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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9.8 연중 제23주일, 지혜9,13-18 필레9ㄴ-10.12-17 루카14,25-33
주님 제자의 길
-사랑, 십자가, 버림-
한 번 뿐이 없는 선물 인생입니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람답게 살고 싶은 바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행복한 삶, 지혜롭고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주님은 오늘 연중 제23주일에 이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배치가 절묘합니다.
1독서가 인간 한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라면 복음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입니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 것 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은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지혜9,13-18).
1독서의 내용을 통째로 인용했습니다.
인간 한계를 자각한 자의 지혜를 청하는 간절한 고백의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절규와도 같은 기도가 떠오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겠습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로마7,24-25ㄱ).
주님은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고 이루신 일마다 자애로우십니다.
주님은 당신께 비옵는 누구에게나, 진정으로 비옵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가까이 계신 주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물음에 응답하시어
당신 제자로서 지혜롭고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첫째,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이가 주님의 제자입니다.
유대인들의 화법에 미워한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사랑한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면 집착하게 마련이고 하여 사랑하는 이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도 없습니다.
주님의 단호한 명령은 그 누구에게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친지들을 말씀그대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집착 없는 깨끗한 사랑이 가능하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 길뿐입니다.
분도 성인의 핵심적인 두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마라.’
바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으뜸으로 하여
하느님의 일인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로
주님 사랑을 고백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하느님의 일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하느님 사랑을 촉진하며 형제들에 대한 집착 없는 깨끗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참 사랑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할 때
형제들에 대한 참 사랑입니다.
집착 없는 깨끗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2독서에서 필레몬의 종 오네시모스에 대한 바오로의 사랑이 그 모범입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종이 아니라 심장처럼 사랑하는 형제로 대하는 바오로의 참 순수한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사랑의 주님을 닮게 합니다.
이런 사랑 중에 저절로 형성되는 지혜로운 삶, 품위 있는 삶입니다.
둘째,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여러분의 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가 주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타인의 십자가도 아닌 바로 제 십자가입니다.
때로는 힘들게 느껴지는 내 존재자체가 무거운 짐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내 운명의 십자가, 내 책임의 십자가입니다.
피하고 싶고 내려놓고 싶은 제 십자가입니다.
누구도 져줄 수 없는, 내가 짊어지고 가야하는 제 십자가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 이미 유전으로, 환경에 의해 주어진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십니다.
이래서 순교적 삶입니다.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내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사람이 다 다르듯 십자가의 크기, 색깔, 모습도 다 다릅니다.
이 운명의 십자가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제 십자가를 피해 갈 곳 아무데도 없습니다.
제 십자가가 무겁다하여 피하면 더 큰 십자가가 기다립니다.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갈 수 있는 방법은
내 운명의 십자가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바로 주님을 사랑할 때 내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고, 주님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순교자 성월인 9월,
주님은 우리 모두 제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천국 문에 도착해도 우선, 주님이 점검하는 것은 십자가일 것입니다.
언젠가 십자가는 더하기(†)라 표현한 적도 생각이 납니다.
나†하느님이니
바로 제 십자가는 무궁한 힘의 원천이자 충만한 삶의 원천임을 깨닫게 됩니다.
항구히 제 운명의 십자가를, 책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고는
구원도 없습니다.
모두들 다 나름대로 무거운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또한 동병상련의 도반들입니다.
막연한 형제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형제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 위로와 격려로
십자가의 짐을 덜어주는 사랑입니다.
형제들의 십자가의 짐을 가볍게 해주지는 못할망정 무겁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자기(소유)를 다 버리십시오.
내외적으로 자기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이가 주님의 제자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는 일이요, 자기를 비우는 일입니다.
평생 자기 비움, 자기 버림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말 그대로 모든 소유를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탐욕입니다.
버리고 버려도 끊임없이 버릴 것이 있듯이, 모으고 쌓아도 끝이 없는 탐욕입니다.
바로 자기 소유를 다 버린다는 것은 탐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날 대부분 힘들게 사는 이들은 버릴 자기 소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버릴 탐욕은 있습니다.
모든 불행의 진원지는 탐욕입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는 무욕의 초연한 삶을 뜻합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의 쾌락이요 존재의 기쁨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탄의 시스템’ 신자본주의 체제,
설국열차 안에서 탐욕의 노예 되어 자기를 잃고 괴물로 살아가는 지요.
사람이 되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과제는 없습니다.
억지로 자기 소유를 버리지도 못하고, 자기를 비우지도 못합니다.
