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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 환자가 정결의식
레 14: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4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5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6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7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8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9 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레 14:1-9 / [문둥병이 나은 뒤의 정결예식]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다음은 문둥자가 깨끗해져서 부정을 벗는 날 지켜야 할 규정이다. 먼저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 데리고 오면 3) 제사장은 그를 데리고 진영 밖으로 나가 그의 환부를 자세히 살펴보아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 4) 그에게 깨끗한 새 두 마리와 송백나무와 진홍빛 털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여라. 5) 그리고 깨끗한 물이 담겨 있는 오지그릇 위에서 가져온 새를 잡게 하여라. 6) 또 살아 있는 새 한 마리는 송백나무와 진홍털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와 깨끗한 물이 담겨 있는 오지그릇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7) 문둥병에 걸렸다가 이제는 깨끗하다는 판결을 받은 그 사람에게 일곱번 뿌려라. 그러고 그 사람에게 깨끗하다고 선언하고 나서 살아 있는 그 새를 들판으로 날려보내라. 8) 그런 다음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은 입고 있던 옷을 빨아입고 몸에 난 수염이나 털을 모두 깎고 나서 목욕을 하면 깨끗한 사람이 된다. 그런 뒤 다시 진영 안으로 들어와 자기가 살던 천막 밖에서 이레 동안 머무르게 하여라. 9) 이레째 되는 날 자기 몸에 난 머리털과 턱에 난 수염과 눈썹을 모조리 깎고 입고 있던 옷을 빨아 입고 물로 목욕을 하면 그 사람은 깨끗해질 것이다.
나병이 죄를 상징한다면 정결의식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상징합니다.
나병 환자가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1-4) 누군가 나병에서 회복되었다고 생각되면 제사장은 그를 진 밖에서 검사하게 되고, 그 환자가 치유되었다고 판단되면 정결의식을 위해 준비합니다. 첫째 날의 정결 의식을 위해서 준비할 것은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질그릇입니다. 새에게 행해지는 예식은 나병 환자에게 일어날 변화를 상징합니다. 새의 예물이 지녀야 할 조건은 '살아 있는'이며 '정결함'입니다. 정결예식 예물 중 백향목은 강하고 향기로운 향을 발하며 잘 썩지 않습니다. 이는 치유된 나병 환자가 다시는 썩어들어 가는 육체를 가지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홍색 실은 속죄와 새 생명을 상징하고, 우슬초는 흡수력이 강하고 박하 향이 있는 식물로서 방부제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피를 찍어 뿌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치유된 나병 환자의 부패가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막는다는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새를 잡으라(5-7)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으라'는 히브리어 본래의 의미로 '신선한 물이 담겨 있는 질그릇 안에서 잡으라'는 뜻입니다. 질그릇은 치유된 나병 환자를 상징하고, 물은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새를 잡을 때 이 새의 피는 질그릇 안에서 신선한 물과 섞이게 됩니다. 피가 섞인 생수는 치유된 나병 환자에게 주어질 새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은 한 마리 새는 살아있는 그대로 우슬초 줄기와 백향목 나뭇가지에 홍색 실로 묶어 질그릇 속의 핏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나병 환자에게 핏물을 일곱 번 뿌림으로써 정결하다고 선언하고 들판에 자유롭게 놓아 주었습니다. 산 새(The living bird)에 내포된 상징성은 생명의 세력이 죽음의 세력을 압도한다는 것입니다.(참고 요일 5:6, 8; 롬 4:25)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리하면 정결하리라(8-9) 치유된 나병 환자는 일곱째 날에 정결의식으로써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몸을 물로 씻음으로 육체적 나병의 잔재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고 진 내로 들어 올 수 있었으나 집 밖에서 7일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육체적 병과 부정의 잔재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이고 영적인 성결을 얻기 위한 2차 정결예식을 위한 시간이었습니다(참고 마 8:1-4).
