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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隋唐 교체기에 중국 기병 전술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견해는 이제 중국 군사사학계의 통설이다. 수나라 때까지만해도 남북조 이래의 전통적인 중장기병 위주의 기병 전력을 보유했으나 당나라는 돌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경기병 위주의 전력으로 전환했고 그에 따라 운용 전술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왕전(汪笺)의 '왕전수당사논고'(隋唐史论稿)를 통해 1981년 제기된 이후 중국 학계에서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C.J. Peers 같은 서구권의 중국 군사사가들이나 일본에서 나온 중국 군사사 관련서적에서 당나라 시대에 중장기병에서 경기병 위주로 전술 변화가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같은 중국 역사학계의 보편적 연구 흐름을 따라간 것이다. 특히 C.J Peers의 책은 국내에서도 이미 번역됐으므로 이런 주장들 자체는 국내에서도 이미 별로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제2차 고수전쟁, 다시 말해 수 양제의 고구려 침략 당시 수나라 기병들도 중장기병이었을까? 아니면 경기병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혼성이었을까. 당연히 나올법한 질문임에도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한 국내 논문이나 저서를 본 기억이 없다. 물론 중간 논증 과정이나 사료적 근거 제시 없이... 수나라 기병의 주력은 중장기병이므로 고수전쟁 당시 수나라 기병도 중장기병...식의 근거 생략형 결론을 본 기억은 있다
고수전쟁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고구려 수당전쟁사'도 당시 수나라 군의 편제에 대해 총 8페이지에 걸쳐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나라 기병의 특성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전무하다. 근래에 나온 책도 마찬가지여서 임용한 선생의 '전쟁과 역사-삼국편'에도 이 문제에 대한 해설이나 접근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김성남씨의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는 말할 것도 없다.
제2차 고수전쟁에서 수나라는 실제 동원된 병력이 얼마인지에 대한 논란은 논외로 치더라도 기록상 100만이 넘는 경이적인 규모의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당시 수나라군 편제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여러차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은 사실상 없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 문제는 굳이 여러 종의 사료 부스러기와 논문의 주장들을 최대한 끌어 모을 필요도 없이 기본 사료의 번역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결론이 나올 수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수군의 편제에 대해 가장 널리 참조하는 자료는 당연히 수서(隋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수서에서 당시 수군의 병력 구성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두 곳이다. 수서 권4에는 左第一軍可鏤方道, 第二軍可長岑道, 第三軍可海冥道, 第四軍可蓋馬道, 第五軍可建安道, 第六軍可南蘇道, 第七軍可遼東道, 第八軍可玄菟道, 第九軍可扶餘道, 第十軍可朝鮮道, 第十一軍可沃沮道, 第十二軍可樂浪道. 右第一軍可黏蟬道, 第二軍可含資道, 第三軍可渾彌道, 第四軍可臨屯道, 第五軍可候城道, 第六軍可提奚道, 第七軍可踏頓道, 第八軍可肅愼道, 第九軍可碣石道, 第十軍可東暆道, 第十一軍可帶方道, 第十二軍可襄平道. 등 전체 24군의 리스트가 등장한다.
이어서 총 병력이 100만이 넘었고, 보급이나 수송 지원병까지 포함하면 그 배에 달했다는 유명한 설명 구절(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 號二百萬, 其餽運者倍之. 癸未, 第一軍發, 終四十日, 引師乃盡, 旌旗千裏.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이 뒤 따른다.
총 24개군으로 구성된 원정군은 전시 임시 편성이므로 평시 편제와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각 군의 구체적인 편성을 알려주는 자료는 수서 권8의 예의지에 등장한다. 그 중에서 기병의 편성을 알려주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每軍大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置一纛. 十隊爲團, 團有偏將一人. 第一團, 皆靑絲連明光甲、鐵具裝、靑纓拂, 建狻猊旗. 第二團, 絳絲連硃犀甲、獸文具裝、赤纓拂, 建貔貅旗. 第三團, 白絲連明光甲、鐵具裝、素纓拂, 建辟邪旗. 第四團, 烏絲連玄犀甲、獸文具裝、建纓拂, 建六駁旗.
