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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이트에서 벌어졌던 저와 전국시대님의 논쟁입니다. 고수님들의 지적부탁바랍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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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
전쟁은 무기체계 // 장군의 역량 // 그 나라의 국력(군대사기, 물량 같은) , 이 3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봅니다. 어떤 한가지 요인이 떨어져도 나머지 두가지 요인으로 승리한 전쟁은 수도 없이 많고, 반대로 두가지요인이 떨어져도 나머지 하나의 압도적인 힘으로 승리한 전쟁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기/용/양, 모든 분야에서 앞서지 않는 한, 전쟁은 붙어보기전에는 모르는 것같습니다. 다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단순화시켜서 생각하기 좋아한다는 데서 오는 것같습니다. , 아, 뭐만 있었더라면, 누가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등등.
펠릭스님께서 말씀하신, 스위스창병의 경우가 큰 단적인 예인듯합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잘써먹었던 팔랑크스의 부활, 분명, '선진적'인 기술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후덜덜한 용맹과 당시 고착화된 중장기병 위주의 전술에 최적화된 힘으로 일세를 풍미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스위스 창병으로 시작한 장창병의 전성시대도 오래지 않아 대포를 위시한 화약무기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임진왜란은 어떻습니까? 많은 분들이 초반에 조선군이 밀린 이유를 , 조총때문이다, 아니다 일본도때문이다, 아니다 일본식 장창때문이다, 아니다 율곡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따르지 않았기때문이다(이거 생구라), 등등 단순화시킵니다. 제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임진왜란 당시 기록들을 보면, 전체 병력투입량은 조선이 더 많았으며, 대소 전쟁의 승률을 따져봐도 전체적으로는 조선군이 앞섭니다(수전을 제외해도!!). 무기체계 또한, 당시 조총이 조선의 각궁을 앞섰다고 보긴 힘듭니다. 일본도는 전장에서 쓸모있는 무기도 아니고요. 그런데 왜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군이 압도적으로 밀렸으며, 또 왜 임진왜란 말기에는 일본군이 밀렸을까요. 양국의 무기체계가 달라진게 없는데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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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율리우스 카이사르님//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이 쾌속진군을 할수 있었던 원인을 들자면, 조선 정규군의 주력과 일본 정규군의 주력이 맞붙은 탄금대 전투의 패배가 뼈 아팠습니다.
교과서에서는 다소 영웅화되어 있는 신립은 기실 적의 신무기인 조총의 효율성에 대해 무지해 부장들이 제시한 기습전(복병)을 무시하고, 일본군의 조총부대를 상대로 평지에서 기마 장창병으로 맞서려고 하다가 대패하고 맙니다.
(일본은 전국시대에 이미 조총부대가 기마병의 시대를 끝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손쉽게 이길 수 있었죠)
당시 조총이 각궁을 앞서기 힘들다고 쓰셨는데, 조총의 위력은 활과는 격이 달랐습니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가 개발한 2열 조총사격(1열이 총을 쏘는 동안, 2열은 장진을 하고 이를 계속 반복하는 것)으로 인해서,
다케다 신켄으로 대표되는 기마병의 시대가 끝난 것이니까요.
(오다 노부나가 이전의 시대는 기병 > 궁병 > 보병(창병) > 기병 이라는 공식이 성립했습니다만 조총 중심의 보병 부대는 기병, 궁병, 창병 모두에 대한 상성부대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또한, 조총은 공성전에서 활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합니다.
공성시의 활의 역할이란 무기 특성상 그저 상대 머리 위로 화살을 쏟아붇는 정도일 뿐이어서 방패 등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방어할 수 있지만, 조총은 저격 및 화망구성이 가능한 무기였기에 살상력이 월등했고, 따라서 공성전시 훨씬 적은 인력으로 대군을 방어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점으로 조총을 각궁보다 앞섰다고 보기 힘들다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그리고, 임진왜란 후기에 일본이 밀린 큰 원인 중 하나가 명군의 대포였습니다.
