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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식약청, ‘쓰레기
만두’ 제조업체 명단 발표
2004년 6월 온나라를 ‘쓰레기 만두’열풍
으로 내몰았던 쓰레기 만두 제조업체 및 유통업체가6월10일 적발돼 명단이 공개
됐다. 식약청은 이날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쓰레기만두 사태’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
하고, 불량 만두소를 사용한 18개사와 조사
를 끝내지 못한 7개사 명단을 공개했다.
이 중에는 CJ와 동원F&B 등 5개 대기업
도 납품받을 것으로 밝혀져 국민의 분노를 더했다.
쓰레기 만두는 몇몇 양심없는 식재료 납품업체 등에서 단무지 제조업체에서 쓰고 버린 자투리나 썩은 무 등을 공짜로 받아 만두소 재료로 만들면서 시작됐다.
게다가 이 때 사용된 물 또한 폐우물 등
에서 퍼올린 비위생적인 물이었다.그들은 이렇게 불법 제조한 만두속을 20kg과 4kg 포장용기에 담아 kg당 400~800원에 팔았다.
이들이 사용한 물과 완제품 등을 국과수에 의뢰한 결과, 식중독의 원인이 되는 세균과 대장균 등이 다량 검출됐다.
식약청은 이날 ‘쓰레기 만두’ 적발 업체 명단 발표와 함께 모든 제품을 폐기 대상
으로 지정했다.
이후 21일 대검찰청은 전국 부정식품
사범 특별단속 전담 부장검사회의를 열고 식품사범에 대해서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보건범죄단속
에 관한 특별조치법’ 상의 가중처벌 조항을 적용해 처벌키로 했다.
➡️2015년‘구원왕’ 리베라 아들도 MLB 마운드에 서
➡️2015년전몰군경 미망인회 19명 선정… 어머니들이 뽑은 ‘장한 어머니’
➡️2010년 나로호는 나로호는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오후 5시 1분 발사됐다. 하지만 항공우주연구원 발표결
과 마하 1에 도달한 나로호는 발사 137초 뒤 고도 70~130km에서 통신이 두절됐으
며 추락하였다.
➡️ 2008년 미국산 쇠고기수입 반대 시위 최고조. 서울 광화문 일대에 약40만명 이상.
➡️2005년한미 정상회담(한국시간 6월 11일) 워싱턴서 개최
➡️2004년흑인 음악의 거장 레이 찰스 사망
흑인 음악의 거장 레이 찰스 (74)가 10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이달에 공연을 앞두고 있었으나 간질환에 따른 합병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가수였던 찰스는 솔(soul)을 기반으로 로큰롤, 블루스, 컨트리, R&B, 가스펠, 재즈까지 거의 모든 영역의 음악에서 빛을 발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레이 찰스 뮤직’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그의 작곡과 연주력보다 반짝인 것은 블루스풍의 강하고도 독특한 노래 솜씨였다.
그가 부른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Georgia On My Mind)’, ‘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 같은 노래들은 지금껏 사랑받고 있다. 이런 음악들로 찰스는 그래미상을 12회나 받았고 엘비스 프레슬리, 어리사 프랭클린, 스티비 원더, 밴 모리슨, 빌리 조엘 등 숱한 뮤지션에게 영향을 미쳤다.
찰스는 녹내장으로 일곱 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은 뒤 피아노를 비롯해 클라리넷, 색소폰, 트럼펫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학교를 그만둔 뒤 뮤지션으로 나섰다. 본명 레이 찰스 로빈슨에서 ‘로빈슨’을 뗀 것도 이때였다. 권투선수 ‘슈거 레이 로빈슨’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
1978년 나온 그의 자서전 ‘브라더 레이’에서 그는 “당시 나의 귀는 스펀지였다. 모든 음악을 흠뻑 빨아들였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에 대해서도 “앞이 안 보이는 것은 내 음악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장애는 내게 아무것도 주지도, 가져가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2004년 식약청, ‘쓰레기 만두’ 제조업체 명단 발표
➡️2003년 미국항공우주국(NASA) 화성탐사선 ‘스피릿(Spirit)’ 발사
➡️2003년한국기독교장로회 창립 50주년, 천안서 ‘새역사 희년대회’ 개최
➡️2003년`전설의 섬`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 완공
소설 속에 등장하던 ‘전설의 섬’ 이어도(離於島)가 해양환경·수산물 연구와 태풍 예방을 위한 해양 과학기지로 바뀌었다. 해양수산부 허성관 장관은 2003년 6월 10일 “남제주군 마라도에서 149km 남서쪽에 위치한 이어도에 지난 95년부터 212억원을 들여 종합 해양과학기지를 완공했다”고 발표했다.
이어도는 실제 섬이 아니라 바다 속 4.6m에 감춰진 암초로, 파도가 심할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예부터 제주도에서는 바다에서 실종된 사람들이 산다는 ‘전설의 섬’으로 불려왔으며,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Socotra)호에 의해 처음 실체가 알려졌다.
과학기지는 이어도 남측 경사면에 설치된 철골 구조물을 기초로 수면 위 36m 높이에 400평 규모로 만들어졌다. 기지는 무인(無人) 자동화 시스템으로 운영되며, 첨단 장비를 이용해 해양 기상과 환경·해류·생물자원을 관측한다.
