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먼지 쌓인 노트북을 연결하여 자판을 두드려보네요.
20여년 전 두드려본 자판인지라 머릿 속 기억의 자판은 햇갈리는데 생각을 비우니 손가락이 기억하는듯 잘 찾아 두드립니다.
오늘은 주문한 물건을 찾으러 나왔다가 3시 부터 한잔하여 현장이 아닌 집으로 들어와 이렇듯 한가한 여유로운 시간으로 저녁을 보내네요.
오래 전 부터 법..도..진리..신..죽음 ..사후 세상..업..인연..종교..등 인간의 인식 사유로 이해불가한 그런 내용들에 대하여 긴 글 올려볼까 생각한적 있었지요.
그런데 시간 흘러 생각하니 모두 부질없는 제 망념이었다는걸 압니다.
그런 한가한 생각에 다시금 망념이 떠오르며 이런 생각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겐 어떨까.? 라는 망념이 솟아납니다.
가령...
우리의 인식이 없다면 보고 듣고...하는 오감의 인식은 무엇일까.
그런데 우리는 인식이 있고 인식하는 주체가 있는걸로 알고 배워왔지요.
이것을 당연히 그런 현상으로 알고 추호의 의심도 해본적 없지요.
물론 저도 44살까지는 그렇게 알고 수많은 선지식들과 대론하며 참구하며 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식은 대상과 함께한다는데 왜 우리는 대상이 존재하여도 인식하지 못할까.
눈 앞에 존재하는 사물이 있는데 눈이 떠 있어도 보지 못하고..
간지럼 많이 타던 내가 술이 취해 잠들면 발바닥을 긁어도 모르고..
이때 인식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잠이 들어 오감의 대상도 없는데 홀로 꿈 여행을 하며 또 다른 세상에서 활동하는 인식은 무엇인가.
깊은 잠에 들어 세상사 모르는 상태의 인식은 무엇인가.
죽음을 맞으며 오감[안이비설신]이 사라지는걸 느껴가며 호흡도 멎는걸 알아차리는 인식은 무엇인가.
이미 현실 경계를 탈락한 오감이 대상으로 존재치 않음인데 주체도 없이 오감의 대상도 없이 인식하는 그런 현상은 무엇인가.
....................
축약 축약 축약해도 한 없이 많은 의문이기에 대도무문이라 했나봅니다.
온갖 고행과 온갖 사유와 온갖 통찰력을 동원해도 알 수 없어 길 없는 길이라 했나 봅니다.
사람들은 존재치 않는 현상을 잘못 알아 고집하는 세월을 흰 머리가 가루가 되도록 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억겁전 이전에 존재하던 과거 칠천불...
수많은 무명의 성인 중생...
인간 싯다르타 성인 중생...
인간 달마 성인 중생...
인간 조주 혜능 경허 가섭 아난 앙굴리마라 ...
그리고..
주인공 외치는 사술로 휘어잡는 중생 성인..
참나로 휘어잡는 중생 성인..
초불로 밥벌이하는 중생 성인..
원음으로 빌어 먹는 거지 중생 성인...
윗 분들 모두 한치의 차이도 없이 평등하며 다름이 없이 천당에 갑니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스스로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그 차이는 ..
모르는 사람은 그냥 모를 뿐이고..
아는 사람은 일체지를 투과하여 무불통지라 합니다.
오신통을 하고 육신통을 하여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습니다.
그 중 법에 대한 타심통이 있습니다.
말하는 상대의 참 됨과 거짓을 환히 알기에 오신통에 속하는것이지요.
숙명통....등 등 모두 같습니다.
마음은 곧 법이며,
법은 곧 우리네 생각입니다.
우리네 생각은 온통 마음이라 통칭하며 선이라 합니다.
선은 곧 마음이며 부처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팔아 종교로 포장하여 착취에 일삼는 밥버러지들에게 속아 맹신도가 되고 맹목적 광신도가 됩니다.