자기 버림과 자기 비움 역시 사랑의 열매입니다.
주님을 열렬히 사랑할 때,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참 보물임을 발견할 때,
우상인 재물은 그 힘을 잃어 저절로 버리고 비우기 마련입니다.
하느님보다 더 큰 보물은 없기에 세상 보물들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어
저절로 집착 없는 자유로운 삶입니다.
설국열차에서 하차입니다.
저절로 세상 우상들로부터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다만 주님과 사랑의 관계 하나만 갖고 갑니다.
최소한도 의식주의 삶에 만족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영적혁명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첫 주일인 오늘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어
자유롭고 행복하게, 지혜롭고 품위 있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주님을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2.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3.자기를 버리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우리 모두에게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항구히 당신을 따를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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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지혜 9,13-18
제2독서 필레 9ㄴ-10.12-17
복음 루카 14,25-33
저는 일정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서 여러 곳에 저의 일정을 남겨둡니다. 스마트폰은 기본이고, 컴퓨터에도 똑같은 일정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들고 다니는 수첩에도 그리고 사무실 칠판에도 일정표가 적혀 있습니다. 무려 4군데에다가 똑같은 일정을 적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예전에 어떤 본당에서 강의를 하기로 했다가 일정을 적지 않아 펑크를 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으로만 기억하고 있다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 뒤에는 혹시라도 약속을 펑크 내지 않을까 싶어서 여러 곳에 일정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정표를 이용하다보니 일을 훨씬 계획성 있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시간 가는대로 일을 한다면 어떨까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실수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질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계획성 있게 해야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계획을 세워서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시간이 나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냥 막연하게 언젠가는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라고 말만 할 뿐입니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일을 이렇게 계획 없이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이런 분을 만났습니다.
“신부님, 요즘 너무 바빠서 성당에 못 나갔어요. 그런데 이제 좀 한가해지니까 열심히 성당에 다니겠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의 양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신중한 작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탑의 비유, 적과 맞서고 있는 임금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용의주도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준비보다는 앞선 형제님처럼 순간적인 기분만을 쫓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순간적인 기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막연하게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라는 예상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철저한 계획과 노력을 통해서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계획의 첫 번째에는 하느님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한 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윗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들의 준비와 노력들을 다시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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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2013. 9. 8.)(루카 14,25-33)
<신앙생활>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끝까지(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지금 말하는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중간에서 멈춘다면,
또는 신앙생활을 불성실하게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안 믿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목적지에 도착할 자신이 없다면 처음부터 출발하지도 마라."
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원 받기 싫으면 받지 마라."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받으면 살고(영원한 생명을 얻고),
못 받으면 죽는(영원히 멸망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탑'을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사다리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사다리는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걸어서 올라가는 사다리입니다.
생명을 얻고 싶다면 사다리를 잘 만들어야 하고,
끝까지 잘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처음에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서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했을 때,
천사는 하느님의 뜻이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윽박지르지 않았고,
마리아가 응답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루카 1,38).
마리아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또 끝까지 갈 수 있을지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슨 손익 계산 같은 것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마도 천사는 마리아가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루카 1,29)
충분히 기다려 주었을 것입니다.
그때의 상황은 마리아가 "저는 자신 없습니다. 못하겠습니다.
다른 처녀를 찾아보십시오." 라고 대답할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그랬다면 처음부터 선택을 받지도 않았겠지만...)
어떻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고 마리아가 말한 것은,
탑을 세우는 공사를 마칠 만한 충분한 경비가 있음을 확신하고
공사를 시작하겠다고 응답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생애는
그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서 훌륭한 탑을 세운 것과 같습니다.
(마침 9월 8일은 성모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계속해서 나오는 임금의 비유도 같은 뜻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루카 14,31-32)."
지금 이 상황은, 싸우다가 전멸 당하든지,
아니면 항복해서 신하로 들어가든지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어떤 임금, 다른 임금'이라는 표현은
그냥 비유를 위한 표현일 뿐이고,
인간이 하느님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만 명, 이만 명'이라는 군대의 수에도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만 명이 이만 명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도 있습니다.
(몇 백 명의 군대로 수만 명의 군대를 이긴 전쟁도 있었으니...)
지금 예수님 말씀의 뜻은
"인간은 하느님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이길 수 없으니
그분을 주님으로 섬기고 생명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은 하느님을 안 믿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을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표현을 조금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이길 수 없으니,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생명을 얻어라."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지금 전쟁 상황으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들의 적이 아니라 보호자이시고,
구원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하느님의 보호와 구원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를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인생의 주인(주님)은 누구인가?
