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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시절 선생님들과 숨박꼭질 하듯 몰래 교정을 빠져나와 계림동파출소를 지나 금남로로 빠져 나가려던 계획이 들통이나서 교실 1층과 2층을 돌며 교문과 계림초등학교쪽, 계림동 성당쪽, 남쪽 월담으로 아카시아 교정을 빠져나가던 시절이 생각난다. 금남로에서 학생들이 모여 유신반대 대모를 하기로 하고 ...
나야 주가 되어 움직였던 학생은 아니어서 경찰서까지는 불려가지 않았지만...
요즘 다시 지난 박정희 독재정권 유신시절의 희생이 되신 장준하 선생의 사인이 밝혀지고 있다.
그 시절 박대통령의 딸이었고,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있었던 박근혜씨는 지금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 1977년 1월1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박근혜씨가 청와대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씨는 당시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했다.
그런데 자신은 연좌제 피해자라는 것이다. 이 말이 맞을까? 피해자? 무엇에 의해? 무슨피해? 용어의 선택이 자기 편리할 대로 선택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역사인식이 부족한 대통령후보로서 말이다.
지금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정치를 하고 있지 않나? 5.16이 쿠테타가 아니라고... 또 지금 잘 먹고 잘 사는것이 다 아버지의 공이다고...아버지 덕에 이룬 경제성장의 공이 있다고...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도 민주적인 대통령이 아니고, 경제 발전도 서민 백성, 힘없는 국민의 희생에 의한 결과이고...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영화도 그 결과 아닌가? 오직 박정희 정권의 산물인 한나라당, 새누리당(옷만 바꿔입고 합쳐서 한누리당)만을 위한 영화 아닌가? 100%를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진정성이 있는 말인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그의 말에는 정직성과 진실성이 있다고? 과연 그러한가? 내 생각에는 립서비스다. 자가 편리할대로 말하는 자기주장, 오직 대통령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자기최면의 자기변명이다.
여기에 최근 민주통합당의 최민희 의원은 최근 논란이 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도 폭파` 발언에 대해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경선 후보의 책임론을 제기한 것은 `연좌제`가 아니냐는 의견에 반론을 제기했다.
최 의원은 MBN `뉴스M`에 출연해 "연좌제가 아니라 음서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연좌제는 부친의 어떤 행위로 인해 정치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인데 그동안 박 후보는 박 전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많은 덕을 입었다"며 "어려운 시기마다 박 후보를 튼튼하게 받쳐주는 지지기반도 대구 중심 영남권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니까 박후보는 역사적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편할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대위원장을 맡았을 때 일어난 공천 헌금 문제, 공천의 공정성 문제도 공정의 투명성을 강조했던 자기 책임이 아니고 개인비리라고 돌려서 사법적 처리가 끝나야 결론이 난다는 얘기다. 자신의 책임에는 문제될 것이 없는 모양이다.
8월20일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의 뉴스앤뷰 김동현기자와의 인터뷰에 나온 기사를 보자.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 씨는 20일 5년 전 한나라당 경선때 박근혜 후보가 김희숙 여사를 찾아와 사과한 데 대해 "사과라고 볼 수도 없는 사과를 한 것"이라고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장 씨는 이날 불교방송 '고성국의 아침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저희 모친께서는 기왕 만나는 것이니까 진실로 박근혜씨에게 정치를 하고 싶다면은 바른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덕담을 해주셨고. 박근혜씨는 자신의 아버지 시대에 정치적으로 반대에 섰던 분들이 고생을 하셨던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상당히 판에 박힌 그러한 사과를 했다"며 5년전 상황을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어 "그 당시는 박근혜씨가 이명박 지금 대통령하고 경선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장준하 선생님, 저희 아버님의 부인을 찾아서 사과를 한다는 그 장면은, 왜 찾아오느냐에 대해서는 이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죠"라고 박 후보의 당시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는 박 후보에 대해 "박정희의 잔존세력과 이어지는 전두환의 군부 세력들, 이들과 손을 잡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면서 국가에 봉사한다든가, 이런 개인적인 삶을 살게 됐다면 지금 말하는 무슨 연좌제라든가 책임이라든가 이런 것을 추궁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며 "그러나 단지 그 분이 지금 정치를 하겠다고 하고, 또 나아가서 대통령을 하겠다고 하니, 그리고 그 면면을 보게되면 과거의 그 세력들과 같이 손을 잡고, 독버섯같은 그들의 존재가 주변을 둘러싸고 권력을 한 번 다시 가져보려고 한다, 하는 그런 상황에서는 분명히 박근혜 씨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있는 자기의 어떤 의견을 내놔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연좌제의 진실이 무엇인지 '박근혜는 절대 알 수 없는 '제주 4.3 연좌제'에 대해서'아이엠 피터'블로그에서 밝힌 그 내용을 보자.
