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가람뫼 문화답사기
섬진강 따라나선 하동고을
*답사지: 지리산 칠불사 - 지리산 역사관 - 탑리 삼층석탑 - 악양 최참판댁
‘나리’가 올라온단다. 우리나라가 세계 기상대에 제출한 태풍의 이름이다. 이 태풍이 이번 답사일에 한반도를 통과한다니 여간 걱정이 아니다. 이틀 전부터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락날락거리며 기상학자가 되어야 했다. 결론은 'OK' 답사가 끝날 무렵에야 태풍의 영향권에 든다는 분석을 내리게 되었다.
이른 7시에 출발지인 부산진역 앞, 답사참가자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였다. 열한 명 신청에 참가자도 열한 명, 태풍소식에도 백퍼센트 참석이다.
답사팀은 날씨 덕에 행락 차들이 없는 뻥 뚫린 남해고속도로를 달려 하동 땅으로 들어갔다.
전라경상 두 남도를 굽이굽이 가로지른 섬진, 헌데 그동안 봤던 섬진강이 아니었다. 지리산 지역에 많은 비가 내린 때문인지 강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내 누이 하얀 살결처럼 고왔던 섬진강의 고운 모래밭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지리 반야봉에서 토끼봉을 이어받아 동남쪽으로 흘러 내려온 곳, 해발 800m 지리산 중턱에 위치한 ‘칠불사’가 답사의 첫 목적지이다. 동국제일 구름 위의 선원으로 불리는 ‘운상선원(雲上禪院)’과 세계 건축학 사전에 올라 있을 정도로 우리 조상의 슬기가 번뜩이는 건축물인 ‘아자방(亞字房)’이 있어 더욱 유명한 곳이다.
회색빛 하늘이 지리산의 풍광과 비온 뒤의 고즈넉한 산사를 가만히 감싸고 있었다.
칠불사에 든 일행들은 대웅전 참배와 함께 아자방을 둘러보았다. 이어 신라 말 도선국사의 ‘옥룡자결’에 “음택(陰宅)으로는 오대산 중대보궁이 제일이고 양택(陽宅)으로는 지리 칠불의 자리가 제일”이라는 곳인 ‘문수전’을 참배하고 각자 명상에 들었다.
칠불사의 어른이신 통광 큰스님이 계신다는 소식에 법문을 청하니 흔쾌히 응하신다.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장유화상을 따라 이곳에 와서 성불했다는 설화와 아자방에 대한 내용, 대운율사의 계맥에 얽힌 이야기들로 통광 큰스님의 법문은 진속(眞俗)의 경계를 넘나든다.
“공양하고 가라”는 큰스님 말씀에 귀가 솔깃해진다. 모두들 “먹고 가자!”고 이구동성이다.
모처럼 먹는 절밥이 맛있는 모양이다. 모두 조용한 걸보니...
간간이 비가 뿌리고 서서히 바람이 인다. 아마 태풍이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답사 다니기에는 딱 좋다.
칠불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지리산 역사관을 찾았다. 해방 후부터 6.25 전쟁이 끝나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린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지리산 빨치산의 역사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도 물어가지 않을 이데올로기라는 이념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서러운 역사를 지리산 한 구석에서 비를 맞으며 증명하고 있었다.
화개장터를 지나다 뜻밖의 수확을 거뒀다. 화개면 탑리에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1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를 찾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칠 뻔했다. 순간 우체국 빨간 간판 사이로 탑의 지붕돌이 시야에 잡혔던 것이다. 예정치 않았던 곳에서 유물을 발견하고 이를 일정에 보태는 것도 답사의 묘미 가운데 하나이다. 비록 탑의 상륜부가 유실되고 옥개석 부분이 일부 파손되었으나 천년의 풍파를 견뎌온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아주 오래전 기억 속에 묻혔던 친구를 만난 듯 했다.
악양! 말만 들어도 박경리씨의 소설 ‘토지’의 주무대인 최참판댁을 떠올린다. 모두 최참판댁과 여기에 등장하는 서희와 길상이, 그리고 기타 인물들을 실존처럼 여긴다. 이를 ‘픽션’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처음엔 나도 그랬지만...
최참판댁에는 과연 참판어른이 있을까? 조금씩 빗줄기가 굵어지는 가운데 초가집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대궐 같은 최참판댁으로 향했다. “이리 오너라!” 큰소리치고 싶었지만 표지판만 보고 뒷문으로 들어간 탓에 나중에 참판어른에게 ‘상놈’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동군청에 항의해야할 일이다.
행랑채 앞마당을 지나 사랑채에 가서 참판어른을 찾았다. 입구 안내소에서 소개한대로 정말 참판어른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하동군에서 위촉한 유학자 선생이란다. 사랑채와 이어진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옛 선비와 양반들의 살림살이를 해학적인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내는 참판어른의 ‘명강의’ 속에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참판어른이 달여 주시는 녹차, 한 번 앉으면 일곱 잔은 마셔야 된다며 계속 달여 내신다.
저 멀리 보이는 섬진강이 소나기를 몰고 온다. 선계(仙界)가 여긴가? 집도 잊고 사람도 잊었다. 한 폭의 낡은 그림처럼 이대로 못 박히고 싶었다.
하행 길, 답사의 백미가 남았다. 먹는 즐거움 또한 무엇에 견주랴! 섬진강의 명물 참게탕 전문집을 찾았다. 태풍이 하동 고을에 접근한 모양이다. 사나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섬진강가의 나무들이 춤을 춘다. 일행들은 참게탕에 빠져 바깥 세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하동을 벗어나 부산으로 오는 길이 만만치 않았지만 가람뫼 문화답사를 위해 도움을 주신 여러분들과 당일 참가했던 분들, 특히 늘 안전운전하며 답사의 발이 되어주고 있는 손동수 법우에게도 감사드린다.
첫댓글 연수원장님, 손동수 법우님 늘 감사드립니다.
답사..... 꾸준히 다니다보면 우리 문화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삶의 고단함을 쉬어갈 수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