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3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주윤호 진사의 자료를 찾아 강화도 답사 이틀째이다.강화군청 문화관광과 이지영팀장을 사전에 연락하여 만났고 강화tv윤용환 사장님과 강화열린신문의 김기헌 대표님을 만나서 같이 동행하여 답사를 가기로 하였으나 두분은 안나오시고 (사0인천문화재보존사업단에서 민경수,남궁순 두분이 답사에 참여하셨다.백범선생이 방문하셨던 황부잣집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안주인 마님이 계셨다.
전날 방문했던 백범 김구선생이 서당을 열었던 터에 세워진 편직공장(현재 카페)의 외관이다.
황부잣집의 외관과 안주인과 필자(백범 선생이 하룻밤 주무신 고택이다.올해 3월정도에 고택체험을 하는 공간으로 거듭 변신한다고 한다)
인천감옥을 탈옥한 이후 고향을 들른 백범은 1900년 봄 숙부로부터 농사를 지으라는 엄명을 받았으나, 인천감옥에서 탈옥을 도와주고자 했던 김주경을 찾아서 김두래라는 가명으로 강화도의 김주경댁을 방문한다 .그 때 김주경은 집을 떠난 지 4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고,김주경의 셋째동생인 김진경의 집에서 서당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치며 3달을 생활한다.
3달후 유완무를 돕던 이춘백이 방문한것을 알고 유완무를 만나기 위해 함께 강화를 떠났고,한성 마포 공덕동에 살던 유완무의 동서인 진사 박태병의 집에서 유완무를 마침내 만난다.
얼마후 유완무는 동지인 논산 연산 광이다리(고양리와 고양교가 있다) 앞 도림리에 살던 이천경(2016.2.12 논산문화원 향토사연구회장인 조중헌님께 자료추적을 부탁드렸다)에 소개편지를 내서 찾아가도록 하였고,이천경은 무주에 살던 이시발,이시발은 지례군(현 김천시) 천곡에 살던 성태영에게 소개글을 쓰고 노자를 주어 방문하도록 한다.그 직후 지례군을 방문한 유완무와 성태영에 의해서 김구는 김구金龜라는 이름을 얻는다.자는 연상,호를 연하로 ...그 직후 진사 주윤호(확인한바 주윤창 선생이 자금을 마련해주엇다고 한다)가 무주의 유완무에게 백동전 4천냥을 보냈는데 그것을 온몸에 둘러 감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그 직후 진사 주윤호를 찾아서 1주일을 머무르셨다고한다.
내가 사직동에 있는 동안에 유인무와 주윤호가 다녀갔다. 그들은 예전 북간도 관리사 서상무와 합력하여 북간도에 한 근거지를 건설할 차로 국내에서 동지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자기들이라 하여 밤을 삶고 닭을 잡아서 정성으로 그들을 대접하셨다. 우리는 밤과 닭고기를 먹으면서 연일 밤이 늦도록 국사를 이야기하였다.
유, 주 두 사람에게 듣건대 김주경은 몸을 숨긴 후로 붓장사를 하여서 수만 금을 모았다가 금천에서 객사하였는데, 그 유산은 주경이 묵던 주막집 주인이 먹어버리고 주경의 유족에게는 한 푼도 아니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김주경이 그렇게 돈을 모은 것은 필시 무슨 경륜이 있었으리라고 말하였다. 주경의 아우 진경도 전라도에서 객사하여서 그 집이 말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심히 슬퍼하였다.
<백범일지에서>
황부잣집의 원주인은 1900년대 초에 하와이로 인력송출을 갔던 사람인데,하와이에서 돈을 벌었고 나중에 1930년대에 고향땅인 강화 남문안 이자리에 기와로 지은 집을 지었다고 한다.그리고 백범은 광복뒤 환국하여 강화를 방문하였을 때 김진경의 집터인 서당터를 찾았으나 건물은 없어졌고 안쪽에 황부잣집이 있어서 여기서 숙박을 하신 것이다.