어떤 선객도 어떤 성인도 호객하여 법을 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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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좋고 배움이 많아 근기가 있는 학인을 제접하면..
무엇이 부처인가.?
네 놈 그대로 부처다.
아둔하여 생각이 느리고 게으른 학인을 만나면...
무엇이 부처입니까?
네 몸을 세밀히 관찰하여 마음의 흐름을 살펴라.
천재적 통찰력을 가진 근기를 만나면....
무엇이 부처입니까?
산이 물 위로 흐르는구나.
일면불 월면불이다.
이미 일을 마친 근기를 만나면...
학인이 묻지도 않지만 시험을 합니다.
꽃을 들어보이니....그저 스승을 향해 웃을 뿐...
이것이 누진통을 이룬 각인들의 경지입니다.
일체중생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지요.
이렇듯 법을 설함에 호리유차의 틈을 용납하지 않기에 지금도 면면히 법을 이어오고 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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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마약과 같아서 어리석을수록 집단에 매몰되어 자신도 망치고 남도 망치게 합니다.
종교의 속성은 사술을 휘둘러 회유를 통한 맹종을 강요하여 맹신을 유도합니다.
별 것도 아닌 개 밥 그릇을 황금 도자기인양 우러러보게 합니다.
성령 신 조물주 성품 전지전능 부처 하나님...
그게 모두 우리네 마음을 지칭하는것인데 온통 속아서 언어의 상에 매몰되어 노예가 됩니다.
부처님을 쳐 죽여 개밥으로 던져준다던 옛 분들의 기백이 부러운 지금의 세상입니다.
옛 분들의 말씀에 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경책을 하며 말 타고 산을 훑듯 그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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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탄. 감사합니다 제가 가장 의문을 갖는 것은 우주 전자기/생명력/에 어떻게 우주의 식(알식자) 알음알이가 침투?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작용도 이 자기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보통 마음 작용이라 하면 일초에 수만 수십만번?
작용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보이고 들리는 객관 현상 이 외부에 이전부터 존재했고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결론 부터 말하자면
산을 보면 산이 있고 물을 보면 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산을 보기 이전에는 산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문제이지요.
산의 형상이 드러나는 그 자리에는 산의 형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산을 보기도 하지만 보는 형상에 끌려가지 않으면 목전무법, 본래자리 그대로라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눈앞에 다 있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눈 닿는곳, 오감이 닿는곳 그 자리가
부처가 출현하는 그자리지요.
그래서 수행도 어떤 인위적인 형식에 얽메이면
그 자체가 어긋나 있는거지요.
수행이란 눈앞에 나타나는 그 현상의 이전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화두라면 언어 이전을 응시하는 것이고요.
그 응시력이 회광반조이지요.
사물이든 생각이든 그 드러나는 그 자리를 돌이켜 보는 그 놈을 보면 그 자리가 본래 여여한 자성불 이라는 사실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현상이 본래부터 있는것이 아니고 마음에 나타난 사실이다.
마음이 작용을 돌이켜 멈추면 현상도 마음도 없다. 작용하면 만법이 드러난다.
이 자리를 알아야 주체적인 생각도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입니다.
@무지랭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겠지요.
그 길을 자세히보면 할미꽃도 피고 장미도 피고. 다양함과 장엄감을 같이 음미하기도 하구요.
로마만 찾다보면 소소한 일상과 삶의 아기자기함이 묻히지 않을까요.
무지랭 님과 함께하니 적이 동지요, 동지가 적이다는 것을 느끼며 배울 상대가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soma 그저 무지랭이의 꿈이라고 보시면 되지요.
고맙습니다.
대승기신론의 진여문과 생멸문을 주제로 본다면, 어떻게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가는 것인가? 에 대한 것이 공부입니다.
