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장생(金長生)
27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1548∼1631) 84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현, 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정릉동제(貞陵洞第)에서 출생,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이간공(夷簡公) 영(瑛)의 딸이다.
1557년(명종 12) 열 살의 어린 나이로 구봉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할 때 행동이 무게가 있고 말이나 웃음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식자들은 장차 덕성을 갖춘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말했다. 장성하여 1567년(명종 23)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宗匠)이오, 예학(禮學)의 태두(泰斗)가 되었다.
1575년(선조 9) 아버지 황강공(黃岡公)을 따라 관서지방(평양)에 갔었으나 언제나 조행이 방정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1578년(선조 1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을 배수하였고 1581년(선조 15) 변무사(辨誣使)로 중국에 가는 아버지 황강공을 돈녕부 참봉의 관직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황강공의 별세로 복제기간 효성이 지극하였다. 1584년(선조 18) 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병으로 사임하였는데 도리어 평시서 봉사로 승진되었고 1590년(선조 26)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되고 5월에 장자 은(?)이 왜병에게 해를 입고 서제(庶弟) 연손(燕孫)이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하는 등 불행이 겹쳤다. 1596년(선조 30) 정산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연산 향사(鄕舍)로 돌아왔는데 12월에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1) 정유재란에 조정에서 명나라 원병에게 군량을 호남에서 조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니, 이 일을 완수하고 겨울에 해서(海西: 黃海道)로 돌아와 문생과 함께 강송을 하던 중 12월에 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598년(선조 32) 군자감 첨정, 호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가을에 「근사록해의서(近思錄解疑)」1권을 저술했다. 9월에 남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이듬해 정월에 양근군수, 2월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치 않았다. 얼마 후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어 사양하는 것이 미안하므로 마침내 취임했고 6월에 안성군수가 되었고 9월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1601년(선조 35) 조정에서 주역의 구결(口訣)을 교정하는 일로 부름을 받아 종친부 전부(典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직무를 수행치 못했던 바 영의정 이항복(李恒福0의 천거로 염금리(廉謹吏)로 초선(抄選)되었다. 이듬해 봄에 정인홍이 권력을 잡자 선비들을 탄압하니,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에 내려와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도를 강의했다. 1603년(선조 37) 익산군수로 임명되고 이듬해 10월에 사임하였다. 1609년(광해 2) 익위에 임명되어으나 나가지 않고 8월에 회양(淮陽)부사를 제수받고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못하고 11월에 부임하였다. 1610년(광해 3) 10월에 회양은 북방의 요충지대이기 때문에 무인(武人)으로 임명하는 것이 적합하므로 철원부사로 체임(遞任)되었다. 1613년(광해 6) 서제 경손(慶孫)과 평손(平孫)이 계축화옥(癸丑禍獄)에 연루되어 옥사하므로 이를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나 10년간을 연산에서 은거하며 경서와 고훈(古訓)을 잠심탐독하고 후진 학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고 1618년(광해 11)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을 완성하였으며, 1623년(인조 1) 3월에 인조반정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니, 상소하여 늙고 병이 있음을 들어 사양하고 반정의 원훈들에게 「군의 덕을 도와서 잘 인도하고..... 조정을 잘 보전하며.... 」라는 글을 보내고 도한 정국삼장(靖國三將)의 과오를 밟지 말도록 충고하였다. 또 경연에서 임금의 위로 말씀이 간절하므로 차문(箚文)을 올려 제왕의 학문하는 길을 아뢰니, 기꺼이 받아드리고 곧 사재감 첨정으로 체임시키니 경연의 관원들의 건의에 따라 원자(元子)를 보양하고 유생을 가르치라고 성균사업(成均司業)을 설치하였다. 10월에 거듭 상소하여 사직하였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 어가를 맞이하고 난리가 평정된 후 임금의 수례를 호종하고 서울로 돌아와 상의원정에 임명되고 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어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퇴하고저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와 열세가지 일을 진주(陳奏)하였다.
8월에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사직하고 10월에 왕명으로 입궐하여 강의를 드렸다. 이듬해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동지중추부사를 배수하였고 1626년에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건립하였다. 이듬해 정월, 정묘호란에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되어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양호지역에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4월에 마침내 적이 물러가니 호소사의 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9월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치 않았고 1629년(인조 7) 윤 4월에 왕이 「마차를 타고 오라」하교 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경은 이 나라의 대로요 덕행이 뛰어나니....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노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하였으나 글을 올려 정중히 사양했다. 마침 1630년(인조 8) 4월, 83세 때 노인을 우대하는 식전이 있어 가의대부에 올랐다.
이와같이 천자가 돈후하여 자연히 도에 가깝고 뜻을 세워 대현에게 친히 배웠고 입지가 전일(專一)하여 약관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덕기(德器)가 혼연히 이루어 안면(顔面)에 나타남으로 선비들이 성덕군자(成德君子)라 일컸었다. 문하에는 우암(尤菴) 송시열,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등을 비롯한 여러 유현을 배출하여 기호(畿湖)학파를 이루었다. 저술을 일삼지 않고 글을 읽다가 얻은 것이 있으면 기록하여 경서(經書) 8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과 서소잡록략(書疏雜錄略) 천(千)편과 첨주가례집람(添註家禮輯覽) 3권이 있고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등을 저술하여 세상에 배포하였는데 지금은 이를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으로 집대성하였다. 1631년(인조 9) 5월에 병이 났으나 요양하지 않고 매일같이 문인들과 강론하다가 8월 3일 서거하니, 향년이 84세라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고 세자도 강경(講經)을 폐하였다. 이때 문도(門徒)로서 복제(服制)를 갖춘분이 수백이고 장일(葬日)에 모인 사람이 수천이었다. 이해 11월에 진잠현 성북리에 안장하였고 1636년(인조 14) 조정의 공의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41년(인조 19) 1657년(효종 9)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며, 1717년(숙종 44) 문묘(文廟)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이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沙溪全書, 神道碑文)
1.저 서
저서에 『사계유고(沙溪遺稿)』·『사계전서(沙溪全書)』가 있다.
2.기 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 10여 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1.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김계휘(金繼輝)
# 전라도(全羅道) 나주(羅州)
*월정서원(月井書院)
현종갑술건 기유액(顯宗甲戌建 己酉額).
