아 교실을 건축하여 2백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1910년과 1911년 YMCA 제1,2회 학생 하령회(夏令會)에 연사로 참여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 구원을 위한 삶의 헌신에 대해 설파하였다.
한편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1910년 가을 양전백, 이상재, 최병헌 등 한국내 각 교파의 명망있는 교역자 17인을 초청해 일본시찰을 시켰다. 일본의 발전된 문물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주눅 들게 하여 회유 포섭하려는 속셈에서였다. 그러나 시찰단 일행은 기죽지 않고 일본의 정치가와 종교가들 앞에서 일본의 풍요한 물질문명과 종교 도덕의 빈곤을 대비시키며 그것을 풍자하였다고 한다. 시찰에서 돌아온 양전백은 사람들에게 “영국이 100년에 걸쳐 이룩한 사업을 일본이 30년만에 이루었다면 한국인이 이를 10년에 이루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며 종교 도덕의 각성과 각종 사업에 힘쓸 것을 격려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회유가 먹히지 않자 일제는 그 대신 압박정책을 실행하기에 이르는데, 그 과정에서 터져 나온 것이 ‘데라우치(寺內)총독모살미수사건’ 이른바 ‘105인사건’이었다.
이른바 ‘105인사건’은 일제가 관서지방의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혐의 내용은 평안도 일대의 반일인사들이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가까운 시일 내에 관서지방을 순시한다는 소문을 듣고 1910년 9월부터 12월까지 수차에 걸쳐 기독교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동원해 경의선 연변에 있는 평양, 선천, 정주, 신의주 등지의 정거장에서 권총으로 총독을 암살하려는 모의를 했으나 사실이 와전되고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미수에 그쳤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작된 사건으로 1911년 10월 양준명을 비롯한 선천 신성중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이 대거 검거될 때 양전백 또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모두 389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양전백을 포함한 123명이 경무총감부에 의해 정식 기소되었다. 기소 과정에서 양전백은 일제 관헌에게 상상을 초월한 고문을 당했다. 그에 대해 당시 그와 같은 감방을 썼던 선우훈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양전백 목사는 그 성명을 모르는 이 없이 교계의 태두로 존숭을 받는 성자다운 어른이시다. 밤 9시경에 수갑찬 손에 콩밥 한 움쿰을 들고 다리를 절며 의복을 거두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방안에 들어서서 미친 사람같이 손바닥에 콩밥만 핥어 잡수신다. 머리털 전부가 뽑혔고, 한 개 수염도 없었다. 내 곁에 앉았으되 반죽음 상태가 된 그는 문안도 없고 대답도 없다”
결국 양전백은 다른 122명과 함께 1912년 5월에 기소되어 6월 28일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공판중 기소자들은 사건이 고문에 의해 날조되었다며 완강한 공판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재판을 강행하여 9월 28일 123명중 105명에 대해 징역 5년에서 10년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선천지역 신민회의 주요 간부로 분류된 양전백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105명은 모두 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항소심은 경성복심법원에서 11월 26일부터 1913년 3월 20일까지 5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1심 공판 과정에서 사건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자, 항소심부터는 피고인들이 신청한 증인과 증거 제출이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항소심 판결에서 윤치호, 양기탁, 임치정, 이승훈, 안태국, 옥관빈 등 6인을 제외한 99인이 무죄 방면되었다.
무죄로 풀려나 1년 6개월만에 다시 교단에 선 양전백은 심중한 태도로 “나는 이제 교직(敎職)을 그만두어야 되겠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재감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이 입으로 거짓말을 하였으니, 주의 교단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고 한다. 이 한 마디 말에 수천의 청중들은 일제히 통곡으로 응답을 했고, 결국 그의 사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1914년 평북노회장에 피선된 데 이어,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 제5대 총회장에 선출됨으로써 전국의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떠올랐다.
독립선언의 민족대표로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장로교회의 원로 반열에 오른 양전백은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함으로써 또 한번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양전백이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1919년 2월 6일경이었다. 그날 저녁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간부로 활약하던 선우혁(鮮于赫)이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선우혁은 신성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그와 함께 옥고를 치른 막역한 사이였다. 그는 양전백의 집에서 하루 밤을 유숙하며 양전백에게 1월부터 프랑스 파리 근교의 베르사유궁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전승국과 중립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데,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金奎植)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을 부탁하였다. 선우혁에게서 이번 파리강화회의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가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라는 소식을 들은 양전백은 독립운동의 취지에 동감을 표하면서, 그러나 당장은 경찰의 단속이 심해 모금이 어려우니 일단 압록강 건너 만주 안동현으로 가 있으라고 답을 하였다. 때마침 선천에서는 약 30명의 목사와 80, 90명의 장로, 그리고 천여 명의 교인이 참석한 대규모의 사경회(査經會)가 열리고 있었다.