일본은 (전국시대의 경험상) 성벽위에서 조총만 쏴대면서 버티면 공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접해보는 명군의 신형 대포의 위력에 성벽이 부서져 나가자 어찌할 도리도 없이 성을 내놓으며 철수를 거듭해야 했습니다.
한국의 역사책들은 의병과 이순신 장군등 조선측 군대의 업적들을 찬미하면서 명의 군사력은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측 역사책을 보면 당시 일본군들이 명군의 참전과 신무기에 얼마나 당황하고 곤란해 했는 지를 알수 있습니다.
즉, 임진왜란의 승리에는 명군의 참전과 그들의 신무기(공성대포)도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진왜란 후기에도 양국의 무기체계가 달라진게 없다는 부분도 동의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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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戰國時代님// 글쎄요. 저도 전에는 전국시대님 처럼 생각했는데 밀덕/역덕이 되다 보니 조총/대포의 위력보다는, 참전용사들의 정신상태/경험 등이 더 중요한 요소라는 쪽으로 견해가 바뀌어서 말이죠.
오다노부나가의 삼단철포설( 설이죠.)이 많이 회자되고는 하는데, 삼단철포설로 화망을 구축했다는 얘기는 일본역사가들이 자국의 우수함을 앞세우기 위한 구라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혹은 소설'대망'이나 게임 신장의 야망 등의 영향이라고 봐야죠. 구스타프아돌프나 마우리츠 공의 그것보다 50년 앞서서 더 후진 총으로 서양보다 선진적인 전술을 개발했다는 주장이니까요. 다케다신겐의 중기마병설(이것도 설이죠) 또한, 당시 일본 (왜소한) 말의 품종과 일본지형, 마상무예의 질, 무기형태 등을 볼 때, 다케다신겐의 기마대 또한 전장까지 이동 후 하마 하여 보병기사로 싸웠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노부나가 삼단철포설이나, 신겐의 개돌중장기병설이 진실이라고 쳐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주력은 조총이나 기병이 아니었습니다. 창병이 80%이상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더불어 조총의 명중률이나 유효사거리 살상력 연사력 모두 어떤 것을 살펴봐도 각궁의 그것보다 (임진왜란 당시) 위력이 떨어집니다. 왜란당시의 조총이 공성전에 유리하다거나, 저격이 가능하다는 애기는 전 금시초문이네요. (특히 저격은.. 강선이 없는 당시 총으로 쏴봐야.. 맞을리가..)
당시 조총이 활보다 유리한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병과양성의 용이함이죠. 몇년을 익혀야 되고, 관리도 철저하게 해야하는 활에 비해 몇달만 익히면 되고 화약만 젖지 않게 하면 되는 조총이 군사양성에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실록에도 임란 전에 조총을 조선조정에서 평가하는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왜란당시의 조총이 무슨 듣도보도못한 신무기는 아니었다는거죠. 결론은, 각궁보다 위력이 못하니 굳이 조총병을 양산할 필요가 없다 였죠. 많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당시 조정의 신료들의 무능함으로 비웃지만, 전 꼭 그런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아 군인양성을 쉴새없이 해야했던 일본에 비해 내전상황이 아니었던 조선으로서는 굳이 빨리 정병을 양산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각궁을 버리고 조총을 택할 이유가 없는거죠.
탄금대 전투 또한, 당시 일본군의 주력은 창병이었습니다. 앞서말한 스위스장창병의 경우도 그렇듯, 모랄이 갖춰진 창병은 기병을 잘막아냅니다.(브레이브하트!!) 신립이 진형이 갖춰진 창병을 상대로 기병대를 개돌시켜서 진거죠.