➡️2003년미국항공우주국(NASA) 화성탐사선 ‘스피릿
(Spirit)’ 발사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화성 탐사 로버(MER)’ 2대 중 1대를 10일(현지 시각)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보잉 델타 Ⅱ 로켓에 실어 발사했다.
‘스피릿’이란 이름의 이 탐사 차량은 내년 1월 화성에 도착할 예정이다. NASA는 폭풍 때문에 이 탐사 차량의 발사를 이틀 연속 연기했다. 두번째 탐사 차량은 이달 말쯤 발사된다.
화성 탐사 차량은 바퀴가 6개 달려 있으며, 화성의 하루(지구의 24시간 39.5분)당 약 40m를 전진한다.
이 탐사 차량의 값은 두 대 합쳐 8억 달러(약 9600억 원). 탐사 작업이 끝나면 그대로 화성 표면에 남게 된다.
➡️2002년 박세리 "최연소 메이저 4승"
➡️ 2002년 한일월드컵, 대한민국 vs 미국, 1대1 무승부
https://youtu.be/SoZyBpRFaWs
➡️2001년 키르기즈스탄 제1승동교회 예배당 완공 헌당예배
➡️2001년 이탈리아 연합 내각 출범
➡️2000년 시리아 하피즈 알 아사드가 대통령 사망. 1971년 취임해 30년 가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1999년북한 경비정 6척, 북방한계선
(NLL) 침범
➡️1999년유고 연방군 코소보서 철군
78일간에 걸친 ‘코소보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 유고 연방군이 1999년 6월 10일 코소보에서 철군을 시작하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지난 3월 24일 이래 계속해 온 공습을 중단했다. 유엔 안보리도 코소보 평화 결의안을 채택했다.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난민촌에서는 코소보에서 쫓겨온 알바니아계인들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고, 평화유지 임무 수행을 위해 코소보에 파견될 나토 군은 마케도니아의 기지에서 비상대기에 들어갔다.
코소보 독립을 추구하는 알바니아계 무장세력의 도발과 이에 맞선 세르비아계의 인종청소가 노골화된지 1년 5개월, 나토가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을 응징하기 위해 전투기와 미사일을 동원한지 78일 만이다. ‘코소보 전쟁’ 종식은 외형적으로 나토, 특히 미국의 승리를 상징한다. 유고 땅 코소보가 나토의 수중에 넘어왔고, 나토의 요구사항이 관철됐다. 밀로셰비치는 전범으로 기소됐을 뿐 아니라 그의 권좌도 위태로워졌다.
반인류 범죄 응징이라는 명분으로 주권국가에 대한 침략이 정당화되는 새로운 ‘국제규범’이 확립됐다. 그러나 코소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처뿐인 전쟁이었다. 지상군 투입을 배제한 공습 일변도의 작전은 인종청소를 오히려 격화시켰고 한 국가의 국토와 기간시설을 초토화시켰다. 오폭으로 인한 무고한 민간인 희생으로 나토 작전의 정당성은 훼손됐다.
➡️1998년제16회 프랑스월드컵 개막
➡️1997년한국 최초 프로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씨 별세
한국 최초의 프로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58)씨가 1997년 6월 10일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했다. 김씨는 사망 10개월 전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왔다.
김씨는 한국 프로복싱사를 일궈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였다. 그는 국내 프로복싱 사상 첫 세계챔피언이라는 명예를 얻었고 착실한 인생여정 속에 부를 쌓아 가장 성공한 체육인이라는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하나의 드라마였다. 태어나기 3일 전에 아버지가 사망해 유복자로 세상의 빛을 보았고 6·25때 월남, 이 사회의 밑바닥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고교 2학년 때 동경아시안게임 웰터급서 우승하는 저력을 보인 그가 아마 때 남긴 기록은 87승 1패. 프로 데뷔 후 그는 동양챔피언을 거치며 착실히 전적을 쌓다가 1966년 6월 25일 벤베누티(이탈리아)에게 판정승을 거두며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에 등정했다. 마징기(이탈리아)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준 후 조용히 링에서 물러난 그는 링에서 얻어맞으며 번 돈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
1960년대 말부터 명동서 챔피언다방을 운영하며 돈을 벌어 빌딩을 소유하는 등 탄탄한 재력을 축적했다. 그는 1996년 말 간암선고를 받기까지 골프 싱글수준을 유지하며 건강한 삶을 영위해왔다. 그러나 병마와의 마지막 승부에선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1996년기아자동차 2인승 컨버터블 스포츠카 `엘란` 시판
➡️1994년전쟁기념관 개관
➡️1993년북한, 동해안에서 사정거리 1,000km 미사일발사실험 실시
➡️1993년경기도 연천 예비군 부대 폭발사고
1993년 6월 10일 오후 4시5분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군단 포병훈련장 8진지에서 동원예비군 포사격훈련중 포탄4발이 폭발, 예비군과 현역 장-사병 등 20명이 사망하고 5명이 크게 다치는 대형참사가 발생했다.
포병훈련장 사고현장 주변에서 1993년 6월 11일 군인들이 파편 등 폭발잔해를 수거하고 있다.
