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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의 ‘천사’였다. 단, 어떤 의미에서는 ‘백의의 천사’보다 ‘죽음의 천사’에 가까웠지만……! 실제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격적이게도 그가 목숨을 구한 환자 수보다 사망한 환자 수가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당시 죽은 환자 중에는 제때 적절한 응급조치와 제대로 된 치료만 받았다면 충분히 생명을 구했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알고 보면 크림전쟁에서 간호사로서 남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업무 실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놀랍게도 터키 이스탄불 근교 스쿠타리(현재 위스키다르)에서 나이팅게일이 간호 책임자로 근무한 병원에서는 환자 2만 5,000명 가운데 사망자가 무려 1만 8,000명에 달했다. 즉,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 다섯 명 중 세 명 이상이 죽어서 병원 문을 나온 셈으로, 하루 최고 70명이 사망하는 무시무시한 죽음의 현장이었다. 크림전쟁 중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곳이 바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간호 책임자로 일하던 병원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분노를 터뜨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 수뇌부의 잘못이에요! 병사들이 우리 병원에 이송되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어요!”
-「episode 1. 나이팅게일은 과연 ‘백의의 천사’였을까」중에서 (26p.)
더구나 만년의 간디와 함께 잔 사람은 아내가 아니었다. 그럼 과연 누구였을까? 간디의 개인비서의 여동생으로 의사로서 간디를 간호한 수실라 나야르였다. 한데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간디가 그 외에도 어린 소녀, 지지자, 친척의 아내를 포함한 여러 여성에게 알몸 동침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간디는 혼자서는 추워서 잘 수 없다는 이유로 조카의 아내인 아바라는 여성의 옷까지 벗겨 한 이불에 들었다.
“몸을 데울 생각이시라면 아내 대신 제가 함께 자겠습니다.”
졸지에 아내를 빼앗기게 된 조카가 황급히 말했다. 그러나 간디는 조카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간디와 알몸으로 같이 잔 소녀 마누는 “엄마랑 같이 자는 게 뭐가 문제야?”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간디는 주위 여성들에게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했다.
간디의 ‘절대금욕’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성욕을 절제하라는 힌두교 교리를 충실히 따르고자 했던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굴복시킴으로써 자신을 여성화, 양성구유화하고자 했다고 한다. 밤마다 시달리던 오한을 핑계 삼아 알몸 여성과 함께 자면서 그것을 성욕 제어 훈련 또는 제어하지 못한 욕구에 대한 속죄의 고통의식이라고 변명하는 바람에 논란을 일으키고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아무튼, 이쯤 되면 우리는 ‘간디의 위대함을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라는 난감한 생각마저 든다. 여러 면에서 그는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 성인과 세속적 정치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입체적이고도 기묘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가 역사적 위인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어쩌면 수많은 민중의 시선을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던 희귀한 재능에 있었던 게 아닐까.
- 본문 「episode 2.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썼으나 성욕의 포로가 돼버린 간디」중에서 (pp. 34~37)
훗날 엘리자베스 1세는 많은 연인을 두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즉흥적 감정에 이끌린 선택이 아닌, 치밀한 계산 끝에 맺은 냉철한 관계였다. 또 그는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 탓에 차츰 욕구불만이 쌓였고, 그렇게 풀지 못하고 누적되기만 한 에너지를 다소 도발적인 취미생활로 발산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자주 이야기되는 일화로, 그는 상반신을 덮은 부분이 좌우로 벌어져 있어 가슴과 배가 슬쩍슬쩍 드러나는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여왕의 속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도무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프랑스 대사를 보면서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태연자약 알현을 계속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갈 곳 몰라 헤매는 프랑스 대사의 동공을 바라보며 짜릿한 쾌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런 모습은 뭇 남성의 집요한 시선에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여성보다는 도발적 취향을 가진 남성의 모습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여기에 더해 당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백년전쟁을 치를 정도로 오랜 앙숙이었던 데다 그의 아버지 헨리 8세 재위 시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척을 지게 되면서 당시 대표적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와 더욱더 험악한 관계였던 점을 고려하면 엘리자베스 1세가 고도의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본문 「episode 3. 밤에는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고 낮에는 연인의 뺨을 때린 무서운 여자 엘리자베스 1세」 중에서 (pp. 42~43)
사랑하는 아들과 손자들의 죽음을 전해 들은 일만으로도 샤 자한은 충분히 지옥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느 날이었다. 샤 자한이 식탁에 앉자 음식이 나왔다. 그가 고기 요리 뚜껑을 열자 실로 놀라운 ‘요리’가 나왔다. 그게 뭐였을까? 충격적이게도 샤 자한이 끔찍이 사랑했던 아들 다라 시코흐의 머리였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이탈리아 여행가 니콜로 마누치(Niccol? Manucci)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샤 자한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져 식탁에 얼굴을 박았다.