제향. 박 순(호사암 영의정 시문충 본충주). 김계휘(호황강 대사헌 본광산). 심의겸(호손재 예참 청양군 본청송).
祭享. 朴 淳(號思菴 領議政 諡文忠 本忠州). 金繼輝(號黃岡 大司憲 本光山). 沈義謙(號巽齋 禮參 靑陽君 本靑松).
2. 김계휘(金繼輝) 부(父)
※ 沙溪先生全書 (古 810.819 김71걁)
金長生 (1548∼1631) ; 字 希元, 湖 沙溪, 本貫 光山.
木板本. - [發行事項不明].
零本1冊(全51卷26冊) ; 31.7x20.7cm.
四周雙邊, 半匡 ; 20.6x15.3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向黑魚尾.
조선 중기의 학자인 김장생의 시문집이다. 김장생은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송익필(宋翼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78(선조 11)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육품직(六品職)에 오르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고 유성룡의 천거로 종친부(宗親府) 전부가 되었다. 1602년 청백리에 녹선, 1609(광해군 1)년 회양(淮陽),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신문(訊問)을 받았으나 무혐의로 누명을 벗고 관직을 사퇴, 연산(連山)에 은둔하여 학문에 전심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령에 복직, 사업(司業), 상의원정을 거쳐 이듬해 집의, 공조참의, 부호군을 지내고 다시 사퇴, 낙향했다가 특명으로 162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군량미 조달에 힘썼으며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교육에 전심했다. 송익필의 문하에서 예학(禮學)을 전수 받고 후에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禮學派)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하에 송시열, 송준길 등 유학자를 배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1688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連山)의 둔암서원(遯巖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그의 유문은 본래 《사계유고(沙溪遺稿)》로 시문을 주로 한 문집이었으나 저자 사후에 문인 송시열 등이 유고를 모아 편찬한 것인데, 그 후 1685(숙종 11)년에 사계선생유고(沙溪先生遺稿)의 원고 10권, 부록 3권,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권 합계(合啓) 14권 6책이 열람을 위해 상진(上進)되었고, 1687년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간행되었다. 이 후 1922년에 후손들이 이 구본(舊本)에 저자의 학문에 관한 여러 저술을 더하고 부록을 증보하여 《율곡전서(栗谷全書)》의 체제에 의방(依倣)하여 편차 출간하였다. 우리대학 【一般古書】에 零本 1책이 수장되어 있다. 본서에 수록된 시(詩)는 가야산봉윤정경(伽倻山逢尹正卿), 재유가야산(再遊伽倻山), 만최여윤명용(輓崔汝允命龍) 3수뿐이다. 소차장계(疏箚狀啓)의 문장은 순통(順通), 간독(懇篤)하다. 「환향후진소회소(還鄕後陳所懷疏)」는 80에 가까운 노령에 바친 것으로 흉년에 조병부서(調兵赴西)하고 징포자송(徵布資送)하는 일이 폭거임을 조열(條列)하고 장정을 선발해서 그 수효를 삭감하여 어적(禦敵)과 내궤방지(內潰防止)의 실효를 거둘 것을 건의한 것이다. 「사집의잉진십삼사소(辭執義仍陳十三事疏)」는 1624(인조 2)년에 바친 것으로, 진술(陳述)한 13사(事)는 1)입대본(立大本), 2)회구업(恢舊業), 3)존홍범(尊洪範), 4)강소학(講小學), 5)진성학(盡聖學), 6)경사전(敬祀典), 7)친구족(親九族), 8)체군신(體群臣), 9)친청정(親聽政), 10)혁민폐(革民弊), 11)파선혜청(罷宣惠廳), 12)수군정(修軍政), 13)엄금아(嚴禁衙)이다. 「사공조참의겸진소회소(辭工曹參議兼陳所懷疏)는 역시 1624년에 바친 것으로 내노(內奴)가 민간에서 작폐(作弊)하는 일에 대처하는 인조의 태도를 간(諫)한 것이다.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는 서성(徐暉), 정엽(鄭曄), 유순익(柳舜翼), 심종직(沈宗直) 4인과의 연명상소로 그의 은사 송익필(宋翼弼) 생시에 기부사연(其父祀連)의 일로 환천(還賤)된 것이 개석(開釋)되지 못한 채 죽은 것을 풀어 주기를 청원한 것이다. 「논시사소(論時事疏)」는 1626년에 바친 것으로 호패법시행의 폐단을 논하여 그것의 광구(匡救)를 상언한 것이다. 「여이자상항복(與李子常恒福)」에서는 정철(鄭澈)의 고역전말(告逆顚末)을 문의한 것으로, 항복(恒福)의 답서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여이성징정구서(與李聖徵廷龜書)」에서는 강항(姜沆)의 절의를 표창해줄 것을 권하고 있다. 이귀(李貴)와의 서한(書翰)이 전후 5편이 있는데, 인조반정 후에 군왕을 바로 보도(輔導)하고 민심의 향배에 주의해서 매사를 근신(謹愼)히 처리하여 의거(義擧)가 개인의 부귀를 위해 취해진 것이라는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근계(勤戒)하였고, 그 외에 조식(曺植)과 이황이 옥사를 중심으로 하여 절교한 일을 비롯한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원인을 논한 것도 있다. 이 밖에 그의 서한(書翰)에는 당시 제인(諸人)을 시비한 것이 유난히 많다. 이 밖에 예제(禮制)와 사서(四書)에 관해 논의되어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卷之 2. 書 ; 答辛用錫(慶晉)李玉汝(貴),
3. 김계휘(金繼輝)
전고대방(典故大方) 호당록(湖堂錄)
명종8년(1553)
신광한(申光漢) 11
한지원(韓智元):이좌 청주인,
박민헌(朴民獻):참판 반남인,
심수경(沈守慶): 우상 풍산인,
허화(許?):부학 ?,
유순선(柳順善):감사 진주인,
김귀영(金貴榮):좌상 상주인,
김홍도(金弘度):전한 안동인,
김질충(金質忠):교리 광산인,
윤의중(尹毅中):참찬 해남인,
김계휘(金繼輝):대헌 광산인,
안수(安璲):홍박 순흥인
김장생(金長生)
27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1548∼1631) 84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현, 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정릉동제(貞陵洞第)에서 출생,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이간공(夷簡公) 영(瑛)의 딸이다.