문제는 가는 도정인데, 각자의 근기에 따라서 법을 사용함으로써 진여문을 가리킵니다. 한편에서는 자유자재로 펼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열반 구분없이 학교 교과과정처럼 한반에 몰아 넣고 수업합니다. 저야 이쪽 업계에 몸을 담은지가 좀 되서 뭔 말을 해도, 대충 짐작하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뜬구름잡기가 되버리고, 도는 알듯 모를듯 구름위에 숨고 사람들은 닭좇던 개마냥 혼돈에 빠집니다. 더구나 진여문의 언어방식은 일반인에게는 신선노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질감을 줍니다.
뭔가 알듯말듯 판타지에 빠지고 구체적인 삶속에서 적용이 안되는 병폐가 만들어집니다.
소위 평상심이 도라는 의미를 아무나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지경까지 빠지게 됩니다.
평상심이 도라고 하면 안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방편이 사실 미혹에 빠지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말을 하든 알아먹을 사람은 다 알기 마련이고, 각자가 가진 보따리에 기연이 맞는 이가 그 보물을 취하는 법.
다 정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생사를 여의는 것만을 말한다면, 생사속에 있는 우리들의 문제는 부질없는가?
이 두차원은 극단으로 치달아 모 아니면 도인가?
무명이 깨달음을 막고있고 미혹에 빠져 있다면 왜 우리는 그 상태에 있는 것인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왜 이런 환상에 빠져 자신을 잃어버리는 가?
흔히 최고로 좋은 시절을 보낸다고 표현하지요.
soma님이 지금 그런 세월을 지나고 있는 중 이랍니다.
무르이꼬 익으면 툭 터지듯 그런날이 올겁니다.
다만 옥상옥 석상석하는 그런 앎의 놀이가 멈추어질때 비로소 회광반조하게 되니 어느날 그런 시절이 도래할겁니다.
법은 양단을 포섭치 않고 배척하지도 않으니 앎의 이해로 구하는 습이 멈추어지면 비로소 불이법을 인연하게 되니...이것이 생멸문과 진여문이 함께하는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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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신론에서 일심이문을 세운것은 가설이지요.
논설로 풀자니 어쩔수 없이 나누게된 자비심의 발로이지요. 다만 이해가 필요할뿐 그이상의 분별은 득이 없다고 봅니다. 하나의 소 고삐와 같은 것이지요.
눈앞에 펼쳐진 성색 밖에서 진리를 따로 구한다면 정처없는 먼 풀밭길을 가야겠지요.
가고 오는 이 일상 그대로
허공에서 허공으로
한걸음이 항상 그 한걸음 그대로인 것이지요.
펼쳐진 그대로 형상 아님을 보는거지요.
눈뜨면 다 이렇게 형상인데 무엇이 형상아닌가? 이렇게 돌이키는거지요.
이런 말이 생소한 분들도 있겠지만
이곳에 오신 분들은 금방 아시리라 봅니다.
허공에서 허공을 걸으면서 현실 문제도 분석하시면 피로도 덜하지요.
무를 이야기하면 무로 받아치고, 유를 이야기하면 유로 맞서고.
유를 이야기 하면 무로 받아치고, 무를 이이기하면 무로 맞서고.
전 이런 구도가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무를 이야기하면 무로 대응하고, 유를 이야기해도 무로 대한다면?
@soma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한것이지요.
말하다 보면 그럴때가 있어요. ㅎㅎ
부처가 나오신이래 2500여년이 흘렀건만 세상은 더 교묘해졌고 사람의 심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인간사에서 과연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부처님이 몇분 더 계신다면 인간사가 달라질까 결핍은 욕심을 낳고 권력을 독점하게 하고 개체본능은 생존이라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사파리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인간사입니다. 아무리 깨달음이 있어도 속세를 등진 제한된 개인의 각성에 불과합니다. 현실로 돌아오면 여지없이 깨져 버리는 환상입니다. 결핍속에 평안을 얻는 방편이 성인들의 말씀이고 권력자들은 이를 이용하지요 인지가 부족할때는 가르쳐 다스렸지만 교묘한 세상에는 부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날 것
으로 봅니다. 세상은 결국 의식주의 변화로 인간사가 변하리라 봅니다. 성인들의 말씀으로 세상을 구할 수는 없고 결국 행에 의해 의식주가 변하고 사고도 변해 다 함께 변할때 사회가 변해 인간사가 발전하고 사고가 변하는 것 같습니다.
