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미국 대선 후보 TV 토론 도중 사회자가 사형제 반대론자인 마이클 듀카키스(91)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당신 부인) 키티 듀카키스가 성폭행을 당해 살해됐어도 그 범인의 사형에 반대하겠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듀카키스 후보가 “그래도 반대할 것”이라고 답하자 조지 H W 부시(1924~2018) 공화당 후보는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느냐”고 호통을 쳤다.
남편 마이클이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저 보고 아내를 버리란 겁니까?"라고 되받아쳤더라면 대선 결과가 달라졌을까 싶긴 한데, 결국 그 해 11월 미국 대선은 부시 전 대통령의 압승으로 끝났다. 마이클 듀카키스가 62년을 해로한 88세의 아내 키티 여사를 먼저 떠나보냈다고 AP 통신이 22일(현지시간) 전했다. 고인은 전날 밤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 자택에서 남편을 비롯해 가족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고인은 오래 전부터 치매를 앓아 온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을 대표해 고인의 아들 존 듀카키스는 “어머니는 좀 까칠한 면도 있지만 재미있는 분이셨다”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60년 넘게 서로 깊이 사랑하며 해로하셨다”고 말했다.
키티는 1936년 12월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조부모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아버지 해리 엘리스 딕슨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부지휘자 등을 지냈다. 키티는 스물한 살이던 1957년 결혼하고 아들까지 출산했으나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4년 만에 이혼했다. 그 뒤 세 살배기 아들 존을 데리고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마이클과 1963년 재혼해 두 딸 안드레아와 카라를 낳았다.
그리스 핏줄인 마이클은 1955∼1957년 주한미군에서 육군 통신병으로 복무하고 전역 후 명문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결혼한 해에 민주당 소속으로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발을 내디뎠다. 마이클이 1975∼1979년과 1983∼1991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주지사로 일하는 동안 키티는 남편을 위한 내조에 충실했다. 다만 1979년 홀로코스트 기념위원회 위원이 돼 1987년까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희생된 유대인을 기억하는 사업에 관여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키티가 유대인이라며 위원 직을 제안해 성사됐다.
남편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자 키티는 남편 유세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며 활기찬 지지 연설을 했다. 당시 공화당은 네거티브 전략을 동원했는데 키티가 과거 베트남 전쟁 반대에 앞장선 것도 표적이 됐다. 한 공화당 상원의원이 “키티가 1970년 성조기를 불태우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헛소문이었으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남편과 함께 백악관에 입성하려던 계획이 좌절된 뒤 키티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대선 패배 몇 달 뒤 60일의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았다. 훗날 우울증에서 벗어난 키티는 약물 중독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부와 지역사회, 의료계가 약물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1990년 자서전 'Now You Know'를 통해 그녀는 알코올과 약물 중독, 낮은 자존감이 많은 부분 모친 탓이라고 돌렸다. 2006년 다른 책 'Shock'에는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우울증을 덜려고 2001년 시작한 전기 경련 치료법이 "내게 새로운 현실을 열었다"고 높은 신뢰를 보냈다.
선거 이듬해 제41대 대통령에 취임한 H W 부시 전 대통령은 홀로코스트 기념위원회에서 오래 일한 키티를 다시 위원으로 위촉했다. 이를 두고 대선 과정에 키티가 흑색선전의 표적이 된 데 용서를 빌고 화해하려는 몸짓이란 해석이 나왔다.
1990년대 말 부부는 각자 나눠 생활했다. 고인은 캘리포니아에서 사회봉사직 일을 했고, 남편 마이클은 일 년의 대부분을 캘리포니아 주립대 로스앤젤레스(UCLA) 캠퍼스 교수로 봉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