또 많은 사람들이 당시 신립이 평원의 배수진이 아닌, 산악전을 했다면 이기지 않았을까 라고 하는데,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가정은 신립에 대한 평가절하가 아닌가 합니다. 당시 남부 조선육군은 장비나 전략때문에 일본군에게 발린게 아니라, 전쟁경험이 없기 때문에 탈영현상이 극심해서 발렸다고 보는게 전 옳다고 봅니다. 따라서 당시 자신의 정예군인 함경도군인이 아닌 경기도군을 상당히 델구 있었던 신립은, (앞서 조선군의 패전처럼) 군인들이 도망가지 않을까 걱정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병력 통제가 용이한 평원의 배수진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산악전 하면 군사들이 도망가니까!)
명군의 대포의 위력에 대해서는 제가 놓친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명군이 참전했던 시기에는 이미 남부의병, 조선수군, 북부관군 등에 의해 대반격이 일어나고 있던 시절이었으며, 당시 일본군은 보급문제로 상당수의 배신병(조선군에 항복하고 동포에게 창을 돌리는,,, 뭐 당시 일본사병들이 조선에 오고나 싶엇겠습니까?)이 생길 정도로 참악을 달렸습니다. 명군의 참전은 종전을 몇년 앞당긴 정도였지, 전황을 뒤집은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위력이 무시못할만하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또 무기체계 또한, 우리나라 대포들이 공성을 목적으로 세팅되어있지 않은 것이 문제였지, 대포 자체의 위력이 명군의 그것보다 크게 떨어졌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우리는 공성을 할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시 기마병 대 조총병의 대결로 돌아가서, 창병병과가 없어지고 기병의 장창돌격전술을 화약무기에 의해 막을 수 있게 된 것은, 화약무기가 발달한 서양에서도 30년 전쟁 후인 18세기에 가서나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것도 막을 수 있게 된거지, 1차세계대전전까지도 기병의 돌격전술은 보병에게 언제나 유효한 전술이었습니다. 기병이 사라지게 된건 참호전의 도입과, 차량의 발명 때문이죠. 일본이 16세기에 화약무기로 기병병과를 바를 수 있었다? 이건 약간 환타지죠. 헤드샷이라도 맞지 않는한 웬만한 조총의 위력으로는 아드레날린이 뿜어져나오는 기병을 저지시킬 수 없고, 총검도 개발되지 않았던 당시 조총병으로서는 접근한 기병 1기도 처리하기 곤란하죠. 또 당시 조총의 연사력이나 사거리로는 돌격하는 기병에게 2번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다르게, 신기전이나 각종 대포 등을 봐도 그렇듯, 왜란 당시 화약무기에 있어서 선진적인 국가는 조선이었으며, 따라서 신기술(조총 혹은 개인화기) 도입을 하지 않은 어리석은 조선신료때문에 임진왜란에 졌다(사실 이겼죠.). 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생각이지만) 수십년간의 전란으로 전쟁기계가 된 일본인들의 기세를 평화롭게 살던 우리 선조들이 막지 못한 것은 어쩔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었으며 비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고, 도도한 역사의 흐름은 단순한 기술의 도입이나 장군의 전략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전 그시대를 살려면, 몇십년 전란에 찌들고 외국까지 끌려가서 이유도 모른채 죽어야 했던 왜인들의 삶보다는, 평화롭게 살다가 피란다녀야 했던 조선인의 삶을 택하겠습니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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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율리우스 카이사르님// 삼단철포는 유럽에서 개발된 전술이 맞습니다. ---------------------------------------------------------------------
(2008-08-21 02:05:56)
일본은 이단철포 정도였고, 유럽보다 앞서서 실용화된 건 여러 정황상 사실인 듯 싶습니다.