1557년(명종 12) 열 살의 어린 나이로 구봉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할 때 행동이 무게가 있고 말이나 웃음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식자들은 장차 덕성을 갖춘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말했다. 장성하여 1567년(명종 23)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宗匠)이오, 예학(禮學)의 태두(泰斗)가 되었다.
1575년(선조 9) 아버지 황강공(黃岡公)을 따라 관서지방(평양)에 갔었으나 언제나 조행이 방정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1578년(선조 1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을 배수하였고 1581년(선조 15) 변무사(辨誣使)로 중국에 가는 아버지 황강공을 돈녕부 참봉의 관직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황강공의 별세로 복제기간 효성이 지극하였다. 1584년(선조 18) 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병으로 사임하였는데 도리어 평시서 봉사로 승진되었고 1590년(선조 26)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되고 5월에 장자 은(?)이 왜병에게 해를 입고 서제(庶弟) 연손(燕孫)이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하는 등 불행이 겹쳤다. 1596년(선조 30) 정산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연산 향사(鄕舍)로 돌아왔는데 12월에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1) 정유재란에 조정에서 명나라 원병에게 군량을 호남에서 조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니, 이 일을 완수하고 겨울에 해서(海西: 黃海道)로 돌아와 문생과 함께 강송을 하던 중 12월에 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598년(선조 32) 군자감 첨정, 호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가을에 「근사록해의서(近思錄解疑)」1권을 저술했다. 9월에 남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이듬해 정월에 양근군수, 2월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치 않았다. 얼마 후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어 사양하는 것이 미안하므로 마침내 취임했고 6월에 안성군수가 되었고 9월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1601년(선조 35) 조정에서 주역의 구결(口訣)을 교정하는 일로 부름을 받아 종친부 전부(典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직무를 수행치 못했던 바 영의정 이항복(李恒福0의 천거로 염금리(廉謹吏)로 초선(抄選)되었다. 이듬해 봄에 정인홍이 권력을 잡자 선비들을 탄압하니,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에 내려와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도를 강의했다. 1603년(선조 37) 익산군수로 임명되고 이듬해 10월에 사임하였다. 1609년(광해 2) 익위에 임명되어으나 나가지 않고 8월에 회양(淮陽)부사를 제수받고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못하고 11월에 부임하였다. 1610년(광해 3) 10월에 회양은 북방의 요충지대이기 때문에 무인(武人)으로 임명하는 것이 적합하므로 철원부사로 체임(遞任)되었다. 1613년(광해 6) 서제 경손(慶孫)과 평손(平孫)이 계축화옥(癸丑禍獄)에 연루되어 옥사하므로 이를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나 10년간을 연산에서 은거하며 경서와 고훈(古訓)을 잠심탐독하고 후진 학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고 1618년(광해 11)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을 완성하였으며, 1623년(인조 1) 3월에 인조반정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니, 상소하여 늙고 병이 있음을 들어 사양하고 반정의 원훈들에게 「군의 덕을 도와서 잘 인도하고..... 조정을 잘 보전하며.... 」라는 글을 보내고 도한 정국삼장(靖國三將)의 과오를 밟지 말도록 충고하였다. 또 경연에서 임금의 위로 말씀이 간절하므로 차문(箚文)을 올려 제왕의 학문하는 길을 아뢰니, 기꺼이 받아드리고 곧 사재감 첨정으로 체임시키니 경연의 관원들의 건의에 따라 원자(元子)를 보양하고 유생을 가르치라고 성균사업(成均司業)을 설치하였다. 10월에 거듭 상소하여 사직하였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 어가를 맞이하고 난리가 평정된 후 임금의 수례를 호종하고 서울로 돌아와 상의원정에 임명되고 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어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퇴하고저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와 열세가지 일을 진주(陳奏)하였다.
8월에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사직하고 10월에 왕명으로 입궐하여 강의를 드렸다. 이듬해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동지중추부사를 배수하였고 1626년에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건립하였다. 이듬해 정월, 정묘호란에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되어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양호지역에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4월에 마침내 적이 물러가니 호소사의 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9월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치 않았고 1629년(인조 7) 윤 4월에 왕이 「마차를 타고 오라」하교 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경은 이 나라의 대로요 덕행이 뛰어나니....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노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하였으나 글을 올려 정중히 사양했다. 마침 1630년(인조 8) 4월, 83세 때 노인을 우대하는 식전이 있어 가의대부에 올랐다.
이와같이 천자가 돈후하여 자연히 도에 가깝고 뜻을 세워 대현에게 친히 배웠고 입지가 전일(專一)하여 약관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덕기(德器)가 혼연히 이루어 안면(顔面)에 나타남으로 선비들이 성덕군자(成德君子)라 일컸었다. 문하에는 우암(尤菴) 송시열,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등을 비롯한 여러 유현을 배출하여 기호(畿湖)학파를 이루었다. 저술을 일삼지 않고 글을 읽다가 얻은 것이 있으면 기록하여 경서(經書) 8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과 서소잡록략(書疏雜錄略) 천(千)편과 첨주가례집람(添註家禮輯覽) 3권이 있고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등을 저술하여 세상에 배포하였는데 지금은 이를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으로 집대성하였다. 1631년(인조 9) 5월에 병이 났으나 요양하지 않고 매일같이 문인들과 강론하다가 8월 3일 서거하니, 향년이 84세라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고 세자도 강경(講經)을 폐하였다. 이때 문도(門徒)로서 복제(服制)를 갖춘분이 수백이고 장일(葬日)에 모인 사람이 수천이었다. 이해 11월에 진잠현 성북리에 안장하였고 1636년(인조 14) 조정의 공의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41년(인조 19) 1657년(효종 9)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며, 1717년(숙종 44) 문묘(文廟)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이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沙溪全書, 神道碑文)
1.저 서
저서에 『사계유고(沙溪遺稿)』·『사계전서(沙溪全書)』가 있다.
2.기 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 10여 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 沙溪先生全書 (古 810.819 김71걁)
金長生 (1548∼1631) ; 字 希元, 湖 沙溪, 本貫 光山.
木板本. - [發行事項不明].
零本1冊(全51卷26冊) ; 31.7x20.7cm.
四周雙邊, 半匡 ; 20.6x15.3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向黑魚尾.