황부잣집의 난간을 비교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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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과 강화도와의 인연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잘못 씌여졌다.내가 본 자료에는 유인무 또는 유완무로(백범일지),유안무(김창숙문존),공훈록에는 '유완무'로 되어있고 '유환무'라는 자료는 못봤다.그리고 이왕 안내문을 쓸려면 백범과 심산 김창숙 선생의 스승역할을 한 성태영선생이름도 함께 기술했으면 얼마나 좋을까?이시발,이천경 선생이름도 함께 말이다.백범을 도운 분들의 후손도 모르고 관련지역,관련단체 사람들이 관심이 없지만,그 분들이 백범을 돕기위해 하신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유환무를 검색해보니 하나도없다.백범일지를 안읽어 본 사람도 분명 여기와서 포토존에서 저 안내간판을 사진찍고 블로그나 카페등에 올릴텐데 인터넷에 없다...그만큼 우리는 독립운동 심지어는 백범까지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예능,육아,전세탈출,부동산,맛집,볼거리,진보와 보수등에 관한 관심의 100분의 1만 있어도 참 좋을텐데 말이다.
진보좌파면 뭐하고 보수우파면 뭐하노?백범 김구가 고려시대에 스님들이 먹던 과자이름인줄 아는 국민들이 많은데 말이다.
강화군 강화읍 남문로 7번지.현재 카페가 당시 서당터라고 강화군 공무원인 이진경씨는 설명한다.
전날 방문했던 주씨 문중의 주경운님으로 부터 설명을 듣는 저와 함께한 답사단.강화군청 공무원인 이지영팀장,인천문화재보존사업단 민경수님,황부잣집 안주인,오른쪽 끝이 인천문화재보존사업단 남궁순 팀장
강화도 분들도 여기를 처음 방문하였다.바로 이집에 주윤호,주윤창 두 형제가 살고 잇었는데,백범 선생이 여기 행랑채에서 1주일을 머무르셨다고한다.주감찰댁
주윤호,주윤창 형제의 집이었다.지금은 주윤창 선생의 증손부(曾孫婦)가 살고 계시는데 주경운님이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하신다.
안쪽에서 본 행랑채 건물
주윤창 선생의 중손부가 여기 살고 계시고 시동생 되시는 분이 근처에 살고 계시길레 잠시 뵙자고 오시라고 하였더니 아래와 같은 자료를 내놓으신다.주변의 모든 증언을 들으면 주윤창 선생이 을미사변이후 경술국치와 기미년까지 많은 활동을 하신 것이 드러난다.그러나 보훈처는 그런 자료를 보고 코방귀도 안뀐다.
백범을 인천감옥으로부터 빼내기 위해 도와주던 강화의 김주경과 대원군과 얽힌 관계.대원군은 김주경을 군향고직이로 사람을 썼다고 한다.
증언을 하시는 분은 주윤창 선생의 증손인 주영원씨이다.
주윤호 진사는 백범이 방문하였을 때 이집(주감찰댁)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형님인 주윤창 선생과 함께 살고 있었고,유완무에게 보내서 김구가 온몸에 감고 서울로 갖고 올라갔던 백동전 4천냥은 주윤호의 형인 주윤창 선생이 벼 2천석을 팔아서 마련한 돈이라고 후손들은 증언을 하였다.(주윤호 진사의 증손인 주영목씨의 증언)
주윤창,주윤호 형제분의 집(주감찰댁)에 100년정도 된 농짝이 하나 있다. 아마도 주윤창 선생의 부인이 혼인할 때 갖고 온것인데 인근 섬에 살던 안씨성을 가진 동학도의 우두머리가 와서 돈많은 집을 털려고 하며 도끼로 농을 부수다가 실패했다는 장면이다(동영상).동학란이 일어날 때가 1894년이다.
주윤창,주윤호 선생 집터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