지금 영화를 누리고 살았던 박근혜 후보가 얘기하는'연좌제'가 무엇인지, 지금 박후보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까? 궁금하지 않다면 대통령후보로서 대한민국 역사인식이 전혀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박후보 아버지가 저지른 연좌제는 어떤 내용이었는지...
여기 오마이뉴스에 실린 박정희와 장준하선생, 두 사람의 인생역정이 대한민국의 역사의 굴곡을 대비하고 있다. 한 사람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민주주의와 조국 독립을, 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역사의 왜곡을 낳게 하고 있다.
나도 그 역사의 속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잊어버린 기억을 되짚는다는 생각에, 고등학교시절 유신반대 대모를 하던 생각이 난다. 그 시절 우리들의 누님과 어린 청춘들은 가난과 배고픈 노동으로 노예생활을 함으로써 지금의 경제 10대 국가가 된 것이지, 박정희 독재권력이 지금의 경제를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 장준하 유골의 '싸인' 지난 1일 검사한 고 장준하 선생의 유골. 오른쪽 귀 뒤쪽 두개골에 원형으로 함몰된 흔적이 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지난해 방송된 <싸인>이라는 SBS 드라마는 법의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소재로 다뤄 인기를 끌었다. 법의학자는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아니라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의사다. 범죄 희생자들에게 남겨진 흔적인 '싸인'(Sign)을 통해 범죄에 숨겨진 '사인'(死因)을 밝혀내는 것이 그들의 본업이다.
그런데 사체가 죽음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보낸다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벌어졌다. 귀 뒤쪽에 둔기에 의한 함몰이 선명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이 공개된 것이다. 그 한 장의 두개골 사진은 37년 동안이나 가려져 있던 타살의 '싸인'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장 선생의 유골을 검사한 이윤성 서울대 의대 교수는 소견서에서 "머리뼈와 골반에는 골절 소견이 있지만 다리나 늑골(갈비뼈)에는 뚜렷한 손상이 없다"며 "(장 선생은) 머리 손상에 의해 사망했으며, 머리뼈와 오른쪽 관골 골절은 둔체(딱딱한 물체)에 의해 손상됐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소견에서 인위적인 가격 뒤에 절벽에서 추락했을 가능성과 강제로 떠밀어서 바닥 근처의 돌에 부딪혔을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았으나 사고사가 아닌 타살에 의한 것임은 부인하지 않았다.
광복군 장교 장준하와 황군 장교 박정희의 삶
▼ 광복군 시절의 장준하 1945년 8월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군 OSS 특수훈련을 마치고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의 어느 사진관에서 찍었다. 오른쪽부터 장준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노능서 선생이다.장준하기념사업회
이 교수는 18일자 <한겨레> 인터뷰에서 "37년이나 지나 유골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가벼운 마음으로 가서 제대로 검사를 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도 선명하게 37년 만에 드러난 '싸인'과 '사인'이 가리키는 곳에는 평생 장 선생과 대척점에 섰던 박정희가 있다.
장준하는 1918년생이고, 박정희는 1917년생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다 갔지만, 삶의 궤적은 정반대였다.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에 파병되었으나 일본군을 탈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를 걸어 광복군에 합류해 광복군 장교가 되었다.