포사격 연습도중 1백55㎜ 포탄의 장약에 불이붙어 포탄4발이 연쇄폭발하여, 19명(현역 3명, 예비역 16명)이 숨지고 5명이 크게 다쳤다. 당시 훈련장에는 포 12문이 있었고, 포탄 4발이 터졌는데 이중 3발은 조명탄이었고 1발은 고폭탄이었다. 사고를 당한 예비군들은 967포병대대 소속으로 8일부터 11일까지 동원예비군에 소집돼이틀간 주둔지 훈련을 끝내고 10일 새벽 5시쯤 포병훈련장에 도착, 포사격 실습을 하던 중이었다.
사고 직접적인 원인은 포수요원에 의한 취급부주의 또는 비정상적인 조작이었으나, 좀더 근본적인 원인은 미숙한 교관들의 무리한 훈련진행과 안전관리 소홀인 것으로 지적되었다. 포사격 훈련조교가 포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있지 못했고, 중위계급으로는 예비군 지휘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 부대에 부임한지 2주일도 채 안된 중위가 대위계급장을 달고 예비군 지휘업무를 수행했으며, 적정인원보다 2~3배나 초과해 편성한 훈련조와 훈련일정 등의 원인이 작용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사고 수습을 위해 국방부에서는 사망자는 현역-예비역 구분 없이 19명 전원 국립묘지에 안장, 보상하고 부상자는 완치될 때까지 군에서 치료하겠다고 밝혔으며, 또한 예비군의 숫자 및 훈련시간 동원횟수 등 예비군 운용 제도를 전면 재검토하여 개선책을 마련할 것이라 밝혔다.
➡️1992년아난 판야라춘, 태국 신임 총리에 선임
➡️1991년한국-루마니아, 뉴스교환협정 체결
➡️1990년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에 당선
일본계 이민 2세인 알베르토 후지모리(51)가 1990년 6월 10일 실시된 페루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후보를 누르고 남미사상 최초의 동양계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선이 확정된 후 후지모리는 경제회복에 최우선을 두겠으며, 국민화합을 위해 모든 정당들이 참여하는 거국연립정부를 수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날 투표결과는 페루의 빈곤층 유권자들이 국영기업의 매각 및 대폭감원조치 등을 약속한 요사의 급진적 경제개혁 보다는 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공무원의 해고 및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반대하는 후지모리의 점진적 공약을 택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후지모리후보는 1989년 정치초년생들의 개혁운동 단체인 캄비오(변혁) 90운동을 조직함으로써 정치에 입문했다. `국민생활을 망쳐온 이데올로기와 파당적 정치구조 및 진부한 정치적 행태`의 타파가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후지모리는 리마국립농업대학의 학장에 지나지 않았다. 1960년대 이 대학을 수석졸업한 뒤,미 위스콘신대학 등에서 농업학을 공부한 농학자인 그로서는 정치란 별개의 문제였다. 사회생활이라곤 1980년중반 전국대학협의회 회장과 국영TV 대담프로의 사회자를 맡은 것이 전부였다. 정치문외한인 후지모리가 대통령선거에까지 뛰어들게 된 것은 높은 인플레율과 실업률,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의 부패가 주된 이유였다.
➡️1989년건설부, 일산 등 전국 22곳 738만평을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고시
➡️1987년`6ㆍ10 민주화항쟁`
사료로 보는 6월민주항쟁
전두환 대통령의 5공 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2월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5공 정권은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한다`는 이른바 ‘4ㆍ13 호헌조치‘로 맞서 학생시위를 잠재우려 했으나 민심은 오히려 정권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게다가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개최됐다.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날 간선제 선거를 통해 5공화국 정권을 승계할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 대표가 선출됐다. 같은 시각 대회장 밖.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및 호헌철폐 규탄대회’가 열렸다.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서울의 시위대들 중 일부는 최루탄에 쫓기다 명동성당에 집결, 농성에 돌입했다.
6월 10일의 국민대회는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까지 가세,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항쟁’을 이끌어냈다. ‘6ㆍ10 민주화항쟁’ 결과 집권당인 민정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국민들에게 약속한 8개항의 ‘6ㆍ29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4ㆍ13 호헌조치‘ 또한 철회됐다.
➡️1987년민정당 전당대회서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선출
➡️1985년이스라엘군 3년만에 레바논 철수완료
➡️1984년미국 육군 요격기, 태평양 상공서 목표 미사일 격추
➡️1984년미국 국방성 ICBM을 대기권 밖에서 파괴하는 실험성공 발표
➡️1984년비구니 1천2백여명, 영화 비구니 제작 중지 요구
➡️1984년인도, 시크교 군인 무장 반란
➡️1983년중국항로, 한국비행구역 통과 허용 발표
➡️1982년이라크, 대 이란전에 일방적 휴전 선언
➡️1982년독일의 영화감독 파스빈더 사망
➡️1975년박동명 사건
➡️1975년남대문시장 화재 8백여점포 전소
➡️1974년닉슨, 중동5개국 순방 등정
➡️1973년북한, 휴전선서 대남방송 재개
➡️1969년교황 바오로6세, 5세기만에 신교 연합체인 세계교회회의에 참석
➡️1967년서울대 법대생 6.8부정선거 규탄 데모
➡️1962년10환을 1원으로…2차 화폐개혁
1962년 6월9일 밤10시, 5ㆍ16군사정부가 중대 발표를 했다. `긴급통화조치법`에 의거, 10일0시를 기해 화폐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10환을 1원으로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50환 이하의 소액 은행권과 주화를 제외한 모든 환화(圜貨)의 유통을 전면 금지시키되 예상되는 불편에 대비해 세대당 500원까지는 새 돈으로 바꿀 수 있게 했다.
