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봉헌 때에 있어서의 솔로몬 왕의 간구대로 구약 시대에 있어 그렇게 성전을 향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기도가 상달되고 응답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외에는 달리 다른 것들이 있을 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다른 그 누구보다 가장 유명한 믿음의 선배들 중 한 사람인 다니엘만 하더라도 다니엘 6장 10절에서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말씀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이듯이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 땅에서 하루에 세 번씩, 심지어는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는 상황에서조차도 변함없이 아래 본문과 같은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어쨌든 실상 모든 인생들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 졌고 단결케 된 것이며, 영적으로는 진노와 저주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노예 상태에 빠진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진정 그 어느 인생들이라도, 그 무엇으로든지 간에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과 통로는 아예 없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인생들이 그렇게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시자 공의와 형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며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과 접점은 오직 한 가지로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구주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곧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음부와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있어 길과 통로와 대문과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이신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그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것이며,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으로 뒤바뀔 수 있는 것이며, 간구할 수 있는 것이고 상달될 수도 있는 것이며, 경배할 수 있는 것이고 열납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의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 다양한 모양의 피 제사와 희생 제물들, 유월절 어린 양, 모세를 통한 장대 위의 놋 뱀, 회막, 제사장, 선지자 등과 같이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했든지, 또는 오늘날 우리들과 같이 오신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고 있든지 간에 어쨌든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어떤 목적이든지 간에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인데..
특히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솔로몬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언급함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고 구할 수 있는 중심 매개체로 삼은 성전이야 말로 요한복음 2장 19~20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에서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듯이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이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되며,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고, 본질적으로는 더 이상 아담과 하와 때부터의 죄와 진노와 음부와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가 아닌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된 것일 뿐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특히 사도 바울과 같이 순간순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을 수 있음과 같이, 그와 함께 실제로 온갖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로 응답되고 예비되며 실제로 누리고 경험하게 되며, 게다가 죄악들, 악한 세력들과 싸울 수 있게 되고 이길 수 있게 되며,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서는 자복하고 돌이킬 수 있게 되며 그로 인해 정말 사함과 나음들, 회복과 역전들 등도 맛볼 수 있게 되고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에 있어서는 성전 등이 그와 같은 역할과 통로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역대하6:20)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5월 15일(수)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