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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러지다>
어두컴컴한 방안. 불 켤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릎을 꿇었다. 싸늘하게 굳어버린 내 얼굴에 갑자
기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지금 그가 뱉은 충격적인 말은 날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믿게 하다가, 그 뒤엔 장난으로 느껴졌
다.
“거짓말이지?”
[…….]
반응을 보려고, 내 사랑에 대한 확인을 하려고, 그런 거짓말 하는 거지? 맞잖아. 너 가끔 그런 장난 했어. 친구들이랑 내기해
서 날 화 나게 했고…. 지금은 봐줄 테니까 거짓말이라고 말해.
“거짓말이지…?”
[…….]
대답이 없어. 너 왜 대답이 없어. 평소엔 네가 먼저 장난스럽게 ‘뻥이야!’라고 외치곤 전화를 끊어버렸잖아. 근데 왜 아무 말
도 없어. 왜.
“야, 대답해. 나 화나려고 해.”
점차 자신감을 잃은 내 목소리가 나조차도 끔찍했다. 내 목소리 떨려 나와서 자꾸 네가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아.
[지원아….]
“그렇게 대답 하지 마.”
그런 말 하지 마. 거짓말이라고 해…. 지금이라도….
[거짓말 아니야….]
순간 끔찍할 정도로 세상이 원망스러워졌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 한사람인지, 왜 하필 나인지 묻고 싶었다. 가득
고여 있던 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입을 막고 휴대 전화를 손에서 뗀 채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왜 하필 나일까….]
멀리 떨어진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진우의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산소를 계속 들이마시고
있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나는 가슴을 쳤다. 먹먹해진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몇 천 번씩 생각했는데…. 그런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거잖아.]
애써 태연한 척 하는 진우의 떨리는 음성. 이렇게 의젓한 넌데, 이렇게 날 사랑해주는 넌데, 난 벌써 이별을 결심했다. 잔인
하고 이기적인 나는 벌써 너에게서 조금씩 멀어진다.
“헤어져.”
눈물을 삼키고 말했다. 그래도 떨려 나오는 목소리가 너만큼이나 불쌍해. 나 지금 죽을 것 같아. 오죽하면 공기가 날 눌러 죽
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헤어져.”
쐐기를 박는 내 말에 수화기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이건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 부셔지는 소리가 났다. 내 말에
형편없이 넘어졌을 네가 떠올라 다시 눈물이 흐른다. 그래도 이기적인 나는 단 하나 뿐이다.
“미안.”
미안해, 이진우.
* * * * * * * * * * * * * * * * * * * * * * * *
일 년을 빨랐다. 나는 모든 걸 빠르게 정리해 나갔다. 사진은 태워버리고 기억은 지워나갔다. 시간은 급류라도 탄 듯 자꾸 자
꾸 흘러만 갔다. 그래도 지나간 시간이 돌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시 선택해야 할 일이 없게.
가끔 이진우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너 벌 받을 거야’라고…. 나는 충분히 벌을 받았다. 사진은 타면서 내 마음
까지 태워갔다. 모두 타 버린 사진은 재만이 남았다. 갈기갈기 찢어진 내 마음을 훨훨 날려 보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사랑에 목숨 거는 여자’였었다. 과거시제를 쓴 이유는 내가 끝내 이진우를 버린 것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
금의 죄책감이 남아서, 나는 나 역시 다시는 사랑하지 못하게 모든 걸 태워서 날렸다. 그게 이기주의자인 나에 대한 나의 보
복이었다.
“야, 뭐해.”
“어, 어?”
“아, 자는 줄 알았네.”
대학교 와서 사귄 유일한 친구, 희영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내가 이진우와 헤어진 걸 잘했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
람이었다.
“설마…. 걸어가면서 자겠어?”
“그건 그래.”
또한 내가 일상으로 돌아오는데 커다란 힘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지금도 희영이는 내가 반 년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누누이 일깨워 주며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일러 준다.
“여-.”