이로써 `환`으로 바뀌었던 화폐단위가 9년 만에 다시 `원`으로 되돌아왔다. 시행 첫날인 10일은 일요일인데도 은행은 아침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쳤고, 시장 일부에서는 생필품을 사두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영국 화폐회사에 급히 인쇄를 의뢰하는 바람에 `독립문`이 `득립문`으로, `조폐공사`가 `조페공사`로 잘못 인쇄되기도 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재원을 마련하고 부정축재 자금을 회수하며 고리채를 일소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의도였지만 부작용이 속출했다. 물가는 뛰었고 기업활동도 날로 위축돼 사회 불안까지 가중됐다. 장롱 속에 숨어있을 것이라던 검은 돈의 규모도 미미한 것으로 밝혀지자 결국 군사정부는 1개월 만에 봉쇄예금의 완전 해제로 백기를 들어야 했다.
➡️1961년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1년중앙정보부 창설
➡️1961년국가재건최고회의법. 중앙정보부법 공포
5·16 쿠데타의 성공 여부가 아직 불투명하던 1961년 5월 18일, 쿠데타 감행의 주역인 김종필 예비역 중령이 육사 8기 동기생들을 서울 정동의 하남호텔로 불러 모아 중앙정보부 설치를 논의했다. 김종필이 구상한 조직은 미국의 CIA와 일본의 내각조사실을 절충한 국가정보기관이었다.
1962년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그는 미국과 한국 내 반(反)김종필 세력으로부터 본격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5월 21일 제2공화국 때 장면 총리의 직속으로 있던 중앙정보위원회의 이후락 실장으로부터 중앙정보위의 업무 일체를 인수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중앙정보위는 자유당 시절이던 1959년 1월 이후락 소장이 김정렬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아 창설한 일종의 정보기관으로, 미국의 CIA가 넘겨주는 방대한 양의 정보문서 정리를 주요 임무로 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군의 방첩대, 정보국, 첩보부대, 헌병대, 경찰 등의 수사기관에서 불러들인 사람들로 채워졌다. 요직의 김종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김종필은 5월 28일쯤 중앙정보부 창설안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에게 가져가 장도영 의장의 결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장도영 의장이 결재를 보류하자 김종필은 장도영이 자기 사람을 심으려 한다고 의심했다.
법적 절차를 밟기도 전에 사실상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활동하던 김종필은 이미 활동을 시작한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동원하여 6월 1일 장도영의 측근이자 육사 5기인 김일환 대령 등 3명을 구속했다.장도영도 6월 6일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직을 내놓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내각 수반직만 수행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사실상 실권은 모두 빼앗기고 실권이 없는 자리만 차지하게 된 것이다.
장도영이 이처럼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한 가운데 국가재건최고회의는 6월 10일 중앙정보부법을 법률 제619조로 공포해 중앙정보부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정식 발족시켰다. 중앙정보부법은 전문이 9조로 된 아주 짧은 법안이긴 했지만, 무소불위의 권한을 담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북한 및 해외 관련 정보 업무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 군을 포함한 정부의 정보 수사활동을 조정·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박정희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를 창설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김종필의 독주와 주요 보직을 사실상 독차지한 육사 8기의 전횡에 육사 5기가 반발하면서 혁명주체 간에 서로 등을 지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1959년잡지 `야화` 7월호. `하와이근성(根性)시비` 필화로 판금
➡️1957년캐나다 총선거, 22년 만에 정권교체
➡️1952년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진압
1952년 5월 거제도에 수용중인 친공포로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고 수용소장인 도트 준장을 72시간 납치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이 1952년 6월 10일 유엔군에 의해 진압됐다.
1952년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서 발생한 폭동이 6월 10일 유엔군에 의해 진압됐다.
신임 소장 보트너 준장이 이끄는 유엔군은 거제도의 친공포로들을 무력으로 진압 공격하여 30명의 사상자와 85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1시간 반에 걸쳐 6천여명의 미군들과 탱크는 제76포로 수용소로 돌진하여 대부분의 포로들을 생포했다.
공식 보도에 따르면 포로 지도자들은 유엔군의 명령에 따르는 자들은 죽였고, 또한 그들중 많은 수가 자살했다. 이 사건 이후 도트 준장은 종신대령으로 강등됐고, 후임 수용소장으로 보트너 준장이 임명됐다.
➡️1950년북한, 조만식선생과 간첩 김상용 교환 제의
물산장려운동에서 신간회 결성까지, 조만식
선생은 민족의 사표(師表)였다. 오산학교 교사로 출발한 그의 활동은, 열렬한 애국심과 독립정신 속에서 독립만세운동, 국산품애용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선생은 좌우파가 하나가 되는 신간회가 결성되도록 애썼으며, 광복 후 반탁운동과 민족자주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만학도
조만식(曺晩植, 1883. 2. 1~ 1950.10.18) 선생은 1883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엄친 창녕 조씨(昌寧曺氏) 경학(景學)과 자친 경주 김씨 경건(敬虔)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선생은 7세 때에 한문 공부를 시작해 10년에 걸쳐 사서삼경 등 기초과정을 배웠다. 15세 때부터 평양에서 포목상과 지물상을 경영하며 가계를 꾸려온 선생은 5척 단구의 이름난 술꾼이었다. 그러다가 서당에서 알게 된 한정교(韓鼎敎)의 인도를 받아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했다.