조선 중기의 학자인 김장생의 시문집이다. 김장생은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송익필(宋翼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78(선조 11)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육품직(六品職)에 오르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고 유성룡의 천거로 종친부(宗親府) 전부가 되었다. 1602년 청백리에 녹선, 1609(광해군 1)년 회양(淮陽),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신문(訊問)을 받았으나 무혐의로 누명을 벗고 관직을 사퇴, 연산(連山)에 은둔하여 학문에 전심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령에 복직, 사업(司業), 상의원정을 거쳐 이듬해 집의, 공조참의, 부호군을 지내고 다시 사퇴, 낙향했다가 특명으로 162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군량미 조달에 힘썼으며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교육에 전심했다. 송익필의 문하에서 예학(禮學)을 전수 받고 후에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禮學派)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하에 송시열, 송준길 등 유학자를 배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1688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連山)의 둔암서원(遯巖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그의 유문은 본래 《사계유고(沙溪遺稿)》로 시문을 주로 한 문집이었으나 저자 사후에 문인 송시열 등이 유고를 모아 편찬한 것인데, 그 후 1685(숙종 11)년에 사계선생유고(沙溪先生遺稿)의 원고 10권, 부록 3권,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권 합계(合啓) 14권 6책이 열람을 위해 상진(上進)되었고, 1687년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간행되었다. 이 후 1922년에 후손들이 이 구본(舊本)에 저자의 학문에 관한 여러 저술을 더하고 부록을 증보하여 《율곡전서(栗谷全書)》의 체제에 의방(依倣)하여 편차 출간하였다. 우리대학 【一般古書】에 零本 1책이 수장되어 있다. 본서에 수록된 시(詩)는 가야산봉윤정경(伽倻山逢尹正卿), 재유가야산(再遊伽倻山), 만최여윤명용(輓崔汝允命龍) 3수뿐이다. 소차장계(疏箚狀啓)의 문장은 순통(順通), 간독(懇篤)하다. 「환향후진소회소(還鄕後陳所懷疏)」는 80에 가까운 노령에 바친 것으로 흉년에 조병부서(調兵赴西)하고 징포자송(徵布資送)하는 일이 폭거임을 조열(條列)하고 장정을 선발해서 그 수효를 삭감하여 어적(禦敵)과 내궤방지(內潰防止)의 실효를 거둘 것을 건의한 것이다. 「사집의잉진십삼사소(辭執義仍陳十三事疏)」는 1624(인조 2)년에 바친 것으로, 진술(陳述)한 13사(事)는 1)입대본(立大本), 2)회구업(恢舊業), 3)존홍범(尊洪範), 4)강소학(講小學), 5)진성학(盡聖學), 6)경사전(敬祀典), 7)친구족(親九族), 8)체군신(體群臣), 9)친청정(親聽政), 10)혁민폐(革民弊), 11)파선혜청(罷宣惠廳), 12)수군정(修軍政), 13)엄금아(嚴禁衙)이다. 「사공조참의겸진소회소(辭工曹參議兼陳所懷疏)는 역시 1624년에 바친 것으로 내노(內奴)가 민간에서 작폐(作弊)하는 일에 대처하는 인조의 태도를 간(諫)한 것이다.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는 서성(徐暉), 정엽(鄭曄), 유순익(柳舜翼), 심종직(沈宗直) 4인과의 연명상소로 그의 은사 송익필(宋翼弼) 생시에 기부사연(其父祀連)의 일로 환천(還賤)된 것이 개석(開釋)되지 못한 채 죽은 것을 풀어 주기를 청원한 것이다. 「논시사소(論時事疏)」는 1626년에 바친 것으로 호패법시행의 폐단을 논하여 그것의 광구(匡救)를 상언한 것이다. 「여이자상항복(與李子常恒福)」에서는 정철(鄭澈)의 고역전말(告逆顚末)을 문의한 것으로, 항복(恒福)의 답서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여이성징정구서(與李聖徵廷龜書)」에서는 강항(姜沆)의 절의를 표창해줄 것을 권하고 있다. 이귀(李貴)와의 서한(書翰)이 전후 5편이 있는데, 인조반정 후에 군왕을 바로 보도(輔導)하고 민심의 향배에 주의해서 매사를 근신(謹愼)히 처리하여 의거(義擧)가 개인의 부귀를 위해 취해진 것이라는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근계(勤戒)하였고, 그 외에 조식(曺植)과 이황이 옥사를 중심으로 하여 절교한 일을 비롯한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원인을 논한 것도 있다. 이 밖에 그의 서한(書翰)에는 당시 제인(諸人)을 시비한 것이 유난히 많다. 이 밖에 예제(禮制)와 사서(四書)에 관해 논의되어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凡例.
總目.
卷之 1. 詩 ; 伽倻山逢尹正卿, 再遊伽倻山, 挽崔汝允(命龍).
疏 ; 辭掌令, 論私廟 親祭時祝文屬號, 辭 元子僚屬成均司業(2), 還鄕後陳所懷, 辭職(2), 适變時以不得○問待罪, 辭執義(2), 辭執義仍陳十三事, 辭工曹參議兼陳所懷, 陞資謝恩後乞退, 辭陞嘉善, 辭同知仍陳所懷, 辭辨師寃, 辭同知中樞(2), 啓運宮喪奉慰後還鄕陳情. 論時事, 辨延平府院君李貴箚子, 乞解號召使, 辭刑曹參判(2), 辭召命, 四.
箚 ; 文政殿奏
啓 ; 辭掌令, 辭執義(2), 祇受兩湖號召使印信狀.
卷之 2. 書 ; 上栗谷先生(附答書), 上龜峯宋先生(附答書), 與鄭道可(逑)(附答書), 與李子常(恒福)(附答書), 與金景擇(尙容), 與李聖徵(廷龜), 答李聖徵鄭時晦(曄)金餘慶(玄成), 與鄭時晦(2), 答鄭景任(經世), 答尹德耀(煌), 答辛用錫(慶晉)李玉汝(貴), 與李玉汝金冠玉(?)張持國(維)崔子謙(鳴吉), 與李玉汝金冠玉, 與李玉汝(5).
[출처] 光山金門(광산김문) 沙溪(사계) 金長生(김장생)|작성자 풀향27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1548∼1631) 84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현, 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정릉동제(貞陵洞第)에서 출생,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이간공(夷簡公) 영(瑛)의 딸이다.
