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아가씨들..
심심한 것같은데, 우리랑 놀지 않을래요?"
예감이 빗나가길 그렇게 바랬건만...
그 망할 자식이 다가와-
노골적으로 수작을 걸자
은아는 순간 머릿속이 온통 새까매지는 것같았다.
"...그리고 이 아가씨는..."
술에 취해 발그레하게 물들인 수진의 얼굴은-
...같은 여자가 봐도
...인정하기 싫지만 충분히 예쁘기에-
그 건달같은 놈이 수진의 얼굴을 찬찬히 흝어보자
수진에 대한 보호본능이 불끈 솟은 은아는
자기도 모르게 수진을 끌어 안으며 외쳤다.
"우, 웃기지 마!
저리 가, 누가 너희랑 논대?!"
그런데-
이상하다,
그 양아치 같은 놈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치, 수진을 안다는 듯이.
한참을 수진을 뜯어 본다.
"...연...수진?"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수진을 가리키며
은아에게
그녀의 이름을 확인까지 한다.
"..니, 니가 수진이를..."
니가 수진이를 어떻게 알아?라고..
은아가 채 묻기도 전에
그 녀석은 자기 일행들을 뒤돌아보며
누군가를 소리쳐 불렀다.
"진우 형!!"
...지, 진우?!??
그 이름이 불려지자 마자
은아는 간이 덜컹 내려 앉는 것같았다.
자신이 잘 못 들었던 것임을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저 어둠 속에서 나와
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사람은...
...분명히....
진저리 날 만큼 수진을 괴롭혔던...박진우였다.
"얘, 맞죠-
진우형이 찍었다는 애-
바다여고 3학년, 연수진. 얘 맞죠?"
수진이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퍽 당황해하던 진우는
이윽고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는 걸 알았는지
비열한 웃음을 흘린다.
"...놔 줘.
수진이 지금- 기분 안 좋다구.
술 마신 것 보면 몰라?
니가 수진이 좋아한 다면 놔..."
"...저, 시끄러운 계집애 끌어내라."
은아의 말을 들은척도 않고,
진우는 턱짓을 하며
은아를 끌어내라고 후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웃기지마-
수진이 건들 생각 하지마-
당장 못 보내줘, 이 미친 새끼야!!"
덩치가 좋은 남자 둘에게
팔을 하나씩 붙들려
공원 바깥으로 질질 끌려나가면서도
은아는 미친 사람처럼 바락바락 악을 쓰며 반항했다.
"...수진아, 도망쳐-
야, 연수진-
아직 술에 덜 깬거야?!"
아니,
끌려나가는 은아의 눈에 비친 수진은
술은 이미 깬 듯 했다.
벤치에 똑바로 앉아서
자신을 능글맞게 내려보는 진우를 바라보는
수진의 눈빛은 지극히 이성적이었고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접한 현실을 또렷이 깨닫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자기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수진이었기에
...쓸데 없는 저항은 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건지도 모른다.
"...오랜만이다. 연수진."
진우의 후배(후배인지 졸개인지)둘이
은아를 끌고 나가고 나서
이제 수진과 진우, 둘만 남은 공원에서
진우가 오랜 침묵을 깨고 인사를 건넨다.
"...더 예뻐졌다?
...에릭은 왜 없냐?
...혼자서 이런데서 술 마시고 있고."
"....놓아줘."
쳐다보는 것 조차 역겹다는 듯
시종일관 진우에게서 30도 가량 틀어진 방향을
꼿꼿하게 응시하고 있던 수진이
진우에게 명령하듯 차가운 한마디를 던진다.
"...놓아달라고?
...야...
...너같음...놓아주겠어?
...얼마만에 만난....
햐아...연수진...진짜 보고 싶었다...."
산 넘어...산...이로군....
수진은...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아악-"
공원을 벗어나
얼마나 더 끌려왔는지 모르겠다.
적어도...끌려 온지 십분..쯤은 되었을 것같다.