샤 자한은 이가 몇 개나 부러질 때까지 자기 머리를 식탁에 찧는 자학적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샤 자한은 실권을 잡은 아우랑제브에게 개인 자산인 보석까지 모두 빼앗기는 등 온갖 수모와 냉대를 받으며 죽을 때까지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했다.
인도를 호령하던 황제는 타지마할 근처 아그라 궁전에서 가족과 첩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꼼짝없이 유폐되어 죄수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
창으로 내다보이는 타지마할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고 전해지는데, 말이 상왕이지 실제로는 도저히 상왕이라고 볼 수 없는 매우 비참하고 곤궁한 생활이었다. 심지어 새 실내화를 살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돈에 쪼들렸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 본문 「episode 8. 죽은 아내를 그리워해 21년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묘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 중에서 (pp. 88~91)
총 300명이 넘는 소녀가 루이 15세에게 성적으로 봉사했고 ‘사슴 정원’에서 태어난 국왕의 사생아는 60명이 넘었다. 이렇듯 많은 소녀의 참담한 ‘희생’을 밑거름 삼아 국왕의 총애를 유지한 퐁파두르 부인은 자신의 선택과 행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그 희생이 자신의 권력을 탄탄한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 즉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여겼다.
여러 설이 분분하나 ‘사슴 정원’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 작동 방식을 고안해 실행에 옮긴 사람은 퐁파두르 부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처음에 그 혐오스러움에 몸서리치다가 국왕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운영을 맡았다거나, 처음에는 거부감에 몸을 뺐으나 나중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주장도 있다.
퐁파두르 부인은 프랑스 로코코 양식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그 시기에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고 멋진 나라’라는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완성했다. 어떤 관점에서 퐁파두르 부인은 프랑스라는 나라의 브랜드를 만든 프로듀서였다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프랑스가 누린 영광의 기틀을 놓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영광을 뒷받침해준 기둥 중 하나가 바로 ‘사슴 정원’에서 일한 몇백 명의 이름 없는 소녀들이었다.
- 본문 「episode 26. ‘성’을 무기로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룬 여성, 퐁파두르 부인」 중에서 (231~232p.)
후아나는 남편의 시신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를 온전히 독점하게 된 셈이었다. 그는 남편의 시신을 흑단으로 만든 관에 안치했다. 그런 다음 상여 대신 네 필의 검은 말이 끄는 검은 옻칠한 장례용 마차에 관을 실었다.
여행의 대외적인 목적은 남편의 유해를 그의 어머니 이사벨 여왕이 잠든 도시 그라나다로 운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추모 여행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당시 스페인은 시가지를 벗어나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삭막한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메마른 황야 한복판에서 후아나는 밤낮으로 마차를 달렸다. 펠리페가 당장이라도 되살아날지 모른다고 믿었던 후아나는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느껴지면 관 뚜껑을 열어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때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마차를 세우게 했다. 한때 ‘미남왕’으로 불리던 펠리페의 시신이 부패하며 백골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후아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도원에 남편의 관을 안치한 뒤 스스로 어느 성에 들어가 46년 동안 자신을 철저히 유폐하다 세월이 흘러 추모 여행을 나선 지 3년이 지났을 무렵 후아나는 드디어 토르데시야스성 안에 있는 수도원에 도착해 남편의 관을 안치했다. 그리고 그 수도원에 인접한 어느 성에 들어가 46년 동안 한 발짝도 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미친 여왕’으로서 자신을 유폐했다.
후아나는 이따금 온전한 정신을 되찾기도 했으나 대체로 그의 정신은 광기의 밑바닥에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제대로 된 옷이 아닌 대충 누더기를 걸친 채 여기저기 변을 보고 다니며 식사를 포함한 대부분의 생활을 바닥에서 짐승처럼 뒹굴며 해결했다.
- 본문 「episode 27. ‘남편의 관과 함께 황야를 떠돈 스페인의 ‘미친 여왕’ 후아나」 중에서 (238~2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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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마하트마 간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엘리자베스 1세, 청 황제 건륭제…….