적용: 새 생명은 죄의 잔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결하기 위해 날마다 무엇을 하십니까?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태어난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는 현대의 첼로 주법을 확립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첼리스트였습니다. 그가 95세 때 한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손꼽히고 있는데, 그런 선생님께서 아직도 하루에 6시간씩 힘든 연습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첼로의 활을 내려놓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나는 매일 조금씩 실력이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람들 또한 한순간에 그와 같이 높은 곳에 뛰어오른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과일, 한 송이의 꽃도 금방 맺히지 않듯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노력이 끝이 없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 설 교 >
회복된 문둥병자의 정결 의식
레위기 14:1-9 / 코너스톤 장로교회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환자가 병이 낫는다면 기적입니다. 식물인간으로 수년간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온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그 역시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문둥병에 감염된 사람이 낫는 것 역시 기적입니다. 즉 이 당시만 해도 문둥병은 불치병으로 일반적인 치료책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문둥병이 나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문둥병이 나은 사람은 제사장에게 진찰을 받고 확인 절차를 받고 진영 안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제 새벽 예배를 통해 진영 밖에 나가 부정한 자를 접촉해야 하는 제사장의 모습을 통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 보았습니다. 문둥병으로 인해 부정해진 자에게 깨끗하게 되었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처소를 떠나 진영 밖으로 나가는 제사장의 모습은, 우리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 십자가에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 합니다.
하나님꼐서는 문둥병에 걸렸던 환자의 병이 고침을 받았으면, 그가 진영 안으로 돌아오기 전에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새벽에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제사장은 두 마리의 새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대부분의 제사가 소나 양으로 드려지는 것에 반해 비교적 값이 싼 새가 제물로 쓰이는 이유는, 진 밖에서 환자로서 생활하던 이가 가축을 접할 수 없기에 구하기 쉬운 새를 통해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또한 문둥병에 걸린 환자가 그 동안 진영 밖에서 경제적 활동이 불가 했으므로 소나 양을 살만한 형편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의 형편을 고려한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처럼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제도를 살펴 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은혜가 얼마나 세밀한지 보게 됩니다.
어제는 우리가 새를 중심으로 예물을 살펴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제사를 위해 쓰이는 또 다른 재료들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절에 보니 백향목이 나옵니다. 백향목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할만큼 강하고 튼실한 나무입니다. 향기롭고 잘 썩지도 않습니다. 백향목이 정결 예물로 사용된 것은 정결케 된 몸에 다시 부정함으로 썩어 지지 않을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니 ‘홍색실’도 있습니다. 고대에는 진홍색은 중요한 것을 나타낼 때 쓰인 색깔입니다. 학자마다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만, 홍색실은 피와 속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홍색실은 하나님의 속죄를 나타냅니다. 4절에 보니 우슬초도 있습니다. 우슬초는 털이 무성하고 잎이 오밀조밀하게 밀집되어 있어 피를 찍어 뿌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죠.
어제 새벽에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제물로 가지고 온 두 마리의 새 중에 한 마리를 잡아 죽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레 14:5)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졸졸 흐르는 물에다가 그릇을 넣고 그 안에서 새를 잡는 것과 같은 오해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흐르는 물이란 시냇가처럼 흐르는 물에 담그라는 것이 아니라 ‘Fresh water’ 생수를 말합니다. 즉 질그릇에 생수를 담고 그 위에서 새를 죽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피와 생수가 섞이게 됩니다. 두 마리 중 죽은 새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환자 자신을 상징합니다. 또한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죄인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합니다.
6절 말씀을 보면 맨 마지막 단어가 뭐죠? “찍어”라고 되어 있죠? 그런데 이게 사실은 ‘담그다’라는 해석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죽인 새의 피와 생수가 섞인 물이 있는 질그릇에 살아 있는 새,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담급니다. 그리고 피가 섞인 생수로 환자에게 일본 뻔 뿌립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7은 완전 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따라서 피를 7번이나 뿌렸다는 것은 환자가 부정함으로부터 완전하게 정결하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케 함과 동일합니다. 피 뿌림을 받은 문둥병에서 나은 사람은 다시금 진영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는 특권이 회복되게 됩니다.
