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치 독일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와 미국 일간 뉴욕 타임스(NYT)의 기자로 일하며 20세기의 굵직한 사건들을 취재해 퓰리처상까지 받으며 이 신문의 수석 편집장을 지낸 맥스 프랭켈이 23일(현지시간) 9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고 이스라엘 일간 예루살렘 포스트가 보도했다. 아들은 고인이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방광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등졌다고 밝혔다.
고인의 기자 시절, 최고의 특종은 1971년 국방부(펜타곤) 기밀문서를 폭로한 일이었다. 이듬해 그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수행했는데 퓰리처상 수상의 기쁨을 안겼다. 여드레 동안 상하이와 베이징, 항저우를 돌며 24건의 기사, 3만 5000자를 썼다. 신문사 뉴스룸을 떠나 1988년부터 1994년까지 편집인으로 일했다. 재정적, 기술적, 저널리즘 영역 모두에서 전환기였다. 그는 메트로와 스포츠 지면을 늘리고 내셔널 심층보도, 일부 섹션의 컬러 도입, 뉴스와 피처를 섞는 기사들, 1면을 덜 예측 가능하게 꾸미는 일, 어느 지면에나 뉴스 분석 기사를 찾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예루살렘 포스트라서 그런지 몰라도 유대인인 고인의 어린 시절 고난을 부각시키며 그 때의 경험이 고인의 기자 경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1930년 옛 동독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8년 나치에 의해 가족과 함께 폴란드로 추방됐다. 부친은 소련 집단농장 굴라그로 끌려가고 말았고, 모친이 힘겹게 탈출 허가를 얻어내 뉴욕으로 향하는 배에 오를 수 있었다. 1940년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열 살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
고인이 NYT의 우두머리(head honcho)로 일한 것은 1986년부터 1994년까지로 현대 미국 저널리즘의 길을 닦았다는 평가를 듣는다고 신문은 전했다. 아울러 유년의 경험이 그의 기자 경력과 인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2011년 국제구출위원회(IRC) 인터뷰를 통해 고인은 “나의 어느 한 조각도 난민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조직은 2010년 고인을 "두각을 나타낸 난민" 중 한 명으로 선발해 존중을 표했다.
고인의 기나긴 기자 경력은 일찌감치 싹수를 보인 바다. 그는 고교에 들어갈 때까지 영어로 쓰는 데 어려움을 느껴 교사가 잡지 뉴요커 기사를 밤새 읽고 써보라는 숙제를 내줬다. 숙제를 열심히 했고 그 결과 학교 신문 편집장을 맡게 됐다.
그는 세계적인 지도자들과 마주할 일이 많아 글로벌 뉴스 영향력이 막강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냉전, 그리고 소련 붕괴 등 굵직한 사건들을 취재했다. 고인이 인연을 쌓은 지도자들로는 니키타 S 흐루시초프, 피델 카스트로, 마오쩌둥,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리처드 M 닉슨 등이다.
고인은 두 차례 결혼했다. 1956년 토비아 브라운과 결혼해 세 자녀를 뒀다. 토비아가 1987년 쉰두 살에 비교적 일찍 세상을 등지자 이듬해 조이스 퍼닉과 재혼했는데 신문사 칼럼니스트 겸 편집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