좌우에서 은아를 붙잡고 있는 놈 둘이-
얼마나 세게 그녀를 잡았던지
팔뚝이 저려 올 정도였다.
"놔, 이 놈들아-
너, 너희- 수진이 털 끝이라도 다치면
가만 안 놔둘 줄 알어!
정말이야...죽일거야,
너희들.."
"마음대로..."
그런 은아가 가소롭다는 듯,
양아치 녀석은 침까지 찍찍 갈겨대며
잔뜩 여유를 피운다.
"..그럼...우리 여기서 좀 기다릴까?
진우형이 그 계집애랑 재미 볼 때까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는 은아였다.
...도움을 청할 방법은....없었다.
경찰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녀석들이 이렇게 붙잡고 감시하고 있으니
경찰서에 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그 시간까지
공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여학생들에 대해
경찰이라고 고운 시선을 보낼 리 있겠는가...
눈 앞에 보이는 녀석들이라고는...
담배를 꼬나 물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여학생을 끼고 히히덕 거리는...
길가에 쏘다니는 녀석들 뿐.
"...젠장할...
...창조고 새끼들 오늘 집회 있어?
왜 저리 많이 쏘다녀?"
은아의 오른팔을 잡고 있던 녀석이
자신의 동료에게 기분 나쁜 듯 물었다.
순간...
섬광처럼 은아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은아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이 년이 미쳤나-
당장 못 앉아?!"
그녀를 지키던 녀석 하나가 기분이 언짢은 듯,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눈에 창조고등학교 교복이 보이자
은아는 지옥에서 구세주를 만난 듯 했다.
"이봐요-!!
거기 창조고들-! 야, 창조고등학교!!
너희들 일루 와봐!!"
목구멍이 바짝바짝 말라 온다.
이름이 불린
대여섯명의 창조고 양아치(-_-;;)들은
꽤나 황당한 듯
범생임에 분명한 여학생을 흝어 보며 술렁인다.
그리고는...
그 중 한 명이 찬찬히 은아 쪽으로 다가온다.
"이.., 이 년이 미쳤나-
창조고놈들을 끌어들여 무엇하겠다는거야!"
진우의 후배는 은아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왜 불러?"
교복 셔츠 단추를 서너개 풀어헤치고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가 난,
썩 인상이 좋지 못한 창조고 녀석이
은아를 바라보며 반쯤은 호기심에,
반쯤은 어이가 없다는 듯 묻는다.
"...이민우 어딨어."
창조고...라면....
어쩌면...신화의 빽..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이 댄 이민우의 이름은-
꽤나 효과가 좋았다.
은아를 제외한 남자들은,
순간 놀라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수 초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창조고 녀석이
갑자기 퍽 양순해진 태도로 은아에게 묻는다.
"...미, 민우 형님...아세요?"
....빙고....!!
은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러나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민우...어딨어.
급해. 민우한테..빨랑 전해.
박진우한테 수진이 잡혀갔다고-
...수진이라고 하면 알아.
얼른 연락해."
민우의 이름을 대자마자
갑자기 몸놀림이 신속해지는 창조고...들이다.
창조고 녀석은 갑자기 90도로 허리를 굽혀서
은아를 황당하게 하더니
뒤돌아 일행에게 재빨리 명령을 내린다.
"....야-
빨리 민우형한테 연락해서 일루 오시라고 하구,
그리고 너희들은-
이 놈들 잡아 놓고 이 분 보호해드려-"
순식간에 뛰어온 창조고들에 의해
은아는 정말 극적으로
팔이 풀리면서 자유로운 몸이 된다.
진우의 명령으로-
은아를 잡고 있던 놈 둘은
졸지에 창조고들에 의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고.
"...언제 오는데? 민우는?"
"...아마도. 곧 오실겁니다.
그런데...어떻게...."
어떻게 너같은 범생이가 민우를 아느냐...는 듯
창조고들이 알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은아는 지친 듯 힘없이 중얼거린다.
"...에릭...이랑 좀 아는 사이야."
...내가 아니고 내 친구가...말야....
