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반대쪽 텅빈 학교건물 너머 삼엄한 경비가 엄중히 사방을 감시하고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임시 막사 안의 집무 책상에 총장은 지금 심각한 얼굴로 앉아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는 중이다.
총장이 그새 미쳐버린 것일까? 막사 안은 군용 침대와 집무 책상, 총장 외엔 아무것도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총장은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다.
아무리 봐도 허공밖에 안 보이는데 삿대질을 하고 천장을 향해 눈을 찌푸린다.
사실 교묘하게 색상 위장술로 꾸며진 막사 후편 벽 쪽에 개인백병전엔 막강하지만 은밀기동암살은 잘 모르는 총장의 뒤의 안전도모를 위해 총장의 측근이 경호업무를 서고 있는 것이다.
총장은 자신의 막역지우이자 최측근인 그와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밀양 연합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실상 열띤 토론이 되어가는데, 우락부락한 총장과 달리 은밀기동을 담당하는 은신경호원은 성격도 음습해서 차분히 얘기를 하니까 성립이 안 된다.
무조건 밀어붙이기로 정평이 나있는 총장이다 보니 법원이고 지랄이고 내려가서 해체시키고 천벌내리고 각개격파하고 병신만든 뒤 경찰에 주고 오자고 거품을 무는데, 그의 측근은 조용히, 아직 본 가(家)의 하명이 있지 않고, 센터도 협의중에 있으니까, 나서서 선수쳤다가 좋을지 나쁠지도 확실치 않은 일에 발벗지 말자고 얘기하고 있다.
사실상 확률적으로 봐도 전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 이 일에 관련사업한다는 사람이 나서야지 않겠느냐 하고 치고 나간다면 득이 될 게 높다. 하지만 99퍼센트는 아닌고로 쑤셔놨다가 나중에 뻘손해보면 우리만 개출혈이다, 이거다. 요즘은 또, 법정 인정 이전 인권이라는 게(맞나?) 있어서 혐의만 보고 이런 고이연놈 하고 냅다 찌르면 살인죄란다. 옛 옥 장군 임기 땐 정의의 철퇴입니다하면 장군이 여론잡아줘, 경찰잡아줘, 타고 가라고 차까지 잡아줘, 다 쑤셔밟으면 됐었는데, 요새는 국민이 유식해져서 잘 안 먹히니까 최소 2주만 보자는 그런 말이다. 덧붙여 경호원은 이런 말을 했다. 또릿또릿하고 몸 빠른 애들 몇몇 박았으니까 머지 않아 주동자, 혐의자, 법정피의자, 동조자 할 꺼 없이 다 나올 꺼라고. 일단 명단만이라도 확보한다는 것도 언제라도 출동 준비할 수 있다는 거니까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거품물던 총장도 입이 씨익 귀에 걸린다.
(현재 밀양여중생집단성폭행사건은 몇몇 판결이 완료되어 복역중인 수명과, 강간! 혐의가 있음에도 훈방조치! 를 받는 등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본문의 사건은 인용된것**)
업무 관련 얘기가 끝난 눈치를 보고, 경호원이 슬며시 가장 중요한 얘기 중 하나를 꺼낸다.
"대체 언제쯤이나 총장의 술잔을 제가 한 번 올려드릴지..."
순간, 총장의 거대한 덩치가 움찔했다.
사실 총장은 유성회 통합 후 어떤 그 사건(?)을 계기로 범죄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경찰과 관련 분야 전문의의 상담 치료를 통해 그 좋아하던 술도 끊은지 몇 년 되가는 것이다.
너무 괴로워 해를 세는 것은 관뒀다.
당가(黨家)의 차기 당주가 될 사람이 너무 정무정도(正武正道)를 걸어도 앞날이 가시밭길이다. 본 가(家)의 득을 위해선 아주 가끔이라도 필요에 따라선 원한다면 반드시 해야만 한다면 살인인들 못할쏘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총장은 경호원도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의 (공식적인 입장에서의)범죄는 없이 경찰과 작업을 해나가게 됨으로써, 본 가(家)의 스토리 전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경호원은 총장의 나이를 생각, 술을 좋아하니까 계속 옆에서 부추겨서 마시게 하면, 꽉막힌 법의식의 구석에 조그만 구멍이 생긴 셈이 되니, 앞으로 조금이나마 총장이 사업하시기가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 것이다. 총장은 무슨 압박심리같은 것처럼 아예 스스로 금제를 걸어두듯이 하니까.