7절을 보면 아까 물에 잠시 담구어 두었던 새를 자유롭게 들에 놓아줍니다. 새가 들판으로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처럼, 죽음의 사슬과도 같은 문둥병이 풀어지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붉은 피가 온 몸에 묻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사슬에서 놓임 받고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8-9절을 보면 제사를 드리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약간의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일단 문둥병에 걸렸던 자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다 물에 빨래를 해야 했습니다. 또한 온 몸에 난 털을 다 밀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진영에 들어가서도 자기 장막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칠일 간 장막 밖에서 생활하다가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미 제사장이 병이 다 나았다고 선포 했는데도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참 까다로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절차들을 통해 문둥병이 얼마나 무서운 질병인지, 그 질병에 걸리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편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삶의 손해를 봐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이를 통해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우리 삶에 무서운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 죄가 얼마나 큰 고통과 불편을 일으키고 그리고 손해를 보게 하는지 깨닫게 하십니다. 문둥병이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기에 신중을 다하고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우리의 죄도 이제라도 또 다시 우리들을 넘어뜨리고 유혹에 넘어갈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있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피로 말미암아 혐오스런 문둥병과 같은 죄를 씻음 받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정결한 자요 주님의 백성으로 인정 받은 삶을 살고 있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히 죄로부터 무관한 삶을 살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도 죄의 습성은 남아 있어서 우리의 연약함을 틈타 죄는 또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그 날까지 죄의 생각들을 쳐 복종시키고 죄로 인해 더럽혀진 마음을 정결케 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장애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레 14:1-9
다시 장애인주일이 찾아왔습니다.
지난 20일은 장애인의 날이고 이를 전후로 해서 우리 교회는 해마다 장애인의 날을 지켜오면서 장애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모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2년전 장애인의 주일을 맞이하면서 단순히 장애인에게 사랑을 보이자 하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작은 것이라도 구체적으로 한번 실천해 보자란 취지에서 장애보조기구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목발 20여개, 휠췌어 2개가 수집되어 적절하게 필요한 분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을 돕기 위한 기금을 몇몇 교우들이 뜻있게 지속적으로 헌금해 주셔서 무려 222만여원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이 기금은 일부 이미 장애인들을 위해 휠체어를 산다든가 세탁기를 산다든가 하면서 쓰여졌고 남아 있는 기금도 조금 더 모이면 장애인들을 돕기 위한 아주 실질적인 사업에 쓰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산지역사회선교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이 협의회는 총회 사회부와 부산노회와 부산동노회와 더불어 사회선교 전반을 연구하고 사업을 추진하는 대 사회봉사기구로서 지난해에는 특별히 장애인선교에 집중했습니다.
먼저 장애인 휠체어 모집 켐페인을 해서 현금 420만원 현물 2대를 마련하여 총 14명의 지체부자유장애인들에게 작년 12월 6일 기독교방송국 강당에서 휠체어 전달식을 했습니다.
오늘 그 중에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찬양을 해 주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장애인기금과 6여전도회 바자회 수익금에서 일부를 지원하여 참여하였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장애인 문화선교 차량을 운행할 계획으로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은 대부분 문화적 생활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문화행사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차량을 구입해서 이동도서관과 음악테이프, 교양테이프등을 구비하고 직접 장애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문화적 삶을 도우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정신적, 신체적 장애를 가지신 분이 많이 있습니다. 약 37명 정도 있는데 작년에는 전혀 기금이 없어서 도울 수 없었지만 올 해는 다소 기금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12명 정도에게는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여러분의 끊임없는 기도와 관심이 요청되고 지속적으로 이 도움을 계속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장애인주일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성경을 통해 묵상하려고 합니다.
장애인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도로, 교통, 건물 등 모든 시설들이 사실 신체적으로 불편함이 없는 사람위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 보다도 가장 가슴아픈 불편은 사회적 냉대입니다.
