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간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을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이 계절을 마저 느끼러 충남 논산으로 떠났다. 이 고장에서 마주한 풍경은 가을을 떠나보내기엔 아쉽지만,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가을을 가슴속에 담을 수 있었기에.
고풍스러운 명재고택의 가을
명재고택은 노성면 교촌리 황금 들판을 가로질러 노성산 기슭의 한 작은 언덕을 지나면 나타난다. 고택은 조선 후기 소론의 거두였지만 우의정 자리도 마다하고 관직에 나서지 않은 윤증 선생이 살았던 공간이다. 300년 넘는 세월을 이어온 유서 깊은 이곳은 다른 고택들과 달리 솟을대문과 담장이 없다.
문화해설사가 일러준 말에 따르면 대문과 담은 윤증 선생의 후손들이 스스로 허물었단다. 우리나라 고택 가운데 이리도 개방적인 고택이 또 있을까 싶다. 덕분에 고택 안에서 완연하게 물든 가을 풍경을 감상하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대문과 담이 없어 집 안에서도 밖이 훤히 잘 보였기 때문이다.
지면에서 3m가 넘는 높이에 세워진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서자 누렇게 물들어 바람에 넘실대는 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왼편으로는 400년 수령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시야에 걸렸다. 이런 걸 두고 ‘가을이 둘러싸다’라고 표현하지 않을까. 윤증 선생도 이렇게 누마루 난간에 걸터앉아 깊어가는 가을을 눈에 담고 가슴에 새겼으리라.
어디 그뿐이랴. 지금의 종부가 사랑채와 느티나무 사이에 수백개의 장독을 들여 고택의 가을에 예스러움을 더했다. 줄지어 늘어선 갈색 장독은 옛것이 아님에도 옛것인 듯 고풍스러웠다. 더구나 그 사이사이를 수놓은 낙엽과 어울려 마치 가을을 닮았다. 장이 익어가듯 가을은 고택의 장독들에서도 깊어졌다. 명재고택에서의 가을은 그렇게 소리 없이 무르익고 있었다.
탑정호 수변생태공원의 평온함
탑정호는 충남에서 두번째로 넓은 호수다. 대둔산의 물줄기가 흘러드는 탑정호. 물이 맑기로 유명한 이곳엔 이맘때면 아름다운 풍경에 이끌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평온함. 탑정호 수변생태공원에 첫발을 들인 순간 떠오른 단어다. 커다란 호수에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이 그랬고, 이곳을 찾은 이들의 표정이 그러했다. 햇볕에 물든 나뭇잎과 고개 숙인 억새도 평온했다.
그렇게 평온함에 젖어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수변 산책로를 걸었다. 물 위에 세워진 기다란 산책로는 땅 위가 아닌 물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산책로를 걷는 동안 마치 물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배를 타지 않고도 물 위를 노닐 수 있는 곳. 이런 곳이 또 있으랴 싶었다.
호수 위에 놓인 산책로는 방향이 꺾일 때마다 매번 다른 경관을 보여줬다. 쪽빛 하늘이 가득 나타나기도, 연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펼쳐지기도, 금빛으로 빛나는 수면이 비치기도 했다. 그 풍경에 걸음이 절로 느려졌다. 호수가 품은 가을을 느끼려면 천천히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주 천천히, 머지않아 가버릴 가을 풍경을 가슴에 담아야 하기에.
걷는 동안 바람에 흔들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청둥오리의 날갯짓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가을의 풍경과 소리를 눈과 귀, 그리고 가슴에 담고 보니 이제 가을이 가도 크게 후회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가을은 누군가의 가슴속에 들어찼기 때문에.
논산=김동욱 기자, 사진=남승준 기자 jk815@nongmin.com
논산에서 꼭 맛봐야 할…
각종 나물 쓱쓱 비벼먹는 건강식 대명사 ‘보리밥정식’
풍부한 해산물·쫄깃한 면발 가을에 딱 맞는 ‘해물칼국수’
보리밥정식
충남 논산시 취암동 인근에는 보리밥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정갈하게 차려져 나오는 보리밥 한상차림은 이 고장 건강식의 대명사로 손꼽힐 정도다. 보리밥 한공기에 애호박·무채·콩나물·느타리버섯 등 각종 나물을 얹어 고추장과 함께 비비면 한끼 식사가 뚝딱 완성된다. 거기다 고등어구이나 제육볶음 같은 고기 반찬을 곁들이면 맛과 영양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해물칼국수
아침저녁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을날엔 뜨끈하고 짭조름한 국물이 잘 어울린다. 거기다 야들야들한 해산물과 쫄깃한 면발이 더해지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이 계절에 논산을 찾는다면 해물칼국수를 한번쯤 맛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홍합·바지락·굴 등이 듬뿍 들어간 해물칼국수는 푸짐한 양만큼이나 풍미가 가득하다. 양념장을 풀어 칼칼하게 먹어도 좋으니 입맛에 따라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