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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친선과 미군
강 문 석
금년에도 한미친선군민협의회장 초청 용산 미8군 오찬을 했다. 봄이 한창 무르익어 여름으로 접어든 5월 끝자락에 만나는 식사회동이다. 처음 협의회장께서 “이제 우리가 살면서 친구 만나는 것 이상 더 좋은 일이 있겠소?” 했을 때 난 감동적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도 한두 해 만나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벌써 몇 년 세월이 흘렀지만 오찬행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오늘도 초청인은 멀리 부산에서 찾아온 옛 부하직원들에게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해 훈훈한 정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지난 세월 국토방위 선봉에 섰던 역전의 용사들에게 주어진 감동적인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곧바로 백주에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미국국기 성조기가 불태워지는 현실에 참담한 심경들이 되고 말았다. 답례인사를 할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지만 답답한 심경은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레스토랑을 나서자 국기게양대 밑으로 영내를 오가는 현역 미군들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군인가족으로 보이는 파란 눈의 여인들이 학교에서 귀가하는 어린 자녀들과 걷고 있지만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워 보였다. 유사시 우리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위해 미8군 핵심부대는 평택으로 이동하지 않고 서울에 남기로 했었지만 그 계획은 뒤집어졌고 그것도 예정보다 앞당겨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는 것.
미군과 그들 가족은 고국을 떠나온 입장이지만 다시 복무하던 지역을 벗어나야하는 부담 때문인지 어딘가 풀이 죽어 보였다. 얼마 전 SNS에선 한반도 전쟁 위협 때문에 미군 가족들이 일본을 거쳐 귀국길에 오르는 영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언론들은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로 일관하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한미친선군민협의회는 1981년 설립되었으니 어언 4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다. 협의회가 맡고 있는 일은 한국에 파견되는 미군들과의 친선가교역할뿐 아니라 동란에 참전하여 나라를 구한 역전의 용사들을 찾아 워싱턴을 직접 방문하여 미국 내의 은인들을 한자리에서 위로하는 행사까지 맡고 있다.
그래서 명칭도 군인이 앞서고 민간이 뒤를 따른다. 단체를 이끌고 있는 박정기 회장은 한국중공업과 한국전력 사장을 역임했고 한전사장 재임 때는 원자력 중심 에너지 자립기반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8군을 나서서는 부산행 열차시각을 뒤로 미루고 동두천으로 향했다. 반세기 가까운 1971년 본국으로 철수한 미7사단 주둔지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전철이 의정부에 들어서자 30개월 군 복무기간 중 20개월 몸담았던 미1군단 주둔지 가능역이 나타났지만 그대로 통과했다. 당시 미7사단은 한국동란에서 사단기를 적에게 빼앗겨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부대였다.
그러한 부대를 전역 한 해 전인 1967년 여름 딱 하루 발 디뎠다. 인근부대와 합동작전을 목적으로 병사들에게 부대위치를 알리는 훈련이었지만 당시에도 하루로는 너무 짧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앞서 문산에 주둔한 미2사단에는 2주간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7사단에서는 망아지만큼 덩치가 큰 군견을 앞세우고 능선을 따라 철책담장을 순찰하는 미군병사와 생전 처음 소요산을 둘러볼 수 있었다. 능선에서 내려다본 부대 전경은 계곡에 납작 엎드려있는 형국이라 적의 공격으로부터는 더없이 안전할 것 같았다. 미7사단은 1917년 창설되어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여러 차례 부대해체와 재창설을 반복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1945년에는 일본이 항복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한국에 진주한 최초의 미군부대였다. 그랬다가 정부수립 후인 1948년 12월 31일 철군하여 다시 일본에 재배치되었다. 일본에서 극동사령부 예비대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한국동란이 발발했고 그땐 이미 많은 감편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미7사단은 낙동강 교두보에서 일진일퇴하던 중 10군단 창설 때 예하로 편제되었는데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한국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이후 계속하여 한국에 주둔하다가 닉슨독트린에 의거 미1군단과 함께 1971년 미국 본토로 철수했다.
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유 중 하나가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기 위해서였는데 그 대상이 바로 미7사단이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철수가 이루어지자 공식 철군행사 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아쉬움을 표했을 정도로 우리 안보의 한 축을 담당한 미7사단이었다. 1945년과 1950년 두 차례나 인천에 상륙했고 동해안 임원에도 상륙한 경험이 있어 해병대도 아니면서 한반도의 동쪽과 서쪽의 상륙전을 섭렵한 특이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전선이 고착화된 후에는 주로 중부전선과 서부전선 일대에서 활약을 펼쳤다.