장애인은 정상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입관으로 갖고 그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커녕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종종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물을 새로 건축한다고 하면 동네에서 들고 일어나 반대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런 반대 저변에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격리의식이 내재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장애인에 대한 냉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말씀은 상당히 우리에게 다른 측면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레위기의 말씀인데 이 레위기는 성경을 비교적 가까이 하는 분들도 읽기 어려운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레위기에는 제사지내는 법과 규칙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다소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가 가신 제사, 즉 예배의 의미가 아주 깊이 있게 반영되어 있는 책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 읽은 부분은 "정결예식"에 대한 규정의 일부입니다.
사실 이 "정결예식"은 11장에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12장에 아기를 낳은 산모에 대한 정결예식, 13장에 악성피부병, 즉, 요즈음 말로 하면 천형으로 일컬어지는 나병에 대한 분별방법과 대처방법, 그리고 15장에는 남자가 부정하게 되는 경우와 여자가 부정하게 되는 경우가 제시되어 있고 16장에 들어가면 여기에 대한 속죄규정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레위기 중에서 정결예식은 11장부터 16장에 이르기까지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정결예식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스라엘민족의 보건위생에 관한 규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이 제사규정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당시 유대나라의 기후나 위생상황에 비추어 보아서 엄격하게 전염병이 방지되고 전염병이 일단 발병하면 더욱 번지지 않도록 하는 아주 세심한 장치가 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11장에 나오는 부정한 동물과 정한 동물의 구분은 그 동물의 본질을 두고 하는 구별이 아니고 그 동물의 위생이 유대기후에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한 실생활적인 구분입니다.
이러한 음식구분법은 지금도 안식교에서는 그대로 지키고 있는데 상당한 부분은 일리도 있으나 우리 나라의 기후조건에 비추어볼 때 백페센트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상당히 타당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12장에 들어가면 여성이 아기를 출산한 다음에 위생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많은 산모가 죽고 아기까지 죽는 사태가 속출하기 때문에 이를 엄격히 처리했습니다.
이를테면 아기를 낳았을 때 일정기간동안 부정한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부정하다는 말은 흔히 한국 무속에서 말하는 "부정탔다"란 말이 아니라 깨끗하지 못한 상태라는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30일 혹은 60일 일정기간동안 집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들과 딸의 경우가 다른데 이것은 아마 당시 가부장제적 사고에서 그렇게 차별을 두지 않았나 싶고 아기를 낳은 여성이 성소에 드나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피의 부분이 당시에는 어떤 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성소에로의 접근을 막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3장에는 악성 피부병에 관한 규정이 나오는데 이 때의 악성 피부병은 곧 나병입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엄청나게 강하고 한번 발병했다 하면 본인은 물론 온 동네가 희생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규정을 두었습니다.