(일본은 수백년간 전쟁만 하고 있었으니 전술면에서 여러가지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이기도 했구요)
그리고, 조총병이라는 게 창병과 섞여 있는 건 맞습니다만, 조총병이 기병대에 유리하다고 하는 것은 조총으로 기병대를 대량 살상하는 영화같은 장면이 아니고, 기병대가 질서정연하게 고속 돌진하지 못하고 말들이 조총에 놀라서 멈추거나 도망가거나 해서 진형이 교란되는 효과가 더 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케다 신켄의 기마보병설에 대해서는 저도 익히 들어본 바가 있습니다만,
조총 등장 이전의 기마병대의 효율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속도를 이용한 교란, 포위 섬멸전 등) 말에서 내려서 싸웠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저격과 화망구성이라는 말을 너무 현대적으로 받아들이신 거 같은데, 일본 전국시대의 저격이라는 말은 일종의 집중사격 개념입니다.
적의 장군을 저격하라 라고 하면 저격수가 혼자서 쏘는 게 아니라, 한 소대 정도의 병력이 적장만 보고 집중사격을 하는 것입니다.
저 시대의 전장 지휘관의 사망이 갖는 의미는 익히 아실테니 그 효과에 대해서도 충분히 상상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총이 공성전(혹은 수성전)에 유리한 것은 직선 발사병기이기 때문입니다. 활은 공성/수성시 하늘을 보고 쏘아 아래로 쏟아 부을수 밖에 없는데(직선으로 쏘면 사정 거리가 안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측은 대형 방패(혹은 나무판)을 위로 들고 성을 방어하거나, 혹은 성벽 밑까지 전진해 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총은 직선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이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을 경우 활일 때보다는 공성/수성이 훨씬 까다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swordfish님// 당시 일본 조총의 성능이 유럽보다 낮았던 건 사실이지만, 수에서 만큼은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전국시대 후기 일본의 총기류의 수가 당시의 유럽 전체보다 많았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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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 견지로 보면 신립의 대응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습죠. 오데로 튈지모르는 후덜덜한 규모의 전투를 하자고 하는 거 자체가 무자비한 압박이었다고 할까요. 문제는 위의 델카이저님이 말씀하신 군대중간계층의 부재로 애초에 병력통제가 될리가 없었다는점. 결과 ㅎㄷㄷ한 탈영율, 근접전기피등 그동안 안 아프던 복합골절이 하필 출발선상에 서니까 도진 꼴의 조선군대.. =안습이라능
동감입니다. 싸움도 제대로 해본적 없는 병사들이 태반인데 사활을 건 전투에서 제대로 싸울리도 없을테고 도망갈곳은 없다 배수진이 백병전 싫어하는 병사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방법이었을것... 노련한 병사들도 아니고 산악기습이 잘 될리도 없고, 역시 병사들의 상태를 잘 알고 있던 신립의 판단
탄금대전투에 대해서는 제가 쓴 글을 읽어보시길 부탁드립니다아. 신립에 대한 재평가는 임진전란사에서 주로 시작된듯 한데, 실제 신립에 대해, 탄금대 전투에 대해, 그리고 그 전장등에 대해 알아보면 신립의 대한 평가가 조선시대의 주류 평가로 다시 돌아감을 느낄수 있습니다아아아.
호환마마보다 님하들이 더 무섭삼-_-);;
여기 게시판 검색해보니 십만양병설이 아예 구라라는데(이이 가 전쟁전에 그런말 한적 없다고.. 쿨럭.) 그런가요? -_-
십만양병설이 처음 등장하는건 임진왜란으로부터 수십년이 흐른 이후 서인들의 개인 문집에서 나옵니다. (정확히 어떤거였는지는 기억이...;;;) 원래는 조선의 군대가 하도 개판이라 정리 좀 하자라고 했던것이 율곡을 추종하는 서인들의 손에 십만양병설로 바뀌게 된거죠.
선조수정실록에 십만양병설이 나옵니다만, 선조수정실록은 그리 신뢰하기는 춈 ㅡ.ㅡ; 그리고 그당시 조선의 동원력은 충분히 10만 이상이었슴다. 그때 반론이 정예병이니 상비군이니 뭐니 하지만, 그당시 10만의 상비군을 돌리는 나라가 있을리 만무하고, 정예병을 키운다는것도 그당시 시스템상 말이 정예병이지 그리 쉬울랑가요?
