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한 마부에게라도 일찍이 이놈 저놈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人不可以口業取快於一時,子雖予僕御之賤,未嘗以這漢那漢呼之也
- 정조-
<편지 속 정조의 표현들>
“이 사람은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창원부사를 지낸 문신 서영보에게)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이 경박하고 어지러워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학자이자 문신인 김매순에게)
“경박해서 동서도 분간 못하면서 선배들에게 주둥아리를 놀리는 놈” (김이영을 비판하며)
“황인기와 김이수가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
“늙고 힘없는” (문신 서매수에게)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하고 졸렬한” (청주목사 김의순에게)
“약하고 물러터진” (삼사와 이조의 청요직을 두루 지낸 이노춘에게)
“나는 경을 이처럼 격의 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조심을 하지 않는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 매양 입조심하지 않으니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라 하겠다. 너무도 답답하다.” (46세인 정조가 67세 노인인 우의정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에서)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서신첩인 《정조어찰첩》을 보면 '학자군주'답지 않게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자유자재로 욕설과 막말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는데,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구상유취라는 사자성어에서 따온 욕설이다) 사람 꼴도 못 갖춘 새퀴랑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진이 감히 그 주둥아리(의역이 아니다. 원문에 쓴 글자도 새부리 훼(喙)자를 썼다) 를 놀린다."라거나,
"대신 ○○○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 나서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 "호로자식"이라든지. 어전 회의 중에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거나 맘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면 바로 욕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다만 정조가 성군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자기 기분이 틀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신하들의 유배 등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
실제로 당하관 대신 중 한 명이
"전하의 업무 처리 방식은 매우 글러먹으셨는데, 이건 전하의 급한 성질머리 때문으로, 요즘 옥체가 자주 편찮으신 것도 그 때문인 줄 아뢰오"란 식의 내용의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상당히 무례한 내용의 상소였고, 중신들도 중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으나 정조는 끝내 그 신하를 용서하고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어떤 편지에는
'아놔. 내가 새벽 세시까지 잠 못자고 이러고 있다.'란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웃음소리 '껄껄'을 뜻한다.(중국에서는 呵의 발음이 ke라고 한다 크어, 크 정도로 발음이 된다. 발음때문에 현대중국어에서도 웃길때 자주쓰는 말이다)요즘으로 치면 "ㅋㅋ"나 다를 바 없는 표현. 이런 걸 보면 초성체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각종 기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냐"며 신하들을 까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는 점. 실제로 정조는 "경들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경연을 폐지하면서, 임금 자신이 중하급 관리를 직접 교육해서 발굴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한다. 또한 실록에 보면 신하들에게 "공부 좀 하쇼"같은 잔소리 멘트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단한 독서광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사관이나 승지들이 적절한 인용구를 못 찾아 헤매는 경우가 있으면 정조는 "어느 책 몇 쪽 몇 번째 줄에 뭐라 되어있는데, 이는 적절치 못한 인용이다. 어느 책의 몇 쪽에 몇 번째 줄에 이렇게 되어있으니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걸 그대로 옮겨적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나중에 신하들이 왕의 말을 믿지 못하고 크로스체킹을 할 겸 직접 원문을 찾아봤는데, 왕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이런 사례는 서애 유성룡이나 율곡 이이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정조가 다른 업무로도 하루 종일 바쁜 왕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근본적으로 조선시대 왕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왕이 모든 경서를 달달달 외우고 있었던 인물이 정조다.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정조는 자신이 그 책을 암송할 때까지 지독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점만을 보면 정조가 공부벌레로만 보이지만, 찾아보면 대단한 먼치킨이다. 세손 시절부터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를 익혀서 뛰어난 무예실력을 갖추었다.
활 솜씨도 대단히 훌륭해서 글자 그대로 '백발백중'. 화살 50발을 쏘면 48발, 49발씩 맞히고 나머지 한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군주는 스스로의 재주를 자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곤봉에 놓고 쏘아 10발을 쏘아 모두 명중시키기도 했다. 세손 때 쏘고는 즉위 후 16년간이나 놓았는데도 50발 중 41발을 맞히었고 한번 49발을 맞힌 이후로는 어김없이 49발을 맞혔다.
자상한 것만은 아니어서 성질이 불같았다. 이 불같은 성격이 엄친아적인 능력과 결합되면서 말빨(한지워리어...)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조 역대 국왕 중 언쟁 능력은 극강급.
정조와 논쟁 한번 벌였다가 유체이탈을 제대로 경험한 조정 중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것에 따르면 욕도 매우 찰지게 잘해서 주위 신하가 말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즉위 직후 치뤄진 신하들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빽으로 급제한 신하들의 답안지(처음에는 심지어 백지였고 이후에는 말도 안되는 삼행시였다고 한다)를 전국 관아에 뿌려서 개망신을 주었다.
역시 말빨 1인자. 이때가 정조의 춘추 스물넷이다.(정조가 즉위하던 해의 춘추이다)
다만 정조만 유난히 뛰어난 키배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물고 늘어지면서 반드시 이기는 것으로는 태종이 조선시대 최강급이었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으로 유명한 세종 역시 말년에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거침없이 상대방을 갈구는 것으로 유명했다. 거기에 영조는 실록에 신하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라는 말이 여러 번 적힌 임금이다. 특히 숙종, 경종, 영조 모두 화술에 능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쯤되면 유전.
나중에 나이 들고서는 좀 더 쪼잔해져서 자기 정책을 공개적으로 깐 어느 선비를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에 임명시키면서 대놓고 "니 주제에 그런 중임을 할 수 있겠니?"라고 조롱했다.
이 글만 보면 정조는 욕쟁이 임금님?? 싶지만 따뜻한 겨울이 계속돼 얼음이 얼지 않자 “과인이 모두 부덕한 탓이고,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하고 “제주 백성들의 전복 채취하는 힘겨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전복 바치기를 전면 금한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끔찍하게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이기도 했다
첫댓글 로설 남주 그자체
와 독설ㅋㅋㅋㅋ
뭔가 재수없닼ㅋㅋㅋㅋㅋㅋㅋㅋ참나!!
화살 50발중 49발 명중이면 이 재주자랑 끝났구만 1발 남긴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정조대왕...캐릭터 웹소설 남주 재질...
쳇 반박불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정조는 진짜 완벽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