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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 [질문] 임진왜란 당시 각궁, 활, 대포 , 조총, 기병 등에 대해..
율리우스카이사르133 추천 0 조회 1,911 08.08.21 02:42 댓글 8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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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8.22 18:06

    뭐 그런 견지로 보면 신립의 대응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습죠. 오데로 튈지모르는 후덜덜한 규모의 전투를 하자고 하는 거 자체가 무자비한 압박이었다고 할까요. 문제는 위의 델카이저님이 말씀하신 군대중간계층의 부재로 애초에 병력통제가 될리가 없었다는점. 결과 ㅎㄷㄷ한 탈영율, 근접전기피등 그동안 안 아프던 복합골절이 하필 출발선상에 서니까 도진 꼴의 조선군대.. =안습이라능

  • 08.08.23 00:09

    동감입니다. 싸움도 제대로 해본적 없는 병사들이 태반인데 사활을 건 전투에서 제대로 싸울리도 없을테고 도망갈곳은 없다 배수진이 백병전 싫어하는 병사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방법이었을것... 노련한 병사들도 아니고 산악기습이 잘 될리도 없고, 역시 병사들의 상태를 잘 알고 있던 신립의 판단

  • 08.08.23 13:25

    탄금대전투에 대해서는 제가 쓴 글을 읽어보시길 부탁드립니다아. 신립에 대한 재평가는 임진전란사에서 주로 시작된듯 한데, 실제 신립에 대해, 탄금대 전투에 대해, 그리고 그 전장등에 대해 알아보면 신립의 대한 평가가 조선시대의 주류 평가로 다시 돌아감을 느낄수 있습니다아아아.

  • 08.08.24 07:17

    호환마마보다 님하들이 더 무섭삼-_-);;

  • 작성자 08.08.24 10:50

    여기 게시판 검색해보니 십만양병설이 아예 구라라는데(이이 가 전쟁전에 그런말 한적 없다고.. 쿨럭.) 그런가요? -_-

  • 08.08.24 12:36

    십만양병설이 처음 등장하는건 임진왜란으로부터 수십년이 흐른 이후 서인들의 개인 문집에서 나옵니다. (정확히 어떤거였는지는 기억이...;;;) 원래는 조선의 군대가 하도 개판이라 정리 좀 하자라고 했던것이 율곡을 추종하는 서인들의 손에 십만양병설로 바뀌게 된거죠.

  • 08.08.24 12:42

    선조수정실록에 십만양병설이 나옵니다만, 선조수정실록은 그리 신뢰하기는 춈 ㅡ.ㅡ; 그리고 그당시 조선의 동원력은 충분히 10만 이상이었슴다. 그때 반론이 정예병이니 상비군이니 뭐니 하지만, 그당시 10만의 상비군을 돌리는 나라가 있을리 만무하고, 정예병을 키운다는것도 그당시 시스템상 말이 정예병이지 그리 쉬울랑가요?

  • 08.08.25 00:06

    팔랑,애란 / 그렇다지만-_-;;; 또 단순히 창작이라고 보기도 좀 힘듭니다. 짭짭;

  • 08.08.25 09:22

    상소문에 10만의 병력을 양성해야 한다고는 나오는데.. 이게 현대 감각의 상비군인지 아니면 당시 군 동원체제의 상비전력인지는 좀 불확실합니다. 뭐 대체로 이이가 개판된 군사시스템 점검에 대해 상소한 것은 사실이고 거기에 10만에 대한 언급은 있으나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었죠..

  • 08.10.07 12:20

    이이는 평소 백성을 위해 세금을 줄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10만 양병이라니 쿨럭... 그런데 조선군은 당시 육군 6만에 수군 5만정도라는 설도 있는데 그럼 병력을 줄이자는 건지.. 가장 중요한 그 당시 이이의 각종 글에는 세금줄이자는 소리만 있지 10만양병 운운은... 이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위대하신 주자님이 이끄는 천군이 쳐들어 오면 성인 만세를 외치며 뛰어 나가실 분이요.

  • 08.08.25 04:45

    내셔널리즘에 심취하면 사실도 왜곡하는 법. 명군 도움없었더라면 남해안에서 이순신장군이 100전100승을 거두었더라도 결국 조선이 멸국할 수 밖에 없는데(원군이 없었다면 선조는 북경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뻔), 우리가 이순신 장군이 일본 몰아낼려고 애쓰는데 명나라는 방해만 했더라 식으로 역사를 조작하면 자존심은 설 수 있으나 진실은 외면하는 꼴이 되어버리군요.

  • 작성자 08.08.25 08:53

    그런가요? 명나라군의 활약이 없었어도 의병들과 광해군의 활약 으로 어느정도는 밀어낼수 있지 않았나요? 흠. 명나라는 방해만 했더라는 좀 말이 안되지만, 명나라의 역할은 빠른 종전에 기여한거지 전쟁승패자체에는 큰 영향을 끼쳤다고는 생각되지 않던데... 흠.