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 라고 하면서
하느님(예수님)의 보호와 구원을 거부하면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고,
그런 오만함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느님(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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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려면, 먼저 미워하라 >
정신과 의사 이무석씨 책 ‘30년 만의 휴식’(101-7쪽)에, 캐나다 멕길대학 정신과 교수인 다반루 박사가 한 우울증 환자를 치료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환자는 30대 회사원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매우 초라하고 못나보여서 견딜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소심하고 복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의사와 이야기 할 때도 머리를 항상 내리깔고 바닥만 보며 이야기 하였습니다. 목소리도 떨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사회생활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엉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반루 박사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나를 쳐다보지 못하십니까?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는 몹시 당황하다가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 선생님을 마주 쳐다보는 것은 건방진 행동이에요. 선생님은 화가 나서 저를 ‘버릇없는 놈’이라고 소리 지르실 거예요.”
“그리고요?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 잠시 뒤 울음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자신이 하고 있는 상상을 말합니다.
“저도 화가 나요. 의자로 선생님을 후려쳐 버려요. 선생님의 머리는 박살이 나고 골이 흘러 나와요. 선생님의 눈도 튀어나왔어요.”
그 때 박사가 다시 묻습니다.
“눈은 무슨 색이지요?”
“초록색이요. ... 아! 그런데 선생님의 눈은 초록색이 아니군요. ...”
그는 비로소 초록색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초록색은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색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너무나 엄한 분이셔서 동생과 싸우면 항상 자신만 야단쳤고 몸이 약한 어머니를 무시하고 자주 때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힘이 생기면 아버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서재에 불러놓고 한 시간씩 설교를 하곤 했는데, 아버지의 서재에 걸려있던 그림이 초록색이었던 것입니다. 즉 이 환자는 자신이 증오하지만 죄책감으로 자신 속에 묻어 둔 아버지의 모습을 이 의사에게 투영시켜 그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떻게든 다른 이들에게 전이되어 누구와도 편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눈에 증오와 죄책감과 두려움 등의 비늘이 씌워져 모든 것들을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의 탓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그 화살을 돌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어쨌든 이 환자는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었습니다. 다반루 박사가 환자를 5년 뒤에 다시 만났는데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했고 뛰어난 유머감각이 있었으며 성공적으로 직장생활을 잘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위해 반드시 또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완전하지 않고 완전으로 가는 도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란 영화가 있습니다. 특수 훈련을 받고 남한에 파견돼 바보역할을 하며 임무를 기다리는 김수현이 주인공입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당장이라도 내어 놓아야 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2년 동안 슈퍼에서 일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동안 동네 사람들에게 정이 들어갑니다. 특히 무뚝뚝하고 짠순이인 슈퍼 주인아주머니는 자신을 위해 일해 주는 바보 동구(김수현)를 친 아들처럼 여기며 몰래 장가갈 밑천까지 조금씩 저금을 해 놓습니다.
‘바보’, 그 역할은 세상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과거를 지닌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조금씩 변화되게 되는 것이고, 온전한 관계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더 이상 이 간첩들이 필요하게 되지 않자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동네 사람들의 정에 끌려버린 김수현과 동료들은 죽기를 거부합니다. 과거가 죽으니 살고 싶어 진 것입니다. 결국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만 쇠뇌 당해왔던 공작원 마음 안에 새로운 무언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써서 먹을 수 없는 죽은 물을 살아있는 샘물로 만드는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특히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에 모세가 나뭇가지를 넣어 달게 만들었다는 마라의 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나뭇가지는 바로 십자가를 상징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만이 죽어가는 우리를 살아있는 생명수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죽은 물에 소금을 넣어 생명의 샘으로 변화시킵니다. 소금 또한 누군가가 물에 녹아 사라지는 희생이 있어야만 그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의 남파공작원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북어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김수현에게 그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던 슈퍼 주인아주머니의 사랑과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미워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떠나야합니다. 떠나서 나를 받아주고 사랑해 주는 그 사랑의 원천에서 내가 과거를 털고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해야만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의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은,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과거의 모든 것들을 떠나고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없지만 희망의 전도사로 활약 중인 닉부이치치의 결혼 이야기는 참 재미있습니다. 그의 불구는 누구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멸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그렇게 태어난 것도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지로서는 어림도 없는 미녀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사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부이치치는 밀어붙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부터 1년 동안 우리 서로 연락을 하지 맙시다. 이메일도 전화도 문자도 하지 맙시다. 그리고 1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 사랑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뜻으로 알고 함께 합시다.”