이후 선생은 신학문에 대한 동경이 불 같이 일어나서 23세의 만학으로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했다. 1906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먼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고 1910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부(明治大學 專門部 法學部)에 입학했다.
평남 사천에서 독립만세 시위 주도하고 1년간 옥고
동아일보 1920년 8월 22일자 기사. 물산장려회가 조만식 등의 발기로 평양에서 창립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선생은 1913년 명치대학을 졸업한 후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 선생의 초청으로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동경에서 견문을 넓히고, 또한 세계 속의 조선을 바라보며 교육의 방향과 포부를 가졌다는 점 등을 인정받아 2년 후에는 교장으로 승진했다. 사감까지 겸하여 주야 24시간을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했다. 선생의 풍모는 매우 독특해서 5척 단구에 머리를 빡빡 깎아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국산품을 애용하여 허영을 배척하는 모범된 삶을 보여주어 항일의 표징으로 손 꾭혔으며, 민족적인 긍지를 가지고 국산품 애용을 실천했다. 선생의 교장생활은 스스로 학생과 똑같은 규율을 지키고 민주적 자치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지도하면서 장차 이 나라의 큰 일꾼을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교장직을 사퇴하고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江西郡 沙川)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그 후 특별한 사명을 띠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려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어 교육계를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선생은 항상 조선 사람의 약점과 결점을 뚜렷이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데 앞장섰다.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는 철저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언제나 애국애족하는 정신을 고취하고 무엇보다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지름길이며 민족자립 경제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정신보급에 힘썼다.
1920년 평양에서 조선 물산장려운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운동이 시작되자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가서 각 지방에서는 물산장려회 또는 토산품장려회 등으로 단체조직이 속출하고 금주․금연동맹과 같은 도덕적인 성격의 운동으로까지 파급되었다. 1923년에는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주축으로 벌어진 조선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 언론창달에 힘쓰고 민족계몽에 앞장섰으며 그 후 1937년에 수양동우회 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1921년부터 11년 간에 걸쳐 평양 YMCA 총무로서 기독교정신과 민족부흥의 정신을 일체화 함으로써 항일의 선봉에 서서 일제 말기에 소위 신사참배, 궁성요배 등 강요에 결연히 반대했다.
중외일보 1927년 12월 22일자 기사. 신간회 평양지회 창립대회가 열렸으며 조만식이 회장으로 선출된 사실을 알리고 있다.
민족유일당인 신간회의 중앙위원 및 평양지회장으로 활동
1927년 민족의 좌우합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가 서울에서 조직되자 선생은 신간회 중앙위원과 평양시 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민족단일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려는 대전제와 민족과 사회가 한 덩어리가 되어 항일 공동전선을 펴나가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선생은 이 무렵 육신의 곤고함을 잊어버리면서 청년회 조직과 강연회 토론회 등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때의 별명이 ‘무주랑 빗자루’였다. 키는 작았으나 담대했고, 얼굴 빛과 흰 머리카락은 청초한 모습이었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열띤 웅변을 할 때는 듣는 사람마다 공명을 얻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광복 후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 평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평남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8월 18일 평남 도청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조인식에 입회하는 형식으로 참석하였다. 8월 26일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당을 평양 호텔로 초청하고 연립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선생이 위원장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 측에서도 여러 명이 조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립정권의 수립은 이때까지는 선생의 지도력을 배제할 수 없어 이뤄진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이러는 한편 공산당의 위상은 날로 떠오르고 소련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위원회는 날치기 행정으로 제 세력을 키워갔다.
여운형, 안창호와 찍은 사진.(1935)
안창호 출옥 후 기념촬영한 것으로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이다.
조선민주당 창당한 후에 소련군정, 김일성 일파와 담판 벌였으나 결렬
1945년 11월 3일 선생은 평양에서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5년 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1946년 1월 2일 소련군정에 신탁통치 불찬성의 뜻을 통고하고 한편으로는 반탁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소위 인민위원회 위원장 직도 사퇴했다. 1946년 1월 6일 마침내 소련군정 및 김일성 일파와의 최후 담판은 결렬되고 선생이 인민위원회 건물 현관을 나서자 이미 소련군에 의해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실려 고려호텔로 연행되어 갔다.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자리한 고당 조만식선생 동상.
그 후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생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월남을 권하는 인사들에게 “나의 일신을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북한의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이미 굳게 결심하였고”라며 오직 애국애족과 민주주의를 위하는 굳센 신념으로 끝내 권유를 거부했다. 북한동포의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분, 공산당원도 그 인격 앞에 겸손하게 절을 하였던 분, 월남 동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선생, 오늘도 우리 민족의 가슴마다에 살아 계신 분이다. 선생의 높은 유덕을 기리는 소리는 지금도 끊임이 없다.