@cibies 거지의 나라 조선이 플라즈마 즉 이온의 세계를 정복하고 곳간 인심으로 보살도를 행하고 있습니다. 오행의 토8>화7>목65>수4>금3은 빅뱅의 과정인데 부처8>보살7>연각65>성문4>중생3차원계로 나눠 적용하면 화는 이온 즉 플라즈마로 보살도를 행하게 돼 있는데 악마로 치부되는 북한이 인본주의를 내세우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란적이 있었고 하늘의 이치가 한치 틀림 없음을 알고 또 한번 놀라게 됐습니다.
@cibies 이미 조선의 현자들은 결핍을 해결 못해 리셋을 일삼는 유대와 달리 천년을 책임지고 만년을 보장하는 인간살림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참으로 무서운 얘기입니다. 3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우선 먹고사는 민생고 문제인 물질과 물욕 즉 에너지를 해결하였고 다음으로 지구의 지하 바다 그리고 우주까지의 진출로 공간의 문제까지 해결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를 유지할 지속 기능한 사상과 종교의 통합을 사람중심의 주체사상으로 해결하였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천년를 책임지고 만년을 보장하는데 방해가되고 막아선다면 무자비한 징벌로 뿌리까지 벌초한다는 무서운 선언인 것입니다.
@cibies 재미있는 말씀 많이 나누시는데 끼고 싶어 한 말씀 올렸습니다.
@cibies 저도 아직 급이 안되서 세상일에 나서지 않고 견해도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르면 지켜보는 자세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좋은 견해에 제가 알지 못하여 한 마디 섞지 못함이 아쉽습니다.
@soma 별말씀을... 겸손하십니다.
@cibies 살다보니 모르는 것은 지켜보는 것이 허물이 덜하다고 느껴집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아는 것도 모르고 싶은 데, 아직 알지 못해서 언제 모르게 될지 진도가 안나가네요.
사람은 생사가 무엇 보다도 중하지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면 그 보다 더 중한 일은 살아가는 일이지요. 그러다 보니 태어난 일은 까마득 하고 죽는 일은 아직 모르겠고 그러지요.
그런데 사실 태어난 일은 생각도 안했으니 중하다 할것도 없는데 문제는 죽는일이 머리가 아프지요. 그러나 죽는일도 태어난일 처럼 누구 맘대로 되는것이 아닌데 머리가 아픈것은 무엇때문인가 하는 문제가 있지요.
죽는 일도 태어나는 일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잘 살다 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저의 관심은 도학과 현상세계의 연결입니다. 도학이 세상일이고, 세상일이 곧 도학이 되는 것.
도학의 역할은 옷의 첫단추를 바르게 첫구멍에 맞추어 세상이 혼미에 빠지지 않게 한다라고 봅니다.
이게 안되면 말법시대. 미혹세상이 열리게 되구요. 그래서 도인들의 역할이 막중합니다.
@soma 그 일은 뜻과 실천이 병행 되어야겠지요.
@무지랭 요새 표현으로 유리바닥과 유리천장으로 세상을 보호하여 혼돈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페미들이 자기들이 보호받고 있는 줄을 모르는 게 아이러니입니다.
@soma 페미의 의지는 자체 프레임 안에서는 한계가 있겠지요.
@무지랭 예를 들어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빛을 주고, 세상만물을 지키는 힘이 됩니다.
그 안에서 세상은 평안을 찾는 것이지요. 보호하는 법이 없다면 아귀지옥으로 세상은 변합니다.
그게 법의 힘이요,또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간사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실 세상도 남자들의 보호하에 전쟁이나 기아, 질병 등에서, 또 가장의 보호막속에서 가정이 지켜지는 것인데.
요새 페미세상은 가정과 국가를 보호하는 가장의 역할을 멸시합니다. 그 구조가 페미의 유리천장 타령으로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