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지석 동
성묘 가서 쓸 떡과 오징어 등을 샀다. 러시아워 전에 간다고 탄 버스가 만원이라 간신히 끼어서 갔다. 그때 어디서 큼큼한 냄새가 났다. 생각해보니 내 가방에 든 오징어에서 나는 냄새였다. 참으로 난처했다.
전철에서도, 시외버스를 갈아탔을 때도 내 옆에는 사람이 앉지를 않았다. 나한테서 나는 냄새로 알고 피한다고 생각하니 창피해서 얼굴이 뜨거웠다. 귀한 먹거리였던 오징어가 냄새 때문에 외면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내가 오징어를 통째로 먹을 수 있었던 날은 소풍 가는 날이었다. 그날 어머니가 어깨에 매주시던 보자기에는 김밥 두 줄, 사과 한 개, 삶은 달걀 세 개, 사이다 한 병, 오징어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다른 것은 다 먹었어도 오징어는 가지고 와 구워서 동생들과 나눠 먹었다. 오징어는 살이 두텁고 분이 하얗게 인 것이 맛이 좋았다. 고것을 연탄불에 얹으면 마치 뜨거워서 죽겠다는 듯 몸을 비틀다가 숨이 끊어진 듯 오그라졌다. 그 뜨거운 것을 찢어서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났다. 특히 함박눈이 내리던 밤, 아내와 긴 창경궁 돌담을 끼고 결으며 땅콩을 곁들여먹던 그 맛을 어찌 잊을까!
내가 트롤선 통신장을 할 때다. 서아프리카 모로코, 모리타니, 세네갈 연안에서 잡는 오징어는 얼마나 큰지 큰 것 두 마리면 고기 담는 펜이 꽉 찼다. 두께도 동해산 오징어의 배가 넘고 맛도 월등히 좋아 톤당 팔천 달러나 받았다. 말린 것을 가늘게 찢어서 가스라이터 불에 구워먹으며 가족들한테 맛 보여줄 날을 기다렸다. 라스팔마스에 입항하면 술집에 가서도 라이터 불에 구워서 안주를 했다. 백인들이 보고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웃어, 한 마리 주었더니 똑같이 구워 먹으며 웨이터 편에 맥주를 보내줘서 잘 마셨다.
귀국할 때다. 세관에서 가방을 열다가 코를 막으며 어서 가라고 해, 기분이 나빴다. 우릴 무시하는 것 같아서였다. 하긴 그때 우리 가방을 뒤져봐야 돈 될 것은 없고 냄새나는 오징어 몇 마리뿐이라 그랬을 것이다.
집에 와 형제들한테 오징어를 선물했다. 큰누이와 넷째 누이 식구는 그걸 먹고 애어른 없이 탈이나 밤새 토하고 화장실에 다니느라 난리를 쳤다고 해서 난처했었다. 해풍에 안 말리고 기름내 나는 기관실에서 말린 것이 잘못인 것 같았다. 둘째 셋째 누이는 별일이 없었는지 더 없느냐고 해서 웃었다.
82년 4월 뉴질랜드로 조업하러 가기 전날이었다. 아내가 추억이나 만들러 가자고 해 당시 동물원이 있던 창경궁엘 갔다. 모처럼 아이들한테 옷도 사 입히고 나섰지만 우울했다. 그건 아내가 며칠 전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삼 개월 된 태아를 지우며 불임수술까지 해, 아예 아기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날 작은애가 오징어를 사달라는 걸 안 사주었다. 심술이 난 아이 손을 잡고 걸으면서 '내가 그걸 안 사주고 가서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이러나.' 했었다. 아내를 미워했던 마음이 딸아이한테까지 미쳤던 것 아닐까.
다음날 김포에서 비행기를 탔다. 이륙한 후 나온 식사에서 피클이 눈길을 끌었다. 고 짜글짜글한 것 세 개가 가슴 졸이며 기다릴 처자식 같아 한참 속울음을 울었다. 2년 뒤에나 만날 아내를 마음 아프게 하고 온 것이 후회돼서였다.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코피를 다 쏟았다.
뉴질랜드 어장은 오징어 철이면 던지는 그물마다 십 톤 이상씩 올라왔다. 그것을 보고 작은아이 생각이 나서 코끝이 찡해
'그까짓 오징어가 무어라고 안 사주고 와서 이렇게 가슴 아파할까!' 했다.
오징어가 하도 많이 잡히니까 나중에는 지겨웠다. 채 처리를 못 해서 버리면 갈매기들이 잔치를 했다. 그런 때는 통신실에서 처리실로 내려가서 몇 시간씩 일을 도왔다. 주방장도 뼘치를 한 소쿠리 골라다 내장도 안 빼고 통째로 쪄서 고추장과 같이 선원식당에 내놓았다. 오가며 고추장에 쿡 찍어서 우적우적 먹었다. 그때 먹은 오징어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번은 한국 운반선이 와서 고기를 실어간다는 전보를 받았다. 같이 갔던 사돈한테 김치통을 세 개 구해서 오징어젓을 담그라고 했다.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많이 담느냐고 물었다. 집에 보낼 것이라고 했더니, 여기서 그걸 어떻게 보내느냐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넬슨항에 입항한 다음 날 운반선이 왔다. 이국에서 태극기 단 배를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그 배의 통신장은 구면으로 육십 대 중반이었다. 이제 고만 타지 왜 또 나왔느냐고 했더니,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다음, 계다 뭐다 하며 집 밖으로 나도는 며느리가 보기 싫어서 도망 왔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분한테 오징어젓갈 이야기를 했다. 한 통은 선배님이 드시고 두 통은 서울로 부쳐달라고 했다. 그는 염려 말라며 대선 소주를 내놓아 오랜만에 고국 술맛을 봤다. 한 달쯤 뒤에 오징어젓을 받았다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선배가 진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의 성의가 정말 고마웠다.
그토록 흔했던 오징어가 잡히지 않아 어민들이 울상이다. 너무 많이 잡아낸 이유도 있겠고 기후변화로 생태계가 바뀐 탓도 있지 싶다. 광어나 우럭처럼 양식이라도 해서 어민들은 생계곤란을 면하고 소비자는 타우린이 풍부한 오징어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2012. 4. 18.
첫댓글 오징어요선생님, 그리 좋아해서 잘 먹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치아에 부담이 되어 예전처럼 즐겨 먹지 못합니다. 감상 잘 했습니다.
선생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각별의 오징어도 많이 드시고 오징어에 대한 추억이 많으시네요. 감사합니다.
지석동 선생님의 오징어사연 잘읽었니다. 그많았던 오징어가 자치를 감추고 나타나지않는 기후변화를 마음깊이 되세겨보아야 할것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