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4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새 영과 새 마음으로 우리를 빚어주시되 돌 같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심허주소서.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어주소서.
나는 심히도 연약하여 자주 넘어지오니 내가 나의 힘으로 주의 법을 행할 수도, 지킬 수도 없습니다.
하여 나는 오직 주를 힘입어 나의 영원한 처소인 아버지 품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나 비록 넘어질지라도 주를 힘입어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오니 나를 받아주소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의 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옵소서.
함께 모여 공동체로 예배하는 주일입니다.
각지에 흩어진 주의 백성들이 예배를 사모하여 기쁨으로 나아오게 하옵소서.
무너진 성전의 귀퉁이를 주 안에서 다시 일으켜 주소서.
내가 회개하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히 11:32-40
제목 :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온전한 소망을 두고, 오실 메시야를 바라며 산 자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뱓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과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나의 묵상
히브리서 11장에는 맨 처음 원시역사의 아벨 에녹 노아가 나온다.
그리고 족장시대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나오며 특히 요셉은 입애굽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모세는 출애굽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 기생 라합이 예시된다.
이어서 사사시대의 사사들과 사무엘 그리고 다윗과 모든 선지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을 하나씩 열거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또한 이들의 믿음은 승리하는 믿음과 인내하는 믿음으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다.
믿음으로 나라를 이긴 것은 바락, 기드온, 입다, 사무엘 그리고 다윗의 승리를 말한다.
믿음으로 의를 행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세운 것으로 특별히 사무엘과 다윗에게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대변한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약속을 받은 것은 39절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과 서로 충돌한다.
믿음의 증인들이 받은 약속은 단편적인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시스라가 바락의 손에 넘겨지고 기드온이 그 백성의 구원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최후로 약속된 것을 미리 맛보게 하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믿음으로 다니엘은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
그들은 믿음으로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였다.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불의 세력을 멸하여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다.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과 그의 부하들의 칼에 의해 박해를 받았으나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다.
삼손은 약함 가운데 강하여졌고 다윗은 믿음으로 강하여져서 골리앗을 맞서기도 하였다.
이로써 이방 사람의 진은 믿음에 의해서 완전히 초토화 되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기도 하였으며 승리하는 믿음과 인내하는 믿음 사이에 부활의 믿음이 존재한다.
이것은 종말론적 희망의 성취이다.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고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리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려는 자신의 뜻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미리 예표하셨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받기도 하였다.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이들에게 세상은 결코 그들의 마음을 주거나 빼앗길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들어가 유리하였다.
여기에 나온 부정적인 현실은 인내하는 믿음을 표현한다.
결코 과장된 것들이 아니며 믿는 자들이 실제로 경험했던 사실들이다.
심한 고문을 받되 결코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던 이들은 마카비 시대와 관련이 있다.
랍비 엘르아살은 헬라 왕의 핍박에 맞서다 선 채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뒤를 따라 일곱 형제가 고문을 받았지만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구차하게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믿음을 지킨 선지자들과 증인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도 세상과 달리 하였다.
일상적인 복장이 아니라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었고 편안한 집이 아니라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며 살았다.
그들은 극심한 가난과 환난 그리고 학대를 받되 그런 것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상의 가치나 판단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온전한 소망을 두고 오실 메시야를 바라며 살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이나 증인들은 그 소망을 위하여 인내하기도 하고 그 인내를 통하여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삶 자체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고난 뒤에 있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빛나고 영광스러운 하늘의 소망이 있기에 오직 그 한 가지를 바라며 결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주를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담대함 곧 파레시아가 그들의 전 인생을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그 나라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도 여전히 신앙의 현실은 명암이 교차한다.
어떤 때는 승리하는 믿음이 강하게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인내하는 믿음을 요구하기도 한다.
인생은 성공과 실패의 양면성이 교차한다.
재물이 풍부할 때도 있고 그와는 달리 궁핍할 때도 있다.
사업 역시 성공할 때와 실패할 때도 있고 직장을 얻을 때와 있던 직장을 잃을 때도 있다.
자녀들의 대학 입학이 순조로운 때도 있고 몇 번의 고배를 마실 때도 있다.
이는 신앙에도 동일하다.
모든 것이 형통할 때가 있고 열악할 때도 있다.
목회도 잘 될 때가 있지만 상황은 잘 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못하여 바닥을 칠 때도 있다.
세상의 시각은 많이 모이고 예배당 크게 짓고 목사가 좋은 차 굴리면 목회에 성공했다고 판단하고 인정해 준다.
이런 이들은 노회나 총회에 가서도 어깨를 펴기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주장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목사들은 아예 총회와 같은 큰 모임에 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것으로 위축되는 목사들이 많다는 것이 현실이며 이로 인하여 자존심 상해하기도 한다.
성경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한다.
목사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성도들에게 제발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핏대를 세워가며 침을 튀기면서 외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런 좁은 길로 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아무리 신앙이 좋고 믿음이 출중하여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때로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할 때가 있다.
살다보면 답답한 일을 당하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과 조롱을 받을 때는 또 어떤가?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남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거꾸러져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후 4:7-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하는 것에 낙심하지 않고 버림받지 않으며 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아들을 통하여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아버지 집이요 거할 처소가 있기 때문이며 그 신비의 처소를 아는 자만이 담대함 곧 파레시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명한 자 같지만 하나님께 인정받을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라는 이름을 가진 자이다.
또한 죽은 자 같지만 항상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결코 죽임을 당하지 않으며 근심으로 휩싸인 자 같으나 그 근심이 우리를 결코 완전히 넘어뜨리지 못하는 것은 그 근심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히려 그 근심이 변하여 항상 기뻐하게 하는 것은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
(고후 6:8-10)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너희가 내 계명을 잘 지켜 내 언약 안에 머무르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들의 계속되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들이 언약 안에 머물지 않으므로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히 8:9b)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당신의 살과 피로 성취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언약 안에 머물러 있으면 새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된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아닌 그보다 훨씬 뛰어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큰 형님 큰 오빠와 동생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고후 6:17-18)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구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누구라서 예수님을 큰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도 주의 말씀으로 성령 안에서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교제와 사귐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한 가족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런 가족 관계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나라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펼쳐져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이 땅에서는 부요함과 가난함, 성공과 실패, 얻을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사오니 땅에 있는 것 곧 썩어 없어질 것으로 일희일비하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날마다 주의 말씀으로 그 나라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가게 하옵소서.
오늘이라는 시간이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그 나라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영적 하루살이가 되어 주님으로 충만하며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나 가진 것 비록 없지만 예수로 만족하는 자족의 은혜와 기쁨이 나를 온전히 감싸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