➡️1949년노르웨이의 소설가 운세트 사망 - 1928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49년권농일 제정
➡️1946년이탈리아, 공화제 선언
➡️1943년코민테른 해산
➡️1940년노르웨이 독일에 항복
➡️1940년이탈리아, 영국,프랑스에 선전포고
➡️1934년영국 작곡가 딜리어스 사망
➡️1932년장개석, 여산회의에서 제4차 소공전(掃共戰)을 결정
➡️1926년건축가 가우디 사망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로 불린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1926년 6월 10일 저녁 기도를 하러 가다 전차에 치여 74세로 숨졌다. ‘금세기 최고의 건축가’ 로 평가받는 가우디가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르네상스시대의 메디치가문처럼 평생의 후원자 구엘을 만나면서였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가우디의 작품이 3개나 지정될 정도로 그의 건축은 독보적인 것이었지만 그중 2개 건축물에 후원자의 이름이 새겨질 만큼 40여년에 걸친 두 사람의 만남과 우정은 각별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가우디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120년 전인 1883년 착공했으나 난해한 설계로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바르셀로나의 성(聖)가족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때문이다.
옥수수 모양의 첨탑, 직선을 배제하고 곡선만 사용한 독특한 조형미… 사람들은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 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1926.6.10 평생 독신으로 살다 초라한 행색으로 전차에 치여 세상을 떠나다
"가우디는 바그너와 세잔 및 그 외의 예술가과는 반대로, 바르셀로나에서 혼자 혁명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지도 위에 카탈루냐의 위치를 표시하듯 미술사에서도 카탈루냐 지방의 위치를 표시함으로서, 다른 국가와 다른 분야의 천재들이 했던 모든 것, 앞서간 예술가들이 했던 모든 노력을 단 혼자의 재능으로 일궈낸 가우디를 발견하게 된다."
건축의 성자, 자신이 지은 최후의 역작에 묻히다
인용한 글은 1927년 푸란스시코 푸욜이 카탈루냐 출신인 가우디를 추모하면서 쓴 에세이의 마지막 문단이다. 약 일 년전인 1926년 6월 7일 가우디는 전차에 치어 3일 후인 10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가우디는 너무 초라한 행색 탓에 아무도 이 거장을 알아보지 못해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말년에 건축 작업에만 몰두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우디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는 건축의 성자이면서, 실내 디자인과 장식 조각, 심지어 의자와 화장대에 이르기까지 제작한 20세기의 독창적인 예술가이다. 그의 전 작품에 드러나는 우아하고 기괴한 곡선과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를 건축에 사용한 그의 '집'들은 피카소의 그림과 견줄 수 있는 건축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거대한 영혼과 작품은 당대보다도 세월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교수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학생
비록 실물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위대한 '작품'들은 도판으로 보아도 들어가고 싶고, 거닐고 싶고, 심지어 만지고 싶다. 건축물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그의 대표작인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 공원’, ‘구엘 별장’, ‘사그라다 파밀리아’ 는 미켈란젤로나 피카소, 바그너처럼 작품으로 남아있다. 건축은 인간이 살아가는 실용적인 공간이다. 벽에 걸어두고 보는 그림이 아니고, 음반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지만, 가우디는 건축물을 보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1895년 바르셀로나 신도시계획 당시 세워진 연립주택으로 1910년 완성된 카사밀라(Casa Mila)의 1920년 모습과 현재 모습
1852년 스페인 레우스에서 태어난 가우디는 아버지가 주물제조업자였다. "내가 공간을 느끼고 보는 재능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와 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주물제조업자였기 때문이다. 몇 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건축가인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주물제조업자는 표면으로 부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가우디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전에 이미 공간을 본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설계도면에서 시작하여 부피를 창조해내는 조각가들이었다."
가우디는 자신의 재능을 타고난 유전자 덕분이라고 밝힌다. 가우디는 비록 가난한 집안에 병약한 소년으로 자랐으나 건축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가우디가 ‘가우디 건축의 성지’라고 불리는 바르셀로나로 간 것은 17세이며 건축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가우디가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는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가우디의 학교생활을 짐작해 하는 말이다. 학창시절,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논쟁과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학생이었다. 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생계를 위해 철 세공업과 같은 일을 시작했다. 물론 이 경험이 가우디 건축에 다 녹아 들어간다. 대장장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망치를 들고 쇠를 두들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물제조업자인 선대의 피를 이어받아 완성된 조각 같은 건축물
자연미와 조형미의 조화를 이룬 구엘 공원
그는 조물주의 손으로 작업했다. 모든 건축물의 설계도면으로부터 시작된 가우디의 정신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꿈틀거리는 건축물들은 조각 작품으로 변신한다.
'구엘 별장' 정면의 철제문은 철 세공품이다. 철문을 장식하고 있는 용의 몸체는 휘어진 철봉으로 표현하고 굵은 용수철을 휘감았다. 용의 다리들은 돋을무늬로 세공한 비늘이 덮고 있고, 왼쪽 발에 움직이는 연접 장치를 하여 문을 여닫도록 만들었다. 주물제조업자인 선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그의 표현이 딱 맞아떨어진다. 선대의 피가 가우디라는 예술가를 탄생시켰으니, 그의 독창적인 건축물들도 문득 튀어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전통에 의해서 탄생한 바로셀로나의 작품이기도 하다.