발병하였을 경우, 그 증상을 보고 악성 피부병인지 아니면 단순한 병인지 구분하고 이 때 마치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보고 병을 판정하듯이 제사장이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고 그 병에 대한 판정을 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때 제사장은 초기증상을 보고만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의 발전상황까지 줄곳 지켜보면서 최종적인 판단을 아주 신중하게 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악성 피부병에 대한 식별요령까지 자세히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14장에는 이제 만약 그런 악성 피부병에 걸렸던 사람이 다시 회복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베푸는 정결예식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레위기의 정결예식 부분을 읽으면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악성피부병이 발병을 하면 반드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이 판정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병에 대한 판정을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당시 사람들은 이런 병을 엄청나게 무서워했고 만약 이웃 중에 누가 이런 병에 걸리면 천형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를 무자비하게 몰아내어 버립니다. 몰아버린다는 것은 곧 영화 벤허에서 보셨듯이 동네에서의 추방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경우에 실제 그 병에 걸리지 않고 유사한 병에 걸린 사람들도 당할 수 있습니다. 병이 발병하면 반드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제사장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경과를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 본문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용케도 회복하였을 때 그를 다시 정결하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사회로 복귀하는 절차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런 절차가 없으면 한번 병에 걸렸던 사람을 동네사람들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나았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완전해 지고도 공동체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공식적으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도록 복권시켜 주기 위해 제사장은 정결예식을 거쳐서 그들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하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동기 한 가지가 있는데 성경은 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하다고 판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권리를 최대한 지켜주고 오히려 그들의 회복에 촛점이 주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종교란 것이 가끔 율법적인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종교생활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깨끗지 못하면서 도덕적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소외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병도 서러운데 그들이 소외되는 것은 더욱 서러운 것으로 인식하여 그들의 권리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모든 가능한 일을 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구원에서 한 사람이라도 떨어뜨리려기 보다는 멸망이 선고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편으로 옮겨 오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전에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영화 "쉰들러스 리스트"란 영화를 보면 아우슈비티 죽음의 수용소로 가게 되어 있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마지막에 자기의 자동차와 악세사리까지도 팔았다라면 10명의 목숨, 두 명의 목숨을 더 구할 수 있었을텐데 하고 탄식하는 장면에서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습니다. 레위기는 부정하다고 정죄하려는 의도 보다는 부정한 것을 조심스럽게 판정하고 그리고 그들이 회복되었을 때는 완전하게 사회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는 장치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와서는 항상 구체적으로 실천되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항상 죄인으로 판정한 사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장애인의 문제도 같은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을 돕지 않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그들을 장애인으로 단정하고 차별하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취업에서, 임용에서, 입학에서, 권리에서 자꾸 그들의 존재가 차단되고 차별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인식의 문제가 그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회가 냉대하는 장애인에게 "정하다"고, 즉 "정상적이다."라고 선언하는 제의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장애인에게 가져야 할 근본적인 복음적 시각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장애인으로서 오히려 건강한 사람보다더 훨씬 훌륭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깊은 영혼저변을 흔들고 감동을 준 음악의 성인 베토벤도 장애인이었고 루즈벨트 대통령도 장애인이었으며 얼마전에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물리학자도 휠체어를 타고 강의를 한 천재 물리학자였습니다. 지난 해에 소개한 일본의 미즈노 겐죠란 시인은 그 영혼이 건강한 사람보다더 훨씬 맑고 상상력이 뛰어난 시인입니다. 일본에서는 그의 삶의 이야기를 영화화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장애인이 훨씬 더 영적으로 맑은 정신, 순수한 정신을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멀쩡한 사람들이 그럴 때가 적지않게 많음을 봅니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시덥잖은 도움보다도 그들에 대한 정상적인 시각, 오늘 레위기의 말씀대로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라 정상인이다"라는 정결선언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슴을 열고 마음을 펴게 하는 그 어떤 도움보다더 큰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을 끝까지 선하게 보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 마음을 배워서 장애인들을 더욱 따뜻하게 대하고 그들이 모든 사람과 똑 같은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 해결된 문제
레 14:1-9 / 서연교회 이명현목사
문제없는 직장 좀 소개해 주세요
하나님 말씀을 통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배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유명한 노르만 빈센트 필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빈센트 필 목사님에게 청년 하나가 찾아와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다니는 직장에는 너무 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문제없는 직장을 하나 소개해 주시죠.”
그의 부탁에 빈센트 필 목사님이 두말하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내가 마침 생각나는 직장이 하나 있는데 지금 내 차를 함께 타고 가시죠.”
“아? 지금 소개해 주겠어요?”
“그럼요. 지금 소개하죠. 내 차를 타세요.”
그래서 그는 이 청년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합니다. 뉴욕 시외로 나가더니 빈센트 필 목사님은 공동묘지 앞에 차를 딱 세우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여, 여기가 문제가 하나도 없는 직장입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으면 조용합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사는 것이 문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문제와 살아가나요? 우리들의 문제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 해결된 문제. 매일 문제를 대하며 살아가는 학생- 정말 문제만 보아도 지긋지긋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여기도 둘 중에 하나 속에 살아갑니다. 풀 줄 알아서 해결된 문제, 아직 풀 수 없어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인생 문제 중에 해결된 문제가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요, 잘 산 사람입니다. 공부 잘 한 학생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요, 여전히 고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문제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문제마다 해결된 문제로 바꾸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가장 잘 살고, 후회없고 보람있는 삶을 사는 비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주님을 만나면 문제는 해결된 문제가 됩니다.