장난스럽게 농담을 하며 지나가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날 부른다. 순간 뒷덜미가 잡힌 것처럼 뻐근해져 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시하면 되는데 내가 아닌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면 되는데 아직도 나는 아직도 그와 관
련된 모든 것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잘 지내나 보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그는 이진우의 친구였다. 김종훈.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 친구로 보이는 여자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여자 친구를 힐끔 봐주었다. 그녀는 내가 라이벌이라도 되는 듯 경계어린
목소리로 ‘누구야?’라고 묻고 있었다. 떨리는 입술을 떼어 말했다.
“그러는 너도 잘 지내나 보네.”
“이진우 알지? 걔 옛날 여자 친구야.”
내 말은 잘근잘근 씹은 채 여자 친구에게 말하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김종훈의 여자 친구는 신기한 듯 나를 쳐
다보았다. 왜,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데?
“이진우는 아직도 너 때문에 미쳐 사는데 넌 잘 지내나 보구나.”
비꼬는 말투였다. 분명히. 약간 화가 솟아올랐다. 그래도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가장 나쁜 년은 바로 나였다.
나대신 희영이가 한 발 내밀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친구가 그 지경이 됐는데 벌써 몇 번째 여자 친구를 갈아 치우냐?”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여자 친구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진짜야?’라고.
“거짓말이야, 원래 쟤나 쟤 친구들은 거짓말 입에 달고 살아.”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희영이가 어이없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렸다. 더 어이없는 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그의 여자 친구였다.
“저기요, 잘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 왜 거짓말을 하세요? 종훈이가 바람둥인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아시냐 구요.”
“내버려둬, 쟤네 원래 저래.”
그들은 마치 우릴 망부석처럼 세워놓고 삼류 소설을 쓰고 있었다. 이러다가 쓰레기 삼류 소설에 휘말릴까봐 나는 희영이의
팔뚝을 잡고 이끌었다.
“야, 그냥 가냐?”
그의 목소리가 올가미처럼 날 붙잡았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덜덜 떨리는 입으로 내뱉었다.
“제발, 그 입 좀 닥쳐줄래.”
“이진우는 아직도 너 사랑한다더라. 미친 놈. 얼마 전에 가봤더니 시각장애 새끼가 너한테 편지 쓴다고 병신처럼 연필 하나
제대로 못 쥐고 덜덜 떨고 있더라? 말이 되냐? 그 새끼가 고등학교 때 전교 일등이었다는 게….”
그는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발목이 잡힌 듯 움직일 수 없었던 내가 그의 멱살을 잡아 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나
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마치 난 그의 멱살을 잡고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손에는 힘조차 쥐어지지 않았다.
그가 내 머리 위에서 날 보며 비웃는다.
“너, 함부로 말하지 마. 너 같은 새끼가 그딴 말 할 자격 없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싸움과 불구경이라면 환장하는 사람들이 싸움이 난 줄 알고 모여 든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보
이지 않았다. 벌써 눈에 눈물이 고여 버렸다.
욕이라도 내뱉고 싶었다. 잊었다고, 다 잊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병신같이 잊은 게 아니라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인증해 버린 것이다. 날 보던 김종훈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잠시 가만히 있던 김종훈의 여자 친구가 날 떼어냈다. 힘껏 노려보면서.
“뭐하는 짓이에요!”
나는 저항 한 번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이래서, 이래서 김종훈을 보면 늘 참았던 건데. 꾹꾹 눌러 참으며 이 시간이 지나가
기를 기다렸던 건데, 제기랄스럽게도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병신이 된 채 길거리에 나자빠져 버렸다.
“왜 남의 남자 친구 멱살을 맘대로 잡아요? 당신이 뭔데?”
그녀의 쫑알거리는 목소리는 하이 톤이라 듣기가 거북했다. 부츠를 신은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전혀 귀여워 보이
지는 않았다.
“소영아.”
김종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또 그러려고. 나자빠진 나를 비웃으며 그렇게 우뚝 서서 삼류 소설이나 써대려고? 맘
대로 해. 나도 지쳤어.