직물업계의 거장 구엘의 후원
피렌체의 메디치 대공이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처럼, 구엘이라는 부자가 가우디의 이상적인 후원자였다. 구엘은 직물업계의 거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우디가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투자한다. 그의 이름이 붙은 별장, 궁전, 공원이 가우디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탁월한 작품이었다. 경제적인 후원을 구엘에게서 받았다면, 건축학적으로는 이슬람의 건축 양식과 아르누보 그리고 비올레 르 뒤크의 이론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뒤크의 <프랑스 건축 사전>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가우디는 뒤크의 가르침을 모든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개성으로 수정 보안한다. 뒤크의 책을 통해 습득한 고딕양식은 '테레사 학원'의 모든 층에서 잘 나타난다. 테레사 학원은 청빈한 수도사들의 건물답게 가우디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만든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창적인 건축기법이 잘 살아있다.
평론가들은 가우디의 작품을 1890년대를 경계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 가우디의 진가는 후반부에서 빛을 발한다. 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건축물들은 후반기의 작품들이다. 특히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가우디'라고 명명할 수 있는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즉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건축에 사용된 모든 재료들이 하나의 생명력으로 재탄생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건축사에서 독특하면서 역동성이 넘치는 건축물들이다.
색채는 빛의 고통이라는 괴테의 말처럼 가우디 역시 건축 색감을 중요시했다. 가우디는 말한다. "건축은 색깔을 거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형태와 부피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 색깔은 형태를 보안해주는 동시에 가장 분명하게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가우디의 ‘카사바트로’ 기와의 색감을 보면 단순히 화려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자연의 색감을 느낄 수 있다. 부자들의 전원주택으로 설계된 구엘 공원에서는 자연미와 조형미의 절묘한 조화를 색감을 통해 보여준다. 소나무, 떡갈나무, 종려나무, 백리향 등의 나무와 재스민, 등나무 같은 덩굴식물, 건축자재로 사용된 타라고나 지방의 마른 돌멩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각각의 고유한 색과 불규칙한 배열이 자연의 풍경에 녹아 들어 있다. 구엘 공원은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미완의 대작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위한 삶
가우디는 평생의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를 건축할 때 예술가로서 날개를 달았다. 그 자신도 이 건축물에 감탄하면서 전통적인 고딕 양식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가우디가 이 대단한 건물의 감독직을 수락한 것은 1883년 가을이었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 간 이 작업 만에만 몰두했다. 이 건축물은 서적상이자 발행인인 호세 마리아 보카베리야가 주도한 일이었다. 그는 성가족이 봉헌된 사원을 바르셀로나에 짓기로 결심하고 기금을 모아 당시 교구 건축가인 프란시스코 데 파올라덴 빌랴르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빌랴르가 건축의 기술 고문인 마르토렐과의 불화로 사임을 하자 가우디가 일을 맡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1955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가우디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간이며, 손상된 인간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을 위해 사용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말년에 가우디는 건축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을 멀리하고 수도자처럼 살았다. 건축가로서의 명성과 열정이 종교적인 신성과 결합하여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건축물은 가우디 사후에도 계속 건축되고 있다. 가우디는 성가족 교회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세 개의 파사드를 만들었다. 동쪽은 탄생의 파사드, 남쪽은 영광의 파사드, 서쪽은 수난의 파사드이다. 가우디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첨탑이 빠진 탄생의 파사드만 완성된 상태였다. 이 파사드의 중앙 문은 사랑, 오른쪽은 믿음, 왼쪽은 소망의 문이다. '사랑, 믿음, 소망'이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는 문 앞에 서 있는 가우디를 상상한다. 그의 영혼이 깃든 건축물들을 통해 영원불멸의 신성을 잠시 엿본다.
➡️1926년6.10만세운동
6.10 만세운동
정의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1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해외 각지에서 움텄던 독립운동도 미국이나 서구열강의 원조가 소극적이고 일제의 교묘한 술책과 탄압에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上海]에 모인 청년정객들의 이상주의에 불과하여 처음부터 많은 분란과 오해의 요인을 안고 수립된 망명정부였다. 그런데 1921년 레닌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원조자금문제와 1925년 이승만(李承晩)대통령 면직결의 등의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결정적으로 난파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의 무장독립투쟁도 1920년 청산리대첩으로 절정을 이룬 뒤, 일제의 대토벌로 인해 러시아방면으로 밀려났다가,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해외 독립운동은 1922년을 고비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도 1920년부터 활발히 전개된 실력양성운동에 의해 민립대학설립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 등이 추진되었지만, 일제의 문화정치라는 양단정책에 말려 1925년 이후 좌절되면서 부진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경과
이렇듯 국내외 기성세대들의 민족운동이 침체되어가는 상황 속에 1920년대 민족운동의 활력소는 학생운동이었다. 이전 분산적이고 비조직적인 맹휴의 성격에서 벗어나 학생층 전체를 망라한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항일학생운동으로 발현되었던 것이 6·10만세운동이다.
제위에 오른 지 4년 만인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자조와 실의 속에 살다가 1926년 4월 26일 죽은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에 대한 전국민의 애도는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유언비어와 불온한 행동을 감시하는 등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심지어 육해군 7,000여 명을 경성에 집결시키고 부산과 인천에 함대를 정박시켜 놓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운동은 대체로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첫째 계열은 노총계(勞總系)로, 사회주의자 권오설(權五卨)을 중심으로 추진되다가 중국지폐위조사건(中國紙幣僞造事件)과 개벽지압수사건(開闢誌押收事件) 등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연류자가 붙잡힘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둘째 계열은 전문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社稷洞系)이다. 1926년 4월 26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80여 명이 세검정(洗劍亭)으로 춘계야유회를 가던 중, 순종 승하의 비보를 듣고 이 기회를 이용,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운동을 일으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20일 40여 명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생 박하균(朴河鈞)의 하숙집에 모여 순종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먼저 준비책임자로 이병립(李炳立)·이병호(李炳鎬)·이천진(李天鎭)·박두종(朴斗鍾) 등을 선출하고, 자금은 박하균·박두종 등이 맡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거사계획은 일제의 감시가 기성 독립운동가들에 쏠리는 틈을 타 이뤄졌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6월 8일 이선호(李先鎬)·이병립·박두종·박하균 등이 서대문 솔밭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격문 30매를 만들고, 다음날 김종찬(金鍾讚) 하숙방에서 이병립이 “2천만동포의 원수를 구축(驅逐)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작성하였다.