또다시 6.25동란 발발일이 다가오고 있다. 68년 전 동란은 서른여섯 살 아버지를 삼켰다.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6.25를 ‘전쟁’으로 호칭해서는 안 되고 ‘동란’이나 ‘사변’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전쟁은 서로 선전포고를 한 후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칭은 이제 ‘6.25전쟁’이나 ‘한국전쟁’으로 굳어진 모양새다. 그런 때문인지 지난 좌파정부 10년과 현 정부 하에서는 심심찮게 북침주장 설까지 나오고 있다.
6.25동란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1960년대 초에 베트남 식으로 적화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6.25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한미동맹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을 1년 전인 1949년 철수시켰는데 누가 6.25동란에 5만4000명이나 되는 병력을 보내 귀중한 생명을 바치면서 대한민국을 공산침략으로부터 구출했을까. 그는 맥아더를 한국전선으로 보낸 즉 미군의 참전을 결단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었다.
2010년 동란 60주년을 맞아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전쟁일기’도 들어 있었다. 전시에 타이프라이터 역할을 했던 프란체스카 여사가 꼬박꼬박 남편의 활약상을 기록했던 것이다. 3년 1개월 동안 처절하게 맞붙은 동란은 수도 없는 고비를 넘었고 그때마다 이승만은 미국 요로에 SOS를 보내 위기를 넘겼다. 그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폭넓게 구축해 놓은 인맥 덕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사석에서 맥아더는 이승만을 아버지로 부르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글이 좀 길어지지만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베트남전을 실례로 들어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국민들에게 보낸 경고를 들어보자. “조국을 지키겠다는 투철한 정신이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무기와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헤진 운동화를 신은 월맹군이 고성능 무기를 보유한 월남군을 이겼다. 북한은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북한이 가난하다고 퍼주기만 하다가 큰 코 다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해방 이후 남한 적화통일을 외치며 지금도 배를 골아가며 죽기 살기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한을 괴롭히고 있다.
6.25를 겪은 늙은 세대는 전쟁의 참상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나라가 망하면 어찌된다는 것을 꼭 알려주어야 한다. 전쟁이 두려워 공산화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쟁이 두려워 도망가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나는 베트남 패망 후 미국으로 도망 온 그 나라 사람들이 국적 없이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를 보았다. 나라가 없어지니 우선 대사관이 있을 수 없다. 미국의 애완견은 신분증이 있으나 베트남 난민들은 신분증이 없다.” 그는 이어서 “기습공격 대비 외교적 군사적 대책 마련이 시급하며 북한 DMZ 인근 배치 미사일이 수도권 한국인 2,300만 명에 치명적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비무장지대 90㎞ 이내에 설치된 북한 미사일은 서울과 수도권까지 사정권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치명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 6.25동란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나라가 에티오피아다. 아프리카 나라들 중 에티오피아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가난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가 그런다하더라도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가난이 아닌 감사함을 먼저 떠올려야 하겠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그것을 누리게 된 배경에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피눈물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5년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은 에티오피아군은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전하였다.
그러자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제네바 국제연맹에 달려가서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에티오피아를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약하고 득될 것 없는 나라를 선뜻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작은 도움조차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의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고 드디어 1941년 이탈리아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 후 유엔이 설립되자 셀라시에는 유엔에서 “우리가 힘들 때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와 같은 나라가 나오지 않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 약한 나라를 도와주자”는 집단안보를 주장하고 나선다.
유엔은 셀라시에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 집단안보는 세계평화를 향한 진보적 한 걸음을 떼게 한 위대한 결과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 후 첫 번째로 발발한 전쟁이 공교롭게도 6.25동란이었다. 6.25가 발발하자 셀라시에는 '집단안보'를 주장하며 유엔에서 한국을 도울 것을 강조했다. 셀라시에는 왕실 근위대였던 강뉴부대를 파병하기로 하였다. ‘강뉴’란 그 나라말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와 ‘초전박살’이란 두 가지 뜻이 담겼다. 한마디로 6.25에서 이 두 가지 뜻을 실천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셀라시에는 '강뉴 부대'를 파병하면서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해왔던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안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강뉴부대는 16개 참전국 군인 중에서도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 5차에 걸쳐 6,037명이 참전하였고 123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었다. 그 이유는 이기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53번 전투에서 253번 승리를 거두게 된다.