“…미안한데, 먼저 가있어.”
충격적이었다. 그는 바람둥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매너 있는 남자였다. 그런데, 이런 대낮에 사람들이 모여든 이곳에서 여자
친구에게 먼저 가있으라니….
예상대로 매우 기분이 나쁜 듯 소영이라 불리는 그녀는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나보고 가라고?”
“먼저 가있어. 갈게.”
더 놀라운 건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김종훈이었다. 희영이가 어이없어 하며 나를 일으켰다.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보고 가라고? 저 여자가 아니라?”
“가있어.”
“지금 가면, 나 너 얼굴 안 봐.”
김종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김종훈을 쳐다보던 그녀가 그의 표정을 대답으로 들었는지 미간을 잔뜩
좁히며 멀어져 갔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시간이 재미없던 건지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져갔다.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
던 김종훈이 말을 꺼냈다.
“얘기 좀 하자.”
“…….”
몸이 후들 후들 떨렸다. 나는 경계어린 눈으로 김종훈을 노려보았다. 김종훈이 나에게 한 행동을 보면 난 도저히 용서가 되
지 않았다. 6개월 전부터 날 죽이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내가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괴롭혔었다.
내가 이진우와 사귀던 평범했던 시절 그는 진우의 친구였지만 또한 내 친구이기도 했다. 곧잘 나를 형수라고 부르며 장난도
많이 쳤었다. 그것도, 헤어진 이후로 끝이지만.
“중요한 얘기야.”
“네가 이지원한테 할 중요한 얘기가 있냐?”
희영이가 대신 부딪혔다. 김종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진우 얘기야.”
다시 숨이 막혀 온다. 왜, 나는 왜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에 숨이 막혀야 하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이야. 니 얼굴 보는 거.”
“……뭐?”
“너 내 얘기 들어. 안 그러면 후회해.”
“…….”
잊고 살 거라고 생각했다. 일 년이란 시간에 나는 이진우가 묻힐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여전히 이진우는 내 안에 살
아서 자꾸 날 잠식시켰다. 울음이 터져 나올까봐 나는 힘겹게 아주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마지막이니까. 널
잊지 못하는 것도, 내가 이렇게 힘겹게 하루하루 사는 것도 오늘로서 마지막이니까.
걱정스럽게 날 쳐다보는 희영이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내 발로 지옥으로 걸어들어 가듯 김종훈을 따라 커피전문점으로 들
어갔다. 김종훈이 날 힐끔 쳐다보았다.
진우와 자주 왔던 곳이었다. 머리가 지끈 거렸다.
“앉아.”
의자에 앉았다. 김종훈은 의도적으로 나와 이진우가 자주 앉았던 창가 쪽에 자리했다. 까만 눈이 날 향했다. 나는 의자에 등
을 푹 기대고 말했다.
“말해.”
“…….”
내 말에 김종훈이 테이블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침묵이 테이블을 휘감았다. 자꾸 추워져서 나는 겉옷을 여몄다.
“…너 생각나? 너랑 이진우 오토바이 사고 났던 날.”
“…….”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엄마와 크게 싸운 뒤 나는 이진우에게 오토바이를 태워달라고 했었다. 평소처럼 이진우는 자신의 머
리가 아닌 내 머리에 헬멧을 씌워 주었고, 우린 밤거리를 달렸었다. 워낙 복잡한 곳이라 그런지 사거리에서 정면으로 다가
오는 트럭을 피하려다 우리는 전봇대에 오토바이를 들이 받았었다.
그 때 생긴 흉터가 아직도 팔뚝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난 머리는 다치지 않았었다. 이진우가 씌워준 헬멧 때문에. 하지만 진
우는 머리 쪽을 심하게 부딪쳤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나는 몸서리를 쳤다.
“그때 이진우 머리 깨졌잖아.”
“…….”
“그 새끼 회복 속도 빨라서 금방 낳았었지.”
