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범인들이 천재들 특히 예술분야의 천재들에게 기대하는 삶이란 무언가 괴기스럽고 음울하며 세상과 유리된 고립, 분노, 상처등을 홀로 안으며 고독하게 살다가 끝내는 요절하고마는 그런 것이 아닐까... 확실히 그러한 생애를 겪었다고 알게된 작가들은 우리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흔히 영문학에서 상징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보들레르의 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우연히 접한 그의 시가 유난히 감동적이어서라기 보다는 그의 평범하지 않은 삶과 그의 시집 <악의 꽃>이 출판당시 악을 찬양하고 미풍양속을 해한다는 이유로 몇편 삭제되고 금지되는 수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였던 까닭이다.
그에 대해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들, 예컨데 그가 62세의 아버지와 27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어머니가 장교와 재혼하는 등의 성장배경과 그 후 창녀와 사는 성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영위했다는 사실등은 이 책을 통해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평에서 논하고있는 보들레르의 자연에 대한 공포, 더 나아가 자연에 대한 악의에 찬 비판과 혐오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보들레르는 악과 자연을 동화시키고 있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의 자연에 대한 그 거룩한 예찬-자연은 보든 선과 모든 가능한 아름다움의 토대, 원천 그리고 그 전형이라는 것-을 완전히 뒤집어 엎은 것이다. 보들레르의 자연은 부드러움과 풍요로움이며 그는 이것에 강한 공포를 느낀다. 그가 느낀 창조, 풍요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전생애동안 비풍요성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가 많은 시를 쓰지 않은 것도 그가 결코 무능해서가 아니라는 해석이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라고 강요하는 자연의 무한한 부드러움에 분노한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자연은 늘 거기에 있으며 그에게 강요한다. 그는 이러한 저항들을 초극하는데서 알 수 없는 쾌락을 느꼈다. 어쩌면 그도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수용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그 세계 속에서 보들레르는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水晶의 함정 속에 빠진듯
極地에 갇힌 채로
대체 어느 빌어벅을 해협으로 부터
이 감옥으로 떨어졌나를 생각하는 배 한 척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노벨상을 거부한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에게 보들레르는 강한 연민, 공통의 감수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감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