  • 08.08.25 11:02

    육로수송로가 거의 볍진 수준인 조선(사실 조선뿐만 아니라 당시세계어딜가도 다 그수준)인 고로 당시 낙동강 단일보급라인으로 한반도 전체의 전장을 제어해보겠다는 일본의 생각은 어차피 무리인 감도 없진 않았듯합니다. 물론 이러한 아이디어자체들이 현대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초기의 위기에 명나라가 도와줘서 한고비넘기게 한것은 사실이지만 전비면에서 보면 뭐니뭐니해도 명+조선의 최고의 삽질은 인진왜란후 휴전을 했다는 것인거 같습니다. 일본의 보급라인은 안습인 고로 자꾸 소모전으로 몰아가면 분명 승산이 있었는데 휴전, 일본의 비명을 질렀을 법한 보급선이 안정을 찾은 것은 물론이고 재정비까지 가능케하여 정유

  • 08.08.25 11:03

    재란을 초래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명이 나름 도움이 된점을 다 상쇄시키고도 남겠죠.

  • 08.08.25 11:58

    꽤나 오래된 논쟁인데-_-;; 물론 명군의 대규모 참전이 의의는 있지만 벽제관 참패 이후 명군은 실제 전투력 보다는 외교적 압박 카드로 작용한 면이 크고 마냥 득만 된것도 아니고 군량징발 크리로 조선군 규모가 줄어들거나 전장터에서 갖가지 추태를 부리거나 휴전 한답시도 협잡꾼에게 놀아나다가 정유재란 크리를 맞는다거나 기타등등. 흠 이건 뭐 잘 쳐줘도 제로섬이군요-_-;;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군은 '전쟁을 빨리 끝낼 이유'만 있었지 '일본군과 싸울 이유'는 희박했습죠. 굽쉰굽쉰.

  • 08.08.25 12:09

    매디벌狂 / 그런데 조선의 육상수송로가 당시 세계 평균이나 땅 덩어리 규모에 비해 좀 병진인건 맞습니다. 꺼이꺼이ㅠㅠ

  • 08.08.25 18:20

    명나라 없었다면 선조는 의주버리고 도망쳤을테고 임금 도망친 나라에서 누가 의병일으켜 나라찾는답니까. 명나라가 평양성함락하고 시간을 벌어줘서 권율 등이 관군과 의병을 모아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고 충청 이북 지역을 확보해서 군량과 병사를 충당할 수 있었는데, 그리고 명나라가 꾸준히 5만 이상의 전력을 유지해서 일본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고, 다만 명나라가 휴전하고 미적거린 이유는 지들 코도 석자라 왜군을 압도할 수 없어서 외교로 해결하려는 노력이었고, 이러한 시점에서도 명군의 전력은 조선군에 비해 압도적이어서 방해로 말하기는 너무 억지인데 명군은 방해군이고 결군 조선이 알아서 국토를 회복했다고 주장한다

  • 08.08.25 18:22

    면 제 3국의 역사가들에게도 지지를 얻을 수 있겠나요? 이런식이라면 6 25전쟁도 한국군이 제일 먼저 중앙청에 기를 꼽고 압록강에 도달해서 통일할 수 있었는데 미국넘들이 방해쳐서 휴전하고 끝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군요.

  • 08.08.25 19:26

    11:11 /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 하다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따져봅시다요. 일단 임진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일본 1,2군의 전쟁 수행능력은 급감합니다. 역시나 날씨와 보급이 문제라서 말이죠. 고니시가 평양성에 들어 앉아 협박장이나 보내던 이유는조선과의 협상을 바란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보급부족으로 인해 공세를 펼치는데 한계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고니시가 선조에게 보내는 외교문서에 스스로 적기를 [장차 서해에서 10만 대군이 올라오면 그땐 어디로 가시겠습니까]라고 말했으니까요. 이 발언의 의미를 조금만 뒤집어보면 [선조씨 여기서 대충 지지치고 쇼부치시죠? 서해 수로로 보급품 들어오면 재미없음돠 ㄲㄲ]

  • 08.08.25 19:37

    정도 되지요. 문제는 다들 아시다시피 치트공 이순신 때문에 일본의 기본 작전구도인 수륙병진이 어그러지기 시작한것-_-;; 의병의 준동과 형편없는 육상보급의 효율을 생각해보면 일본군의 선택지는 더더욱 줄어듭니다. 바로 현지 보급인데 전라도를 확보하기 위한 6,7군의 진공은 정담,권율,곽재우,조헌,김시민,고경명등의 조선군이 막아버리고 꿩대신 닭이라고 찝적거렸던 황해도 일대의 연백평야는 연암성에서 이정암이 이끄는 조선군이 극강포스를 발해 지켜내 버리니-_-;; 수로 보급도 육로 보급도 현지조달도 모두 물 먹어버린 상태에서 일본군의 보급은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이었습죠.

