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3월28일 [(자)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예레미야서 7,23-28
복음 루카 복음 11,14-23
◈ [서울] 사순 제3주간 목요일
2019년 다해 3월28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지난주에는 대구와 경주를 다녀왔습니다. 대구에서는 범어동 성당,
계산 성당, 성모당, 성직자 묘지, 다사 성당, 유스티노 신학교,
대구가톨릭 대학을 보았습니다. 경주에서는 진목정 성지와 산내
성당을 보았습니다. 작년 제주 엠마오 연수를 함께 했던 신부님들이
계신 곳이어서 방문했습니다. 교구는 다르지만 같은 길을 가는
동료이기에 같이 기도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문화, 예술,
문명을 이룩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구별에 잠시 머물다가는 나그네인데 왜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기심, 이기심, 욕심, 교만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인간이 가지는 ‘아픈 상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마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더 채우려고 하는 욕심이며, 남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시기와 질투입니다. 카인은 사랑하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좋아했는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동생만 없어지면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아 줄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인간이 범한
최초의 살인은 ‘시기와 질투’가 원인이었습니다.
사울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졌다면
다윗은 더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시기는 본인은
물론 본인의 가족들까지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자신은 한 나라의 왕이었고,
많은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 때문에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결국 아합 왕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전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권위를
알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렸던 권위를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 역시 시기와 질투가 초래한 비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늘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섬기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떡고물’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내려놓으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리하고 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자연, 신화, 이성’의 옷을
굳이 입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진리’는 언제나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했던 ‘하느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했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습관은 습관을 통해서만 고쳐집니다.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면, 나쁜
습관은 ‘저절로’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좋은
습관을 통해서 악의 세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소통과 통합은 하느님 뜻 뒷자리에
2019년 다해 3월28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소통과 통합은 하느님 뜻 뒷자리에>
복음: 루카 11,14-23
1985년 전재용 선장이 1년간 참치 잡이를 하고 25명의 선원들과
부산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이때 베트남 공산화로 무작정
배를 타고 탈출한 보트피플 96명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회사는 그들을 구하지 말고 그냥
복귀하라는 명령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재용 선장은 그들을 구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이때 배에 있던 25명의 선원들 중 전 선장의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전 선장은 부산항에 도착한 즉시 회사로부터 해고당했고
더 이상 어떤 선박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 선장은
그들을 구할 때 자신이 미래와 그런 경력까지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전 선장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선원들도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 것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경청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는 리더는 공동체를 올바로 통합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리더는 하나같이 어디로 가야할지 명확한 방향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경청과 소통은 그 지향된 목적지를 위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비전 없이 통합만
강조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올바른 리더는 목적을
위해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을 겁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떨어져나갈
사람은 떨어져나가고 들어올 사람은 들어옵니다. 리더의 첫 번째
덕목은 명확한 목적지를 알고 그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전을 위해 공동체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그 다음
덕목입니다. 전 선장은 어떻게 25명의 선원들에게 믿음을
얻었을까요? 그들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전 선장의 말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적어도 1년 이상 그들과 함께 참치를 잡으며
그들에게 보여준 전 선장의 인품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가 믿는 대로
따랐을 때 항상 이득이 온다는 오래도록 축적된 경험이 그를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전 선장이 평소에도 올바른 선택을 해왔음을
말해줍니다. 이렇듯 축적된 경험은 더 큰 신뢰심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수많은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 힘이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마귀 두목에게서 온다고 말하며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통합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당신
뜻에 따르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상처받더라도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같은
나라도 서로 싸우면 망하게 되는데 어떻게 마귀가 마귀를 쫓아내느냐고
설명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예수님은 당신 노선이 있으셨고 최대한 설득하시지만 당신 노선에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통합하려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이나 소통과 통합이라는 둘 째 목표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 명확히 아셨습니다.