세계 물리학의 거장은 아이작 뉴턴입니다. 뉴턴은 인류의 과학적 문제를 가장 위대하게 풀어낸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들면서 죽음을 앞에 두고 전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건망증이 생겨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나이도 생일도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수 많은 물리학의 법칙,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고, 이것을 기초로 더 많은 문제를 풀게 했던 것을 자신은 단 한 가지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게 되었다니요. 얼마나 기구하면서도 어처구니 없는 인생입니까!
친구나 후배들이 찾아와 인사를 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 천재가 일생을 통해 가깝게 지내온 사람들한테조차 "자네 누군가?" 하고 물었다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한번은 누가 하도 답답해서 뉴턴에게 물었답니다. "선생님,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
그러자 뉴턴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단 두 가지가 있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것, 이 두 가지는 기억하고 있어요."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함으로 해결된 문제가 되게 했습니다.
사과가 왜 땅으로 떨어지는지 몰라도 사람들은 살 수 있었습니다. 수 천년 동안 만유인력의 법칙을 몰라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떨어진 사과를 주워 먹으며 진짜로 별 지장 없이 별 불편함 없이, 오히려 왠 떡이냐 하면서 신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죄에 문제는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해 세상에서도 힘들게 하며 죽어서도 영원한 심판 속에 있게 합니다.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처절한 절규, 슬피 울며 후회하되, 이를 갈면서까지 할 후회-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예수님의 나의 구주라는 답을 만나면 됩니다. 뉴턴은 다른 것을 다 잊어버려도 이 사실을 잊지 않았기에 인생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어려움에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병도 찾아옵니다. 일하고 싶어도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은퇴도 찾아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도 세월 앞에는 다 내 놓아야 합니다. 기억력도 점점 사라집니다. 인생의 문제에 답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와 별 상관이 없다고 여기지는 레위기, 그러나 레위기는 어렵다기 보다 나와 별 상관이 없기에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 각종 피부병, 심지어는 옷이나 가죽에도 나병이 있고, 집에도 나병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병은 요즘 같은 시대에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약이 없었습니다. 나병은 문제 중의 문제였습니다. 걸렸다 하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집을 나와야 했고, 공동체를 떠나 진밖에 살아야 했습니다. 일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약도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리며 쓸쓸히 켵에 아무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요즘 똑같은 것을 봅니다. 사스나 신종 플루입니다. 성경이 만약 이 병에 대해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이었다면 불신자들까지도 모두 사서 읽느라고 야단법석이 났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당시에 나병이 나았습니다. 세계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정결예식-예배를 통해 깨끗함이 선포되고 공동체로 돌아가며 사랑하는 가족과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기쁜 소식이었을까요? 복음이었습니다.
정결 예식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4절을 보면,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제사장에게 가져갑니다.
백향목은 최고의 건축자재입니다. 솔로몬 성전이 백향목으로 지어졌습니다. 남대문은 솔향이 있는 소나무 중에서 금강송을 썼습니다. 이유는 향기로 인해 벌레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향목은 사단이 틈을 타지 않게 하는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홍색 실은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홍색을 띠는 피는 생명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홍색 줄을 창문에 달아 내린 라합의 집은 무너지지 않고 살았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것을 볼 때,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우슬초는 정결하게 하는 식물입니다. 시 51:7에는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이 3가지 위에 새 하나를 흐르는 물, 질그릇 안에서 잡아 찍어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뿌립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를 살려 주십니다. 인생 죽음의 문제를 풀어 주십니다.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즉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는 해결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영화 벤허에서 벤허의 가족은 문둥병에 걸려 집을 떠나 죽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보혈의 피를 흘려 죽는 순간에, 문둥병이 다 낫습니다. (영상)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 새는 7절, 들에 놓아 줍니다. 자유케 된 것입니다. 문제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해결된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 인생은 해결됩니다.
