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카페에서 나단조를 그리다
류 흔
성남아트센터 초입에 ‘브람스카페’가 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브람스의 연탄곡(連彈曲)이 테이블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닌다. 여기서 주로 목격되는 음악은 브람스의 칸타타나 지금 내 앞에 서서 리듬을 타는 중인 무곡(舞曲)이다.
주문한 에스프레소를 들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마감이 내일인 시를 써야 하는데, 연주를 흘깃거리느라 집중이 안 된다. 차라리 이런 날은 요즘 연작작업 중인 그림의 미니멀리즘(minimalism) 표현처럼 단조(短調)로운 피아노협주곡이 어울린다.
〈그림〉 시의 리듬-나단조 3 / 2022, 95˟138cm, Oil & acrylic on canvas
마침 쇼팽의 왈츠 10번 나단조(No.69-2)가 실내에 흐른다. 나단조. 운율이 시적인 쇼팽의 B음. 건반을 두드리듯 발바닥에 스텝을 얹자, 여태 완성하지 못한 시의 리듬이 걸어 나왔다.
나단조가 으뜸인 시의 리듬은 어둠 속에서 구(球)에 간여하는 무채의 색으로 구현된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기 위한 전조(轉調) 작업.
화면 중앙부의 작은 원은 나단조의 으뜸음으로 조형되었으며, 상·하의 큰 원으로 확장되었다. 좌우로 흐르는 비정형의 돌(stone)이 유구한 자연의 음표로 설정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쇼팽의 왈츠를 캔버스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건반 누르듯
보도블록을 밟는다
술은 마시지 않겠다
가자미눈으로 조심스레
하늘을 살피니
맥주 거품 비슷한
구름 한 조각
없다
대명천지를 활보하는 오늘의 태양과
길에서 받은
오늘의 커피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단조로운 바람이
앞서 걷는 아가씨 치마를 건든다
하늘하늘한
저
잠자리 좀 봐라
한 바퀴 스무드하게 돌아보면 어떨까
나단조로, 그러나 단조롭지 않게
쇼팽의 왈츠를 연주해주렴
랄랄랄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애인들이 다 떠나거나
마주 오는 저놈이
이유 없이 나를 한 대 치고 도망간다 해도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날 꼭 전화는 오네, 랄
랄 단조롭지 않게
으뜸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 「나단조」 전문
〈그림〉 시의 리듬-나단조 4 / 2022, 50⨯60cm, Oil & acrylic on canvas
시의 리듬 시리즈는 형식 면에서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 nism)로 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도상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으나, 화면을 임의로 구획 지어 세밀히 살펴보면 그림 안에 다른 이미지가 존재함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시작(詩作)에서의 중의적 표현과 유사하다. 하나의 그림 안에 두 개 이상의 작품이 내재하는 것이다. 시의 행간에 흐르는 리듬과 화면이 보여주는 색감의 감정적 디테일은 상통한다.
술을 마시러 나가기에 몹시 적절한 날씨지만, 쇼팽이 불러주는 시를 캔버스에 적느라 나는 카페 구석 자리에 오래 앉아있었다.
〈류 흔〉
△ 1964년 경북 안동 출생
△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후
△ 2011년 '시집『꽃의 배후』바보새' 발간하며 작품활동 시작
△ 2011년 웹진〈시산맥〉으로 재등단
△ 2021년 '시집『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달아실'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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