어떤 참전용사들은 월급을 에티오피아로 보내지 않고 부대 안에 '보화원'이란 보육원을 만들어 전쟁고아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잠을 잘 때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을 옆에서 지켜줬다. 그렇게 고마운 강뉴부대 대원들은 6.25가 끝나고 모국으로 돌아가자 7년 동안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게 된다. 목축업을 하던 나라에 풀이 없어지자 가축들은 굶어 죽었고 아프리카 최강국이었던 에티오피아는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어느 해에는 100만 명이 굶어죽기도 했다. 가난에 시달리자 사람들은 봉기했고 1974년 맹기스투라는 군인이 공산주의를 주창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에티오피아는 공산국가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셀라시에는 수술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지만 측근에 의하면 독살형을 받았다고 한다. 세계평화를 위해 더욱이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노력했던 그가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강뉴부대원들 또한 공산주의와 싸운 대가로 감옥에 가두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등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게 된다. 핍박을 견디다 못해 어떤 이들은 6.25 참전사실을 숨긴 채 이름도 바꾸고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렸다. 그 후 에티오피아는 공산정권에서 민주정부로 바뀐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참전 용사들을 찾을 수가 없다.
6.25 당시 나라의 존망이 풍전등화였을 때 그들은 대한민국이 지구 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달려왔고 가장 용감히 싸웠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모르고 그저 가난한 아프리카 나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슬픈 일이다. 오늘을 살아갈 수 있도록 희생한 그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우리 역사교과서는 이런 사실들을 가르치지 않는지 모르겠다. 6.25동란을 누가 일으켰는지 모른다는 19세 이상 성인 인구가 15% 약 500만 명이나 된다는 보도다. 그러고 급기야는 6·25가 북침인지 남침인지를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 일군의 정치세력이 국회에까지 입성했다.
미7사단이 주둔했던 소요산 자락은 47년 세월을 말해주듯 황량할 정도의 텅 빈 광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절체절명의 한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맹방의 부대였기에 기념탑이나 동상 하나 정도는 서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보은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순간 워싱턴 한국동란 기념공원에 새겨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란 말이 떠올랐다. 좁은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상한 무리들이 다스리는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굳이 국가보훈처가 아니더라도 지역 내 뜻있는 기업이 나선다면 부대주둔 기념탑 건립 정도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옛 부대 자리 오른쪽 산중턱을 올라 들어선 자유수호평화공원에선 씁쓸한 나그네의 표정이 드러났든지 젊은 여성 근무자가 탐방객을 친절하게 맞아주면서 정성을 다했다. 앞에서 언급한 한미친선군민협의회에선 <BRIDGE>란 정기간행물을 펴내 주한미군들과 그 가족들에게 배포하면서 그들의 기고문도 싣고 있다. 연전엔 중국이 자국의 관광객을 두고 속좁은 짓을 해댄 '한한령'을 꼬집는 어설픈 글을 싣는 바람에 책자를 선물받아 지인들에게 보낸 적도 있다. 1966년 미1군단에서 만나 2년 가까이 병영생활을 함께한 미군 병사가 복무기간을 남긴 채 귀국하여 보내온 빛바랜 편지를 ‘브리지’에 투고하는 것으로 졸작 글을 맺는다.
Dear Kang, March 16, 1967
I just received your most welcome letter and it sure was wonderful hearing from you. Please forgive me for not writing sooner. I had so much to do, getting straight and seeing friends and neighbors, so do forgive me, I will do better next time.
You said in your letter you made solder of the month, that’s great Kang and nice going. I grew quite fond of you Kang and respected you for what you have and are doing for your country. I’m so glad for you, that you made Sgt. Kang. My mother send your letter to me at my new duty station which is
Sgt. Terry L Smeal
331st Signal Company
Fort Polk, La 71459
You see I’ll be here until Jun the 27th, after that I’ll be at my home. Kang, you said you thank me for being of service to your country, well Kang let me say I wish I could have done more.
Your people are so kind and willing to help. You no Kang I miss Korea, I really do. I never met a nicer group of people and I pray your people will continue to be as nice as they have been to me. Kang, it was an honor to serve in your country and thank you for your complement.
I hope you don’t mind If I call you Kang and let’s be friends and call me Terry that’s my first name and that’s what my friend’s call me and you are certainly my friend, so do call me Terry Ok.
The weather here at Fort Polk is quite nice it’s been in the high 80°, it’s really been wonderful here. Oh, you tell Kwon I said hello and to take good care of himself and good luck Ok.
Well, Kang I much get my booth and brass shined for tomorrow and take a shower, so do forgive me for taking so long in writing, Remember Kang I’m a friend forever and be sure and let me know where and how you doing Ok. Well God bless you and waiting to hear from you.
Your friend Terry Smeal
P.S. Write
Now and let me know how you 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