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년 봄 다시 경주를 찾아갑니다.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사랑하고 그래서 경주에 터를 잡고 사는 이재호 선생과 함께 하는 이번 경주 일대 걷기는 토함산 자락을 넘어 기림사로 이어지는 옛 신라왕들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 기림사 골굴암을 답사하고 감은사와 문무왕 수중릉 일대를 돌아 볼 예정입니다.
조선시대의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이라는 그림을 보면 목조전실이 묘사 되어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숙종 12년(1686)에 정시한이 쓴「산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5월 16일 정해, .....15리를 가서 곡굴암에 닿았다. 앞에 있는 고개에 올라가 바라다보니 석봉이 기괴하다. 괴석怪石처럼 생긴 바위들이 층층이 쌓여 있고, 거기에 굴이 있다. 굴 앞에는 간략하게 목조가옥을 세워놓아 처마와 창이 달려 있다. 벽에는 채색도 했다. 바위 사이의 단청이 된 전각 5,6채가 걸려 있는 것이 바라다 보이는데, 마치 그림속의 광경 같다....밥ㅂ을 지어 먹은 다음에 수민修敏 스님과 병든 노인인 김운길金雲吉과 함께 사자굴獅子窟에 올라갔는데, 암자는 비어 있다. 섧버굴說法窟을 지나 정청굴正廳窟과 승당굴僧堂窟에 갔는데, 역시 비어 있다. 달마굴達摩窟에 도착했는데, 이곳에 있는 쌍성雙性슨미과 운길의 아들인 선청善淸. 선개善皆스님은 모두 밖에 나가고 없다. ”
해방 전에만 하더라도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만큼 위세가 당당했던 기림사는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직후인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의 승려 광유(光有)가 500여 명의 제자들을 교화한 뒤 창건한 후 임정사라 부르던 것을 원효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창 하였습니다.『삼국유사』에는 “신라 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용으로 환한 선왕으로부터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얻어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서편 냇가에서 잠시 쉬어간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신문왕 이전에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절에 김스습의 시 한편이 남아 있습니다.
잠시 개었다가 다시 비오고(시晴시雨)
잠시 개었다가 다시 비오고 비오다 가 다시 개인다. / 하늘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세상인심 이랴 / 칭찬을 하다가도 오히려 나를 헐뜯고 / 명예를 피한다더니 오히려 이름을 구한다네. / 꽃이 피고 꽃이 진들 봄이 어이 관계하며 / 구름이 가고 구름이 온들 산이 어이 다투리. / 세상 사람들 잘 기억하시게 / 어디서나 기뻐함은 평생에 득이 된다네.
남산 자락에 있는 괘릉을 들러 찾아갈 원원사터는 경주물 외동읍 모화리에 있는 절로 <삼국유사>에 자주 등장합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당나라와 다시 새로운 싸움에 나섰고, 그때 호국 염원을 담은 절들을 세웠는데. 원원사遠源寺는 그 중의 한 곳이다. 김유신은 당나라 군사를 격퇴시키는데 불력을 나타냈던 신인종의 승려인 고승 안혜와 낭융등과 더불어 적이 서울로 쳐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에 절을 세운 것입니다. 아름다운 불교 유적인 동서 삼층석탑과 소나무숲이 일품인 원원사터는 사적 제 4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경주에서의 하룻밤과 경주를 경주답게 돌아볼 이번 여정에 참여하실 분은 미리 신청하십시오.
일시: 2007년 4월 14일(토) 아침 7시 30분 양재역 8번 출구 서초구청 앞11(일)까지(전주 4시 30분)
장소: 경주. 토함산(임금이 걷던 길 3시간) 기림사. 골굴암. 감은사. 문무왕 수중릉. 괘릉. 원원사외 경주 일대
강사: 신정일(우리 땅 걷기 대표) 김판용 (시인)
참가비: 일반 80,000원 학생 65,000원
계좌번호: 국민은행 754801-01-479097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입금하시고 메일 올리십시오.