*****************************************************
"...뭐야...누가...날 안다고?"
...후배들이 집회니 뭐니 했지만
앤디의 병실이나 지켜야지 마음먹으면서
오늘 밤 외출을 하지 않으려 했던 민우는-
병실에 걸려온 갑작스런 전화 한통으로
그날 밤 스케쥴을 변경해야 했다.
"...누구라고?
...응, 연...수진?"
수진의 이름이 민우의 입에서 나오자
함께 병실 복도에 나와 있던 동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본다.
"..응, 아는 사이니까 걱정마.
그래, 잘 보호해주고-
내가 갈테니까 그때까지 행동개시하지마.
괜히 서툰 짓 해서
경찰서 들어갈 일 만들지 말란 말야."
핸드폰 플립을 접으며
민우는 조금 미안하다는 듯 동완에게
핸드폰을 들어보이며 양해를 구한다.
"...미안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어서...나가 봐야겠다."
"...어, 어떻게 된건데?"
수진에 대해 앤디에게 들은 바가 있었던 지라-
동완은 또 무슨 사고가 터진게 아닌가, 염려스럽다.
"...좀 골치 아픈 놈 하나가
연수진...에게 달라붙었나봐.
...가볼게."
"응...
아, 그리고-"
아, 그리고-라는 소리에
서둘러 병원 밖으로 나가려던 민우가
동완을 휙 돌아본다.
"...에릭...한텐 말하지 마라. 알았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얼른 대답을 못하던 민우가
알았지..하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동완을 보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윽고 병원을 뛰쳐 나간다.
*****************************************************
"...날...봐라, 연수진."
아까부터 자신과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는
수진의 태도가 화가 난다는 듯,
진우가 위협조로 말했다.
"...날 보라고 했잖아!!"
자신의 목덜미까지 느껴지는
진우의 뜨거운...호흡이...
흡사 뱀이라도 닿은 것처럼 기분나쁘고...싫다.
아까부터 눈물이 자꾸...나려고 하는데....
죽어도...눈물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하는
진우의 손길은- 좀처럼 느슨하게 풀어지지 않았다.
"...젠장할!!"
결국 화가 난다는 듯,
진우는 또 폭발해 버린다.
"무엇이 그리 싫다는거야?
왜 그렇게 나와 있으면 기분나빠 죽겠다는 듯
인상을 쓰는거지?
그렇게 기분나쁜가?
좀 웃어봐!
웃을 줄 몰라!? 너 병신이야, 연수진!??!"
....아....
...누구였더라...
그래...맞아...
천 칠백년...전....누군가도...
나에게...저 말을 하면서 화를 냈었다....
'내 왕비가 된 것이 기쁘지 않나..?
왜 그리 인상을 쓰고 있는거지?
좀 웃어봐!
오늘은 너와 나의 혼사날이잖아!
니가 왕비가 된 기쁜 날이라고!
젠장할- 왜 웃지 않는거냐...!! 왜!!!'
또...옛날이 떠오른다.
앞에서 울부짖는 진우의 얼굴 따윈,
오히려 먼, 먼 세계의 일 인 듯,
천 칠백년 전 옛 기억이 오히려 더
현실감있게 다가 온다.
문정혁을 두고...
억지로...가야만 했던 시집...
첫날밤...
금새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같은 자신을 향해
남편은-
왕은-
무섭도록 화를 내었다...
그러나...
정말...
웃을 수가 없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순간만큼은...
천금을 준대도...
...웃을 수 없었다.
"...보내줘...."
수진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진우에게 애원한다.
왜...내 사랑은...
이다지도 어긋나는 것일까....
박진우, 너도...
이렇게 나를 원망하다 원망하다...
아주..먼 옛날...다음 생에선
나의 원수로 내 앞에 설거니...?
내가 니 마음에 준 상처를
앙갚음 하기 위해서...
이건...누구의 장난일까...?
왜...이다지도...
...왜 이다지도 가혹한 인연들로
우린..엮어졌을까...
도대체....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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