2. 말씀과 기도로 문제는 해결된 문제가 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실의와 절망에 빠져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인생 진로의 문제를 만났습니다. 한 순간에 목적을 상실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습니다. 그 때, 주님이 찾아 오셨고, 이들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길을 가면서 성경을 자세히 풀어 주시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눅 24:27, 개정)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리고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떡을 가지사 기도- 축사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이들의 눈이 밝아져 바로 이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곧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제자에게 갔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이들은 인생 진로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딤전 4:5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은 롬13,13-4 말씀을 듣고, 인생 방황이 끝났고, 루터와 웨슬리 목사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듣고 구원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이명현 목사도 신학생 때 읽은 요6,29 말씀으로 인생과 목회의 구체적인 방향이 결정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구원받고 사명을 깨달아 하나님의 왕성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몸에 있는 병으로 인해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구원 이후, 그리고 사명을 찾아 힘있게 일하는 이후의 또 다른 문제를 만난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된 문제로 만들었나요? 고후12장에 그 답이 나옵니다. (고후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성경에서 3번은 완전 수입니다. 간절히 응답 올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 해결된 문제가 됩니다.
(고후 12:9, 개정)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기도 했더니 육체의 가시가 자기를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임을 깨달았습니다. 기도 했더니 사단의 사자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활용하신 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곧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해결된 문제가 되더니 아픔이 오히려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었습니다.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약한 것이 어서 누가 무슨 말만 해도 기가 죽었었습니다. 상처가 되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이제 도리어 이제는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만나고, 말씀과 기도로 되어집니다. 해결된 문제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명품 옷을 입고 다니지 않아도, 구설수에 올라도, 내 집을 마련하지 않았어도 , 공부 때문에, 어느 대학을 갈지도, 진로에 대해서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을 예수님과 그 분의 역사- 말씀과 기도에 초청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해결된 문제가 됩니다.
레위기 14:1-9
/ 김두옥 목사
※ Hallelujah!
- 오늘도 수요일 새 날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됨을 감사와 찬양 드립니다.
- 천하 만물이 하나님의 주권 섭리 속에 차질 없이는 진행되어지는 계절이니 주님의 뜻에 순종으로 기적과 평강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지는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때로는 순간적인 실수로 범죄 했으나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를 교회와 성도들이 사랑으로 받지 않고 용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영혼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도 큰 손해를 끼칠 수가 있으니 서로 받아주고 용서와 용납합시다.
- 또한 만사의 때를 하나님이 정하심을 믿고 감사드리며 오늘이 생애의 최고의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본 문
나병환자의 정결예식
이해와 요약
14장에서는 13장에 이어 나병으로 판명된 자가 완치되어 이스라엘 공동체로 복귀하기 위해서 행해야 할 정결 의식과 규례를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 나병으로부터 회복 된 자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진 밖에서의 정결 의식과 여호와의 성막 번제 단 앞에서의 정결 의식을 거치게 하였습니다.
- 옴이나 의복과 가옥의 나병, 붓는 것과 피부병, 색점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 악성 나병이 퍼진 집은 헐고 돌과 그 재목과 그 집의 모든 흙을 성 밖 부정한 곳으로 내어가야 합니다.
- 보수하는 것만으로는 정상적으로 치유되지 않을 때 이런 식으로 완전히 제거 해 버린 것입니다.
- 이와같이 죄악도 몇 차례의 교정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없어지지 않으면 그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합니다.
- 집을 고쳐 바른 후에 색 점이 퍼지지 않으면 색 점이 나은 것이므로 제사장은 그 집을 정하다고 선언하고 정결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 그리고 진 밖에서 7일 동안 행해지는 의식에는 산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 등이 준비되었는데, 이것들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7일이 지난 다음날, 제사장은 번제단 앞에서 그를 위해 속건제, 속죄제, 번제, 소제의 희생 제사를 차례로 드렸습니다.