우리 땅 걷기
한강 천 삼백 리를 느리게 걷는다.
정해년 봄 다시 한강 천삼백리 길 여정을 한발 한발 걷기 위해 여정을 시작합니다. 태백. 삼척. 정선. 평창. 영월 단양 제천 충주, 원주. 여주. 양평. 양수리. 남양주. 구리. 서울. 김포. 그리고 한강이 바다에 몸을 푸는 보구곶리까지 천 삼백리 여정을 매달 이틀씩 12월까지 진행해서 끝마칠 예정입니다. 우리 민족의 젖줄이자 동맥인 한강을 아는 것은 우리나라를 아는 것이고,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곳 검용소에서 하구까지 그침이 없이 갈 수 있는 것은 한강을 흐르는 물과 걸어가는 우리들 그리고 세월이라고 이름지은 시간뿐일 것이다.
“이곳 검용소는 한강 514.4km의 발원지로 하루 2천여톤 가량의 수원이 석회암반을 뚫고 나온다. 깊이 1.5m, 넓이 1.2m의 암반 20.3십미터를 지나 이루어낸다. 수온은 사계절 내내 9℃이며 암반 주변 풀 이끼는 신비함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강줄기를 거슬러 이 산에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이 지금의 폭포이며 부근에서 풀을 먹기 위해 온 소를 그 용이 잡아먹기도 해 마을 사람들이 내려가 버렸다고 한다.”라고 적힌 안내판 옆에는 검용정이 세워져 있고 “태백의 광명정기에 솟아 민족의 젖줄 한강을 발원하다”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제당궁샘 1.9km 두문동 재 3.8km 암수령재 7.7km라고 쓰여져 있는 나무 팻말들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물은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른다.
서울의 젖줄이면서 한국의 젖줄,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젖줄이라고 일컬어지는 한강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강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미창(士美倉)이 있었다는 창말 마을을 지나며 진재언씨가 “강원도 사람들은 뭘 먹고산대요”하고 말하는데 옛날에는 옥수수나 감자 그리고 조밥만 먹고 살았는지 몰라도 지금은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돼버렸기 때문에 옥수수나 조밥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일 것이다. 잡초 무성한 제방 둑 위에 누군가 벗어놓고 간 검정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혀있다. 누가 벗어놓고 갔을까? 아직 어느 한곳 구멍 뚫린 곳도 찢어진 곳도 없는데 내 어린시절 우리들은 떨어진 신발 또는 찢어진 신발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저녁 내내 힘들여 기워 신은 고무신이 학교에 가기도 전에 찢어지면 별 도리가 없이 야산에 올라가 칡넝쿨을 거두어다 꽁꽁 동여매고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었지“
“사람이 늘 그렇다. 다왔다 싶자 다리가 아프다. 나는 그렇다치고 매일 차만 타고 다니던 일행들은 너무 힘겨워한다. 욕심이라는 걸 버려야 하는데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쯤을 빨리 간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돌아갈 집도 여기서 멀고 누구에게도 아무런 소식도 없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사라져 간다는 것 역시 그러할 것이다. 천천히 천천히 잊혀져 가다가 아주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남은 사람들 역시 그 전철을 밟고 사라져갈 것이다.”
그 첫 구간 검용소에서 정선군 임계면까지의 여정이 강물이 풀리는 사월부터 시작됩니다.
“강물이 풀리다니/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은 무슨 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서정주 시인의 시 구절처럼 새로운 세상을 살고 싶으신 분이나 한강을 느리게 알고 싶으신 분의참여를 기다립니다.
일시: 2007년 4월 27일(금) 밤 9시 양재역 8번 출구 서초구청 앞29(일)까지(전주 밤 6시)
첫댓글 전 경주하면 석굴암를 한번 가보고 싶은데... 한이 조금 맺혔기에.. 내 방랑병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