“…….”
“근데 아니야.”
“뭐……?”
앞뒤가 안 맞는 그의 말에 난 눈살을 찌푸렸다. 똑똑히 들었었다. 그것도 의사선생님한테…. 깨끗이 낳았다면서 운 좋은 줄
알라고 말하셨는데. 그제 서야 겨우 죄책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안 낳았다니.
“아직도 머리가 아프데…?”
“부딪히면서 눈에 있는 망막이 훼손됐데. 시신경 어쩌고 했는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중요한 건 오토바이 사고와 관
련 됐다는 거지.”
“무슨…소리야. 퇴원 후에도 멀쩡했잖아!!”
“천천히…. 천천히 잃어 간 거야. 니가 아냐. 천천히 시력을 잃어가는 기분.”
“…….”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럴 리가 없어. 눈을 다쳤다곤 생각도 못했는데….
“퇴원 후에 다 낳은 것도 아닌데 너랑 여행가고 놀러가고 그랬던 거 기억 나냐?”
“…….”
“그 새끼, 하나라도 더 기억하려고 그런 거야. 잃기 전에 너 웃는 얼굴 실컷 봐두려고. 추억 쌓아 놓고 그걸로 살아가려고.”
무너져 버렸다. 심드렁하게 말하는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이 내 심장에 꽂혔다. 주르륵 보이지 않은 피가 흐른다. 멍청
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쳐다보며 다시 보이지 않은 화살을 만들어 내 심장에 꽂는다.
“그 새끼, 니가 헤어지자고 말 안했어도 헤어질 생각이었어. 아냐?”
벌써 볼이 젖어 있었다. 이 상황이, 이 모든 게 끔찍해졌다. 거짓말 같아서, 너무 거짓말 같아서 볼이라도 세게 꼬집고 현실
로 돌아가고 싶었다.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전화… 해…줘. 전화….”
띄엄띄엄 열 때마다 눈물이 차오르는 입을 열어 메이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냉정한 눈으로 날 보던 김종훈이 말했다.
“죽었어.”
“……뭐…?”
순식간에 눈물이 멎었다. 대신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쇼크에 빠졌다.
“죽었다고.”
“…….”
“그거 아냐.”
“…….”
“너는 이진우 없이 살아도, 이진우는 너 없이 못살아.”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결론적으론 내가 죽인 거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김
종훈의 멱살을 잡으면서 나는 외쳤다. 턱 끝으로 눈물이 떨어져서 김종훈의 바지가 젖어가고 있었다.
“언제…. 언제!!! 언제!!!”
“육 개월 전.”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서 였어…? 니가 날 괴롭힌 이유. 그거였어? 나는 버리고 있었는데 천천히 지우고 있었는데 이진
우는 끝까지 날 가슴에 묻고 죽어서? 그래서 내가 그렇게 못 견딜 정도로 괴롭히고 싶었던 거였어…?
“이제 실감 나냐?”
“…….”
더 이상 말할 힘조차 없었다. 입을 열 때마다 눈물이 차올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진우가 너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제 서야 실감이 나냐고.”
“왜 이제 말해…. 왜!!”
입을 열자 눈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엉성한 발음으로 외쳤다. 바보 멍청이였다. 난…. 난.
“내가 아까, 그 새끼가 편지 썼다고 말했지.”
“…….”
김종훈이 주머니에서 잔뜩 구겨진 편지를 꺼냈다.
“전해 달라는데, 니가 얄미워서 그냥 주긴 싫더라. 그래서 장난 좀 쳤지.”
비틀린 그의 웃음엔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 역시 진우를 가슴에 묻고 있었다. 늘 버리려고, 그를 지워 내려고 했던 건 나 혼
자였다. 내가 진우를 잊어가고 있는 시간 동안, 진우는 가슴에 날 쌓아 올리고 있었다. 희미해지는 세상 속에서도 오로지 날
찾았을 진우인데 나는 그렇게 처참하게 버렸다.