격문은 『시대일보(時代日報)』 배달부 김낙환(金洛煥)을 통해 빌린 인쇄기계로 사직동 이석훈(李錫薰) 하숙집에서 1만 여매를 인쇄한 뒤, 이선호·박두종·이천진·박하균·유면희(柳冕熙) 등이 각각 자기학교 학생 및 관련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셋째 계열은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通洞系)이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朴龍圭)·곽대형(郭戴炯)·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이동환(李東煥) 등이 순종승하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5월 29일 통동의 김재문 하숙방에서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金性洙)·최남선(崔南善)·최린(崔麟)”이라는 격문을 기초하였다.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거사일인 6월 10일을 기다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4000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 그리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오전 8시 45분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오전 9시 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박두종 외 2명이, 오후 1시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1시 30분경 동대문 근처에서 『시대일보』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오후 2시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생 박용철·이동환, 중동학교생 곽대형·황정환 등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학생들의 항일독립만세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결과
이에 군중들도 합세하여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감시망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학생 중 취조받은 자가 106명, 수감된 자가 53명이었으나, 어느 정도 시위가 가라앉자 이들 대부분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11명은 제령(制令) 제7호와 출판법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그 해 11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렸다.
이 때 재판장 에토[江藤逸夫]의 심문에 주동학생들은 거침없이 거사의 동기와 목적을 진술하였다. 이병림은 “거사의 목적과 동기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새삼 물어볼 것이 어디 있느냐?”, 박하균은 “우리 나라의 형편은 현명한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무엇을 알려고 하느냐?”, 이천진은 “호각으로 군호를 삼아 일제히 거사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애석하다”, 이선호는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거사에 임하였다”, 유면희는 “오로지 기미년 경험으로 재기하려 하였다”, 박용규는 “4,000여매의 격문을 각 남녀고보에 배부하였고 가회동 취운정에서도 계획하였다”, 곽대형은 “격문 500매는 만세 당일 돈화문 앞에서 살포한 뒤 통동계 학우들과 같이 숭인동방면으로 달려가 기회를 포착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들에게 검사는 1~3년의 실형을 구형하였으나, 그 해 11월 17일 재판장은 언도공판에서 10명에게는 2~3년, 1명에게는 1년의 징역형에 5년간 집행유예를 각각 언도하였다. 이에 검사가 상소를 제기하여, 1927년 3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10여 명은 징역 1년, 1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아 10명은 결국 수감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서울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는데, 고창·순창·정주·울산·군산·평양·홍성·공주 등지 뿐만 아니라 당진·강경·전주·하동·이원까지 파급되어갔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된 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꾸준히 다져온 학생들의 결사·동맹휴학·계몽활동 등의 학생운동이 결집된 소산으로 나타난 항일운동이었다.
그래서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담당하여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하나의 큰 횃불이 되었다. 2020년 12월 8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1925년일제 한국서 치안유지법 실시
➡️1923년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르 로티 사망
➡️1915년영국, 독일식민지 카메룬을 점령
➡️1914년총독부, 각급학교에 교련과목 신설
➡️1914년박용만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 조직
➡️1909년영국 기선 슬라보니아호 조난중 최초로 SOS발표
➡️1907년 프랑스 일본 조약 조인(중국의 영토보전)
➡️1907년 프랑스 류미엘 형제, 칼라사진방식을 발표
프랑스의 화학자 류미엘 형제(오거스트와 루이)가 1903년에 발명한 오토크롬 건판(乾板)이라는 칼라 사진방식을 1907년 6월 10일 발표했다. 적색,녹색,청색의 3색 필터로 피사체를 분해기록하고 현상후 3색 필터 스크린을 통하면 화상이 재현되는 것으로 1장의 건판에서 색의 분해, 합성이 모두 가능한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이는 고감도 흑백감광사진에 비해 60배정도의 노출시간이 필요하지만, 상업이나 예술에 널리 이용됐다.
류미엘 형제는 1895년 촬영기 겸 영사기도 개발해 `영화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다.
오토크롬법에 의한 초기의 칼라사진
➡️1907년 북경-파리간 최초의 장거리 자동차레이스 스타트
➡️1903년 세르비아 군대 혁명
➡️1898년 친위기병대 창설
➡️1871년 신미양요 일으킨 미 함대 초지진 상륙
➡️1868년 미국의 제15대 대통령(1857-61 재임) 뷰캐넌 사망
➡️1832년 원동기시대를 개막한 기술자 오토
➡️867년 일본의 59대 천황(887~897) 우다 출생
https://youtu.be/CgOvET1DNSM
출처 네이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