그 뜻이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어떤 것과도 타협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흔들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으나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소통이나 통합보다 아버지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이렇게 성장해왔습니다. 항상 하느님의 뜻을
물으며 문제를 해결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바오로 사도가 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는데 유다인들이
하는 할례를 받아야하느냐며 반기를 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구약의 할례 전통을 폐지하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유다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떨어져나갔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는 그 전통을 고수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방교회와도
분열되고 개신교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좋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교회는 2천 년 동안 같은 교리로 가장 큰 종교를 유지해오며 점점 좋은
열매를 맺으며 순항하고 있습니다. 한 때 한국 대통령과 교황님이 며칠
상관으로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다는 기사는 뒷면에 작게 실렸지만 교황님이 방문한다는
기사는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이것이 여전히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항상 하느님의 뜻을 알면 그 뜻을 위해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알았다면 예수님처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순 제3주간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28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1,14-23: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구들을 쫓아낸다.”
(1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벗겨내고, 마귀의 전능을 인정하며, 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이
베엘제불이라고 우긴다. 그들은 질투의 가시에 찔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이라고 그분께 요구하였다.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 것은 그분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말한다.
나라가 서로 갈라지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집안도 식구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뜻과 행실이 일치할 때 선다. 아마 베엘제불도 자기와
반대되는 것을 모두 끊으면 제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가? 마귀는 마지못해 사람에게서 떠나는
것이다. 사탄이 저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시종들을
해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의
두 손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손가락은 바로
아들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이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인간 본성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절)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지배자를 이기셨다. 그를 무릎 꿇리고 그의
힘을 빼앗은 다음,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내주셨다. 주님께서는 그 주인보다 더 힘센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막강한 힘을 누리며 본래 하느님의
것인 양들을 멋대로 다루고 자기 외양간에 가두었다. 강도와 같은
자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말씀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
맞서시자, 그는 전 재산을 빼앗기고 그의 재산은 전리품으로 분배
되었다. 그에게 넘어가 불경과 잘못을 저지르던 사람들은 진리를
알도록 부름을 받고 믿음을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23절)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내고 그에게 속아 넘어간 이들을 그의 거짓에서 건져
내러 오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주님께서 구원하고 모으신 이들을
흩어버리려는 자이다. 그분께 대항하고 사악한 뜻으로 그분의 목적을
훼방하려는 그자가 어떻게 주님을 도와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흩어버리는 자다.
(루카 11, 23)|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28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흩어버리는 자다.(루카 11, 23)
모아들이는 마음이 구원의 마음입니다.
주님과 함께 모아들이는 삶이 참된 복음의 삶입니다.
복음의 삶이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께 협력하는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세력보다도 모아들이시는 선하신
주님께서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흩어버리는 세력들은 언제나 우리를 믿음에서 떼어놓으려 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도록 흩어버립니다.
믿음은 주님과 협력하는 기도의 삶입니다.
영적 여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모아들이시는 하느님을 통하여 우리자신이 하느님의 백성이며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않는 신앙의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신앙의 여정은 복음을 전하는 삶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깨어있는 삶이듯 영적식별은 말씀의 열매를 맺는 선한 삶입니다.
모아들이시는 하느님께 의지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수도회] 입술만의 회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회개를
하십시오!
2019년 다해 3월28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입술만의 회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회개를 하십시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해보면 깜짝 놀라게 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찌 그리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와 꼭 빼닮았는지 모릅니다. 공통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거듭되는 외침 앞에 끝도 없는 고통과 수모를
당해왔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시 왕들은 대체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꼭두각시 같은 존재로 전락했고, 그저 자기 한몸 건사하느라 백성들의
생명과 안전은 뒷전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여러 예언자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꼭
빼닮았기로 유명했던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명을 수행했던 시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변 강대국들, 아시리아, 비빌론, 이집트는 돌아가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갖은 갑질과 횡포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눈치보느라 바빴습니다.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를 반복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정기적인 조공을 바쳐야했습니다. 약소국으로서 눈물을
머금고 내정 간섭을 당해야겠습니다. 급기야 대대적인 침공을 받기도
했고, 머나먼 땅으로 유배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 45년간에 걸쳐 예언자로 활동했던 예레미야가
느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슬픔은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건네신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파렴치한 우상 숭배와 반역, 죄와
악행을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그로 인해 조만간 겪게 될 대재앙과
끔찍한 멸망을 선포하게 되는데, 끝끝내 귀를 막는 지도자들과
백성들, 그 사이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자신의 태어난 날까지
저주합니다.