팔랑,애란 / 그렇다지만-_-;;; 또 단순히 창작이라고 보기도 좀 힘듭니다. 짭짭;
상소문에 10만의 병력을 양성해야 한다고는 나오는데.. 이게 현대 감각의 상비군인지 아니면 당시 군 동원체제의 상비전력인지는 좀 불확실합니다. 뭐 대체로 이이가 개판된 군사시스템 점검에 대해 상소한 것은 사실이고 거기에 10만에 대한 언급은 있으나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었죠..
이이는 평소 백성을 위해 세금을 줄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10만 양병이라니 쿨럭... 그런데 조선군은 당시 육군 6만에 수군 5만정도라는 설도 있는데 그럼 병력을 줄이자는 건지.. 가장 중요한 그 당시 이이의 각종 글에는 세금줄이자는 소리만 있지 10만양병 운운은... 이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위대하신 주자님이 이끄는 천군이 쳐들어 오면 성인 만세를 외치며 뛰어 나가실 분이요.
내셔널리즘에 심취하면 사실도 왜곡하는 법. 명군 도움없었더라면 남해안에서 이순신장군이 100전100승을 거두었더라도 결국 조선이 멸국할 수 밖에 없는데(원군이 없었다면 선조는 북경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뻔), 우리가 이순신 장군이 일본 몰아낼려고 애쓰는데 명나라는 방해만 했더라 식으로 역사를 조작하면 자존심은 설 수 있으나 진실은 외면하는 꼴이 되어버리군요.
그런가요? 명나라군의 활약이 없었어도 의병들과 광해군의 활약 으로 어느정도는 밀어낼수 있지 않았나요? 흠. 명나라는 방해만 했더라는 좀 말이 안되지만, 명나라의 역할은 빠른 종전에 기여한거지 전쟁승패자체에는 큰 영향을 끼쳤다고는 생각되지 않던데... 흠.
육로수송로가 거의 볍진 수준인 조선(사실 조선뿐만 아니라 당시세계어딜가도 다 그수준)인 고로 당시 낙동강 단일보급라인으로 한반도 전체의 전장을 제어해보겠다는 일본의 생각은 어차피 무리인 감도 없진 않았듯합니다. 물론 이러한 아이디어자체들이 현대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초기의 위기에 명나라가 도와줘서 한고비넘기게 한것은 사실이지만 전비면에서 보면 뭐니뭐니해도 명+조선의 최고의 삽질은 인진왜란후 휴전을 했다는 것인거 같습니다. 일본의 보급라인은 안습인 고로 자꾸 소모전으로 몰아가면 분명 승산이 있었는데 휴전, 일본의 비명을 질렀을 법한 보급선이 안정을 찾은 것은 물론이고 재정비까지 가능케하여 정유
재란을 초래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명이 나름 도움이 된점을 다 상쇄시키고도 남겠죠.
꽤나 오래된 논쟁인데-_-;; 물론 명군의 대규모 참전이 의의는 있지만 벽제관 참패 이후 명군은 실제 전투력 보다는 외교적 압박 카드로 작용한 면이 크고 마냥 득만 된것도 아니고 군량징발 크리로 조선군 규모가 줄어들거나 전장터에서 갖가지 추태를 부리거나 휴전 한답시도 협잡꾼에게 놀아나다가 정유재란 크리를 맞는다거나 기타등등. 흠 이건 뭐 잘 쳐줘도 제로섬이군요-_-;;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군은 '전쟁을 빨리 끝낼 이유'만 있었지 '일본군과 싸울 이유'는 희박했습죠. 굽쉰굽쉰.