인류가 영웅으로 칭송하고 위인으로 존경하던
인물들의 음흉하고 어리석고 위험천만한 속살을 들추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의 ‘천사’였다. 충격적이게도 그가 ‘백의의 천사’보다 ‘죽음의 천사’에 가까웠다는 사실이 문제이긴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왜 ‘죽음의 천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을까? 그가 목숨을 구한 환자 수보다 사망으로 이끈 환자 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죽은 환자 중에는 제때 적절한 치료만 받았다면 충분히 생명을 구했을 사람도 적지 않았다(나이팅게일이 간호 책임자로 근무한 이스탄불 근교 스쿠타리의 한 병원에서는 환자 2만 5,000명 중 사망자가 1만 8,000명에 달했다). 전기 작가 휴 스몰은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환자 중 한 명이다.”
이 책에는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썼으나 성욕의 포로가 되어 지지자와 친척의 아내, 심지어 조카의 아내와도 동침한 간디, 밤에는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고 낮에는 연인의 뺨을 때린 무서운 여자 엘리자베스 1세, 한편으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풍습 전족을 엄격히 금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병적으로 즐긴 청 황제 건륭제 등 은밀하고도 위험천만한 욕망에 사로잡힌 30여 명 역사적 인물들의 충격적이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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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명 역사적 인물들의 은밀하고도 위험천만한 욕망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세계사를 바꿨다!
마하트마 간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엘리자베스 1세, 청 황제 건륭제, 마리아 테레지아, 마르틴 루터…….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걸출한 역사적 위인과 영웅들의 음흉하고 어리석고 위험천만한 속살을 거침없이 들추는 흥미롭고 도발적인 역사서가 사람과나무사이에서 출간되었다.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가 그것. 이 책은 1년여 전인 2020년 11월에 출간되어 온·오프라인 단행본 시장은 물론이고 전자책과 오디오북, 유튜브 콘텐츠로도 좋은 반응을 얻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28가지 세계사 이야기-사랑과 욕망편』의 후속작이다.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인간의 마음만큼 난해한 것도 없다. 심해처럼 바닥을 알 수 없고, 그래서 공포스럽다”라고 말한다. 영웅과 위인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른바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인물일수록 표리부동한 경우가 더 많을 뿐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어떤 무섭고 엽기적이고 위험한 모습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저자는 마치 앞면은 아름답고 화려한데 뒷면은 추하고 복잡한 양탄자처럼 이중성과 양면성을 가진 인간의 본성에 주목해 흥미진진하고 충격적이면서도 나름대로 통찰력을 느끼게 하는 30여 명 인물들과 36가지 역사적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 첫 번째 장면 - 나이팅게일은 과연 ‘백의의 천사’였을까?
‘백의의 천사’, ‘간호사계의 넘사벽’ 등으로 널리 알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이중성과 양면성을 가진 ‘양탄자’ 같은 인물의 전형이다. 그는 19세기 중반에 벌어졌던 크림전쟁의 영웅이자 ‘천사’였다. 충격적이게도 ‘백의의 천사’보다 ‘죽음의 천사’에 가까웠다는 사실이 문제이긴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왜 그런 치욕적인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을까? 안타깝게도 그가 목숨을 구한 환자보다 사망으로 이끈 환자 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죽은 환자 중에는 제때 적절히 치료만 받았다면 생명을 구했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나이팅게일이 간호 책임자로 근무한 이스탄불 근교 스쿠타리 병원에서는 환자 2만 5,000명 중 사망자가 1만 8,000명에 달할 정도였다.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 다섯 명 중 세 명 이상이 시신이 되어 문밖으로 나온 셈이다.
나이팅게일은 왜 간호사가 되었을까? 그가 활동했던 19세기 중·후반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나이팅게일은 상당한 재력을 가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상류층이었던 데 반해 당시 병원은 하층계급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었으며, 간호사는 누구나 기피하는 비천한 직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매춘부가 부업으로 간호사를 겸업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도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자부심과 ‘위대한 인물’이 되어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마치 어설픈 초보 댄서가 몸과 마음이 따로 놀 듯 이상과 현실에 괴리가 생긴 결과가 그에게 ‘죽음의 천사’라는 오명을 씌운 주요 원인이었던 건 아닐까. 전기작가 휴 스몰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환자 중 한 명이다”라고 야박하게 평가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f6yg12KWqI
? 두 번째 장면 -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썼으나 성욕의 포로가 돼버린 간디
‘이중성’과 ‘양면성’의 잣대를 들이대자면 간디는 나이팅게일보다 심하다.