그러나 그 끔찍한 세월 속에서도 예레미야는 늘 주님을 신뢰합니다.
때로 너무 힘겨워 주님을 향해 울부짖고 따지면서도, 그저 그분의
말씀에 순명합니다. 평생토록 오로지 주님만 생각하며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는 기회가 좋든 좋지 않든 언제나 주님의 입이자
Speaker, 대변자로 살아갑니다.
오늘도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쳤듯이,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피끓는 목소리로 외치십니다.
“회개하십시오. 입술만의 회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회개를
하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갖은 우상
숭배로부터 돌아서서 우리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세상의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분께서 순종하고, 그분께서 명령하시는 길만 온전히 걸으십시오.
그것만이 여러분이 살 길입니다.”
미국 가톨릭 교회에서 요즘 혜성처럼 떠오르는 저명 작가이자 명
설교가 로버트 배런 주교님은 진정한 의미의 회개에 대해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은 언제나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 체험은 우리가
딛고 선 땅과,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를 기어이 뒤흔듭니다. 참하느님은
우리의 삶을 깨고 들어오셔서 나태와 안정으로부터 우리를 몰아내시고
새로이 바꾸시며, 완전히 바닥에 쓰러뜨리십니다. 그분은, 성경의
이미지를 빌려 말아자면, 회오리바람, 지진, 쳐들어오는 군대,
한밤중의 도둑입니다.”(로버트 배런, 타오르는 말씀, 생활성서)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부산] 사순 제3주간 목요일|염철호 요한 신부 강론 묵상
2019년 다해 3월28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탈출 8,15에서 파라오의 요술사들은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재앙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탈출 31,18에서 돌로 된 두 증언판을 하느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으로 직접 쓰셔서 모세에게 주십니다. 또한 시편 8편은 세상
모든 창조물을 하느님 손가락이 만드신 작품이라고 노래합니다.
이렇게 구약 성경은 창조, 계약, 구원 등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일들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뒤, 당신께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이 모든 일을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신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신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통치가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모든 일을 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몇 사람은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제1독서의 예레 7,26이 이야기하듯 목이 뻣뻣해져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되어 버린 것일까요?
그들의 조상들도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보면서도
목이 뻣뻣해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간 떠돌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목이 뻣뻣해져 바빌론
유배까지 겪게 됩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목이 뻣뻣해진 이들에게 분명히 외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지금 우리의 목은 어떤가요?
- 부산 가톨릭 대학교 성서신학 교수 염철호 요한 신부 -
◈ [기타] 3월 28일 (목) - 이삭과 예수
오늘은 ‘이삭과 예수’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창세기 26장 22절 말씀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를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해에 백배를 거둔 이삭을 보고 아비멜렉은 배가 아팠습니다.
한국에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데 아마 이 때부터 시작 된
탓인지 아비멜렉의 배는 유독 더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훼방을 놓고 떠납니다.
그랄에서 에섹으로, 에섹에서 싯나로, 싯나에서 르호봇으로, 르호봇
브엘세바로, 가는 곳마다 우물을 매꾸고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6장 24절 말씀에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자손이 번성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이삭과 예수님을 비교해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환경이 여러 형태로 자신을 힘들게
하였지만 결코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신 것처럼 이삭이 환경이 아무리
자신을 괴롭혀도 결코 반항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한 것은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삭의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만 있어도 온갖 이유를 다대며 남의 탓으로
돌리고 환경 탓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예수님처럼, 이삭처럼, 그 어떤 환경에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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