- 이것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을 예표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나병으로 상징 된 죄악은 우리의 마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 환경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므로 내 마음과 내 교회와 내 직장, 내 집 등 내 주변 환경까지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 훈계만으로도 죄인이 죄에서 돌이킬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징벌하지 않으십니다.
- 나병으로 인해 진 밖으로 쫓겨 난 자가 다시 정결 예식을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죄를 씻음 받고 다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회복함과 신앙공동체 안에 교제가 새롭게 회복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용한다면
오늘의 핵심 (P.S)
정결예식은 새롭게 거듭나는 생활이다. (레위기14장 8-9절)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성도에게도 완전한 구원의 날이 오기까지 죄를 씻고 점진적으로 성화의 과정이 요구됩니다.
- 8-9절을 살펴보면 나병을 앓고 나은 자로서 제사장에게 정결하다고 진단을 받은 자는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몸을 씻고 진에 들어 올 수 있었으나 칠 일 동안은 장막 밖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 그리고 칠 일이 경과한 후 앞서 진에 들어올 때 행한 것과 동일한 의식을 행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장막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 이처럼 하나님께서 문둥병에서 완치된 자가 진에 들어가기까지 칠 일의 기간을 두신 것은 비록 그가 정결의식을 통하여 정결하다고 선언을 받았지만 부정했던 몸과 옷과 털들을 깨끗케 하여야만 온전히 정결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 씻음을 받아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에게도 지속적인 회개를 통한 죄의 습성들을 씻는 성화의 과정이 필요함을 교훈합니다.
- 성도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도 그 안에 죄의 습성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 그러므로 성도들도 또 다시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에 성도는 지속적인 회개를 통해 죄를 씻고 죄의 습성을 제거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영적 정결 의식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죄의 습성에 사로잡혀 또 다시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는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마치 문둥병을 앓았다가 나음을 입은 병자가 제사장에게 정결함을 선언 받아야 합니다.
- 그래서 정결함을 선언 받은 후에도 장막에 들어가기까지 한 주간에 걸쳐 거듭 정결의식을 행함으로 문둥병의 잠복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한 것과 같이 인생을 다시 거듭나는 것과 같으므로 죄가 다시는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회개를 통해 끊임없이 죄의 습성을 씻는 거듭남과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고린도후서 7장1절에서“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고 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죄에 빠진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신 은혜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그리고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성도들을 얼마나 환영하며 힘이 되어 주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 성령으로 회개하고 거듭나서 믿음으로 다시 살아보겠다는 새 가족을 시기 질투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고 진심으로 따뜻한 사랑으로 용납하고 새로운 용기와 격려 속에 함께 새로운 생활이 되도록 협력합시다.
- 누가복음17장3절에서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 그리고 죄에 빠졌다가 회개한 형제에 대해서는 경계심이나 멸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진정한 사랑으로 감싸주며 그 형제가 다시 교회생활에 정상적으로 복귀할 때까지 도와줍시다.
- 고린도후서2장7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습니다.
-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 죄를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회개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며 복음 증거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 그때 만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용납하지 아니 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 아마도 그는 신앙과 인생에서 모두 실패자가 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은 결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순간적인 실수로 범죄 했으나 회개한 자를 교회와 성도들이 사랑으로 용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영혼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도 큰 손해를 끼칠 수가 있습니다.
- 골로새서 3장13절에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사랑으로 권면하여 회개한 자에 대해서는 정결의식을 통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거듭남의 축복으로 따뜻한 위로와 격려로 섬깁시다.
- 그래서 정결의식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피로 거듭남이요,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제 내가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를 용납하시고 용기와 소망을 주셨듯이 죄에 빠졌다가 회개하여 거듭난 형제에 대하여는 사랑으로 용납하고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