반면에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졸업후 문경 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1940년 4월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이하 만주군관학교)에 2기생으로 입교해 1942년 3월 수석 졸업했다. 박정희는 부상으로 부의(溥儀, 푸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은 졸업생 대표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의 창씨 개명)로서 이렇게 답사를 했다.
▼ 만주군관학교 생도 대표 박정희 <만주일일신문>(42년 3월)에 보도된 만주국 신경 육군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 박정희 생도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나는 오늘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천황 폐하와 부의 황제 폐하께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충성을 다할 것으로 다짐합니다. 나는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백무현, <만화 박정희 1>, 90쪽)
푸의는 일본 관동군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한 뒤 이듬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황제다. 일제는 총독을 파견했던 조선이나 대만과 달리 중국에는 중국인으로 '얼굴마담'을 내세웠다.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친일파로 볼 것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수석 졸업한 박정희는 1942년 일본 육사에 편입-졸업 후 44년 황군(皇軍)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니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
박정희의 혈서 "일본에 '견마(犬馬)의 충성' 다하겠다"
더구나 박정희는 연령 초과로 군관학교 시험에서 탈락하자, 혈서와 함께 입학허가를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에 동봉해 제출하는 등 입학허가를 얻어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공개된 이 '혈서 편지'는 지금도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는데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을 위해 굳건히 결심합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과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 박정희의 '견마의 충성' 혈서 일본에 ‘견마(犬馬)의 충성’과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一死以テ御奉公)을 하겠다는 박정희의 혈서는 당시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에 ‘혈서 군관 지원 -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왼쪽은 황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일본에 '견마(犬馬)의 충성'과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一死以テ御奉公)을 하겠다는 박정희의 혈서는 당시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에도 '혈서 군관 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는데 "29일 치안부 군정사에 조선 경상북도 문경서부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23)이 죽음으로써 봉공하겠다는 혈서가 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당시 군관학교 입학 자격이 16~19세였던 것에 비추어 23살이었던 박정희가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견마의 충성 혈서' 덕분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입학허가를 얻은 박정희는 일본의 기대에 부응해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에 3학년으로 편입해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황군 소위로 임관해 군복을 입고 금의환향하게 된 것이다. 여제자 이순희씨는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증언했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을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중략)…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와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박 선생님을 교사 시절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정운현, <실록 군인 박정희>)
사쿠라를 좋아한 박정희의 성취와 향수
군수·서장·교장은 각각 지방의 행정·치안·교육을 관장한 기관장이다. 황군 장교는 그런 기관장들을 사사로이 불러 모을 만큼 일본 군국주의 통치의 핵심세력이었다. 군국주의 황군 장교로서 박정희의 성취와 그에 대한 향수는 국군 장교 시절은 물론 대통령이 되어서도 두 가지 '코드'로 나타난다. 벚꽃과 일본군 장교복에 대한 '코스프레'가 그것이다.
만주군관학교 졸업생 답사에서 "나는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맹세한 박정희는 실제로도 벚꽃을 무척 좋아했다. 또한 대통령이 되어서는 해방후 이승만 정권 시절에 베어져 나간 벚꽃을 부활시키고 진해, 서울 강변북로에 "벚꽃을 심으라"고 직접 지시했다.
또 서울시 기획관리실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교수에 따르면, 여의도 개발은 전적으로 박 대통령의 뜻대로 이뤄졌고, 국회 주변의 조경도 박 대통령이 직접 신경 썼다. 미국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벚꽃 거리를 본떠 국회가 있는 여의도 윤중제에 벚꽃을 심은 것은 박정희 취향이 반영된 '몰역사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이 한일 100년사에 묻힌 '벚꽃의 비밀'을 추적한 류순열 기자의 결론이다.