1년이 지나도 그들의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고 아이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부이치치는 먼저 하느님께 다가갈 줄 알았고, 또 모든 인연을 하느님께 맡길 줄 알았습니다. 먼저 떠날 줄 알 때야만, 먼저 하느님께 향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알 때야만, 참다운 관계, 영원한 사랑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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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과 소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위로와 평화,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접하면서 긴장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오늘 복음도 “누구든지 나에게 오려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시며 자기소유를 송두리째 버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아드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엉뚱한 말씀을 하시면 마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성당에 나가면 좋은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영 딴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보장 받는다고 했는데 귀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고 약속에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신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출가’ 라는 말을 씁니다. 속세의 가정을 떠나 승려가 되기 위해 불문에 드는 일을 말합니다. 뜻을 품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덕을 닦는 일을 들어 말하기도 하고 결혼을 하여 부모님 품을 떠나갈 때도 ‘출가’라는 말을 합니다. ‘출가’는 소위 가족과의 불화나 갈등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집에서 나가는 ‘가출’하고는 다릅니다. 출가는 단순히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을 떠나는 것입니다.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소중한 하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을 선택하였으면 거기에 투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을 하면 배우자가 있고 자녀가 따르기 때문에 이제 그에 대한 그만한 책임이 주어지게 마련입니다. 한 가정의 주체가 되었다면 이제 부모에게 기대거나 무엇을 바라지 말고 홀로 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뒷받침 해 준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칭 마마보이가 되어 성숙한 인격체로 설 수가 없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이제 놓아 주어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도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자식은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켜보면서 남모르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 사사건건 이래라 저래라 하거나 기대하면 실망이 커집니다. 내가 신경을 안 써 주면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온갖 일에 ‘간섭과 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서로에게서 자유로워야 하고 또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출가의 의미를 새롭게 해줍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이 좋은 것임을 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다른 사람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선택하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축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다시 목숨을 얻는다”(요한10,17). 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도 어렵고 힘들더라도 지금 하느님을 선택하면 바로 그 선택을 통해서 다시 더 큰 것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첫째자리에 놓아야 할 것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세상을 놓고 결정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은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예수님이십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복숭아 농사를 지면서 이른 봄에 가지치기를 하고 시간이 흐르면 적과를 하게 되는데 욕심이 생겨 하나라도 더 얻으려 그냥 모든 것을 방치한다면 그해의 수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깝게 생각되더라도 과감하게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뜻을 품었으면 그에 맞갖은 투신을 해야 합니다. 탑을 세우려면 공사를 잘 마칠 수 있을지 계산해 보고, 임금이 싸움을 해도 먼저 지금 군대의 수로 이길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약삭빠르게 계산하면서 왜 그 좋은 머리를 하느님나라를 차지하는 것에는 쓰지 않느냐? 는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만한 투신과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세상에 나왔으면 탯줄을 끊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끊어버리는 것은 마땅합니다.
따라서 천상을 위해서 유익하다면 나의 집착과 소유의 마음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죄악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생각과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못된 습성을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사람을 소신 있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고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그것도 그냥 고집이 아니라 똥고집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느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쓸데없는 고집불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 소신 있는 여러분의 믿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언제어디서나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면, 또 이쪽도 저쪽도 아닌 미지근한 것이면 단호한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제자인 여러분, 하느님 앞에 적당한 타협이나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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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에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새는 오랜 기간 그 안에서 주인이 주는 모이만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본성이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나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였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새장의 문을 열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새를 놓아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새장 문이 열리자 새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직까지 날갯짓을 해 보지 않았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먹고 자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주는 모이나 먹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새장은 이미 열렸으나 그 새는 좀처럼 나가려 하지를 않습니다. 지금처럼 새장 안에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어쩌면 이러한 새장 속의 새인지도 모릅니다. 열등감, 죄의식, 상처, 분노, 죽음에 대한 공포 등 각자 자신만의 새장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새장의 문을 여셨습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도 혹시 새장 속의 새처럼 문이 열려 있음에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도 날갯짓을 포기하고, 새장에 갇힌 채 재산, 명예, 쾌락, 분주함 등의 ‘모이’나 먹으며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된 자유를 누리려면 새장에서 벗어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이’를 과감히 포기하고 날갯짓을 연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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