  • 08.08.26 02:52

    실제로 이여송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오기 전에 이미 일본군 1,2군은 보급문제로 비전투 손실이 치솟았으니-_-;; 동사자와 병사,아사자가 폭증하던 평양성의 1군이나 길주성에서 시량보급이 안되서 민가까지 뜯어다 불때던 2군처럼 안습시츄에이션 속출(..)입죠. 일본군으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보급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상-예를 들자면 치트공 이순신을 격파하고 서해 물길을 연다던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재앙이 커질뿐입니다(..) 그리고 의병의 경우는 명군 진군시기와 의병봉기와 주요 전투시기를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애당초 당시 조선군 자체가 정규군과 의병 자체의 구분이 모호한 편인데다가

  • 08.08.25 19:49

    명군의 본격 참전 이전에 이미 상당한 승리를 거둡죠. 아예 명군이 오기전에 일본군을 거의 다 축출해버린 함경도 의병같은 경우도 있거니와 정암진/우척현/이치/웅치/금산/진주성과 같이 소소한 지엽전정도로 보기엔 의의가 매우 큰 전투들도 '많이' 있으니 말입죠. 굽쉰굽쉰.

  • 08.08.26 02:54

    결론을 정리하자면 1.치트공 이순신 격파나 경부철도 건설과 같은 별 다른 변수가 없는 이상 일본군의 보급은 갈수록 안습. 2. 보급 없는 군대가 승리할 확률은 부시가 노벨 평화상 받을 확률과 동일. 홈그라운드 우왕ㅋ 굿ㅋ 3.저는 명나라가 방해만 했다고 한 기억이 업ㅂ구만요 굽쉰굽쉰.

  • 08.08.25 20:40

    무장공비님께서 잘 설명해 주셨지만...고니시가 평양성을 점령한 후의 조선 조정의 분위기나 류성룡 선생의 기록을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당시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 "왜 고니시가 평양성에서 버로우 타고 있지?", "왜 안 올라 오나연?" // 그 이유는? 수륙병진 작전이 이치트공 때문에 말 그대로 병진이 되어버렸기 때문(....) 게다가 "점"만 점령해 버리니 의병들과 관군 때문에 점령지끼리 연결이 끊키고, 보급도 안되고 우왕ㅋ굳ㅋ

  • 08.08.25 20:48

    참고로 선조 임금이 평양을 떠난 건 6월 11일(징비록)이고, 평양을 수복한 건 계사년 1월. 고니시는 6개월 가량 평양성에서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왜 6개월 동안 얌전히 평양성에 웅크리고 있다가 계사년 1월달에 허무하게 무너졌을까요?-_-; 명나라, 조선과 협상을 하느라? =_=;; 언제 올지도 모를 명나라 군대가 두려워서?-ㅁ-;;

  • 08.08.26 03:02

    zert / 좀 더 사족을 붙이자면 ["점"만 점령해 버리니 의병들과 관군 때문에 점령지끼리 연결이 끊키고, 보급도 안되고 우왕ㅋ굳ㅋ]에 연쇄적으로 이어서 일본군의 조직적 약탈이 시작되었습죠-ㅅ-;; 그것도 그럴만한게 물자 추진도 안해주는데 일본군도 먹고 살려니(..) 징수가 강제징발이 되고 강제징발이 다시 약탈이 되는 순간 위민정책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리는것입죠. [유성룡曰 : 왜군이 이 땅에서 학정을 펼쳐서 다행이었다.] 이건 일본군이 광합성을 터득하지 않는 이상 학정이 안될래야 안 될 수가 없는 시츄에이숑 입니다ㄲㄲㄲ

  • 작성자 08.08.26 04:22

    그러고보면 광합성 터득하는 순간 몽고군 저리가라하는 먼치킨 병과가 탄생되겠군요. !!

  • 08.08.26 11:40

    무장공비//뭐 임진년이야 환곡으로 버텼다지만...임진년 말부터는....안습ㅠㅠ

  • 08.08.26 20:06

    서울 이북으로 10만 넘게 올라갔다가 겨울에 다시 모여보니 6만이더라... 하는 말이 있죠. 고니시군이야 명에게 깨졌다 해도 나머지는 다 누구에게 깨져 사라진 걸지...

  • 08.10.07 12:24

    조선의 육로로는 진군이 불가능 하오! 그로 부터 600년이 흘러 대일본제국께서 조선을 근대화(?) 시켜 주었지만 북한군이 서울로 쳐들어 내려오는데 길이 캐병진이라 개전 당일 서울입구까지 들어 왔다가 전차이동이 불가능해 빠꾸해서 돌아가는데 뒷부대가 꽉막혀 후진하는데 4~5시간 걸려 그 다음날이 됐소. 덕분에 서울까지 쳐들어 오는데 3일 걸렸지 아니면 개전 당일 털렸소. 국방부 편찬 한국군공간사에 나온 말이오.

  • 08.09.14 18:45

    지리,지형적 잇점이....새로나올 임페리얼에도 반드시 반영되어야 합니다. ^_^;; 우리 지형이 중소규모 의병 출몰, 전투하기 좋은지형이지요.

  • 08.10.07 12:28

    뭐.. 보급문제는 조선의 평야 털면 되지 않느냐 할 수도 있지만 농사 짓는 사람이 있어야지 벼가 스스로 자라나? 기록에 의하면 그 위대하신 명나라의 천장들 께서 술먹다가 취해 토하자 수십명의 유민들이 그자리에 머리를 밖고 핥아 먹다가 모두 죽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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