▼ 박정희와 국가재건최고회의 5.16 군사쿠데타 며칠 뒤의 장도영(왼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 그러나 장도영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의장에서 해임되고 몇 달 뒤에는 혁명세력에 의해 반혁명 내란음모 혐의로 기소되는 곡절을 겪었다
놀랍게도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부터 4월이면 최고회의 및 정부 요인과 외교 사절을 초청해 청와대에서 벚꽃놀이 행사를 주재했다. 또 대통령 재임 중에는 4월마다 진해공관을 찾아 휴가를 즐기거나 주한 외교사절을 초청해 벚꽃놀이 행사를 가졌다. 1976년 4월 9일 진해 방문 때는 박용범 진해시장에게 "가로수뿐 아니라 산이나 들이나 심을 수 있는 곳에 모두 벚꽃을 심어 진해는 벚꽃의 명소가 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박정희 '벚꽃 사랑'은 부인 육영수를 그리는 1977년 4월 1일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기상하여 공관 후정 산책. 후정 벚꽃 터널을 걸어 본다. 1974년 4월 9일 아침 아내와 같이 마지막으로 거닐던 이 길, 추억의 꽃길을 걸어간다. 낙화가 길을 덮고 있었다…(중략)…매년 봄이면 이 길을 걷는 것이 나의 가장 즐겁고도 감상적인 시간이다."(류순열, <벚꽃의 비밀> 38쪽 재인용)
황군 장교 박정희의 일본 군복 '코스프레'
군국주의 황군 장교로서 박정희의 성취와 향수를 드러낸 또 다른 코드는 뜻밖에도 일본 군복에 대한 '코스프레'다. 다음은 1973년 박정희의 특명을 받아 이른바 윤필용 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강창성(육사 8기) 전 보안사령관의 1991년 회고다.
"계엄선포(1971년 10월 17일) 한 달 전쯤인가.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류순열, <벚꽃의 비밀> 39쪽에서 재인용)
일국의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침략군 군대에 몸담았던 시절의 복장까지 갖춰 입고 '좋았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박정희가 가끔 일본군 장교복 코스프레를 즐겼고, 또 그럴 때면 항상 기분이 좋았다는 것은 그가 '뼛속까지 황군 장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박정희가 선우휘 <조선일보> 주필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 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 광복군과 일본군의 대척점 광복군 장교 시절의 장준하와 일본 황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동시대를 산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은 정반대였다.
청와대에서 벚꽃 놀이를 즐기고 집무실에서 일본 군복 코스프레로 행복감에 젖은 황군 장교 출신 박정희에게 광복군 장교 출신 장준하의 존재는 그 자체가 눈엣가시처럼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며 박정희의 친일 경력을 폭로한 장준하의 일갈은 박정희의 감성과 성취감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떠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영구집권을 꾀한 한국 정치의 암흑기인 1973~75년 무렵에 박정희 최대의 정적이었던 김대중에 대한 도쿄 납치사건과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장준하의 의문사가 연달아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함석헌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어"
김대중과 장준하는 박정희에 맞선 민주화투쟁에서 한 길을 걸었다. 김대중은 장준하가 발행한 <사상계>에 글도 쓰고 재정적으로도 후원했다. 그러나 1971년 대선 때는 장준하가 다른 진영에 가담해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김대중과 장준하 사이에는 약간의 앙금이 있었다. 그러나 긴급조치가 난무하자 장준하는 효율적인 반독재 투쟁을 위해 민주세력의 단일화를 촉구했고, 이를 계기로 1975년 3월 31일 김대중·김영삼·양일동·윤보선 4자회담이 열렸다.
그런데 일련의 야권 통합 논의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에게 단독 회담을 제의하면서 깨졌다. 김영삼은 박정희와의 청와대 회담 후 일체 그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세인들은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김영삼의 입장 변화와 시국 상황에 낙담한 장준하는 1975년 7월말 김대중의 자택을 찾아 "김 선생과 함께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사회를 이루고 싶다"고 밝히고 앙금을 풀었다. 두 사람이 점심을 함께 하며 나눈 대화 내용은 <김대중 자서전>에 이렇게 실려 있다.
"식탁 가득 화기가 넘쳤다. 장 선생은 등산의 묘미를 얘기하며 등산 때문에 건강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그간에 오른 산 이름을 두루 열거했다. 거의 모든 산을 오른 듯했다. 내가 염려되어 한마디 했다.
'그렇게 다니셔도 괜찮겠습니까?'