1557년(명종 12) 열 살의 어린 나이로 구봉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할 때 행동이 무게가 있고 말이나 웃음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식자들은 장차 덕성을 갖춘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말했다. 장성하여 1567년(명종 23)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宗匠)이오, 예학(禮學)의 태두(泰斗)가 되었다.
1575년(선조 9) 아버지 황강공(黃岡公)을 따라 관서지방(평양)에 갔었으나 언제나 조행이 방정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1578년(선조 1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을 배수하였고 1581년(선조 15) 변무사(辨誣使)로 중국에 가는 아버지 황강공을 돈녕부 참봉의 관직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황강공의 별세로 복제기간 효성이 지극하였다. 1584년(선조 18) 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병으로 사임하였는데 도리어 평시서 봉사로 승진되었고 1590년(선조 26)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되고 5월에 장자 은(?)이 왜병에게 해를 입고 서제(庶弟) 연손(燕孫)이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하는 등 불행이 겹쳤다. 1596년(선조 30) 정산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연산 향사(鄕舍)로 돌아왔는데 12월에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1) 정유재란에 조정에서 명나라 원병에게 군량을 호남에서 조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니, 이 일을 완수하고 겨울에 해서(海西: 黃海道)로 돌아와 문생과 함께 강송을 하던 중 12월에 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598년(선조 32) 군자감 첨정, 호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가을에 「근사록해의서(近思錄解疑)」1권을 저술했다. 9월에 남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이듬해 정월에 양근군수, 2월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치 않았다. 얼마 후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어 사양하는 것이 미안하므로 마침내 취임했고 6월에 안성군수가 되었고 9월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1601년(선조 35) 조정에서 주역의 구결(口訣)을 교정하는 일로 부름을 받아 종친부 전부(典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직무를 수행치 못했던 바 영의정 이항복(李恒福0의 천거로 염금리(廉謹吏)로 초선(抄選)되었다. 이듬해 봄에 정인홍이 권력을 잡자 선비들을 탄압하니,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에 내려와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도를 강의했다. 1603년(선조 37) 익산군수로 임명되고 이듬해 10월에 사임하였다. 1609년(광해 2) 익위에 임명되어으나 나가지 않고 8월에 회양(淮陽)부사를 제수받고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못하고 11월에 부임하였다. 1610년(광해 3) 10월에 회양은 북방의 요충지대이기 때문에 무인(武人)으로 임명하는 것이 적합하므로 철원부사로 체임(遞任)되었다. 1613년(광해 6) 서제 경손(慶孫)과 평손(平孫)이 계축화옥(癸丑禍獄)에 연루되어 옥사하므로 이를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나 10년간을 연산에서 은거하며 경서와 고훈(古訓)을 잠심탐독하고 후진 학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고 1618년(광해 11)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을 완성하였으며, 1623년(인조 1) 3월에 인조반정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니, 상소하여 늙고 병이 있음을 들어 사양하고 반정의 원훈들에게 「군의 덕을 도와서 잘 인도하고..... 조정을 잘 보전하며.... 」라는 글을 보내고 도한 정국삼장(靖國三將)의 과오를 밟지 말도록 충고하였다. 또 경연에서 임금의 위로 말씀이 간절하므로 차문(箚文)을 올려 제왕의 학문하는 길을 아뢰니, 기꺼이 받아드리고 곧 사재감 첨정으로 체임시키니 경연의 관원들의 건의에 따라 원자(元子)를 보양하고 유생을 가르치라고 성균사업(成均司業)을 설치하였다. 10월에 거듭 상소하여 사직하였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 어가를 맞이하고 난리가 평정된 후 임금의 수례를 호종하고 서울로 돌아와 상의원정에 임명되고 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어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퇴하고저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와 열세가지 일을 진주(陳奏)하였다.
8월에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사직하고 10월에 왕명으로 입궐하여 강의를 드렸다. 이듬해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동지중추부사를 배수하였고 1626년에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건립하였다. 이듬해 정월, 정묘호란에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되어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양호지역에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4월에 마침내 적이 물러가니 호소사의 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9월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치 않았고 1629년(인조 7) 윤 4월에 왕이 「마차를 타고 오라」하교 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경은 이 나라의 대로요 덕행이 뛰어나니....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노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하였으나 글을 올려 정중히 사양했다. 마침 1630년(인조 8) 4월, 83세 때 노인을 우대하는 식전이 있어 가의대부에 올랐다.
이와같이 천자가 돈후하여 자연히 도에 가깝고 뜻을 세워 대현에게 친히 배웠고 입지가 전일(專一)하여 약관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덕기(德器)가 혼연히 이루어 안면(顔面)에 나타남으로 선비들이 성덕군자(成德君子)라 일컸었다. 문하에는 우암(尤菴) 송시열,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등을 비롯한 여러 유현을 배출하여 기호(畿湖)학파를 이루었다. 저술을 일삼지 않고 글을 읽다가 얻은 것이 있으면 기록하여 경서(經書) 8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과 서소잡록략(書疏雜錄略) 천(千)편과 첨주가례집람(添註家禮輯覽) 3권이 있고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등을 저술하여 세상에 배포하였는데 지금은 이를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으로 집대성하였다. 1631년(인조 9) 5월에 병이 났으나 요양하지 않고 매일같이 문인들과 강론하다가 8월 3일 서거하니, 향년이 84세라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고 세자도 강경(講經)을 폐하였다. 이때 문도(門徒)로서 복제(服制)를 갖춘분이 수백이고 장일(葬日)에 모인 사람이 수천이었다. 이해 11월에 진잠현 성북리에 안장하였고 1636년(인조 14) 조정의 공의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41년(인조 19) 1657년(효종 9)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며, 1717년(숙종 44) 문묘(文廟)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이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沙溪全書, 神道碑文)
1.저 서
저서에 『사계유고(沙溪遺稿)』·『사계전서(沙溪全書)』가 있다.
2.기 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 10여 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1.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김계휘(金繼輝)
# 전라도(全羅道) 나주(羅州)
*월정서원(月井書院)
현종갑술건 기유액(顯宗甲戌建 己酉額).
제향. 박 순(호사암 영의정 시문충 본충주). 김계휘(호황강 대사헌 본광산). 심의겸(호손재 예참 청양군 본청송).