간디는 비폭력주의를 일관되게 관철하며 100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가 마침내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인도가 낳은 걸출한 시인 타고르가 존경의 뜻을 담아 그에게 ‘위대한 시인’이라는 의미의 ‘마하트마’라는 호칭을 붙여준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서 들여다보면 간디는 철저히 이중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선, 제국주의 영국에 맞서 싸우며 억압받는 인도인의 자유와 평등을 일관되게 추구한 그가 다른 한편으로 인도의 전통적 신분제도를 철저히 옹호했을 뿐 아니라 명백한 인종차별 의식까지 드러낸 사례가 그렇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진짜 심각한 것은 ‘성 문제’였다. 만년에 그는 아내 이외의 여러 여성과 알몸으로 동침했는데, 충격적이게도 어린 소녀, 지지자, 심지어 조카의 아내까지 포함돼 있었다. 간디의 삶이 이중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욕망’과 ‘이상’의 갈등과 충돌에서 욕망이 승리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 세 번째 장면 - 밤에는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고 낮에는 연인의 뺨을 때린 무서운 여자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는 오래도록 유럽 변방의 ‘북쪽 섬나라’에 지나지 않던 잉글랜드를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만든 위대한 여제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헨리 8세를 비롯한 여러 명의 앞선 잉글랜드 군주들이 범죄자로 엄격히 단속하던 해적 일당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활용할 정도로 예리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런 자질을 바탕으로 그는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하고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당대에 경쟁자가 거의 없다시피 하던 그 나라를 누르고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다졌다.
이런 위대한 여제에게도 간디나 나이팅게일과 마찬가지로 ‘양탄자’ 속성은 뚜렷이 발견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양면성과 이중성은 주로 남녀 문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잉글랜드 여왕이 된 후 엘리자베스 1세는 많은 연인을 두었다. 물론 이는 즉흥적 감정에 끌린 선택이라기보다는 치밀한 계산 끝에 맺은 냉철한 관계로 볼 수 있다. 그는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 탓에 자주 욕구불만이 쌓였고, 그렇게 풀지 못하고 누적되기만 한 에너지를 다소 도발적인 취미생활로 발산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일화로, 그는 상반신을 덮은 부분이 좌우로 벌어져 있어 가슴과 배가 슬쩍슬쩍 드러나는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다. 여왕의 속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도무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프랑스 대사를 보면서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태연자약 알현을 계속했다. 그 순간 그는 프랑스 대사의 당황스러워하는 동공을 바라보며 오히려 짜릿한 쾌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런 모습은 뭇 남성의 집요한 시선에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여성보다는 도발적 취향을 가진 남성의 모습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여기에 더해 당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백년전쟁을 치를 정도로 오랜 앙숙이었던 데다 그의 아버지 헨리 8세 재위 시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척을 지게 되면서 당시 대표적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와 더욱더 험악한 관계였던 점을 고려하면 엘리자베스 1세가 고도의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엘리자베스 1세의 남성 취향은 ‘강하고 나쁜 남성’에 가까웠다. 그는 낮에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밤에는 여린 모습을 보여주는 반전 매력의 소유자였다. 연인과 단둘이 있을 때는 응석을 부리고 달콤한 말도 속삭이다가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 남자가 애인 행세를 할라치면 격노해서 거침없이 그의 따귀를 때리고 망신을 주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이자 연인이던 에식스 백작의 경우 여왕에게 손찌검 당하는 장면이 여러 번 사람들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1세는 전쟁터에서 무모하게 지휘한 점이 빌미가 되어 정적에게 반역자로 몰린 에식스 백작을 끝내 구해주지 않았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등 여러 남자를 유혹했으나 결국 자기 자신과 재물, ‘여왕’이라는 직위만을 사랑했던 여인 클레오파트라 이야기, 한편으로 전족을 엄격히 금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병적으로 즐긴 청 황제 건륭제 이야기, 한때 자신이 끔찍이 사랑한 여인들을 줄줄이 처형대로 보낸 사이코패스 왕 헨리 8세 이야기,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며느리도 마다하지 않은 희대의 호색한 황제 당 현종 이야기, 남편의 관과 함께 황야를 떠돈 스페인의 ‘미친 여왕’ 후아나 이야기, 때로 광기에 사로잡혀 성인과 광인을 넘나든 종교개혁의 선봉장 마르틴 루터 이야기 등 ‘양탄자’처럼 이중성과 양면성을 가진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흥미진진하고 도발적인 이야기로 빼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