매디벌狂 / 그런데 조선의 육상수송로가 당시 세계 평균이나 땅 덩어리 규모에 비해 좀 병진인건 맞습니다. 꺼이꺼이ㅠㅠ
명나라 없었다면 선조는 의주버리고 도망쳤을테고 임금 도망친 나라에서 누가 의병일으켜 나라찾는답니까. 명나라가 평양성함락하고 시간을 벌어줘서 권율 등이 관군과 의병을 모아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고 충청 이북 지역을 확보해서 군량과 병사를 충당할 수 있었는데, 그리고 명나라가 꾸준히 5만 이상의 전력을 유지해서 일본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고, 다만 명나라가 휴전하고 미적거린 이유는 지들 코도 석자라 왜군을 압도할 수 없어서 외교로 해결하려는 노력이었고, 이러한 시점에서도 명군의 전력은 조선군에 비해 압도적이어서 방해로 말하기는 너무 억지인데 명군은 방해군이고 결군 조선이 알아서 국토를 회복했다고 주장한다
면 제 3국의 역사가들에게도 지지를 얻을 수 있겠나요? 이런식이라면 6 25전쟁도 한국군이 제일 먼저 중앙청에 기를 꼽고 압록강에 도달해서 통일할 수 있었는데 미국넘들이 방해쳐서 휴전하고 끝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군요.
11:11 /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 하다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따져봅시다요. 일단 임진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일본 1,2군의 전쟁 수행능력은 급감합니다. 역시나 날씨와 보급이 문제라서 말이죠. 고니시가 평양성에 들어 앉아 협박장이나 보내던 이유는조선과의 협상을 바란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보급부족으로 인해 공세를 펼치는데 한계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고니시가 선조에게 보내는 외교문서에 스스로 적기를 [장차 서해에서 10만 대군이 올라오면 그땐 어디로 가시겠습니까]라고 말했으니까요. 이 발언의 의미를 조금만 뒤집어보면 [선조씨 여기서 대충 지지치고 쇼부치시죠? 서해 수로로 보급품 들어오면 재미없음돠 ㄲㄲ]
정도 되지요. 문제는 다들 아시다시피 치트공 이순신 때문에 일본의 기본 작전구도인 수륙병진이 어그러지기 시작한것-_-;; 의병의 준동과 형편없는 육상보급의 효율을 생각해보면 일본군의 선택지는 더더욱 줄어듭니다. 바로 현지 보급인데 전라도를 확보하기 위한 6,7군의 진공은 정담,권율,곽재우,조헌,김시민,고경명등의 조선군이 막아버리고 꿩대신 닭이라고 찝적거렸던 황해도 일대의 연백평야는 연암성에서 이정암이 이끄는 조선군이 극강포스를 발해 지켜내 버리니-_-;; 수로 보급도 육로 보급도 현지조달도 모두 물 먹어버린 상태에서 일본군의 보급은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이었습죠.
실제로 이여송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오기 전에 이미 일본군 1,2군은 보급문제로 비전투 손실이 치솟았으니-_-;; 동사자와 병사,아사자가 폭증하던 평양성의 1군이나 길주성에서 시량보급이 안되서 민가까지 뜯어다 불때던 2군처럼 안습시츄에이션 속출(..)입죠. 일본군으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보급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상-예를 들자면 치트공 이순신을 격파하고 서해 물길을 연다던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재앙이 커질뿐입니다(..) 그리고 의병의 경우는 명군 진군시기와 의병봉기와 주요 전투시기를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애당초 당시 조선군 자체가 정규군과 의병 자체의 구분이 모호한 편인데다가
명군의 본격 참전 이전에 이미 상당한 승리를 거둡죠. 아예 명군이 오기전에 일본군을 거의 다 축출해버린 함경도 의병같은 경우도 있거니와 정암진/우척현/이치/웅치/금산/진주성과 같이 소소한 지엽전정도로 보기엔 의의가 매우 큰 전투들도 '많이' 있으니 말입죠. 굽쉰굽쉰.