"지구상에 몇 병 안 된다는 승자의 술, 나폴레옹 돈 페리뇽을 두 병 구해뒀습니다."
성격이 음습해서 평소 좀 위트있는 말은 꺼낼 눈빛도 안 만든다는 경호원이 살짝 멘트도 넣어주며 속삭이자, 총장의 등은 더욱 심하게 떨렸다.
국가와 민족, 나아가서 세계를 위한다는 자신이, 청소년인 주제에 술에 또 다시 입을 댄단 건 노 국가원수와의 약속도 스스로 깨는 꼴이요, 자신의 품에 안겨 끝내 눈을 감은 민휘의 생애 자체를 배신하는 거니까.
하지만 속이 쓰린 것도 사실이다. 입엔 이미 군침이 고여있고, 목은 벌써 레디(Ready)하고 특유의 달콤씁쓸한 한 모금이 지나가길 목젖이 튀어나가라 기다리고 있다. 머리 속엔 딱 한 잔 만, 딱 한 잔 만, 귀에는 경호원의 딱 한 잔 만 하는 소리가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홀로 들어오고 있다.
"자, 마감이 임박했습니다, 총장.... 안 드시면 팔든지 제가 오늘 저녁 연회 때 다 마셔버릴껍니다~~?"
순간, 총장의 온 몸 떨림이 딱 멈췄다. 그리고 총장 특유의 살기가 천천히 등에서 피어오르며 그의 어린애 혹은 인간같지 않은 덩치가 눈으로 보기에 이상하게 점점 커지는 거 같다.
경호원도 물론 알고 있다. 이 순간, 자신의 본가를 위해 목숨 바치겠다는 충성심 따위와는 상관없이 이 괴물의 손에 생명의 등불이 왔다갔다 할 것임을. 하지만 그게 길이라면, 뚫어야 될 길이라면, 응당 당연히 충성을 바쳐야 되는 것이다.
마침내 총장의 앉아있어서 굽었던 등과 어꺠가 일(一)자로 곧게 펴졌고, 한 마리 괴물이 막사 안의 공간에 강림했다.
분명히 인간, 사람가죽으로 된 눈 코 입 얼굴인데 저런 악마같은 인상이 풍기게 될 수 있을까... 경호원은 본 가(家)를 위해 목숨 바치겠다 선언했지만, 죽는 것과 이 살기를 받는 것은 전혀 틀린 느낌이다.
"니....이 자슥..."
단 두 마디가 푹푹 찌는 한 여름 오후의 누런 막사 안을 시퍼렇게 얼어붙게 만든다.
경호원은 입을 열면 김이 서릴 듯, 손을 움직이면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듯, 눈을 떼면 그 즉시 목이 날아갈 듯 눈을 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본능적으로 괴물의 입을 보고 있다.
"피식."
순간, 시베리아 얼음 벌판같던 막사 안이 천국의 초월적 존재의 따스한 손이라도 들어온 듯 따스해졌다.
"니가 내를 위하고, 또 내 종가를 위하는게 그렇게 나를 돕는거라 생각하고 하는 말이지만, 다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는 법. 차기 당주가 될 사람이 그깟거 묵고 못 묵고 법이고 뭐고에 매달릴 사람이가. 내가, 응? 으핫핫핫핫!!!"
간신히 기운을 차린 경호원은 다리에 힘을 꽉 준 채 따라서 배가 쩡쩡 울리게 대차게 따라 웃었다.
아직 못 미더운 부분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당당하고 괴물같고 유능하며 든든한 이 차기당주 앞에선 같이 대차게 웃는 것이다.
그리고 머릿속 저 바닥 구석진 어두운 곳에서 다음부턴 안건은 서류로 제출할까하고 실밥같은 생각이 피어올랐지만 재빨리 짓뭉게버렸다.
그렇게 전국통일 천하제패 연합회의 임시 막사 안에선 당당히 전설로서 길이 남을 하나의 역사 자체가 승천할 준비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