구겨진 편지를 떨리는 손으로 펴들었다. 눈물이 떨어져서 편지를 적셨다. 겹쳐진 글씨, 평소 글씨 잘 쓰기로 소문난 이진우
는 어디가고 초등학교 3학년 글씨체가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혹여나 틀릴까봐 크게, 아주 크게 그 큰 종이를 단 여섯 글자
가 메우고 있었다.
[사랑해 이지원]
“연필 하나 못 잡는데, 그거 얼마나 웃겼는 줄 아냐? 그거 여섯 글자 쓰려고 꼬박 삼일은 연필만 잡고 있더라.”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렇게 하면 김종훈의 목소리가 희미해 질 거라고 믿었다. 편지를 가슴에 묻었다. 나는 편지가 이진
우라도 되는 것처럼 힘껏 끌어안았다. 그가 나를 가슴에 묻었던 것처럼….
* * * * * * * * * * * * * * * * * * * * * * * *
그거 알아? 이진우 너랑 나랑 닮은 거 엄청 많아. 우린 고등학교 삼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또 같은 천칭자리고, 심지어 스펠
링도 같아. 해산물 싫어하는 것도 똑같고, 오토바이 타는 거 좋아하는 것도 똑같아. 영화관에서 멜로 영화 보면서 우는 사람
도 싫어해. 우리 엄청 비슷해.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사귄 시간이 긴 만큼 우린 추억도 많았다. 처음부터 닮았던 것도 있었지만 사귀는 기간 동안 닮아
간 것이 훨씬 많았다. 그건, 지금 생각해보면 진우가 내 식성을, 내 성격을, 내 모든 걸 맞춰줘서 였다. 멍청하게 모르고 있었
지만….
편지가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 이걸 쓰려고 한참 동안이나 애를 먹었을 진우를 생각했
다. 나는 내 이름 석 자 위에 크게 겹쳐 썼다.
[사랑해 이진우]
미안해, 이진우.
정말 미안해. 내가 나쁜 년이라서, 이것 밖에 못해서 너무 미안해.
먹먹해진 가슴이 자꾸 아파왔다. 끝까지 나는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자꾸 욕심이 생길까봐 나는 책상위에 놓인 약통을
들었다.
쏟아져 나온 약들은 날 물끄러미 보며 말하고 있었다. ‘넌 지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거야.’라고.
“알아.”
나도 알아. 너무 잘 알아. 근데, 있잖아. 나 때문에 혼자 외롭게 가버린 걔를 내버려 둘 수가 없어.
“괜찮아.”
괜찮아. 난 괜찮아. 수면제 두 통을 탈탈 털어 손에 쥐고 나는 나에게 위로를 했다. ‘벌 받을 거야.’라고 다시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진우가 날 벌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물끄러미 그것들을 쳐다보다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에 털어 넣었다. 씹지도 않은 채 꿀꺽 꿀꺽 삼켜버렸다.
죽음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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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남자의 하루하루를 다큐멘터리로 만든 프로그램을 봤어요. 라면하나 제대로 못 끓이고
계란 하나 제대로 못 넣어도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닫더라구요. 그러면서 실수할 때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이
나 자책을 하고 있더라구요. 옛날 여자 친구와는 시력을 잃음과 동시에 헤어졌구요. 미래도 잃었어요. 꿈도 잃었구요.
자신의 남자, 혹은 여자친구가 시력을 잃게 된다면…. 그런데 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 됬을까, 상상하다가 단편으로 써봤
어요. 비록 비극으로 끝났지만…. 읽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쓰려고 많이 애썼어요.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 여자가 너무 이기적이엇네요.... 슬퍼요 ㅠㅠ
저도 그 다큐멘터리봣어요 ㅠㅠㅠㅠ엄청슬펏는데 양부모님한테 파양까지당해서 엄청슬펏다능 ㅠㅠㅠ눈물글썽글썽 ㅠㅠㅠ여자가밉긴하지만 그래도 ㅠㅠㅠㅠ슬퍼용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