결론을 정리하자면 1.치트공 이순신 격파나 경부철도 건설과 같은 별 다른 변수가 없는 이상 일본군의 보급은 갈수록 안습. 2. 보급 없는 군대가 승리할 확률은 부시가 노벨 평화상 받을 확률과 동일. 홈그라운드 우왕ㅋ 굿ㅋ 3.저는 명나라가 방해만 했다고 한 기억이 업ㅂ구만요 굽쉰굽쉰.
무장공비님께서 잘 설명해 주셨지만...고니시가 평양성을 점령한 후의 조선 조정의 분위기나 류성룡 선생의 기록을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당시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 "왜 고니시가 평양성에서 버로우 타고 있지?", "왜 안 올라 오나연?" // 그 이유는? 수륙병진 작전이 이치트공 때문에 말 그대로 병진이 되어버렸기 때문(....) 게다가 "점"만 점령해 버리니 의병들과 관군 때문에 점령지끼리 연결이 끊키고, 보급도 안되고 우왕ㅋ굳ㅋ
참고로 선조 임금이 평양을 떠난 건 6월 11일(징비록)이고, 평양을 수복한 건 계사년 1월. 고니시는 6개월 가량 평양성에서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왜 6개월 동안 얌전히 평양성에 웅크리고 있다가 계사년 1월달에 허무하게 무너졌을까요?-_-; 명나라, 조선과 협상을 하느라? =_=;; 언제 올지도 모를 명나라 군대가 두려워서?-ㅁ-;;
zert / 좀 더 사족을 붙이자면 ["점"만 점령해 버리니 의병들과 관군 때문에 점령지끼리 연결이 끊키고, 보급도 안되고 우왕ㅋ굳ㅋ]에 연쇄적으로 이어서 일본군의 조직적 약탈이 시작되었습죠-ㅅ-;; 그것도 그럴만한게 물자 추진도 안해주는데 일본군도 먹고 살려니(..) 징수가 강제징발이 되고 강제징발이 다시 약탈이 되는 순간 위민정책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리는것입죠. [유성룡曰 : 왜군이 이 땅에서 학정을 펼쳐서 다행이었다.] 이건 일본군이 광합성을 터득하지 않는 이상 학정이 안될래야 안 될 수가 없는 시츄에이숑 입니다ㄲㄲㄲ
그러고보면 광합성 터득하는 순간 몽고군 저리가라하는 먼치킨 병과가 탄생되겠군요. !!
무장공비//뭐 임진년이야 환곡으로 버텼다지만...임진년 말부터는....안습ㅠㅠ
서울 이북으로 10만 넘게 올라갔다가 겨울에 다시 모여보니 6만이더라... 하는 말이 있죠. 고니시군이야 명에게 깨졌다 해도 나머지는 다 누구에게 깨져 사라진 걸지...
조선의 육로로는 진군이 불가능 하오! 그로 부터 600년이 흘러 대일본제국께서 조선을 근대화(?) 시켜 주었지만 북한군이 서울로 쳐들어 내려오는데 길이 캐병진이라 개전 당일 서울입구까지 들어 왔다가 전차이동이 불가능해 빠꾸해서 돌아가는데 뒷부대가 꽉막혀 후진하는데 4~5시간 걸려 그 다음날이 됐소. 덕분에 서울까지 쳐들어 오는데 3일 걸렸지 아니면 개전 당일 털렸소. 국방부 편찬 한국군공간사에 나온 말이오.
지리,지형적 잇점이....새로나올 임페리얼에도 반드시 반영되어야 합니다. ^_^;; 우리 지형이 중소규모 의병 출몰, 전투하기 좋은지형이지요.
뭐.. 보급문제는 조선의 평야 털면 되지 않느냐 할 수도 있지만 농사 짓는 사람이 있어야지 벼가 스스로 자라나? 기록에 의하면 그 위대하신 명나라의 천장들 께서 술먹다가 취해 토하자 수십명의 유민들이 그자리에 머리를 밖고 핥아 먹다가 모두 죽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