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가득찬 방 외 3편
허유미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간다
시작에서 시작으로
마주 보는 사람 없이
드러내는 변명도 없이
한 덩이 미소도 되지 못한 채
바라보면 길고 건너보면 짧은
안이 밖을 채우는,
오래된 구름을 채색하다가
잎이 떨어진 자리까지만 생각하다가
보라색 침묵으로 동그라미 소리를 자르는 하루
발걸음은 사물의 중심으로 가서
발걸음은 사물의 둘레로 나온다
온몸에서 떨어져 나간 말들이
동그라미 안에서 의문형 대답을 받고
손톱처럼 고민스럽다
흐린 비처럼 비명을 지르면 더욱 선명해져
정확한 발음과 맞춤법으로 나를 꾹꾹 밟아
행이 빈자리로 옮겨 놓는,
동그라미 속 동그라미를 확인하는
동그라미가 나를 데리러 오는 길
낡은 외투에 햇볕이 잠시 망설인다
편지
연필을 잡으면
감자꽃은 피어납니다
당신이 도착한 곳은 북쪽 끝인가요
당신 신발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손에 눈이 쌓입니다
눈을 밟고 한 자 한 자 걸어가면
침엽수처럼 뾰족한 연필심이 붉은 습지에 닿네요
겨울은 한 장의 종이로 끝날 수 있을까요
이별보다 먼저 여문 감자는
남쪽 햇살처럼 환합니다
새소리만 남은 빈 방에 가끔씩 기차는 오고
오래된 외투는 내려
나의 이마를 짚어주고 밤으로 웅크립니다
습지 물고기들의 뻐끔거리는 입에서 새는
젖은 달빛이 눈에 어리면
사향의 발자국을 쫓아 써 내려가던 필체는
오늘 밤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요
잠을 기울이면 감자꽃은 자욱이 마침표를 찍을까요
몇 줄의 문장에서 푸른 잎과 줄기와 나와
반지하 창문을 열어 놓습니다
연필을 눕히면 몽당 닳아진 손에
구름처럼 싹이 돋습니다
달려라 통닭
너는 내 일회용 밤에 쓸
두 번째 체위야
골목이 반쯤 어두워지면
네가 있는 방향은 환해지지
사실 오늘이 어제보다 더 서툰 시간이 될지 몰라
너는 오로지 뜨거운 한 문장에 끼워진 풍부한 쉼표
고개 숙여 유리창이 바삭해질 때까지
최후의 명상은 행복한 수당일까
네 짧은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뒤집힌 고독을 가만히 안아 보네
컨베이어 벨트에 밤은 감기고
가슴이 빈 병처럼 바람만 담을 때
비닐 팩 안에서 아직 고독으로 따뜻한 네가
밤의 끝을 구분 못 하는 나를 부축 한다
소모품은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너는 최선을 다해 허벅지에 힘을 주고
야근 수당도 없는 비정규직에
나는 최선을 다해 청춘을 달린다
계란찜
거품 위에 봄이 있습니까
첫사랑
맛볼 수 없는 간
아직도 물컹 흔들립니다
상상은 여백에서 시작되지만
휘휘 저어야만 하는 상처 때문에
깊은 곳으로 가라앉습니다
뜨거운 것과 날 것 사이
호흡의 원주는 시계보다 큽니까
회전력이 빠른 것들은 형체가 서로 닮아있다는데
고백은 같은 종족의 언어였습니까
중심에서 밖으로 갸우뚱한 거리를
결말 없는 소설 구조로 재어 보면
노랑은 복선입니까 봄의 절정입니까
눈 감으면 부풀어 오릅니까
콕 찌를 수 없는 시간이
뭉클 흘러나옵니다
상상은 은은히 바라보는 규칙에서만 익습니다
여기서부터 서사는 끝나고
저녁은 둥글어집니다
당신 집에도 거품의 매뉴얼은 시작 됩니다
― 2019년 제35회 서정시학 신인상 당선작, 계간 《서정시학》 (2019 / 여름호)
허유미
제주 출생. 2019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청소년 시집 『우리 어멍은 해녀』 , 합동시집 『시골시인―J』. 박영근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