'설마 놈들이 날 어떻게 하겠소.'
'그래도 혼자서는 절대 다니지 마십시오. 세상이 너무 험합니다.'
그것이 내가 장 선생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의 따뜻한 웃음과 우리 집을 나서는 뒷모습이 선한데,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 계곡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홀로 등산'을 강력하게 만류했어야 하는데, 그리하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김대중 자서전 1>, 348쪽)
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을 확신했던 함석헌 선생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 하나는 죽었어야 했어" 1975년 10월 49재를 맞이해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재야 및 정치권 인사들. 함석헌과 이희호, 김대중의 모습이 보인다. 타살을 확신한 함석헌은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하고 힘을 합쳤기 때문에 박정희 입장에서 김대중과 장준하, 둘 중의 하나는 죽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는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한편, 장준하기념사업회와 유족은 20일 오전 유광언 기념사업회 회장과 장남 장호권씨가 청와대를 직접 방문해 사건의 재조사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낼 예정이다. 장호권씨는 "37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아버지의 유골은 추락사가 아닌 타살의 가능성을 너무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며 재조사와 진상규명에 착수해줄 것을 촉구했다. 1924년생인 김대중은 2009년 8월 18일 눈을 감았다. 박정희 독재에 맞서 싸운 두 사람의 기일은 공교롭게도 각각 8월 17일과 18일이다. == 2012.08,20 인터넷오마이뉴스김당기자 ; 팩트의 위대한 힘을 믿는다. 오마이뉴스정치데스크를 세번 맡았고, 부사장겸 전국부 총괄데스크를 거쳐 현재는 뉴스게릴라본부장(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2012년 4월 3일 아이엠피터 글---
제주 4·3을 말하는자, 국가보안법으로 처단하라'
제주에 살면서 제주 4·3을 말하는 이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금기어이자,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면서, 구속될 수 있는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면 설마?라고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오마이뉴스 노순택
'가족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연좌제라니'제주는 유난히도 조작간첩 사건이 많이 나오기로 유명했습니다. 그것은 4·3 당시 혹독한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도피한 사람이 많았고, 도피한 재일교포와 그 가족을 조작간첩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사례가 '조작간첩 강희철' 사건입니다. '강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지난 75년 부친이 있는 일본 오사카로 밀항했다가 81년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한국으로 송환됐다. 강씨는 부산 보안수사대에서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86년 4월28일 경찰에 연행돼 85일 동안 불법감금된 상태에서 수사를 받은 뒤 관공서와 기관, 학교 등의 위치를 북한에 알렸다는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강씨는 12년 동안 복역한 뒤 지난 98년 8·15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 (한겨레 신문 2006년)
제주지방법원은 2008년 재심을 통해 강희철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연좌제는 예전 역모를 처벌하기 위해 삼족을 멸한다는 유래에서 시작된 제도입니다. 사실 연좌제는 1894년 대한제국의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으나, 공식,비공식적으로 연좌제는 계속 대한민국 사회에 통용됐습니다.
2000년 제주 4·3 도민연대는 '연좌제 피해관련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 놀랍게도 응답자의 86%가 연좌제 때문에 피해를 봤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신원조회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의 감시, 사관학교와 공무원 임용시험 등에 피해를 겪었다는 이 설문 조사가 2000년까지 나왔던 결과는 제주 4·3이 얼마나 제주도민들을 족쇄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녔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공동체가 멜싸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말이야. 이념적인 건 문제가 아니야. 거기에 왜 붉은 색을 칠하려고 해? 공동체가 무너지고, 누이가 능욕당하고, 재산이 약탈당하고,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친구가 고문당하고, 씨멸족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항쟁이란 당연한 거야.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항복하고 굴복해야 하나?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싸우는 게 인간이란 거지. "(현기영 작가) 노무현 대통령은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하며,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라고 말했습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위원장은 제주도민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할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비가 이승만처럼 독재권력을 휘둘러 자신의 권좌를 지켰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박정희 군사정권이 증거인멸을 위해 파괴한 백조일손지지 묘비의 파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