祭享. 朴 淳(號思菴 領議政 諡文忠 本忠州). 金繼輝(號黃岡 大司憲 本光山). 沈義謙(號巽齋 禮參 靑陽君 本靑松).
2. 김계휘(金繼輝) 부(父)
※ 沙溪先生全書 (古 810.819 김71걁)
金長生 (1548∼1631) ; 字 希元, 湖 沙溪, 本貫 光山.
木板本. - [發行事項不明].
零本1冊(全51卷26冊) ; 31.7x20.7cm.
四周雙邊, 半匡 ; 20.6x15.3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向黑魚尾.
조선 중기의 학자인 김장생의 시문집이다. 김장생은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송익필(宋翼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78(선조 11)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육품직(六品職)에 오르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고 유성룡의 천거로 종친부(宗親府) 전부가 되었다. 1602년 청백리에 녹선, 1609(광해군 1)년 회양(淮陽),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신문(訊問)을 받았으나 무혐의로 누명을 벗고 관직을 사퇴, 연산(連山)에 은둔하여 학문에 전심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령에 복직, 사업(司業), 상의원정을 거쳐 이듬해 집의, 공조참의, 부호군을 지내고 다시 사퇴, 낙향했다가 특명으로 162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군량미 조달에 힘썼으며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교육에 전심했다. 송익필의 문하에서 예학(禮學)을 전수 받고 후에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禮學派)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하에 송시열, 송준길 등 유학자를 배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1688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連山)의 둔암서원(遯巖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그의 유문은 본래 《사계유고(沙溪遺稿)》로 시문을 주로 한 문집이었으나 저자 사후에 문인 송시열 등이 유고를 모아 편찬한 것인데, 그 후 1685(숙종 11)년에 사계선생유고(沙溪先生遺稿)의 원고 10권, 부록 3권,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권 합계(合啓) 14권 6책이 열람을 위해 상진(上進)되었고, 1687년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간행되었다. 이 후 1922년에 후손들이 이 구본(舊本)에 저자의 학문에 관한 여러 저술을 더하고 부록을 증보하여 《율곡전서(栗谷全書)》의 체제에 의방(依倣)하여 편차 출간하였다. 우리대학 【一般古書】에 零本 1책이 수장되어 있다. 본서에 수록된 시(詩)는 가야산봉윤정경(伽倻山逢尹正卿), 재유가야산(再遊伽倻山), 만최여윤명용(輓崔汝允命龍) 3수뿐이다. 소차장계(疏箚狀啓)의 문장은 순통(順通), 간독(懇篤)하다. 「환향후진소회소(還鄕後陳所懷疏)」는 80에 가까운 노령에 바친 것으로 흉년에 조병부서(調兵赴西)하고 징포자송(徵布資送)하는 일이 폭거임을 조열(條列)하고 장정을 선발해서 그 수효를 삭감하여 어적(禦敵)과 내궤방지(內潰防止)의 실효를 거둘 것을 건의한 것이다. 「사집의잉진십삼사소(辭執義仍陳十三事疏)」는 1624(인조 2)년에 바친 것으로, 진술(陳述)한 13사(事)는 1)입대본(立大本), 2)회구업(恢舊業), 3)존홍범(尊洪範), 4)강소학(講小學), 5)진성학(盡聖學), 6)경사전(敬祀典), 7)친구족(親九族), 8)체군신(體群臣), 9)친청정(親聽政), 10)혁민폐(革民弊), 11)파선혜청(罷宣惠廳), 12)수군정(修軍政), 13)엄금아(嚴禁衙)이다. 「사공조참의겸진소회소(辭工曹參議兼陳所懷疏)는 역시 1624년에 바친 것으로 내노(內奴)가 민간에서 작폐(作弊)하는 일에 대처하는 인조의 태도를 간(諫)한 것이다.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는 서성(徐暉), 정엽(鄭曄), 유순익(柳舜翼), 심종직(沈宗直) 4인과의 연명상소로 그의 은사 송익필(宋翼弼) 생시에 기부사연(其父祀連)의 일로 환천(還賤)된 것이 개석(開釋)되지 못한 채 죽은 것을 풀어 주기를 청원한 것이다. 「논시사소(論時事疏)」는 1626년에 바친 것으로 호패법시행의 폐단을 논하여 그것의 광구(匡救)를 상언한 것이다. 「여이자상항복(與李子常恒福)」에서는 정철(鄭澈)의 고역전말(告逆顚末)을 문의한 것으로, 항복(恒福)의 답서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여이성징정구서(與李聖徵廷龜書)」에서는 강항(姜沆)의 절의를 표창해줄 것을 권하고 있다. 이귀(李貴)와의 서한(書翰)이 전후 5편이 있는데, 인조반정 후에 군왕을 바로 보도(輔導)하고 민심의 향배에 주의해서 매사를 근신(謹愼)히 처리하여 의거(義擧)가 개인의 부귀를 위해 취해진 것이라는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근계(勤戒)하였고, 그 외에 조식(曺植)과 이황이 옥사를 중심으로 하여 절교한 일을 비롯한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원인을 논한 것도 있다. 이 밖에 그의 서한(書翰)에는 당시 제인(諸人)을 시비한 것이 유난히 많다. 이 밖에 예제(禮制)와 사서(四書)에 관해 논의되어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卷之 2. 書 ; 答辛用錫(慶晉)李玉汝(貴),
3. 김계휘(金繼輝)
전고대방(典故大方) 호당록(湖堂錄)
명종8년(1553)
신광한(申光漢) 11
한지원(韓智元):이좌 청주인,
박민헌(朴民獻):참판 반남인,
심수경(沈守慶): 우상 풍산인,
허화(許?):부학 ?,
유순선(柳順善):감사 진주인,
김귀영(金貴榮):좌상 상주인,
김홍도(金弘度):전한 안동인,
김질충(金質忠):교리 광산인,
윤의중(尹毅中):참찬 해남인,
김계휘(金繼輝):대헌 광산인,
안수(安璲):홍박 순흥인
김장생(金長生)
27세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의정공파/문원공)(1548∼1631) 84歲,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현, 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정릉동제(貞陵洞第)에서 출생, 아버지는 대사헌 계휘(繼輝)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이간공(夷簡公) 영(瑛)의 딸이다.