이렇게 독립운동의 기운이 점차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2월 8일 일본 토쿄에서 한국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정부와 의회에 발송하고, YMCA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국내에서도 독립운동 거사를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계와의 교섭을 위해 급히 상경할 것을 요망한다는 최남선의 전언이 2월 9일경 인편으로 선천 사경회에 참석하고 있던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에게 전달되었다. 최남선의 연락을 받고 급거 상경한 이승훈은 2월 11일 서울 계동 김성수의 거처에서 송진우와 만나 기독교계를 움직여 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에 쾌히 승낙을 하고, 남대문밖교회에 들러 함태영 조사의 동의를 구한 뒤 동지 규합을 위해 선천으로 향하였다. 2월 12일 선천에서는 사경회에 이어 평북노회가 열렸는데, 노회를 마친 뒤 양전백의 집에서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이승훈, 이명룡 등 5인의 목사와 장로가 따로 모여 이승훈이 서울 다녀온 소식을 듣고 거사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이승훈은 2월 14일 평양 기홀병원에서 길선주, 신홍식 목사와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고 승낙을 얻어냈다.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힌 양전백은 평양에서 열린 교회 집회에서 함태영을 만나 그에게 일본 정부와 제국의회, 조선총독부에 보낼 문서에 날인할 도장을 맡겼다. 당초 그는 독립운동의 방식으로 독립선언이 아닌 독립청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거사 직전까지 제1진으로 50명이 독립청원서를 내고, 그 사람들이 체포되면 다음으로 제2진, 제3진이 나서 다시 독립청원을 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기독교계 인사들 다수의 생각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상징적인 독립선언보다는 일제 당국에 청원을 하는 것이 보다 실효성 있는 독립의 방안이라고 판단했던 것같다. 그러나 2월 23일 밤 남대문밖교회 함태영 조사의 사택에서 열린 제2차 장·감 지도자 연석회의에서 독립운동의 일원화를 위해 독립선언서의 발표를 주장하는 천도교측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함으로써 방침을 바꾸었다. 아무튼 양전백은 거사일이 3월 1일로 정해졌으니 거기에 맞춰 반드시 상경하기 바란다는 이승훈의 연락을 받고 그 전날인 2월 28일 밤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하여 근처 여관에서 하루 밤을 유숙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오전 10시에 함태영의 사택을 방문하여 거사 장소를 확인하였다. 이 때 그는 함태영에게서 독립선언서 인쇄물을 건네 받고 비로소 독립선언으로 방침이 바뀐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대의를 위해 함께 하기로 하고, 독립선언식이 열리는 종로 인사동의 명월관지점 태화관으로 향하였다.
독립선언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중에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열렸다. 그리고 3시경에 출동한 순사들에게 전원이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취조 과정에서 양전백은 일제의 무단통치가 적합하지 않으며, 한국인은 일본인과 도저히 동화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21년 11월 4일 마포 공덕리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을 하였다.
출옥후 양전백은 선천북교회의 담임목사로 다시 시무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그는 목회에 힘쓰는 한편으로 1917년 인가 취소를 당해 서당제로 명맥을 유지하던 명신학교의 재건에 착수하여 1923년 반양식 교사를 신축하고 이듬해 9월 6년제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유지들의 기부로 56,236원의 재산을 모아 1926년 재단법인 허가를 얻어냈다. 이후 50대 말에 이르러 그는 목회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말년의 작업으로 1927년부터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아 서울의 피어선성경학원에 머물며 교회사 자료를 수집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선천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다가 1933년 1월 17일에 64세를 일기로 선천 천북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1895년부터 근 40년동안 권서로, 조사로, 목사로 교회와 민족을 섬긴 양전백은 12만여 리에 달하는 거리를 전도 여행하며 3천명이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평안북도 선천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가꾼 장본인이었는데, 그것은 비단 교회 방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방면에서 도시의 모범을 만드는 사업이기도 하였다. 특히 명신학교와 선천중학교, 보성여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진 그의 교육사업은 선천을 민족교육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장례는 1월 21일 5천여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남궁억 박사의 사회 아래 기독교연합사회장으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치러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영신과의 슬하에 2남(윤모·윤직) 4녀(윤성·윤정·윤숙·윤도)를 두었다.
1962년 3월 1일 삼일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