이 구절 자체는 당시 수군의 편제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사학자들에 의해 널리 인용되었던 자료이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문제는 해석이었다. 흔히 이 구절은 각 군에 기병단 4개, 각 단에 기병 10대가 편성되어 있으며, 각 대의 병력은 100명이고, 각 단 별로 깃발이나 갑옷의 색깔이 달랐다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각 군에는 총 4000명의 기병이 편성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송나라때 쓰여진 편년체 사서인 자치통감 권181에서는 이 내용을 每軍上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各有偏將一人, 其鎧胄·纓拂·旗,每團異色으로 요약해 버린다. 각 단 별로 언급된 깃발이나 갑옷의 색깔은 무시하고 편제 원리에 대한 설명 위주로 압축 설명한 것이다. 이런 방식의 설명은 우리나라의 삼국사기나 삼국사절요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결국 자치통감이나 삼국사기, 삼국사절요는 수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청사연명광갑이나 철구장, 청영불, 산예기 등이 등장하는 대목을 단순히 갑옷의 색깔이나 모양, 깃발의 종류 등을 언급한 부분으로 간주, 불필요한 부분으로 생각해서 생략해 버린 셈이다.
하지만 수서의 해당 구절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당시 수군 기병의 특성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몇 개의 단어가 등장한다. 언뜻 더 명쾌하게 설명된듯이 보이는 자치통감을 무시하고 다소 산만하게만 보이는 수서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每軍大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置一纛. 十隊爲團, 團有偏將一人. 第一團, 皆靑絲連明光甲、鐵具裝、靑纓拂, 建狻猊旗. 第二團, 絳絲連硃犀甲、獸文具裝、赤纓拂, 建貔貅旗. 第三團, 白絲連明光甲、鐵具裝、素纓拂, 建辟邪旗. 第四團, 烏絲連玄犀甲、獸文具裝、建纓拂, 建六駁旗.
이 구절에 등장하는 구장(具裝)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단어지만 중국의 12권본 한어대사전에서 馬的鎧甲이라고 설명한데서 알수 있듯이 중장기병용 말갑옷을 의미하는 고전적 용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수서에 등장하는 철구장은 철제 구장, 수문구장은 가죽제 구장의 일종이다.
정리하자면 고구려 침략에 출전한 수나라 24군 소속 각 군의 기병 제1단은 철구장, 기병 제2단은 수문구장, 기병 제3단은 철구장, 기병 제4단은 수문구장이 된다. 다시 말해 당시 수나라 침략에 동원된 24군에는 각 군마다 철제 말갑옷을 착용한 중장기병 2개 단(단은 1000명으로 구성), 가죽제 짐승문양 말갑옷을 착용한 중장기병 2개 단이 편성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구장은 중국 전통무기를 공부하는 사람에겐 익숙한 단어지만 일반적인 역사가들에게는 별로 친숙하지 않은 용어인 탓에 수서 권8의 해당 구절의 중요성이 지금까지 별로 부각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대목을 철로 된 장비, 짐승무늬 장비 식으로 이해하고서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각 군마다 동일한 편성이므로 결국 제2차 고수전쟁 당시 주력부대로 출전한 24군에 소속된 수나라 기병의 100%가 중장기병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각 군에 소속된 기병이 4000명이므로 무려 9만6000명의 중장기병이 출전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24군만으로는 113만명을 채울 수 없으므로 24군 외에 추가 병력이 대규모로 존재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중장기병의 총수는 9만6000명을 훌쩍 넘어설 가능성마저 있다.
그러고 보면 수나라의 양제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당시 수나라의 기병 병종 특성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봄직하다. 중장기병 자체가 장거리 원정에 적합한 병종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뿐더러 고구려 영토 곳곳에 자리한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이상적으로 활약할만한 병종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한줄 요약 :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침략 당시 (24군 소속) 기병 주력은 100% 중장기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