1557년(명종 12) 열 살의 어린 나이로 구봉 송익필 문하에서 수업할 때 행동이 무게가 있고 말이나 웃음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식자들은 장차 덕성을 갖춘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말했다. 장성하여 1567년(명종 23)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宗匠)이오, 예학(禮學)의 태두(泰斗)가 되었다.
1575년(선조 9) 아버지 황강공(黃岡公)을 따라 관서지방(평양)에 갔었으나 언제나 조행이 방정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1578년(선조 1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을 배수하였고 1581년(선조 15) 변무사(辨誣使)로 중국에 가는 아버지 황강공을 돈녕부 참봉의 관직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황강공의 별세로 복제기간 효성이 지극하였다. 1584년(선조 18) 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병으로 사임하였는데 도리어 평시서 봉사로 승진되었고 1590년(선조 26)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되고 5월에 장자 은(?)이 왜병에게 해를 입고 서제(庶弟) 연손(燕孫)이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하는 등 불행이 겹쳤다. 1596년(선조 30) 정산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연산 향사(鄕舍)로 돌아왔는데 12월에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1) 정유재란에 조정에서 명나라 원병에게 군량을 호남에서 조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니, 이 일을 완수하고 겨울에 해서(海西: 黃海道)로 돌아와 문생과 함께 강송을 하던 중 12월에 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598년(선조 32) 군자감 첨정, 호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가을에 「근사록해의서(近思錄解疑)」1권을 저술했다. 9월에 남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고 이듬해 정월에 양근군수, 2월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치 않았다. 얼마 후 군자감 첨정에 제수되어 사양하는 것이 미안하므로 마침내 취임했고 6월에 안성군수가 되었고 9월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1601년(선조 35) 조정에서 주역의 구결(口訣)을 교정하는 일로 부름을 받아 종친부 전부(典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직무를 수행치 못했던 바 영의정 이항복(李恒福0의 천거로 염금리(廉謹吏)로 초선(抄選)되었다. 이듬해 봄에 정인홍이 권력을 잡자 선비들을 탄압하니,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에 내려와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도를 강의했다. 1603년(선조 37) 익산군수로 임명되고 이듬해 10월에 사임하였다. 1609년(광해 2) 익위에 임명되어으나 나가지 않고 8월에 회양(淮陽)부사를 제수받고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못하고 11월에 부임하였다. 1610년(광해 3) 10월에 회양은 북방의 요충지대이기 때문에 무인(武人)으로 임명하는 것이 적합하므로 철원부사로 체임(遞任)되었다. 1613년(광해 6) 서제 경손(慶孫)과 평손(平孫)이 계축화옥(癸丑禍獄)에 연루되어 옥사하므로 이를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나 10년간을 연산에서 은거하며 경서와 고훈(古訓)을 잠심탐독하고 후진 학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고 1618년(광해 11)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을 완성하였으며, 1623년(인조 1) 3월에 인조반정후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니, 상소하여 늙고 병이 있음을 들어 사양하고 반정의 원훈들에게 「군의 덕을 도와서 잘 인도하고..... 조정을 잘 보전하며.... 」라는 글을 보내고 도한 정국삼장(靖國三將)의 과오를 밟지 말도록 충고하였다. 또 경연에서 임금의 위로 말씀이 간절하므로 차문(箚文)을 올려 제왕의 학문하는 길을 아뢰니, 기꺼이 받아드리고 곧 사재감 첨정으로 체임시키니 경연의 관원들의 건의에 따라 원자(元子)를 보양하고 유생을 가르치라고 성균사업(成均司業)을 설치하였다. 10월에 거듭 상소하여 사직하였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 어가를 맞이하고 난리가 평정된 후 임금의 수례를 호종하고 서울로 돌아와 상의원정에 임명되고 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어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퇴하고저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휴가를 청하여 고향에 돌아와 열세가지 일을 진주(陳奏)하였다.
8월에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사직하고 10월에 왕명으로 입궐하여 강의를 드렸다. 이듬해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동지중추부사를 배수하였고 1626년에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건립하였다. 이듬해 정월, 정묘호란에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되어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양호지역에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4월에 마침내 적이 물러가니 호소사의 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9월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치 않았고 1629년(인조 7) 윤 4월에 왕이 「마차를 타고 오라」하교 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경은 이 나라의 대로요 덕행이 뛰어나니....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노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하였으나 글을 올려 정중히 사양했다. 마침 1630년(인조 8) 4월, 83세 때 노인을 우대하는 식전이 있어 가의대부에 올랐다.
이와같이 천자가 돈후하여 자연히 도에 가깝고 뜻을 세워 대현에게 친히 배웠고 입지가 전일(專一)하여 약관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덕기(德器)가 혼연히 이루어 안면(顔面)에 나타남으로 선비들이 성덕군자(成德君子)라 일컸었다. 문하에는 우암(尤菴) 송시열,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등을 비롯한 여러 유현을 배출하여 기호(畿湖)학파를 이루었다. 저술을 일삼지 않고 글을 읽다가 얻은 것이 있으면 기록하여 경서(經書) 8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과 서소잡록략(書疏雜錄略) 천(千)편과 첨주가례집람(添註家禮輯覽) 3권이 있고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등을 저술하여 세상에 배포하였는데 지금은 이를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으로 집대성하였다. 1631년(인조 9) 5월에 병이 났으나 요양하지 않고 매일같이 문인들과 강론하다가 8월 3일 서거하니, 향년이 84세라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고 세자도 강경(講經)을 폐하였다. 이때 문도(門徒)로서 복제(服制)를 갖춘분이 수백이고 장일(葬日)에 모인 사람이 수천이었다. 이해 11월에 진잠현 성북리에 안장하였고 1636년(인조 14) 조정의 공의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41년(인조 19) 1657년(효종 9)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며, 1717년(숙종 44) 문묘(文廟)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이 있다. (見朝鮮王朝實錄, 沙溪全書, 神道碑文)
1.저 서
저서에 『사계유고(沙溪遺稿)』·『사계전서(沙溪全書)』가 있다.
2.기 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 10여 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 沙溪先生全書 (古 810.819 김71걁)
金長生 (1548∼1631) ; 字 希元, 湖 沙溪, 本貫 光山.
木板本. - [發行事項不明].
零本1冊(全51卷26冊) ; 31.7x20.7cm.
四周雙邊, 半匡 ; 20.6x15.3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向黑魚尾.
조선 중기의 학자인 김장생의 시문집이다. 김장생은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송익필(宋翼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78(선조 11)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육품직(六品職)에 오르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고 유성룡의 천거로 종친부(宗親府) 전부가 되었다. 1602년 청백리에 녹선, 1609(광해군 1)년 회양(淮陽),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신문(訊問)을 받았으나 무혐의로 누명을 벗고 관직을 사퇴, 연산(連山)에 은둔하여 학문에 전심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장령에 복직, 사업(司業), 상의원정을 거쳐 이듬해 집의, 공조참의, 부호군을 지내고 다시 사퇴, 낙향했다가 특명으로 162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군량미 조달에 힘썼으며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교육에 전심했다. 송익필의 문하에서 예학(禮學)을 전수 받고 후에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禮學派)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하에 송시열, 송준길 등 유학자를 배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1688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連山)의 둔암서원(遯巖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그의 유문은 본래 《사계유고(沙溪遺稿)》로 시문을 주로 한 문집이었으나 저자 사후에 문인 송시열 등이 유고를 모아 편찬한 것인데, 그 후 1685(숙종 11)년에 사계선생유고(沙溪先生遺稿)의 원고 10권, 부록 3권,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권 합계(合啓) 14권 6책이 열람을 위해 상진(上進)되었고, 1687년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간행되었다. 이 후 1922년에 후손들이 이 구본(舊本)에 저자의 학문에 관한 여러 저술을 더하고 부록을 증보하여 《율곡전서(栗谷全書)》의 체제에 의방(依倣)하여 편차 출간하였다. 우리대학 【一般古書】에 零本 1책이 수장되어 있다. 본서에 수록된 시(詩)는 가야산봉윤정경(伽倻山逢尹正卿), 재유가야산(再遊伽倻山), 만최여윤명용(輓崔汝允命龍) 3수뿐이다. 소차장계(疏箚狀啓)의 문장은 순통(順通), 간독(懇篤)하다. 「환향후진소회소(還鄕後陳所懷疏)」는 80에 가까운 노령에 바친 것으로 흉년에 조병부서(調兵赴西)하고 징포자송(徵布資送)하는 일이 폭거임을 조열(條列)하고 장정을 선발해서 그 수효를 삭감하여 어적(禦敵)과 내궤방지(內潰防止)의 실효를 거둘 것을 건의한 것이다. 「사집의잉진십삼사소(辭執義仍陳十三事疏)」는 1624(인조 2)년에 바친 것으로, 진술(陳述)한 13사(事)는 1)입대본(立大本), 2)회구업(恢舊業), 3)존홍범(尊洪範), 4)강소학(講小學), 5)진성학(盡聖學), 6)경사전(敬祀典), 7)친구족(親九族), 8)체군신(體群臣), 9)친청정(親聽政), 10)혁민폐(革民弊), 11)파선혜청(罷宣惠廳), 12)수군정(修軍政), 13)엄금아(嚴禁衙)이다. 「사공조참의겸진소회소(辭工曹參議兼陳所懷疏)는 역시 1624년에 바친 것으로 내노(內奴)가 민간에서 작폐(作弊)하는 일에 대처하는 인조의 태도를 간(諫)한 것이다.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는 서성(徐暉), 정엽(鄭曄), 유순익(柳舜翼), 심종직(沈宗直) 4인과의 연명상소로 그의 은사 송익필(宋翼弼) 생시에 기부사연(其父祀連)의 일로 환천(還賤)된 것이 개석(開釋)되지 못한 채 죽은 것을 풀어 주기를 청원한 것이다. 「논시사소(論時事疏)」는 1626년에 바친 것으로 호패법시행의 폐단을 논하여 그것의 광구(匡救)를 상언한 것이다. 「여이자상항복(與李子常恒福)」에서는 정철(鄭澈)의 고역전말(告逆顚末)을 문의한 것으로, 항복(恒福)의 답서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여이성징정구서(與李聖徵廷龜書)」에서는 강항(姜沆)의 절의를 표창해줄 것을 권하고 있다. 이귀(李貴)와의 서한(書翰)이 전후 5편이 있는데, 인조반정 후에 군왕을 바로 보도(輔導)하고 민심의 향배에 주의해서 매사를 근신(謹愼)히 처리하여 의거(義擧)가 개인의 부귀를 위해 취해진 것이라는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근계(勤戒)하였고, 그 외에 조식(曺植)과 이황이 옥사를 중심으로 하여 절교한 일을 비롯한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원인을 논한 것도 있다. 이 밖에 그의 서한(書翰)에는 당시 제인(諸人)을 시비한 것이 유난히 많다. 이 밖에 예제(禮制)와 사서(四書)에 관해 논의되어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凡例.
總目.
卷之 1. 詩 ; 伽倻山逢尹正卿, 再遊伽倻山, 挽崔汝允(命龍).
疏 ; 辭掌令, 論私廟 親祭時祝文屬號, 辭 元子僚屬成均司業(2), 還鄕後陳所懷, 辭職(2), 适變時以不得○問待罪, 辭執義(2), 辭執義仍陳十三事, 辭工曹參議兼陳所懷, 陞資謝恩後乞退, 辭陞嘉善, 辭同知仍陳所懷, 辭辨師寃, 辭同知中樞(2), 啓運宮喪奉慰後還鄕陳情. 論時事, 辨延平府院君李貴箚子, 乞解號召使, 辭刑曹參判(2), 辭召命, 四.
箚 ; 文政殿奏
啓 ; 辭掌令, 辭執義(2), 祇受兩湖號召使印信狀.
卷之 2. 書 ; 上栗谷先生(附答書), 上龜峯宋先生(附答書), 與鄭道可(逑)(附答書), 與李子常(恒福)(附答書), 與金景擇(尙容), 與李聖徵(廷龜), 答李聖徵鄭時晦(曄)金餘慶(玄成), 與鄭時晦(2), 答鄭景任(經世), 答尹德耀(煌), 答辛用錫(慶晉)李玉汝(貴), 與李玉汝金冠玉(?)張持國(維)崔子謙(鳴吉), 與李玉汝金冠玉, 與李玉汝(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